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잡품(雜品)① 19.1.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육바라밀을 이미 닦은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합니까?” “선남자여, 이런 보살은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있는 중생을 건집니다.” 19.2. “선남자여, 재물이나 법식(法食)에 인색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에서 어리석고 가난한 과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남자여, 보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원수가 친근한 생각을 하고 자유롭지 못한 자는 모두 자유를 얻으며 보시의 인과를 믿고 계율의 인과를 믿으면 곧 보시의 과보를 성취하게 됩니다. 선남자여, 어떤 사람은 보시란 곧 뜻(意)이라 하고 그 까닭은 뜻이 보시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시는 곧 오음(五陰)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몸과 입과 뜻을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보시가 자리와 이타와 자타리(自他利)를 위한 것이라면 오음을 갖습니다. 이와 같이 보시는 보리도를 장엄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재물이 많은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보시의 바른 과보이고 수명과 건강과 안락함과 변재를 얻음은 보시의 나머지 과보입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뛰어난 재물이 있으므로 뛰어난 과보를 얻고, 복전이 뛰어나므로 뛰어난 과보를 얻으며, 시주(施主)가 뛰어나므로 뛰어난 과보를 얻습니다. 수다원을 닦는 이에서부터 후신(後身)보살, 성불한 이에 이르기까지가 뛰어난 밭이니, 이와 같은 밭에 보시하기 때문에 뛰어난 과보를 얻습니다. 아주 뛰어난 빛, 향기, 맛, 촉감의 물건으로 보시한다면, 이것을 재물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고 이러한 물건으로 보시하기 때문에 뛰어난 과보를 얻습니다. 시주의 신심이 순수하고 보시(施)와 지계(戒)와 다문(多聞)과 지혜를 갖추었으면 뛰어난 과보를 얻습니다.” 19.3. “선남자여, 지혜로운 사람의 보시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직접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신심으로 보시하는 것이고, 넷째는 때에 알맞게 보시함이며, 다섯째는 법대로 구한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어떠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곧 많은 재물, 넉넉한 보배를 얻어서,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산호, 코끼리, 말, 소, 양, 밭, 집, 노비(奴婢)로 많은 가족을 넉넉하게 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자는 이와 같은 과보를 얻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는 자는 어떠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고 나서 얻는 과보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데, 얻고 나서 쓰니, 제 손으로 보시한 자는 이와 같은 과보를 얻습니다. 신심으로 보시하는 자는 어떠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신심으로 보시하고 나서 얻는 과보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데, 항상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모든 중생의 사랑을 받으니, 신심으로 보시하는 자는 이와 같은 과보가 더해집니다. 때에 알맞게 보시하는 자는 어떠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때에 알맞게 보시하는 자가 얻는 과보도 위에 말한 것과 같은데, 필요한 물건도 그때그때 얻으니, 때에 보시하는 자는 이러한 과보를 겸합니다. <!--[endif]--> 법대로 구한 재물을 보시하면 어떠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법대로 구한 재물로 보시하는 과보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데 이 재물을 얻으면 왕이나 도적이나 물, 불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endif]--> 19.4. “좋은 빛깔(色)로 보시하면 이 인연으로 이 사람이 뛰어난 용모를 얻고, 향기(香)로 보시하면 이 사람은 이로 인하여 이름이 멀리 납니다. 맛(味)으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은 이로 인하여 무리들이 보고 듣기를 좋아하고, 보거나 듣고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냅니다. 좋은 촉감(觸)으로 보시하면 이 사람은 이로 인하여 뛰어난 촉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받을 것을 받고는 곧 수명과 건강과 안락과 변재를 얻습니다. 선남자여, 어떤 이는 ‘탑이나 상에 보시하는 것은 받는 자가 없기 때문에 수명과 건강과 안락과 변재를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심이 있으므로, 시주가 신심으로 보시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과보를 받습니다. 선남자여, 마치 비구가 자심(慈心)을 닦으면, 이러한 인자한 마음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지 않더라도 한량없는 과보를 획득하는 것과 같이 탑과 형상 등에 보시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다섯 가지의 과보를 얻습니다. 선남자여, 곡식을 심어서는 오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탑과 형상 등에 보시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다섯 가지 과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밭에서 얻는 과보, 물건으로 얻는 과보, 시주로서 얻는 과보를 말하였습니다.” <!--[endif]--> 19.5. “선남자여,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시(法施)이고, 둘째는 재시(財施)입니다. 법시로는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과보를 얻으나, 재시로는 오직 재물의 과보만을 얻습니다. 보살이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보시를 닦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과 번뇌를 멀리 여의게 하고자 함이고, 둘째는 중생의 마음을 조복하고자 함입니다. 선남자여, 또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시(法施)이고, 둘째는 무외시(無畏施)이며, 셋째는 재물시(財物施)입니다. 법시라는 것은 다른 이를 가르쳐서 계를 받게 하고, 출가 수도하게 하며 사갈마(四羯 磨)를 사뢰고 삿된 소견을 부수게 하고 바른 법을 설하여 주며 사실과 사실이 아님을 분별하여 말하여 주고 네 가지의 전도와 방일하지 않을 것을 널리 설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시입니다. 왕이나, 사자, 호랑이, 물, 불, 도적 따위를 무서워하는 중생을 보고 보살이 구제하는 것을 무외시라고 합니다. 자신의 재보에 대한 인색함을 없애서 아끼지 않고 좋은 것이나 좋지 않은 것이나 많건 적건 소, 양, 코끼리, 말, 집, 이부자리, 나무, 숲, 샘, 남종, 여종, 물, 소, 낙타, 노새, 수레, 연, 가마, 병, 독, 솥, 가마, 의자, 방석, 구리그릇, 쇠그릇, 질그릇, 의복, 영락, 등불, 향, 꽃, 부채, 일산, 모자, 신, 궤, 지팡이, 새끼줄, 쟁기, 호미, 도끼, 끌, 초목, 물, 돌 등과 같은 물건을 구하는 자의 뜻과 필요에 따라 주는 것을 재시라고 합니다. 승방(僧坊)을 세우고 요사채를 세워 위와 같은 것을 출가한 사람에게 보시할 경우, 코끼리와 말은 제외합니다.” <!--[endif]--> 19.6. “선남자여, 보시하는 데에는 네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까워하고 탐내는 마음이고, 둘째는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작은 물건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고, 넷째는 세속적인 과보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의 장애는 두 가지 법으로 부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아(無我)를 닦는 것이고, 둘째는 무상(無常)을 닦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즐겁게 보시하고자 하면 다섯 가지를 제거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내는 마음이고, 둘째는 탐내는 마음이며, 셋째는 질투하는 마음이고, 넷째는 몸과 목숨을 아끼는 것이며, 다섯째는 인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일을 제거하면, 언제나 보시를 좋아하게 됩니다. <!--[endif]--> 즐겨 보시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를 얻으니, 첫째는 항상 모든 성인을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중생들이 보기를 좋아하고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며, 셋째는 대중 속에 들어가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좋은 명성을 얻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리를 장엄하는 것입니다. <!--[endif]--> 선남자여, 보살은 모든 것을 보시할 수 있는 사람(一切施)이라고 하니, 무엇을 일체시라고 합니까?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법대로 구한 재물로서 보시하므로 일체시이고, 항상 청정한 마음으로 받는 자에게 베푸니 일체시이며, 재물이 적어도 보시하니 일체시이고, 아끼는 물건도 인색한 생각을 없애고 놓아버리니 일체시이며, 보시하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일체시이고, 보시할 때 밭이거나 밭이 아니거나를 보지 않으니 일체시이며, 원수에게나 친한 이에게나 평등하게 베푸니 일체시입니다. 보살이 재물을 보시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이고, 둘째는 중생이 아닌 자입니다. 이 두 가지에도 자신의 몸까지도 인색하게 아끼지 않으니 일체시라 합니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은 가여워하는 마음 때문이므로 일체시이고, 베풀고자 하거나 베풀 때나 베풀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니 일체시입니다. 설령 청정하지 않은 것을 주어 받는 사람이 기뻐하더라도, 술, 독, 칼, 몽둥이, 가쇄(枷鎖)등의 물건은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거나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거나 간에 보시해서는 안됩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청정하지 않은 음식이나 약을 베풀어서는 안되고 단 한 푼이라도 남의 것을 빼앗아 그것으로 보시해서는 안됩니다. 보살이 보시할 때 비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인들이라 하더라도 욕하고 때려 그들로 하여금 성내는 마음과 괴로움을 생기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법답게 재시(財施)를 하되 현세나 후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베풀고 나서는 항상 번뇌의 죄과와 열반 공덕의 미묘함을 깊이 살펴보아야 하며 보리를 제외하고는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endif]-->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에게 베풀 때에는 가여워 하는 마음을 내고 복전에 베풀 때에는 기쁨과 공경의 마음을 내며 친구에게 베풀 때에는 방일하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구걸하는 자를 보거든 알아서 필요한 것을 주어 구걸하는 말을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걸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보시를 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기 때문입니다.” <!--[endif]--> 19.7. “선남자여, 시주는 하, 중, 상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업의 과보를 믿지 않고 탐하여 집착하며 인색하고 재물이 다할 것을 무서워하여 와서 구걸하는 자를 보면 성내고 귀찮은 생각을 낸다면, 이는 하(下)근기입니다. 비록 업의 과보는 믿으나 재물을 탐하는 생각을 내고 다하여 없어질까 무서워하지만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기꺼이 베풀 수 있는 마음을 내는 것이 중근기입니다. 깊이 업의 과보를 믿고 재물에 대하여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서 모든 재물은 덧없는 것이라 여겨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베풀 때는 기뻐하고 베풀지 못하였을 때는 괴로워하면서 제 몸에 딸린 물건까지 주는 것이 상근기입니다. 또 하근기란,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낯을 찡그리고 보지도 않으며 사납게 꾸짖고 헐뜯고 욕하는 것이며, 중근기란 비록 베풀기는 하나 경멸하고 천히 여겨 무례하게 구는 것이며, 상근기란 구하기도 전에 베풀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또 하근기란 현재의 과보를 바라는 보시며, 중근기란 후생의 과보를 바라는 보시며, 상근기란 가여워 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입니다. 또 하근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보시이고, 중근기는 업을 위한 보시이며, 상근기는 법장(法藏)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입니다. 또 하근기는 뛰어난 자를 두려워하여 주는 것이고, 중근기는 자기와 같기 때문에 주는 것이며, 상근기는 원수와 친구를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근기는 재물이 있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중근기는 재물이 많은데도 적다고 말하는 것이며, 상근기는 조금 찾는데도 많이 주는 것입니다. 보시하는 자로서 재물이 없을 때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최하인 사람은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악한 마음으로 성내고 꾸짖는 자이고, 중품의 사람은 와서 구하는 자를 보고 바로 재물이 없다고 말하는 자이며, 상품인 사람은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스스로 재물이 없는 것을 미안해하고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자입니다. 선남자여, 또 하품인 자는 항상 성현의 꾸짖는 바가 되고 중품인 자는 항상 성현이 가여워 하는 바가 되며 상품인 자는 성현이 보고는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endif]--> 19.8.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자신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보시를 합니다. 재보라는 것은 항상함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하여, 가엾어 하기 때문에, 인색함을 없애기 위하여, 뒤에 과보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보리도를 장엄하고자하기 때문에 보시를 합니다. 보살은 모든 것을 베풀고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재산이 없어져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자신을 가벼이 여기지도 않으며 때를 가리지도 않고, 구하는 자에 대한 차별도 없습니다. 언제나 구걸하는 자를 생각하기를 굶었을 때 밥을 생각하는 것처럼 합니다. 좋은 벗을 친근히 하여 바른 가르침을 물어서 받습니다.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하기를 불이 난 집에서 재물을 구하는 것과 같이 하여 환희 찬탄하고 재물에는 허물이 많음을 말합니다. 베풀고 나서는 착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긴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리고 구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나에게 있어 참된 공덕의 씨앗입니다. 내가 이제 인색하고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는 것은 모두 그대가 와서 구걸하는 인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구걸하는 자에게 친애심을 냅니다. 이미 베풀었거든 다시 구걸하는 자에게 가르쳐서 같이 법을 수호하고 부지런히 불, 법, 승 삼보께 공양을 올리도록 할 것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즐거이 보시하면 모든 방일을 여의게 됩니다. 비록 몸뚱이를 나눠서 구걸하는 자에게 주더라도 끝까지 악한 마음을 한 생각도 내지 않는다면, 이로 인해 다시 자, 비, 희, 사가 늘어나게 됩니다. 받는 자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스스로 교만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재물이 있어서 구하는 자의 뜻에 맞도록 한 것을 기뻐하고 신심을 더 키우며 업의 과보를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선남자여, 재물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모든 중생을 외아들 같은 생각으로 보면,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자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이 사람은 인색하고 탐하고 집착하는 번뇌에 움직이지 않고 마치 어떠한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 수미산처럼 되니, 이러한 사람은 중생을 위한 의지가 되고, 보시바라밀을 갖춥니다.” <!--[endif]--> 19.9.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네 가지를 위하여 즐겨 혜시(惠施)를 행합니다. 첫째는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번뇌를 파괴하는 것이고, 둘째는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온갖 서원을 발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안락함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재보를 넉넉히 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탐욕이 없는 마음을 보시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 탐욕 없이 하는 보시입니까? 보시는 행동이며 행동을 통해 보시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갖춰 보시하는 것을 무탐(無貪)이라고 합니다. 보시로서 번뇌를 파괴한다는 것은, 이미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면 간탐과 질투와 진에(瞋恚) 와 우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endif]--> 보시로서 온갖 원(願)을 발한다는 것은, 보시를 하고 나서 갖가지 원을 발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고 나서는 갖가지 선과 악의 원을 발할 수 있고 이 선과 악의 원으로 인하여 선과 악의 과보를 얻으니, 그 이유는, 서원의 힘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시로 인하여 안락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보시로 인하여 인간과 천상의 낙을 받고 무상락(無上樂)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시로 재보가 넉넉하게 됩니까? 이 보시로 인하여 구하는 바, 금과 은이, 그리고 축생까지도 뜻대로 곧 얻어지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즐겨 보시를 하면 이 사람은 곧 다섯 가지 해롭고 악한 법을 파괴하게 됩니다. 첫째는 사견(邪見)이고, 둘째는 무신(無信)이고, 셋째는 방일(放逸)이며, 넷째는 간린(慳 吝)이고, 다섯째는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이 악을 여의고 나면 마음에서 환희가 생기고 환희로 인하여 진정한 해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현재에 네 가지 과보를 얻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과 원수까지도 그를 만나 보기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는 착한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지는 것이며, 셋째는 큰 무리 속에 들어갈 때도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모든 착한 사람들이 기꺼이 와서 따르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보시를 하고 나서 그 마음에 후회함이 없으면, 이 사람이 혹 객진(客塵)번뇌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비록 나쁜 곳에 처하였지만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인연으로 두 가지의 고통을 여의게 되니, 첫째는 철환고(鐵丸苦)이고, 둘째는 철장고(鐵漿苦)입니다. 축생의 몸을 받더라도 필요한 것을 쉽게 얻어서 궁핍함이 없습니다. 아귀의 몸이어도 기갈을 느끼지 않고 항상 배부름을 얻습니다. 사람의 몸을 얻으면 수명과 건강과 안락과 변재를 얻고, 믿음과 계행과 보시와 다문과 지혜, 모든 것에 뛰어나며, 비록 악한 세상에 살더라도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악한법이 생길 때에도 끝까지 따라서 받지 않으며, 무서운 곳에서도 공포심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의 몸을 받으면 열 가지에서 뛰어나게 됩니다.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두 가지를 위하여 보시를 하니, 첫째는 자신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망하고 성내는 마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래를 무상존(無上尊)이라고 합니다. <!--[endif]-->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보시를 하면서도 받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고 명예와 두려움을 면할 것을 구하지 않으며 선한 사람이 와서 따르기를 구하지 않고, 또 인간과 천상의 과보도 구하지 않습니다. 또 두 가지 일을 보니, 첫째는 견고하지 않은 재물을 견고한 재물과 바꾸는 것이고, 둘째는 끝까지 아끼고 인색한 마음을 따르지 않음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내가 죽으면 나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손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내 이제 마땅히 없어진다고 괴로워하지 않고 베풀어 주는 것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보시하는 자는 먼저 스스로 몸 밖의 물건을 보시함으로써 그 마음을 시험하여 마음이 조복되었음을 압니다. 그 뒤에 내물(內物)을 베푸니, 이 두 보시로 인하여 두 법을 얻습니다. 두 법이란, 첫째는 영원히 모든 유(有)를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바른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사람이 먼 길을 갈 때 무거운 짐을 졌다면 몹시 피로할 것이나 그 짐을 버린다면 수월합니다. 보시하는 사람은 와서 구하는 자를 보고 재물을 버려 그에게 주고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endif]--> 19.10.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물건이 나를 따라서 후세까지 가게 하려면 먼저 보시할 수밖에 없다’ 하고. 그리고 또 가난하고 궁핍한 괴로움과 부유하고 큰 권세와 쾌락을 깊이 살펴봄으로 마음을 다해 항상 즐거이 보시합니다. <!--[endif]--> 선남자여, 사람이 재물을 두고도 구하는 자를 보면 없다고 하거나 다하였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세에 빈궁하고 박덕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방일하다고 합니다. 선남자여, 재물이 없는 사람이라도 스스로 재물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물과 풀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비록 이것이 나라의 임금이어도 반드시 베푸는 것이 아니고 비록 빈궁한 이라도 베풀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빈궁한 사람도 먹는 분복은 있습니다. 먹고 나서 그릇을 씻고 버리는 물과 그 찌꺼기를 먹을 수 있는 것에게 보시한다면 이 또한 복덕을 얻으며 보릿가루 부스러기라도 개미들에게 주면 또한 한량없는 복덕의 과보를 얻습니다. 그러니 천하에 아무리 가난한 이라도 누가 이 먼지만큼의 보릿가루야 없겠습니까. 하루에 세 움큼의 보릿가루를 먹고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자가 어떤 이가 있겠습니까. 그리니 모든 사람은 마땅히 먹는 것의 절반은 구걸하는 자에게 보시해야 할 것입니다. 선남자여,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복없이 알몸으로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의복이 있다면 어찌 한 올의 실을 주어 떨어진 것을 깁게 할 수 없겠으며, 손가락만큼의 헝겊으로 등불의 심지를 만들 수야 없겠습니까. 선남자여, 천하에 빈궁한 사람이지만 몸뚱이도 없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몸뚱이가 있다면 남이 복을 짓는 것을 보거든 가서 몸으로 마땅히 도와 줄 것입니다. 기뻐하고 싫어함이 없이 하면 또한 시주로서 복덕을 얻습니다. 때로는 못한 것이 있고, 똑 같은 것이 있고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이 인연으로 파세나디 왕의 음식을 받을 때 축원하기를, ‘왕과 빈궁한 사람이 얻는 바, 복덕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endif]-->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향을 사는데 도향(塗香), 말향(抹香), 산향(散香), 소향(燒香) 등의 네 가지 향을 만지면 사는 자나 파는 자나 같이 향내를 맡는 것에 다름이 없지만, 이 향들은 털끝만큼도 잃는 것이 없습니다. 보시행을 닦는 덕도 역시 이와 같아서 많거나 적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함께 기뻐하고 마음과 몸으로 가서 돕거나 멀리서 보거나 듣거나 하면서 마음으로 기뻐하면 그 마음이 같기 때문에 얻는바 과보도 차별이 없습니다. <!--[endif]--> 선남자여, 재물이 없고 남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도 않고 복전을 의심하면 이것이 빈궁함입니다. 재보가 많아서 걸림 없이 자재하지만 좋은 복전이 있어도 안으로 신심이 없어서 받들어 보시하지 않으면 이 또한 빈궁함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 베풀어 줍니다. 보시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천상의 낙을 얻고 무상락에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경에 말하기를, ‘지혜로운 이는 밥 한 덩이가 남아서 자기가 먹으면 살고 남에게 주면 죽을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베푸는데, 하물며 많은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선남자여, 지혜로운 이는 살펴보아서 ‘재물이란 덧없는 것이고, 덧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세상에서 잃고, 무너지고, 줄고 없어져서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덧없는 것이긴 하지만, 보시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이익을 지을 수 있으니 어찌 아끼고 인색하여 보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또 관찰하여 ‘세간에서 계를 지키고, 많이 들으면 이 인연의 힘으로 아라한의 과보를 얻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과보를 얻어도 배고프고 목마름의 괴로움 따위는 막지 못합니다. 아라한으로서 집과 의복, 음식, 이부자리, 의약 등을 얻기가 어렵다면 모두 이것이 전 세상에서 보시를 하지 않은 인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파계한 사람도 즐겨 보시를 행하면 이 사람이 비록 아귀, 축생으로 떨어지더라도 항상 배부르고 만족하여서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선남자여, 보시를 제외하고는 자재와 해탈의 두 과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계를 지킨 사람이 비록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보시를 하지 않았으면 그 때문에 좋은 음식과 미묘한 영락 등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간의 낙과 무상락을 구하고자하면 당연히 즐거이 보시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는 끝이 없고 즐거움을 받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끊기 위하여 보시하지만 즐거움을 구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렇게 관찰하기를, ‘사천하의 땅을 가질 정도의 풍요로움으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만족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무상락을 위하여 보시를 행할지라도 인간이나 천상을 위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덧없기 때문이고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endif]--> 19.11. “선남자여, 누군가가 말하기를, ‘시주와 받는 자와 즐거움을 받는 것이 모두 오음입니다. 이와 같은 오음은 무상합니다. 오음을 버리고 베풀면 누가 받습니까. 비록 받는 자가 없어도 선과(善果)는 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없습니다’고 하거든, ‘베풂과 받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반대로 물어야 합니다. ‘베풂이 곧 이 베풂이고, 받음이 곧 나(我)’라고 하거든, 또 말하여서,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베풂은 곧 베풂이고, 나는 곧 오음이다’고 합니다.” <!--[endif]--> 19.12. “‘여기서 음(陰)을 베푼다는 것은 무상한 것인데 누가 저기서 받습니까?’라고 하면, ‘자세히 듣고, 새겨들으시오. 그대를 위하여 말하여 주겠습니다. 씨앗은 항상한 것입니까? 항상함이 없는 것입니까?’, 항상하다고 하면, ‘어떻게 씨앗이 없어져서 싹이 납니까?’ 이 허물을 보고 다시 항상함이 없다고 하거든 또 말합니다. ‘항상함이 없다면 씨앗에 때로 거름, 물, 흙 따위의 공을 주면 어찌하여 싹이 자라게 됩니까?’ 만약, 씨앗에는 비록 항상함이 없으나 공덕을 일구는 업(功業)을 쓰기 때문에 싹과 열매를 얻는 것이라고 하거든, ‘오음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씨앗 가운데에 이미 싹이 있는 것을 사람과 노력과 물, 거름이 요인(了因)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인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에는 증감이 없습니다. 많으면 많이 있고 적으면 적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과 거름으로 싹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본래 없어도 이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음이고, 둘째는 적음입니다. 많다는 것은 큰 것을 보고, 적다는 것은 작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등불을 켰을 때 밝음이 많으면 큰 것을 보고 밝음이 적으면 작은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하나의 씨앗에 많은 물과 거름을 주어도 한 때나 하루에 자라서 사람과 같거나 사람보다 더 크게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요인에는 비록 두 가지가 있으나, 때를 기다려야 하며, 물건이 적으면 생기는 것이 적고 물건이 많으면 생기는 것이 많으므로 생기는 요인은 더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법은 항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남자여, 씨앗과 싹은 다릅니다. 비록 다르지만, 서로 같아서 끊이지 않습니다. 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남자여, 싹은 씨앗에서 자라고 줄기는 싹에서 자라고 잎은 줄기에서 자라고 꽃은 잎에서 자라고 열매는 꽃에서 자라는 것처럼, 오음의 하나의 도는 오음의 다른 다섯 가지 도에 영향을 줍니다. 이와 같이, 행위를 하는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대의 견해로, 내가 설한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법 가운데는 행하는 자는 나(我)고, 과보를 받는 것은 몸이고, 또 행하는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가 다르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살계(不殺戒)를 받는 것은 곧 나입니다. 이 인연으로 몸에 뛰어난 용모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법에는 받는 자에게 원인이 없고 행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으니 이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짓고 몸이 받는다고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여기서 짓고 저기서 받습니다’라고 합니다. <!--[endif]--> 또 마땅히 묻기를, ‘그대는 몸과 아(我)가 다르다고 합니다. 몸이 음식, 피복, 영락을 받는데 좋은 음식의 인연으로 건강을 얻고, 나쁜 음식의 인연으로 나쁜 건강을 얻습니다. 이 좋고 나쁜 건강이 인연에 속하였다면, 나는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내가 우수(憂愁), 환희(歡喜)를 얻는다고 말한다면 어찌 이것이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른 것이 아닙니까?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힘을 얻기 위해 우유를 먹는데, 이 사람이 오래 먹어서 몸에 건강과 훌륭한 용모를 얻었다면, 어떤 수척한 사람이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곧 크게 좋은 건강을 얻겠습니까?’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몸이 짓는 바 일에 내가 어떻게 얻겠습니까? 왜냐하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법은 그렇지 않아서 오음으로 짓고(陰作), 오음으로 받음(陰受)이 서로 비슷하여 끊어지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endif]--> 19.15. “선남자여, 오음은 항상함이 없어서, 이것이 저것에 이르러서 과보를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법에는 즉작즉수(卽作卽受)이거나, 이작이수(異作異受)이거나, 무작무수(無作無受)가 있습니다. 즉작즉수란 음작음수(陰作陰受)이고, 이작이수란 인작천수(人作天受)이며, 무작무수란 업을 지음이 인연의 화합으로 있는 것입니다. 자성은 본래 없는데, 어찌 작(作)과 수(受)가 있겠습니까. ‘그대의 뜻에 이작이수라고 하면서 어떻게 또 상속부단(相續不斷)이라고 합니까?’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유하건대 독을 젖 속에 넣으면 제호(醍醐) 가 되었을 때에 사람을 죽입니다. 젖이 때가 다르기 때문에 제호도 또한 다릅니다. 또 비록 다름이 있으나 순서대로 생기는 것이 상속 부단하여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아서, 오음도 또한 그러합니다. 비록 다름이 있으나 순서대로 생기는 것이 서로 같아서 끊이지 않으므로, 행하는 자와 과보를 받는 자가 있다거나 행하는 자는 바로 과보를 받는 자라 하거나 행위자도 과보를 받는 자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ndif]--> 오음을 여의면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습니다. 전도된 사견에 마음이 덮인 중생은 색(色)이 곧 나(我)라고 하거나, 식(識)이 곧 나라고 하며, 또 색은 곧 나이고, 그 나머지 사음(四陰)은 곧 아소라고 하거나, 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합니다. 누가 말하기를, ‘오음도 떠나고서 따로 아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불법 가운데에는 색은 나가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상하고 무작이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음(四陰)을 아소라고 부르지 않으며, 식도 또한 그렇습니다. 여러 연(緣)이 화합하여서 다른 법이 생기므로 작(作)이라고 하니 이작(異作)은 실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 연이 화합하여서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수(受)라고 하니 실로 이수(異受)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작무수(無作無受)라고 합니다. <!--[endif]--> 그대가 생각하기를, 이작이수인데, 왜 이 사람이 업을 지음에 저 사람이 구유(俱有)의 오음을 받지 않을까?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endif]--> 왜냐하면, 이(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신이(身異)이고, 둘째는 명이(名異)입니다. 첫째는 부처가 얻는 것(佛得)이고, 둘째는 하늘이 얻는 것(天得)입니다. 불득, 천득, 신(身), 명(名)이 각각 다르므로, 이 인연으로 신(身), 구(口)가 다르고, 신, 구가 다르므로 짓는 업도 다르며, 짓는 업이 다르므로 수명, 건강, 안락, 변재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불득에서 업을 짓고 천득에서 과보를 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모두 오음이어서 색의 이름은 하나이지만 수(受), 상(想), 행(行)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불득(佛得)은 즐거움을 받고, 천득(佛得)은 괴로움을 받으며, 불득은 탐욕을 생기게 하고, 천득은 화를 내게 하므로 서로 닮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색의 이름은 비록 하나이지만 실은 다름이 있습니다. 어떤 불득은 희고 천득은 검은 것이 있습니다. <!--[endif]--> 이름이 같다고 하여 뜻이 하나라고 한다면, 한 사람이 날 때에 마땅히 일체가 나고, 한 사람이 죽을 때 마땅히 일체가 죽을 것입니다. 그대가 이 뜻이 그렇지 않다고 하고자 한다면, 그 때문에 이작이수임을 얻지 못합니다. <!--[endif]--> 그대의 뜻에 만약, ‘너도 이작이수이고, 나도 이작이수이다. 이작이수라면 마땅히 나의 허물과 같거늘 어찌 자기의 허물은 보지 않고 나를 책망하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다름(異)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차제생(次第生)과 차제멸(次第滅)이고, 둘째는 차제생이지만 차제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생이 다르므로 멸도 역시 다릅니다. 내가 말하는 이작이수와 차작차수(此作此受)는 그대의 허물과 같지 않습니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마을에 불을 지르려고 마른 풀 속에 불씨를 놓았습니다. 차차 이 불로 인해 백리도 2백리도 태웠습니다. 촌주(村主)가 잡아서 문초하기를, ‘이 극악한 놈아, 무슨 인연으로 이 큰 마을을 태웠느냐?’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실은 내가 태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놓은 불은 이미 꺼져버렸습니다. 탄 것은 한 다발의 풀이니 내가 이제 마땅히 두 다발을 돌려주겠습니다. 그 나머지 물건은 내가 보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촌주가 또 말하기를 ‘어리석은 놈아, 네 작은 불로 인하여 점차 불이 나서 드디어 백리를 태우고 2백리를 태웠다. 죄가 네게 있는데 어찌 갚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이 불이 다르게 꺼지고 다르게 탔지만 이어져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를 얻습니다. 선과 악의 오음도 이와 같아서 과보를 받을 때 음은 비록 짓지 않더라도 그것이 차제로 상속하여 생기므로 과보를 받습니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다른 이와 내기하기를, 횃불을 잡고 멀리 가서 백리 밖에 이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르지 못하면 벌을 받기로 하고, 이르면 상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endif]--> 그리고 횃불을 잡은 사람이 백리에 이르고 나서 곧 상을 줄 것을 요구하니 그가 말하기를, ‘네 그 횃불은 출발하자 이미 없어졌는데 어찌 여기서 나에게 상을 받기를 바라는가?’하였고, 횃불을 잡은 자가 말하기를, ‘저 불은 비록 없어졌지만 차제로 상속되어 여기 이른 것이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뜻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어서 두 사람이 모두 과실이 없는 것입니다. <!--[endif]--> 말하기를 오음도 그러하여 행위자와 받는 자가 같거나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하여도 모두 과실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이쪽과 저쪽 두 언덕과 가운데의 흐름을 통틀어서 갠지스 강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름에는 두 언덕의 거리가 아주 멀고, 가을에는 두 언덕의 거리가 가까워서 항상 정해진 모양이 없으니, 어떤 때는 크고 어떤 때는 작으며, 비록 또 늘고 줄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을 모두 갠지스 강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것은 강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異)와 불이(不異)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음도 또한 그러하여서 지혜로운 이는 행위자와 받는 자가 같거나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대의 뜻은 두 언덕은 흙이고, 가운데에 흐르는 것은 물이고, 하신(河神)은 강(河)입니다’라고 하면 이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神)이 강이라면 왜 또 강이 맑다느니 강이 흐리다느니 하며, 이 언덕 저 언덕 가운데의 흐름과 깊음 얕음이 있고, 큰 바다에 이르는데 건널 수 있느니 건널 수 없느니 하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나무가 있으면 신이 거기에 있으나 나무가 없으면 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강과 신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덕과 저 언덕 그 중간의 흐름이 차제로 끊이지 않는 것을 통틀어서 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같음과 다름을 말할 수 있으니, 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귀하고 뛰어난 이에게 험한 말을 하고 욕보이다가 그 악한 말 때문에 발에 족쇄가 채워진 것과 같으니, 이 발은 실로 악구의 죄가 없어도 족쇄가 채워진 것이므로 행위자와 받는 자가 같다거나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말로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혜로운 이 만이 행위자와 받는 자가 같다거나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건대, 그릇과 기름과 심지와 불과 사람의 노력 등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야만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등불이 밝은 것에 증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지므로 더하지 않고, 생기므로 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제로 생기기 때문에 등에 증감을 말합니다. <!--[endif]--> 그대가 생각하기를 ‘등불은 항상함이 없고 기름은 항상하다. 기름이 많으면 많이 밝고 기름이 적으면 조금 밝다’고 한다면, 이 뜻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연소(燃燒)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하다면 이념(二念)에 머물 것입니다. 이념에 머문다면 누가 태워서 다하게 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또 말하기를, ‘등불의 밝음(燈明)은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합니다. <!--[endif]--> 오음도 또한 그러합니다. 밝음(明)은 곧 육입(六入)이고, 기름(油)은 곧 업(業)이니, 기름의 업 인연 때문에 오음으로 하여금 더함이 있고 감함이 있으며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지야(阿坻 耶)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지야 말은 이미 오랜 과거의 말이어서 오늘날에는 있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서 차제로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지야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또 이것이 아지야 말이니, 아지야 말이 아니니 하고, 또 옳으니, 그르니 하여도 모두 이치를 잃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endif]--> 오음도 이와 같아서 즉작즉수와 이작이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큰 부자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재물은 관(官)에 넘어 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재물은 나에게 속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관인(官人)이 말하기를, ‘이 재물이 어떻게 행위자가 다른데 다른 이에게 속한다는 말인가?’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또 말하기를, ‘나는 죽은 자의 제7세 손(孫)이다. 차제로 끊이지 않았거늘 어찌 이 재물이 내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하자, 관인이 곧 말하기를, ‘그렇다, 네 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말하기를, ‘오음도 또한 그러하여서 행위자와 받는 자가 같거나 행위자와 받는 자가 다르다’라고 합니다.” <!--[endif]--> 19.14. “그대가 생각하기를 ‘오음이 업을 지으면 이루고 나서 곧 지나간다. 이 몸은 있어도 업은 의지할 바가 없다. 업이 의지함이 없다면 곧 이것은 업이 없는 것이다. 이 몸을 버리고나면 어떻게 과보를 얻을 것인가?’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과거의 업은 체(體)를 기다리고 때(時)를 기다립니다. 비유하자면, 귤 씨는 귤로 인하여 생기고 신맛은 달아 집니다. 사람이 귤을 바라고 이 씨를 심으면 이 씨와 뿌리, 줄기, 잎, 꽃, 덜 익은 과일은 모두 시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과실이 익어야 신 맛이 납니다. 이와 같이 신 맛은 본래 없는 것이 지금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과거 본과(本果)의 인연입니다. <!--[endif]--> 몸, 입, 뜻의 업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 업이 어디에 머무느냐면, 이 업은 과거세(過去世) 가운데에 머물었다가 때(時)를 기다리고 기(器)를 기다려서 과보를 받습니다. 마치 사람이 약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약은 비록 없어졌지만 때가 되면 건강과 낯빛이 좋아지는 것처럼 몸, 입, 뜻의 업도 역시 이와 같아서 비록 지나가서 없어졌어도 때가 되면 곧 받습니다. 비유하건대, 어린아이가 처음 배울 때에는 생각 생각에 없어져서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년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과거의 업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머무는 바가 없어도 때가 되면 저절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음작(陰作)은 음수(陰受)가 아니라고도 하고 또한 음수가 아니라고도 하지 못합니다. 이 일에 명확히 통달하면 이 사람은 곧 무상과(無上果)를 얻을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