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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前)앙코르시대
(1)푸난시대(扶南時代) 중국의 역사서(史書)에 따르면, 1세기 경에 캄보디아 남부로부터 메콩 델타지역에 걸쳐 '푸난'(扶南, 부남)이라는 왕국이 건립되었다고 보여진다. 푸난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영했기 때문에,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인도(印度)로부터 많은 문물과 함께 힌두교 -- 특히 쉬바신(Siva神) 신앙 -- 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ayana)를 받아들였다.
(2)첸라시대(眞臘時代)
6세기 후반에는 푸난의 속국 중 하나인 첸라(眞臘[진랍]: 현재의 라오스 남부를 발상지로 함)의 세력이 강해져, 7세기 이샤나와르만 1세(615-635 [이샤나바르만])가 현재의 캄보디아 중앙부에서 남동부까지의 지역을 평정하고, 이샤나뿌라 -- 현재의 삼보 쁘레이 꾹 -- 에 도읍을 설치했다.
(3)분열과 재통일
이후 첸라는 남, 북조로 분열하여 인도네시아 자바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9세기 초엽, 자야와르만 2세(802-834 [자야바르만 2세]) 시대에 자바로부터 해방되어 통일을 이뤘다. 자야와르만 2세는 신왕숭배(神王崇拜)를 새로운 국가적 신앙으로 보급하고, 훗날의 융성을 기원하는 크메르 신전구축의 기초를 만들었다.
Ⅱ.앙코르시대 (다른 자료에서는 "고전시대"라고도 부르는데 802-1432년까지이다)
그 후 캄보디아의 국왕 대다수는 관개사업에 의한 농업생산력 확대와 신전 건축에 공을 들여, 앙코르・와트 주변에 수많은 유적을 남겼다. 대외적으로는 12세기까지 동쪽의 이웃나라인 참파(Champa: 현재의 베트남 중부)와 세력경쟁을 계속했다. 참파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자야와르만 7세(1181-1201 [자야바르만 7세])이다. 이 시대에 크메르 제국은 최대의 영토를 획득했다. 또한 대승불교도였던 이 왕이 앙코르・톰에 도시를 재건하고, 그 중심에 바이욘 사원도 건설했다.
Ⅲ.후(後) 앙코르시대
13세기 이후 캄보디아는 서쪽의 이웃나라 시암(태국)의 수코타이 왕조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수많은 침략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시암에서 수코타이 왕조의 뒤를 이은 아유타야 왕조에 잠식당하면서 서서히 국력이 소진되게 된다. 현재 캄보디아의 국교(國敎)인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소승불교)도 이 시기에 시암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17세기에는 서쪽의 시암에 더해, 동쪽의 베트남(阮朝)으로부터도 침략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1887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Ⅳ.제1차 캄보디아 왕국의 탄생
(1)1945년 3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를 무장해제시킴과 동시에, 시하누크 국왕은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했지만(1941년 프랑스는 노로돔 시하누크를 캄보디아 국왕으로 앉혔다), 같은 해 8월 일본이 패전하자 프랑스는 이 독립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보호조약을 기초로 한 통치를 계속했다.
(2)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시하누크 국왕은 1947년 헌법공포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1949년 사법경찰과 군사분야를 제외한 한정적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후 프랑스와 교섭을 계속해나가면서 각국을 방문해 여론을 환기시켰고, 1953년 11월 9일에 완전한 독립을 달성했다.
(3)1955년 시하누크 국왕은 부친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대중 정당인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사회주의공동체)을 조직하여 정치 인선에 뛰어든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균형을 취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또한 시하누크는 현재의 행정구조의 기초가 되는 중앙 및 지방의 행정조직 정비를 추진하고, 경제개발 면에서도 기초적인 인프라를 정비하고 산업의 육성을 꾀했다.
한편으로 그는 극우파와 극좌파에 대해 탄압을 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좌파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지만, 중도좌파가 극좌파였던 크메르 루즈(KR, 폴 포트 파)에 합류하고, 친미우파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4)이웃나라인 베트남에서 전쟁이 한참일 때 캄보디아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시하누크는 베트남 공산군(북-베트남)이 캄보디아 동부의 "호치민 루트"를 사용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어 반미, 친중국, 친소련의 외교적 자세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친미우파의 반감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1970년 그가 외유를 나가자 론 롤(Lon Nol) 장군 주도의 친미우파가 무혈 쿱테타(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1)크메르 공화국 시대 (론 롤 시대)
국내에서는 <크메르 공화국> 정부군과 <민족통일전선>(FUNK) 반군이 전투를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자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만 의지하고 있던 <크메르 공화국> 정부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시하누크 국왕을 전면에 내세운 <민족통일전선>은 그 세력범위를 서서히 확대하여, 1975년 4월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민주 캄푸치아 시대 (폴 포트 시대)
정권장악 후, <민족통일전선>의 실권을 장악한 크메르 루즈(KR)는 폴 포트를 수반으로 한 <민주 캄푸치아>를 수립하고, 시하누크 국왕을 유폐시킨 후 농본주의・독재정책을 실시했다.
그들은 우선 도시주민들을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한편, 지식인과 론 롤 정부 및 군 관계자들을 처형했다. 지방에서는 강제노동이 행해졌고,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처형되었다. 그 결과, 이 정권이 전국을 실효지배했던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기아와 처형에 의해 약 100만~20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사망하였다.
크메르 루즈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 Adam Carr 2005-2)
극단적인 정책으로 인해 일부 KR 병사들은 정권을 이탈하여 베트남으로 도피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1978년 12월 베트남 정부의 지원을 받는 <캄푸치아 구국민족통일전선>(KNUFNS)이 결성됐다. 영토 문제로 KR의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은, 같은 달 이 <구국민족통일전선>과 함께 KR 정권 타도를 목표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3)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시대 (헹 삼린 시대)
1979년 1월에 <구국민족통일전선>은 베트남군과 함께 프놈뻰을 함락시키고, 일시에 KR을 태국국경 부근까지 밀어부쳐 영토의 대부분을 실효지배하기 시작했다. 헹 삼린 인민혁명위원회 의장(1981-1993 인민혁명당 서기장)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 "프놈펜 정권" 혹은 "헹 삼린 정권"이라고도 부름 -- 을 수립했다.
이에 대해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세력이 확대되는 위협을 감지한 ASEAN 여러 나라는, 소련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미국, 중국과 함께 프놈뻰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돕기 시작했다. 이들이 시하누크 파, 폴 포트 파(KR), 손 산 파(손 산 전 수상이 이끄는 정파로 주로 크메르 공화국 계통의 인물들이 소속됨)의 3파 연합을 지원하여, 1982년 3파가 연합해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결성했다.
그리하여 소련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던 <프놈펜 정권>과 서방 각국 및 중국의 지원을 받은 <3파 연합> 사이의 대립이 구조화되어, 캄보디아에서 내전은 계속됐다.
1980년 후반부터 대화를 통한 평화의 길이 모색되어, 1990년대에 들어와 급속한 진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미소대립과 중소대립을 축으로 한 냉전구조의 붕괴와 국제적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베트남은 더 이상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베트남과 중국이라는 아시아의 두 공산국가 사이의 관계개선과 평화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캄보디아 평화를 분쟁당사자(프놈펜 정권 및 3파 연합)와 함께, 관련 국가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국제회의가 시작되었다. 1988년 7월 <자카르타 회의>를 필두로, 1989년 7~8월에 열린 <파리국제회의>, 1990년 6월에 열린 <캄보디아문제 도쿄회의>가 연이어 개최되었고, 마침내 1991년 10월 파리국제회의에서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5)평화협정부터 총선까지
평화협정 체결 후, 4파 대표로 구성된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NC:시하누크 국왕이 의장)가 만들어졌다. 총선거를 거쳐 캄보디아 국왕 탄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잠정적 기간 동안, 이 기구가 캄보디아의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합법적 조직으로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평화협정에 기초하여 (1)평화의 유지, (2)중립적 정치환경 확보, (3)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실시, (4)각 정파의 행정기관에 대한 감시 등의 권한과 책임을 갖는 UNTAC(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가 설치되어, 1992년 3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UNTAC를 맞이한 캄보디아 국민들은 평화의 실현에 커다란 기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제1단계였던 각 정파의 70%씩의 무장해제는 KR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KR은 각지에서 무장활동을 활발히했다.
결국 KR이 선거를 보이콧하여, 완전한 무장해제가 달성되지 못한 채 총선거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1993년 5월 23~28일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총선거는 투표율 90%로 기대 이상의 국민적 참여를 얻으면서 치뤄졌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프놈뻰 정권을 이끌던 인민당(CPP: "인민혁명당"에서 개칭)이 제2당이 되었고, 시하누크의 아들 라나릿[라나리드] 왕자가 이끈 푼신펙당(FU)이 제1당을 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정치환경은 이 양당이 연립하는 것 외에는 정치적 안정을 획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Ⅵ.제2차 캄보디아 왕국의 탄생과 그 후
(1)제1차 왕국정부
다행히 각 정파들이 총선 결과를 받아들여 1993년 6월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푼신펙당(FU)과 인민당(CPP)의 연립에 기초를 둔 신정부 수립까지 존속할 잠정적 국민정부도 성립했다. 같은 해 9월 신헌법이 공포되어 <캄보디아 왕국>이 탄생했고, 제헌의회는 "국회"(국민회의)로 명칭을 바꿔 임기를 시작했으며, 시하누크 공이 국왕으로 복위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해외귀국파가 다수를 점하는 제1당인 FU와, 이제까지 캄보디아를 실효지배해왔던 제2당인 인민당이 상호 협조하여 국정을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2인의 공동 총리제 및 주요한 부서(내무부, 국방부)의 공동장관제를 채택하기로 해, 라나릿 FU당 당수가 제1총리를 맡았고, 훈 센 인민당 당수(프놈뻰 정권에서 1985년까지 총리 역임)가 제2총리를 맡았다.
그 결과 FU당과 인민당에 불교자유민주당(BLDP: 손 산 파)까지 더한 연립정권이 발족했고, 라나릿-훈 센 양 총리의 연대에 따라 대체로 국정은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2)무력충돌과 1998년 총선거, 제2차 왕국정부의 성립
(가) 96년 FU당과 인민당 사이에 1998년 총선거를 노린 각종 갈등이 표면화했다. 각 정당들은 사태 타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으로, 자파의 무장증강에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세력이 약해져오던 강경 크메르 루즈(KR)에 대한 대응도 혼선을 초래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7월 5~6일에 프놈뻰에서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라나릿 왕자는 국외로 도피했고, FU당 계열의 군대는 패주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국제사회는 캄보디아 정부에 대해, 1998년 총선에 반대파 정치인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를 것을 요구했다. 훈 센 정권은 UN이 반대파 정치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모니터하는 일을 보장했다.
(다)1998년에 들어와 일본의 4개 항목 제안 등 국제사회가 강력한 요구를 한 결과, 3월 30일에 라나릿의 귀국이 실현됐다. 7월 26일에 총선이 실시되어 유권자 93%가 투표했고, 국내외 선거감시인단 모두 공정성 및 긍정적 평가를 하였다.
투표 결과, 인민당(CPP)이 64석을 얻어 제1당에, FU당이 43석으로 제2당에, 삼・랑시당(SR: 삼 랑시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FU당에서 제명된 후 창당한 정당)이 15석으로 제3당이 되었다. 인민당이 과반수를 점했지만, 헌법에서 요구하는 내각 신임 조건인 3분의 2 의석에 미치지 못해, 다시금 FU당과 연립을 제의하게 되었다.
(라)10월 12일~23일, 시하누크 국왕 주재 인민당-FU당 수뇌회동에서,
- 인민당=FU당 연립, - 훈 센 총리, 라나릿 국회의장, 찌어 심 상원의장=국가원수 대행 (상원을 신설하여 1999년 3월에 발족)
이란 합의를 했고, 11월 30일에 연립정권이 발족했다. 그 후, 캄보디아는 12월 4일에 UN 의석을 회복하고, 다음해인 1999년 4월에 ASEAN에 가입하는 등 국제사회로 복귀를 진행하였다.
(3)2002년 지방선거와 2003년 국정선거
(가) 제2차 왕국정부 기간 중, 캄보디아는 2002년 8월부터 2003년 6월까지 ASEAN 의장국을 맡았으며, 2002년 11월에는 일련의 정상회담, 2003년 6월에는 일련의 외무장관회담을 프놈펜에서 개최하여, 국제사회의 명예로운 일원으로서 자각과 자신감을 회복하려 했다.
(나) 2002년 2월 3일, 근년 들어 최초의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는 지역개발에 대해 국민들의 주체적인 책임추궁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분권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실시된 것이었다.
선거 결과, 인민당이 전국 1621개 면(쿰)・동(성깟)의 약 99%에서 면・동장 직을 획득하였다. FU당은 이전 선거의 약 절반 정도를 얻었고, SR당이 FU당을 추격하는 선이 되었다.
(다) 2003년 7월 27일, 제3회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일본정부를 비롯한 각국 감시단으로부터 감시활동의 범위에서 사상 최고의 분위기 하에서, 대체로 평화롭게 실시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총선결과로서 여당이자 제1당인 인민당이 득표율 및 의석수에서 모두 증가하고(73석), 제3당인 SR당도 약진(24석)한 데 반해, FU당은 의석수에서는 의석수에서는 제2당이 되었지만, 선거 전 의석의 40 %를 잃는 참패를 겪었다(26석).
(4)제3차 왕국정부 성립과 시하모니 신 국왕의 즉위
(가) 이번에도 내각신임에 필요한 3분의 2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인민당이 연립을 제의하여 2당 연립을 의도했지만, FU당과 SR당이 <민주주의 연합>을 결성하고, 훈 센 총리를 제외한 "3당 연립정권" 구상을 부르짖으며 대립했다. 11월 시하누크 국왕 주재 3당 수뇌회동에서, "3당 연립"이라는 기본합의는 했지만, 그 후 각 정당 간의 구체적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고 합의내용도 사장되었다.
(나) 2004년 3월, 훈 센=라나릿 회담에서 2당 연립에 합의하고, 실무회담에서 정책강령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6월의 제2차 훈 센=라나릿 회담에서 정책강령이 합의됨과 함께, 국회의장 선출과 내각신임 투표를 일괄투표로 처리키로 합의했다.
6월 26일, 양당 간 정권 직책 배분을 인민당 : FU당 = 6 : 4로 하기로 합의했고, 30일에 양당 간 협력의정서 서명식이 거행되었다. 7월에는 상기 일괄투표를 위해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15일에 국회는 라나릿 국회의장을 선출함과 동시에 훈 센 총리를 수반으로 한 새로운 내각도 신임하였다. 이로써 총선 후 1년이 경과해서야 간신히 제3차 왕국정부가 성립되었다.
(다) 2004년 10월 6일, 시하누크 국왕이 퇴위를 표명하고, 신 국왕 선출을 위한 "국왕선출위원회"를 요청했다. 상하원 및 정부 관계자들이 국왕의 퇴위표명 철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0월 11일에 급거 <국왕선출위원회 운영법>을 제정하였고, 14일 이 위원회가 노로돔 시하모니 왕자를 만장일치로 새로운 국왕에 선출했다. 10월 29일 즉위식이 왕궁에서 거행되어, 시하모니 신 국왕은 정식으로 즉위했다.
(5)제4차 왕국정부 성립과 현황
2008년 7월 27일 실시된 제4차 총선에서는, 훈 센 총리의 CPP(캄보디아 인민당)이 90석을 차지해 압승했고, 최초로 단독정부를 구성해 추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훈 센 총리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점차로 강해지는 것이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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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 한 번 읽으며 캄보디아 역사를 공부하니
그 전보다 훨씬 이해가 갑니다.
그렇죠..
그래서 복습이 중요하죠~ ^ ^
궁금해서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캄보디아 약사를 찾아보니 실망스러운 수준으로 정리됐네요. 이럴 때면 일본의 '정리력'이 부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