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되신 예수님은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옆에 있는 산헤드린의 실권자이며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으로가서 안나스로 부터 1차 예비심문을 받게 되였다.
우리 일행은 그 현장엘 갈 수가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예수님이 끌려 가신 가야바 집으로 가는 길목 사진 만 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야바 법정으로 가는 길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신 후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
산헤드린은 신약시대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최고 의회였다.
신명기 16장18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그 말씀에 따라 모세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대표회의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산헤드린이 된 것이다.
신약시대에도 산헤드린은 71명으로 되어 있으며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재판관으로 구성된 최고의 의결기관 이었다.
로마 지배시 산헤드린은 가장 큰 세력이었고 국가의 내무 행정은 여기 속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대제사장 임명, 전쟁선포, 예루살렘 성전의 세력 범위 확장 등을 명 할수 있었으며, 사법적으로는 대제사장 , 거짓 예언자 , 반역죄를 지은 원로, 잘못한 지파를 심판 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속죄일을 포함하여 일정한 위식을 감독했다.
따라서 산헤드린의 실권자가 유대의 최고 권력자 인것이다.
그런 산헤드린이 다시 1600년 만인 2004년 10월에 다시 구성되었다.
안나스는 오랜 동안 대제사장으로 산헤드린을 장악해 오다 그라투스 총독에 의해 해임 된 후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였지만 그 실권은 안나스에게 있었고 안나스의 아들 5명과 손자들까지 모두 제사장의 반열에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의 위세는 철권이였다
그러한 안나스에게도 큰 고민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갈릴리 지방에서 활약하는 열심당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인데 로마의 중간에서 두둔 할 수도 없고 멀리 할 수 없는 관계가 그것이였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행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궁핍한 백성들에게 병 고침과 이적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 당시 지도층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압제에 시달렸던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였다.
그러한 무리들의 행동이 유월절에 자칫 폭동으로 이어 진다면 로마로 부터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게 될 것을 염려 하였다.
그토록 위험한 인물인 예수님을 제거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의 언행과 행적을 소상하게 조사하였지만 죽일 만한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법정에 세울 만한 죄를 찾아낸 것은 다음 두가지였다.
첫째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거짓 예언 죄와 둘째 로마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 는 반역 죄인 것이였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벽화
결박 당한 채로 서있는 예수님께 안나스가 그의 제자들의 행방과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자에 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고 가르침에 대해서 만 대답하였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자 곁에 서있던 경비병들 중 하나가 “어떻게 감히 대제사장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느냐!” 며 손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유대인들에게는 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 파괴로 간주되어 금기하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이 뺨을 맞으신 것은 말 할수 었는 치욕인 것이다.
한편 도망갔던 요한과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와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으로 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요한은 예전부터 어머니 살로매(안나스의 친척) 영향으로 가끔 안나스 와 가야바 집을 드나 든 관계로 하속들을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안나스의 집으로 와서 베드로를 문 밖에 두고 자신은 뜰 안으로 들어 가서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을 먼 발치에서 불수 있었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요한은 문 밖으로 나가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을 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는데 그 여자가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고 물으니 당황한 베드로가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며 제자 임을 부인 하였다.
하녀한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 모습의 동상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 담 사이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대제사장 가야바 의 집으로 보냈다.
가야바의 뜰안에는 대제사장 가야바를 비롯 산회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을 때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고 증언 하였다.
대제사장이 " 이 증거가 어떠하냐 "는 질문에 예수님이 잠잠하시니 이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증인을 요구 하리요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사람들이 " 이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며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며 조롱을 하였다.
베드로는 날씨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숫불을 피우고 쬐고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불을 쬐고 있는데 사람들이 묻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며 "내가 그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였다.
그 자리를 피히여 나오는데 감란산에서 베드로가 칼로 귀를 벤 말고의 친척이 말하기를 " 네가 예수님과 그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고 말하니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말하기를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라고 말하고 나니 닭이 곧 울었다.
그때 예수님이 몸을 돌려 측은 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 통곡하였다.
이 대목에서 누가 베드로를 욕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위기상황에서 또는 어떤 이익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 하지 얺는가. 깊히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나와 통곡하며 울던 곳이 가야바의 집에서 약간 떨어진 시온산 남쪽 중턱에 인데 그곳에 주후 457년에 교회가 세워 졌으나 1010년 초기 아랍시대에 파괴 되였고 그 후 파괴와 재건을 거듭하다 1932년에 현재의 교회를 세우고
이름을 갈리칸두( Gallicantu) 즉 닭이 운다는 뜻으로 닭 울음 교회 이름을 지었는데 오늘날은 베드로 통곡 교회로 부른다
닭 울음 성당(베드로의 통곡 기념 교회) 이정표
닭 울음 성당(베드로의 통곡 기념 교회)
십자가 위에 '닭'을 올려 놓았다. 유럽에서는 십자가대신 닭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닭은 베드로의 회개를 상징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한 새벽 녘에 가야바는 예수님을 결박하여 안토니오 요새에 머물고 있는 빌라도에게로
끌고 같다.
안토니오 요새는 예루살렘 대성전 북서쪽 성벽 모퉁이에 위치했던 요새로 하나넬 망대(렘31:38)가 자리했던 곳이다.
주전 31년 헤롯대왕이 제2차 성전을 재건할 때 성전 북서쪽을 넓고 크게 확장하여 성전 수비대를 주둔 시키고 친구인 마가 안토니오를 기념하기 위해 안토니오 요새로 이름을 지었다.
안토니오 요새는 총독 빌라도가 절기나 주요한 일을 처리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 때 사용하였는데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고발해 오므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판결하게 된 이유로 빌라도 법정이라고 불려 졌다.
빌라도 법정 (안토니오 요새) 모습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결박한 채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가 빌라도에게 " 이 사람이 백성들을 미혹하여 가이사에게 세금 받치는 것을 금하였고 자칭 왕이라" 하였다고 고소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