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메 계시온지 보고픈 어머님은 얼마나~”
1966년 영화 <지평선은 말이 없다> 주제곡으로 탄생
독립투사 아들 중국 상해에서 복수극 펼치는 내용
(1절)
어디메 계시 온지 보고픈 어머님은
얼마나 멀고먼지 가고픈 내 고향은
언제나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 모습
그리워 불러보는 이름이건만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2절)
드넓은 이 세상에 외로운 우리 남매
만나자 헤어지는 뼈저린 슬픈 운명
차거운 이국땅에 쓰러져간 오빠를
가슴이 터지도록 불러보아도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대중가요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애잔한 느낌을 주는 노래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비단결 같은 미성(美聲)이 노래의 감칠맛을 더해 준다. 낭랑하고 애틋한 음색에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노랫말이 왠지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인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4분의 2박자 트로트풍이다. 비교적 따라 부르기가 쉽고 한국민들 정서를 건드리는 데 자주 등장하는 고향, 어머니, 남매 등 가족 얘기가 가사 중간 중간 나온다.
이 노래 역시 다른 영화주제가들처럼 영화가 먼저 나온 뒤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66년 같은 제목의 영화 주제가로 태어난 것이다. 주동운 각본, 이신명 감독이 만든 영화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이미자 노래와 함께 인기를 끈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음악은 유명한 음악인 김용환 씨가 맡았다. 그밖에도 김석훈, 이예춘, 도금봉, 강미애, 김희갑, 김칠성 등의 배우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 인기를 모았다.
독립군의 활약상을 그린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을 무대로 한 활극이다. 주인공은 그 때 인기배우였던 장동휘 씨. 그는 그 무렵 의리 있고 박진감 넘치는 배역으로 영화에서 활동이 잦았던 연예인으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극중에서 독립투사 아들로 나온다. 독립투사 아버지 뒤를 따라서 중국 상해로 간 그는 조선사나이로 배신자를 찾아 나선다. 아버지가 한 동료의 배신으로 일본 관헌에 붙잡혀 총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그는 와신상담하면서 배신자를 찾아내 복수전을 펼친다. 아버지의 한을 푼 뒤 그는 꿈에도 잊지 못했던 형제들과도 감격적으로 만나 눈물을 쏟는다.
그런 가운데 오빠를 걱정하며 기다리다 지친 여동생의 눈물어린 얼굴, 독립운동을 하는 주인공이 만주벌판을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 압권이다.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관객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서울 국도극장, 부산 대영극장 등지에서 영화가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하자 노래도 덩달아 히트했다. 노래가 히트하자 배호가 리바이벌해서 부르는 등 다른 남녀 가수들의 취입이 잇따르기도 했다. 영화, 노래가 동시에 뜬 것이다.
영화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들도 꽤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많은 얘기를 남긴 게 영화촬영지다. 영화 속의 중국 대륙은 국내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한강 백사장과 광나루 모래판을 대륙의 평원으로 설정한 것이다. 화면을 자세히 보면 어색하고 엉성한 분위기가 나지만 영화 속에 빠져드는 관객들은 모르고 그냥 넘기게 된다. 하지만 장면들을 꼼꼼히 보면 촬영지가 국내라는 것을 단번에 알게 된다. 격세지감이 있는 대목이다.
영화와 주제가를 만든 사람에 대한 얘기들도 재미난다. 영화감독 이신명은 그 무렵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 만들었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영화주제가가 방송금지곡으로 묶이는 등 <지평선은 말이 없다> 만큼 흥행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백영호가 작곡한 노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란 방송윤리위원회 판정에 따라 전파를 탈 수 없었다.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김용환 씨도 화제의 인물이다. 1950년대 영화음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이만흥 감독이 제작한 <원한의 성> <결혼진단>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에서도 음악을 맡았다. 불륜을 소재로 해 물의를 일으켰던 <자유부인>(1956년) 영화음악도 그의 손을 거쳤다.
한편 영화 <지평선은 말이 없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장동휘 씨는 2005년 4월 2일 오후 청주 자택 부근 참사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5세 나이로 세상을 뜬 고인은 고관절 수술을 받고 합병증 등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1957년 영화 <아리랑>으로 데뷔, 1995년 <엄마와 별과 말미잘>에 이르기까지 약 5백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선이 굵은 성격파 연기를 선보였다. 1971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대전장>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12년의 공백 끝에 컴백, 75세 나이에 윤정희와 찍은 문예영화 <만무방>(1994년)으로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 이미자 씨는 1941년 서울 한남동 태생으로 지금도 무대에 서며 현역으로 뛰고 있다. 1990년 기네스북에 오른 인물로 그 때까지 내놓은 음반은 5백 60장, 발표 곡수는 2천 69곡. 그 이후 것까지 더하면 현재 6백여 장의 음반과 2천 1백여 발표곡에 이른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내고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노래 중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아씨> <여자의 일생> 등 주옥같은 곡들이 수두룩하다. ‘살아 있는 트로트 역사’란 찬사를 받을 정도로 50년 가까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절제된 선율로 격동의 세월, 힘든 삶을 살아온 민초들에게 안식을 찾게 했다. 가요계 사람들은 ‘서민들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 상처받은 가슴을 어루만지는 데 청춘을 바친 가수다’, ‘가요황제로 불린 남인수와 함께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가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1998년 조선일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100인의 여성(1985년 한국일보)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물 베스트 10에 선정된 것은 한 번에 이뤄진 게 아니다. 벽돌을 쌓듯 그의 꾸준한 노력과 인생의 고비들을 이겨내며 얻은 영광의 결과물인 것이다.
왕 성 상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등록 제865호)
·wss4044@hanmail.net/011-238-4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