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원나라가 전 세계를 통일 한후 중국의 베이징을 대도로 세계의 중심지로 삼고 세상을 통치하자 중국인들은 자국의 문화는 뛰어나지만 무력에 무능함을 실감하고 무력의 영웅을 만들고 갈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협소설의 시초가 된다. 세계제국 원나라가 멸망하자 자국민족이 다시 국가를 찾은 명나라가 들어 왔을때 무협소설은 다시 사글어 든다. 지금의 만화와 같은 대중문화 무협소설이 사그러질 찰나 다시 외세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인(한족)을 통치하자 중국인들은 다시 독립운동가 무술영웅을 갈망하고 무협소설이 크게 대중문화에 성행한다.청나라 지배층인 만주족들은 중국대다수 95%이상의 한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협소설을 장려하고 무술을 학문적으로 제 평가 체제를 정비하여 원망을 돌리고 장려한다. 여기서 크게 달라지 것은 지금까지의 무술에 내공이란 계념이 도입된다.현실에서 막강했던 군대나 무술창시자 실전 영웅들은 외공과 냉공의 계념이 없었으며 불필요했다.하지만 평화가 찾아오고 무술이라는 새로운 도장 문파의 사업에서 다양한 돈벌이로 무술이 번성할 필요가 생겨 났고 지배층과 상위 계층의 입장에서 이러한 돈벌이 사업의 기회에서 내공의 의미는 크게 다가 왔다. 그져 실전 스파링과 웨이트 등에서 외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술은 지배층과 평화시대의 대중에게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내적으로 자기수양과 학문의 계념으로 무술이 변화할 필요가 상위 계층과 학자들에게 필요했고 이제 무술도 학문과 국가의 체제 유지에 이바지 할때라 생각 되었다. 이에 청나라 정부는 무술을 내공과 외공으로 나누고 정파외 사파로 나누며 무협소설가들에게 이런 계념을 집어 넣을 것을 강조한다. 중국이 청나라 시대부터 무술을 학문적으로 장려에 나갈 당시 그 반대쪽의 나라 일본도 무술문화가 꽃피우고 있었다. 일본도 원나라의 침공당시 가미가제 폭풍의 도움과 자국무술이 원나라군대와 싸우면서 통했던 것을 다시 제 평가하고 장려하는데 이것이 도장과 검도문화를 꽃피게 된다. 중국이 내공과 외공으로 무술이 다양해지고 학문적으로 자기수양과 문파로 사업화 될때 일본은 다양하 무술을 통치수단으로 학문이 아니 무력의 실전 사용법에 맞게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 졋고 이것이 무도 경기 문화로 생겨 났고 무술을 기술이 아니 도로 최고의 진리로 승격화 하기 시작한다.이로 인해 일본의 모든 무술의 끝자에 술이나 권을 배제하고 도자를 집어 넣게 된다.이미 5백년전부터 무술을 학문으로 승격화한 세계 유일의 중국과 일본은 일본의 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무술가들끼리 맞붙게 된다.과연 자기수양과 내적학문으로 거듭나려는 중국무술과 현실에서 모든 삶의 과정에서 무력이 통하게 하려는 일본무술이 승리할까. 일본의 내노라하는 무술가들이 다른 침략정복지의 국가와 달리 중국에 투입된다. 대다수의 대련에서 일본 무술가들이 승리하지만 일본의 무술 고수들을 이긴 중국의 무술인들이 있엇으니 이들이 근대 중국 4대 무성이다. 모두 외공중심의 무술가들이고 실전대가 들이 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많이 달랐다. 중국 무술과 운동을 하나의 단체로 묵은 곽원갑과 서구와 일제에 대항했던 황비홍,이소룡과 서구에 많은 무술 영향을 끼친 엽문은 중국민족과 독립운동에 무술을 사용하였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으며 중국본토의 공산당 정부와 친했다. 하지만 이서문 만은 달랐다.그는 민족주의자도 아니었고 독립운동에 힘쓰지도 않았으며 세계정국과 국가관에 문외한이었다. 그는 오히려 중국본토 정부인 쑨원이나 모택동보다 민주정부와 서구문물 일본에 가까웠던 장계석 정부쪽에 더 친했으며 민족과 국가를 뛰어 넘어 적국인 일본군에게도 자신의 무술을 가르 쳤다. 이서문은 무술 밖에 몰랐고 실전에서 승리하는 것밖에 몰랐다. 그는 자국무술가 일본 무술가 뿐 아니라 강하다는 모든 무술가와 싸워 상대를 치명적으로 다치게 하거 나 죽였고 패한적이 없었다. 70세가 되었을대 까지도 싸우고 대련하며 많은 사상자를 낸 이서문은 독립운동이나 민족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무술과 승리를 위해 싸우는 데 반대를 토로한 패배한 자들의 독살에 의해 생을 마감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들고 밀어주었던 만주국과 정권을 빼앗기고 남하한 대만정부와 일본 가라데와 군대에 영향을 끼친 그의 팔극권은 최강이라 평가 받게 된다. 모두 싸워서 한방에 상대를 죽게 한 그의 팔극권은 외공 무술이었지만 원래의 팔극권 종가 몽촌과 일본 대만에서 내공으로 승격화하고 학문적으로 제 평가하고 있다. 외공이란 실전에서 많은 스파링과 웨이트를 통해 실전적으로 강한 무술이고 내공이란 학문이 투입되면서 자기수련과 자세의 연구에 치중하는 무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