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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강좌 포교사(녹취) / (2006년 12월 18일)-2
第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업장을 능히 청정하게 한다. 비운다 이 뜻이예요.
업장을 능히 정자는 청정이란 뜻인데 이건 이제 비게한다. 맑힌다,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 불교에서는 비운다는 뜻입니다. 청정이라는 말도 공하다는 뜻이예요.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정자니 또는 청정이니 하는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되지요.
어떤 경우는 청정하다 하면은 아주 훌륭하다, 수승하다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만은 여기서는 완전히 깨끗이 없애 버렸다, 비워버렸다 이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온갖 내용, 설법, 그 설법의 근거가 되는 깨달음 이런 것까지도 다 비웠잖습니까? 저 앞에 무득무설분 같은 데서 그런 이야기를 했고, 줄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것을 없애는 것으로서 일관해 왔는데 업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못난 것이예요.
우리가 뭘 버린다면은 예를 들어서 이사를 갈 때 살림살이를 좀 줄인다 이럴 때 제일 못난놈부터 없애잖아요. 좋은 것은 남겨두지. 그런데 정 짐이 많다 싶으면 좀 좋다 싶은 것도 결국은 나중에 버리고 가잖아요. 제일 나쁜것부터 버리는거예요. 이 업장이라는 것이 제일 나쁜거예요. 좋은 것도 버리는데 나쁜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러니까 금강경을 통해서 업장이 소멸되는 일은 간단합니다.
무릎 아프게 애써서 많이 절할 필요 없어요. 금강경 이치만 제대로 알아버리면 아 이 업장이 본래 없는거구나. 절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업이 되요. 이런 말들이 이해가 되어야 되는데 이런말 곡해하면 크게 비난거리가 돼. 비난 하든말든 나는 내 소신대로 이야기 하니까 이치만 알면은 간단한 거예요. 업장 비우는 일도. 그런데 이치를 모르면 어떤 것도 다 업이 됩니다.
육바라밀 닦는 것이 전부 업이다 그랬어요. 업 지어서 부처되는 길은 없다 그랬어요. 육바라밀 닦으면 부처되는 줄 알지만 그것은 업 짓는 일이지 결코 부처되는 길은 아니다.
몰라 당장에 공덕을 지은 효과가 유효할 동안까지는 남보기에 좀 근사하게 살지는 몰라. 그러나 그 힘이 효력이 떨어지면은 그건 형편없는 삶을 또 살게 된다고. 그런게 보통 우리가 짓는 공덕이고, 짓는 복이고, 짓는 업입니다. 그게 전부 육바라밀이예요.
물을 예를 들어서 흙탕물을 가만히 가라앉히면은, 가라앉힐 동안은 위에 물은 맑지요. 그런데 그 밑에는 어떻습니까? 흐려져 있어요. 조금만 흔들면 또 흐려지는거야. 부처님이 그런 공부를 가르쳤겠어요? 그런데 대개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런 공부를 하고 있어요.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얼마나 깨달음을 위해서 큰 희생을 치렀습니까?
석가모니부터 그외 예를 들어서 조조스님 같은 이만 하더라도 80이 될 때까지, 9살에 출가해서 80세가 될 때가지 행각을 했어요. 부처님보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9살에 출가해서 80이 될 때까지 80이 유행각이라. 80이 되고나서 비로서 행각하는 일을 그때서 멈췄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는 뭐 그야말로 족탈불급이야. 당신은 6년 고행했다고 하는데 이건 보통 다반사예요. 역사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큰 희생을 치르고 기껏해야 흐린 물을 가만히 떠놓으면은 가만히 있으면 맑아지는 그런식의 공부를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건 어지간한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그런 이야기 할려고 그런 희생 치르고 공부하지 않았어요. 벼랑을 닦아가지고 부처된다고 하는 것은 전부 그런 식이야. 흙탕물은 근원은 그대로 있는 것이야. 조금만 누가 휘저으면 그대로 흙탕물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 업을 맑힌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보통 알고 있기로 그렇게 가라앉혀서 맑아지는 그런 물, 어느 순간이라도 휘젓기만 하면 금방 흐려질 그럴 소재를 가만히 두고 잠깐 맑아지는 것, 한순간 맑아지는 것, 그것을 업장을 맑혔다 이렇게 보통 생각하는데 절대 그런게 아니예요. 그건 맑아지는게 아니예요.
그래 가지고 어느 순간 누가 한마디만 실컷 10년동안 잘 참았는데 한마디만 잘못해도 10년 참은 것이 도로아미타불로 확 뒤엎어버리는 그런 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그런 식으로 공부 가르치려고 그런 큰 희생을 치르고 수행을 한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것을 아셔야 돼죠.
그래서 능경업장이라는 것도 그렇게 시간이 걸려서 가라앉혀서 맑아지는 그런 식의 업장 맑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고 보셔야 됩니다. 내용은 뻔 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훌륭한 공덕도 결국은 부처님의 깨달음도 부처님의 49년간의 설법도 하나도 내가 설법한 바가 없고, 깨달은 바가 없다 할 정도로 말씀을 하셨으니. 그외 우리 지은 좋지 않은 업장같은 것이야 말할 거리가 안되지요.
부차수보리(復次須菩提)야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수지독송차경(受持讀誦此經)호대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대
약위인경천(若爲人輕賤)하면
금강경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업신여긴다면 무시고하고 업신여긴다면 금강경 공부를 잘 못해서 그렇겠지요? 뭐 그렇다손치고
시인(是人)이 선세죄업(先世罪業)으로 응타악도(應墮惡道)언마는 이금세인(以今世人)이 경천고(輕賤故)로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히 악도에 떨어져야 하는데 금세에 사람이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는 까닭으로
선세죄업(先世罪業)이 즉위소멸(卽爲消滅)하고 당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선세에 지은 업장들이 곧 소멸하고,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금강경 이것은 선세죄업이 곧 소멸해 버리고 그것만이 아니고 최상의 깨달음도 얻게 되는 그런 가르침인데, 무슨 업장같은 것이 이야기 되겠습니까? 하지만 금강경에서도 업장을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업장 이야기가 불교 안에서는 크게 대두되잖아요. 곳곳에 업장이 어떻고, 정서에 제일이 어떻고 그런 의식이 우리 불자들에게는 너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금강경이 위발대승자설이고, 위발최상승자설, 최상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가르친다면 업장 문제 한 번쯤은 건들고 넘어가야 된다 이거지.
지난 시간에는 부처님이 과거에 정말 가슴 아픈 일들, 살아생전에 석가족이 멸망하고, 가비라국이 없어져버리는 그런 아픈 일을 겪었는데 그것을 어느 경전에서든 그걸 한번 짚고 넘어가야돼. 그래 금강경에서 그걸 짚어준 거예요.
그럼 재가달다 하고 부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결하고 가야될 것이 아니예요. 재가달다 하고 부처님과의 관계. 그냥 역사적인 사실만 가지고 기록하고 말아서는 안된다고요. 그럼 불교가 책임 회피하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살아 생전에 그렇게 교화를 왕성하게 했고, 많은 제자와 많은 신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당신의 고향 가비라국이 살아 생전에 한창 교화가 왕성하던 시기에 없어지고 석가족이 이웃나라의 침입을 받아가지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하는 그런 문제를 그러면은 이 팔만대장경 안에서 어디선가 짚고 넘어가야 될게 아니예요. 그래 금강경에서 그걸 짚어준거예요. 그게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아주 소상하게 했지요.
그러면 재가달다라고 하는 이 사람과의 문제, 이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것도 짚고 넘어가야 되는거야. 어느 경전에서든지 한번 짚고 넘어가야 돼. 부처님의 사상과 소견을 가지고 재가달다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건 법화경에서 그걸 짚어준거야. 이게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전이 성립되었어요.
금강경이나 법화경이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법화경이 조금 늦게 했겠지만. 법화경 같은 것은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거야. 그러면 코살라국이 가비라국을 침범해서 석가족을 멸망시킨 문제보다 더 큰 거야 이거는. 석가모니 같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에게 정치적으로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돼. 그거야 뭐 정치인들 이야기니까 그런데 가장 가까이 또 사촌인가, 뭐 육촌인가 되는 그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그사람 하나 승복 못시키고, 그 사람 하나 설득 못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다고 하면 이것도 또 부처님 체면이 안서는 일이야. 안그래요?
왜 세속에 있을 때부터 항상 경쟁 상대였고, 출가해서도 그사람도 또 출가해서 교당 빼앗으려고 그렇게 했고, 부처님에게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서 부처님을 상하게 만들고, 언덕 위에 올라가서 돌을 굴려서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고 한 그런 정도로 원괴를 품은 사람을 어떻게 석가모니같이 위대한 성인이 설득을 못시키고 그 사람, 말하자면은 마음을 풀어주지 못하고 열반에 들 수 있었느냐 이거야. 부처님에게도 큰 책임이거든. 보통 책임이 아니야. 그 사람 하나 어떻게 못하면 부처님 평생 교화사업 한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
재가달다 하나 교화 못하고 부처님 뭐 누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거야. 그래 그런 문제를 법화경에서 짚어준거야.
법화경에서는 재가달다는 나의 스승이다. 재가달다야 말로 부처님이다. 이런 식으로 다 거기서 수기를 하고 스승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그게 뭐 석가모니가 직접 말씀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도 석가모니의 정신은 그래. 그 정신을 법화경에서 부연해서 해결하고 넘어간거지요.
여기 이제 업장의 문제가 이런 데서 짚지 않을 수가 없는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다 하는 것, 그래서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로 길어졌습니다만은 그렇습니다.
불교는 세상의 어떤 문제든지 다 해답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든지. 도저히 세상에서는 해결이 안되는 그런 문제까지도, 또 참그 않좋은 일들은 떠올리기가 민망하지만은 뭐 한사람이 정신이상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생명을 빼앗게 하는 그런 이야기가 많지요. 뭐 지하철에서 불을 질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든지, 도대체 세상에서는 해결이 안되는거야. 무슨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야 그런 것들은.
불교는 불교의 이치 가지고 거기에 대한 해답이 나와야 되는거지. 그걸 만약에 해답을 못하면 불교는 무책임한 것이지.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맨날 이야기 하면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가 뭡니까? 최상의 깨달음 아닙니까? 또 일체지(一體智) 모든 것을 다 꿰뚫어서 아는 지혜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설사 우리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손치더라도 부처님은 얻었잖아요. 그러면 팔만대장경 어디를 뒤지더라도 뒤져가지고 그 해답이 나와야 된다는거지. 해답 못해서는 안돼요.
능정업장(能淨業障)
이것도 그런 문제 해결 중에 하나입니다. 이걸 보통 경전으로 죽 봐버리고 말면은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은 왜 여기에 이런 이야기를 짚어놓았는가?
또 왜 지난 시간에는 왜 절절지해, 내 과거에 이러이러한 그런 칼로 사지를 마디마디 오리는 듯한 그런 아픔의 문제, 그런 것을 왜 여기다 등장시켰는가? 이런 것들을 분석해서 보면은 바로 그런 문제 때문이예요. 그래서 그런 것도 짚고 넘어가고 해결해야 되는 그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我念過去無量我僧祗劫)에
수보리야. 내가 기억하건대 과거 무량아승지겁에
어연등불전(於燃燈佛前)에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연등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제불을 만났다. 그 연등부처님을 위시해서 그 많은 부처님들을 만났다.
실개공양승사(悉皆供養承事)하야
그래서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어.
무공과자(無空過者)호라
그냥 헛되이 지나친 분은 한분도 없었다. 그 모든 부처님들에게 내가 전부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다 그랬습니다.
이 금강경에도 연등불전 이야기 하며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학의 숫자로서는 도저히 계산이 안나오는 숫자입니다 이런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학의 숫자 가지고는 계산이 안나와요. 그렇게 많은 양이예요. 이게 무슨 소리냐?
그 보현행원품에도 보면은 걸핏하면 극미진수부처님 이랬어요.
부처님께 예배한다. 부처님께 공양올린다. 부처님을 찬탄한다 하는 그런 표현 속에는 극미진수부처님 이런 말이예요. 극미진수.
그건 무슨 뜻인고 하니 이 지구를 아주 잘게 부숴가지고 많은 먼지가 있지만은 그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먼지숫자와 같은 숫자의 부처님 이런 말이예요. 그럼 주먹만한 돌 하나만 가지고 극미진으로 아주 지극히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숫자가 얼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숫자 가지고는 계산이 안나오는 숫자일거예요. 돌하나만 가지고 했다 하더라도.
그런데 이 지구를 그렇게 극미진으로 만들었을때 그 숫자와 같은 부처님이라 이렇게 표현했다고요. 대승경전은 전부 그렇게 말합니다. 이건 그래도 뭐 팔백사천만억나유타라고 했으니까 이건 거기다 대면은 화엄경에 극미진수부처님이라고 하는 말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아주 작은 숫자죠. 작은 숫자라고 해도 보통 우리가 쓰는 숫자로는 계산이 안되는 숫자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많은 숫자의 부처님,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게 중요한거예요. 이걸 알아야 돼. 그냥 넘겨버릴게 아니야.
이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은 모든 사람, 심지어 모든 생명, 또 나아가서는 화엄경의 견해라면은 모든 존재,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생명,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정물까지도 전부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런 정신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위에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 위에서 이야기가 안되고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
극미진수제불이란 말을 할 수가 없고,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이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아주 처음부터 그게 상식화 되어 있는 거예요. 그것을 부처님으로 보고 그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거야.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예요. 뭐 석가모니만 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불만 부처님이 아니고, 무슨 천불, 만불만 부처님이 아니고 모든 사람, 모든 생명, 심지어는 모든 존재가 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것이 그냥 상식이야. 대승불교에서는, 그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천보 만보 양보해서 표현하더라도 사람은 부처님이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염두에 두자. 그렇게만 뭐 모든 생명까지도 좀 버겁고 모든 존재를 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도 좀 버겁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일단 보자 하는 것이 저의 소신이고 저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건 기치를 들고 정법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그렇습니다.
화엄경은 여러분들이 잘 외우고 계시듯이 약찬게만 보더라도 주풍신중주공신, 주야신중주와신, 주주신중.....
온갖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기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면은 어떤 부분에서는 신이 제일 위대하다고 하는 그런 종교도 있어요. 또 인도 어떤 종교사회에 있어서는 신을 부처 불자보다도 더 높이 봅니다.
불교쪽에서 보면은 부처, 보살, 조사, 아라한 이런 것을 상당히 높이 보지만은 일반적으로 신자가 부처불자보다 더 높아요. 그러니까 신자를 쓰는거야. 더 좋은 글자가 있다면 그런 글자를 썼을테지만은
그러면 무슨 말인가 하니, 뭐 바람이나, 물이나, 불이나 여기 뭐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밤이나 낮이나 무슨 곡식이나 일체 이런 것들, 유형, 무형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신이오. 그대로 부처님이다. 이런 표현이거든. 그게 화엄경 사상 아닙니까?
그게 다 좋은 이야기지만은 너무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까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천배 만배 양보해서 사람으로 축소시켜 놓으면은 그러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것 아닌가 이거지.
이런 말들을 우리가 숫자로 많이 나열했다 하는데 그냥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왜 이런 표현을 했겠는가,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이런 일을 전부 공양성사했다 하는 것이 뭐 일일이 가서 공양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촛불을 올리고 해서 공양성사했다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근본정신에서 조금도 빈틈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다 공양성사 하는거지요.
철두철미 부처님이라고 하는 정신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면은 그 사람은 초 하나 안키고, 향 하나 안올리더라도 그대로 부처님으로 공양성사하는거지요. 일일이 그런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행위한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천년만년을 설사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일을 했다한들 얼마나 했겠습니까? 몇푼어치 안된다고, 몇번 안돼 불과. 부처님 숫자하고 비교가 안되는거지.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좀 확연하게 깊이있게 좀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이 많고 많은 부처님께 공양올렸다. 불공했다 이말이야.
약부유인(若復有人)이 어후말세(於後末世)에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말세, 뭐 부처님 당시때는 말할것도 없고,
능수지독송차경(能受持讀誦此經)하면 소득공덕(所得功德)이
능히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할 것 같으면은, 그가 얻는 공양, 공덕, 이 경전 금강경을 수지 독송한 그 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앞에서 팔백사천만억나유타 부처님께 불공한 그 공덕으로 가지고 비교를 한다면은 내가 불공한 그 많은 부처님께 불공한 그 공덕은
백분(百分)에 불급일(不及一)이며 천만억분(千萬億分)과 내지산수비유(乃至算數譬喩)로 소불능급(所佛能及)이니라
백분에 일도 못되고, 천만억분의 내지 산수 비유로서 능히 미칠수가 없다 이거야.
부처님께 불공하는 것. 이 많고 많은 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께 불공한 그것 가지고는 그야말로 조적지혈이다 이거야 조적지혈은 그래도 많아. 도저히 이것은 산수 비유로서 능히 미칠 수가 없다 이거야.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경 제대로 우리가 공부하면은 불공 중에는 이 이상의 불공이 없는거야. 불공하는 것이 공덕이 크다고 해서 너도나도 불공을 하잖아요. 너도나도 불공하는거야. 부처님께 향 하나라도 올리고, 돈 한푼이라도 놓고, 초 하나라도 켜고, 등 하나 더 달고 이게 불공 아닙니까 전부가.
그런데 여기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할 것 같으면 진짜 좋은 불공은 금강경 읽는거다 이거야. 그래 어떤 사찰에는 어떤 의식이든지, 자녀들 입시기도든지, 초파일 부처님을 위한 기도든지, 동지 불공이든지, 금강경 독송하는 것으로 전부 불공을 삼는 그런 사찰도 있어요. 이제 조금씩 그래도 사람들이 깨어나나봐. 그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조금씩 그래도 뭔가 하도 이제 금강경이 좋다 하고 들여다 보고, 책이 뚫히도록 들여다보고 하니까 조금 그래도 뭐가 돌아가는가봐. 그래서 이제 그런 사찰이 생겨요. 좋은 현상이예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육조 혜명스님같이 한사람이라도 마음이 환히 열린 사람이 있으면 그러면 되는거 아니예요. 그러면 그건 뭐 우리가 큰 소득이 있다고 봐야지.
수보리(須菩提)야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어후말세(於後末世)에 유수지독송차경(有受持讀誦此經)하는 소득공덕(所得功德)을
말세에 이 경전을 수지 독송 하고 얻는 공덕을
아약구설자(我若具說者)면
내가 구체적으로 다 이야기 한다고 하면은,
혹유인(或有人)이 문(聞)하고 심즉광란(心卽狂亂)하야 호의불신(狐疑不信)하리라
혹 어떤 사람은 그것을 듣고는 그냥 마음이 미쳐버릴 것이다. 돌아버릴 것이다 이말이야. 다 이야기하면,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서 이게 가슴에 와닿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했는데 우리에게는 가슴에 와닿지 않아요.
앞에서 지경공덕분이나, 능경업장분이나 모두가 경전의 공덕을 이야기 한거예요. 똑같애요. 그런데 가슴에 와닿지 않아.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부처님은 조금밖에 안했다 이거야. 혹시 그대들이 미쳐버릴까바 돌아버릴까바 내가 겁이나서 조금밖에 안했다 이런 말입니다. 제대로 내가 이야기하면 심즉광란한다. 내 이야기 듣고 모두 돌아버릴거야.
호의불신하죠. 그리고는 의심해서 믿지를 않을 것이다. 지금 이정도 이야기해도 잘 안믿는데, 거의 안믿죠 뭐. 그런데 이제 더해 놓으면 정말 안믿지. 이건 뭐 정신없는 사람이 한 소리지. 부처님이 한 소리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해서 아마 안믿을거야 틀림없이, 그래 부처님이 심즉광란(心卽狂亂)해서 호의불신(狐疑不信)하리라 이렇게 했어요.
수보리(須菩提)야 당지시경(當知是經)은 의(義)도 불가사의(不可思議)며 과보(果報)도 역불가사의(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전의 의미는 불가사의야. 과보도 그렇기 때문에 또한 불가사의다 그랬어요.
거기에 경전을 공부한 그 과보, 그것도 역시 불가사의다. 왜냐 원인이 불가사의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역시 불가사의다. 그건 당연한 거죠. 경전을 공부한 것은 원인이 되고, 因이 되고, 거기에 따른 공덕은 과보가 되죠. 결과가 되는거죠. 그것도 역시 불가사의지. 콩을 심으면 콩이 열리고, 팥을 심으면 팥이 열리듯이 불가사의한 의미를 가진 금강경을 공부했으니까 거기에 따르는 과보도 결과도 불가사의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인데 이 경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불가사의하고, 과보도 역시 불가사의하냐?
내가 늘 종지를 놓치지 않고 말씀을 드리는데 그전에 내가 탄허스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탄허스님께서 화엄경을 번역을 하시면서 청량소는 전통적으로 사찰에서 많이 보는 좋은 해석본이지만은 통행장자라고 하는 일반 거사가 해석한 화엄학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옛날 선사들이 좋아했고, 하남스님이 좋아했고, 그래서 또 탄허스님이 그것을 번역하시면서 출판의 변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스님 왜 청량스님 해석하신 본을 번역하지 않고 왜 거사가 번역한 것을 합니까? 그 차이점을 이야기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청량도사는 글은 아름답고 표현은 좋다 이거야. 그런데 글이 거칠고 형편 없어도 이 통영장자는 구절구절마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화엄경의 종지를 나타냈다 그랬어요.
그거 중요한거지요. 근본취지를 잃어버리면 안돼요. 읽는 사람이 근본취지를 잃어버릴까바 수시로 짚어주는거야. 저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은 또 짚어주고 또 짚어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화엄경 그 많은 경전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사이에 화엄경 전체의 의미를 한두마디로서 일깨워주고 일깨워주고, 또 상기시키고 상기시키고 그랬어요. 그게 중요해요.
우리가 불교를 어떤 경전을 가지고 어디서 어떻게 공부를 하든지간에 불교의 근본취지를 늘 상기해야 하고, 또 상기시켜줘야 되고 그게 중요해요.
여기서 불가사의라고 한 것도 제가 그런 입장에서 말씀드리면은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불가사의해요? 가만히 살펴보면은 두두물물, 사물 하나하나 불가사의하지 않는 것이 없어. 그렇지만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실은 우리 자신이 가장 불가사의해요.
사람이 가장 불가사의해요. 육신은 이거 뭐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면은 그냥 간단히 분석이 나와요. 이제는 거의다 분석을 해 놓았어. 그런데 마음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 가지고 이 사람이라는 것은 마음까지 포함을 해서 생각하면은 사람같이 불가사의한 것이 없어.
이 깊이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거야. 사람의 넓이, 높이, 크기도 마음을 포함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같이 넓고 크고 멀고 아득한 존재는 없어.
수많은 철인들이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분석해도 끝내 다 공부하지 못한 것, 분석해 내지 못한것. 왜냐 사람이라고 하는 그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야.
여기서 이 경의 의미는 불가사의 하다 그랬어요.
결국 금강경을 통해서 불가사의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모든 깊이와 그 넓고 깊은 마음의 세계까지도 다 우리가 꿰뚫어서 그것을 나의 살림살이로 내 삶으로 하자고 하는 것, 이것이 이제 불교를 공부 하는 목적이거든요
그럼 그 속에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 속에는 정말 무량무변한 능력과 무량무변한 복덕과, 무량무변한 지혜와 자비와 이 모든 위대한 것들이 다 그속에 포함되어 있어. 그래서 이것이 바닥까지 나의 것으로 개발해 냈을 때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거야.
그런데 그것을 개발하는 작업이 결국 금강경 공부하는거야. 그래 금강경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통해서 그 불가사의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해 내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 파악해 내면은 그역시 결과도 불가사의 하다는거죠.
그래서 이 경전, 종이와 먹으로 된 이 경전 가지고 지금 하는 소리가 아니잖습니까? 이 경의 의미는 불가사의하다 이랬잖습니까?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기존의 것, 본래 갖추고 있는 것, 이미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복과 지혜와 덕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들 속에 있다고 하는 것 결국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뭐 다른 불가사의한 것 이야기한 것 아니예요. 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따지고 보면 다 불가사의한 존재지만은 그거 이야기 하자고 한 것이 아니지요. 사람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존재고, 불가사의한 존재고, 그래서 신이 있다면 사람이 신이고, 사람이 전부 신을 만들었어요. 지금 세상에 신이 신이 하는 것은 전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신의 어머니는 사람이예요. 사람이 전부 신을 만들었거든요. 부처도 사람이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이걸 이제 신이라고 하든지, 성인이라고 하든지, 뭐 부처라고 하든지, 보살이라고 하든지, 아라한이라고 하든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장자같은데서는 지인(至人)이라고 표현을 제일 높이 봤어요.
성인이 뭐 이런 것은 성인보다도, 신인보다도 지극할 지자 지인을 제일 위에도 두었어요. 신도 그 밑에 있어요. 지인보다 밑에 있어요. 성인도 더 밑에 있어요. 보통 우리가 뭐 부처님을 보고 세계 사대성인이니 어쩌고 하는 것은 전부 3등에 들어가. 신은 2등이고, 그 다음에 지극할 지자 지인을 1등으로 두었어. 그런 표현들이 있어 참고로.
사람이라고 하는 위대함을 이렇게까지 경을 통해서 표현을 해서 그렇지 모두가 사람을 근본에 두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이 작업을 통해서 그 불가사의한 사람을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 가고, 그래서 그것을 내가 10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뭐 100만분의 1도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쓰지 못하고 그냥 사장시켜 두고 있을 뿐인데 이걸 이제 금강경이라고 하는 이 작업을 통해서 모두 개발해서 10분 활용하는 그런 길이죠. 그래서 금강경이 그렇게 위대하다. 궁극적으로는 개발도구이니까 참으로 위대하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첫댓글 _()()()_
마하반야바라밀()()()
"淨"이란 글자,,, 淸淨하다, 깨끗하게 한다, 맑힌다는 뜻이나 불교에서는 '비운다' '공하다'는 뜻을 內包하고 있음. 當知是經 義 不可思議 過報 亦不可思議,,,!
삼배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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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