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가는 길
박 종 성
일요일 새벽, 정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지난 해 장가 간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대하던 옥동자가 태어났다는 희소식!
우리 부부는 첫 차에 몸을 실었다. 진작, 고추라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출산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성한 가을 들판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지날 때였다. 간헐적으로 미세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 세상에 축복의 새 생명으로 태어난 손자를 맞이하러 가는 길에,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천안 종합터미널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몸의 균형 감각이 떨어지고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다. 내심,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들었다.
아들을 만나 축하를 해주고, 고통을 이겨내면서 대를 잇게 해준 대견스런 며늘아기에게 치하와 격려를 보냈다. 이어서, 사돈네 식구들을 대하면서 축하 인사와 덕담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양가 일행의 기대를 한껏 모으는 신생아실로 올라갔다. 대형 유리창 너머로 강보에 싸여있는 피붙이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을 찾아오는 길이 그리 편치 않고 힘들었던지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긴 여정을 마치고나서, 아늑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리라. 하늘이 내린 신비롭고 경이로운 축복에 감사할 뿐이다. 바람이라면, 이 살기 좋은 세상에서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그날 밤 늦게 춘천에 도착, 이튿날 몸의 이상을 알아보기 위해 동네 병원을 찾아갔다. 종합병원에 갈까 생각도 해 보았는데 그런 데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게 될 것 같아 가까운 병원부터 들려보기로 했다. 또 한 가지, 어느 진료 과를 선택할 것인지 의아했다. 내과, 이비인후과, 신경외과 등이 떠올랐다. 생각 끝에, 우선 심혈관계에 이상이 없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내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혈압을 체크하고 증상을 물어본 후, 걸음걸이와 눈동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더니 대뜸 달팽이관에 이상이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 약을 처방해 주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달팽이관이라면 이비인후과 소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내 설명을 들은 후 의사는 신경외과에서 다루어야 할 병이라 했다. 결국, 신경외과에서 두 세 가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검사결과를 살펴보더니 심상치 않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급기야, 정밀사진을 찍어보아야 알겠다며 종합병원에 가서 CT(컴퓨터 단층촬영) 검사를 받아 오라며 소견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 요지는 뇌졸중이 의심되어 검사를 의뢰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뇌졸중이 나에게 찾아오는가 싶었다. 종합병원에서 CT촬영을 한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면서 상념에 잠겼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미세한 신체 부위의 영향으로 육중한 몸뚱이가 맥도 못 추고 주저앉게 된다는 사실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기력을 잃게 되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일거에 소멸시킨다. 가족이며 친지를 비롯한 소중한 인연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과 희망찬 미래도 없어지고 우주 만물이 자취를 감춘다.
한 참 기다린 끝에 CT검사 결과가 담긴 CD 한 장을 받아들고 신경외과로 향했다. 컴퓨터를 통해 뇌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의사가 말문을 열었다. 뇌졸중 증세는 없고 귀에 이상이 있음을 진단하였다. 그렇다면, 이상 증후의 원인은 무엇인지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의사의 대답은 ‘이석증’이라 했다. 귀속에 있는 이석(돌의 일종)이 떨어져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특별한 원인이라기보다는 퇴행성 질병이라고 덧붙였다.
죽음으로 가는 길(중병)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홀가분했다. 거기에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 간혹 약간의 음주는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