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實學記
- 다산연구소 2012 실학기행에서
양백산인 박 희 용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지구에 아무리 생물이 많아도 사람이 없으면 문화가 없는 법, 자연이 아무리 무궁무진하여도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법, 우리들이 사는 오늘을 위해 문화와 의미를 퇴적해 준 많은 어제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사람 다섯 -성호 이익, 반계 유형원,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 다산 정약용-을 만나러 2012년 9월 7일 새벽 2시 18분 안동 발 청량리 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다.
요즈음 한창 공부하고 있는 한국유학사의 뒤끝에서 만나는 씁쓸한 망국의 원인으로서의 성리학을 어떻게 변명할까.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상과 종교를 깊든 얕든 섭렵해 왔는데, 현재 관점에서 볼 적엔 그래도 성리학이 가장 합리적인 이치가 들어있어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망국의 원인으로 지탄을 받다니,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유학과 성리학은 한 몸일까 두 몸일까, 성리학과 주자학은 한 몸일까 두 몸일까. 실학이 성리학적인 공리공론에 반대하고 실사구시 이용후생을 주장하며 일어난 새 학문이라는데, 과연 성리학이 공리공론이고 실학이 해결의 묘약이었을까. 개화기 그 격랑 속에서도 뚜렷이 대립한 개화논리와 수구논리의 시작과 끝은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이 명분이고 실학이 실리라면, 그 둘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멋진 사상을 창출할 수가 있지 않을까.
몇 년 전부터 신청했으나 번번이 탈락하다가 이번엔 운 좋게 선발되어 참가하는 다산연구소 주최의 ‘2012 실학기행’에서 반계, 성호, 다산이라는 세 분 대표적인 실학자들이 살았던 공간을 직접 답사함으로써 책에서만 읽은 실학사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기를 체감할 수 있으리라. 간고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고민하는 동지들과 3일 동안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할 즐거움 등 등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켰다 지웠다하며 역사의 새벽을 통과하여 6시에 청량리 역에 도착하다.
잠이 남은 얼굴로 이른 아침 길을 오가는 서울시민들의 부지런한 모습에서 오늘 하루를 여는 견고한 의지를 읽는다. 작게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지만 크게 보면 저 삶들이 모여 서울의 삶을 이루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삶을 이루는 것, 싱싱한 얼굴로 아침을 헤치며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서울터미널 앞 보도에 ‘2012 실학기행’ 깃발이 아침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떼를 이루자 안내자를 따라 일행 88명이 관광버스 두 대에 탔다. 다산연구소에서 주최하고 경기도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2박 3일 간의 실학기행이 시작 된다.
정각 8시에 출발, 한강변을 따라 동으로 40분 남짓 달려 팔당댐이 훤히 보이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 소재 실학박물관에 도착하여 발대식을 갖고 생가 뒷산에 있는 다산 선생의 묘소에서 고유례를 올렸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1762년 6월 16일에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4남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 15세까지 여기서 살다가 호조좌랑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이듬해인 16세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고 “꿈 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라고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항상 말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아 평생토록 추구할 학문의 방향을 대략이나마 정하였다.
이후 28세인 1789년에 과거 급제를 하고 벼슬살이를 계속하다가 39세인 1800년에 24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40세인 1801년부터 시작된 귀양살이는 장장 1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57세인 1818년에야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생 18년 동안 학문을 결집하고는 1836년 2월 22일에 75세로 생을 마쳤다.
반계 유형원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실학도 18세기에 들어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로 발전하면서 극성하다가 19세기 초에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탄압으로 실사구시파로 좁혀지면서 쇠락하였다. 사실 다산도 1836년 서거 후 백 년 동안 역사의 들판에 묻혀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일제식민지 시대에 위당 정인보가 ‘장차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조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사상은 무엇일까?’라는 의문 끝에 찾은 인물이 다산으로서, 재조명하기 시작하여 ‘실학’이란 명칭을 붙임으로서 조선 후기 일군의 실학자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위당 이후 반세기 뒤인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후학들에 의해 다산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나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다가 비로소 2009년에 실학박물관이 세워져 다산학 연구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산 이후 백년 뒤의 재조명, 위당 이후 백년 뒤의 박물관 설립. 실학이 약 200년 동안의 생명력을 가졌고, 묻혀있던 실학이 200년 만에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이제 연구가 더욱 심화되고 일반화가 널리 전파되어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고자한 실학자들의 숭고한 뜻이 세세년년 꾸준히 이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10시에 마재에서 출발하여 초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경기도의 풍광을 보며 한 시간 남짓 달려 11시에 수원화성에 도착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명으로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락(1793)』을 지침서로 하여,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징용대장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2년 9개월만인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는데, 석축인 성의 둘레는 5,744m이며 면적은 130ha로 평산성의 형태이며 문루 4개소 등 41개의 시설물을 갖고 있으며,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웅장한 규모의 수원화성을 보며 내내 떠오른 생각은 ‘그 당시에 국력을 기울여 저 성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였다. 높고 견고한 성벽을 한 산성이 아니라 낮고 긴 성벽을 한 평산성이라서 북방의 만주족과 남방의 왜족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미흡해 보였다. 1975년경에 복원했다는데, 축성 때부터인지 복원 때 오류인지 군사들이 서서 활과 총을 쏘기에는 성곽이 높고, 총구멍이 작게 수평으로 나 있어 성 아래에서 달려오거나 기어오르는 적을 보기도 어렵고 사격하기도 어려웠다. 구조와 시설들이 이치에 안 맞고 실전에서도 이용하기가 불편한 것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방어 목적으로 만든 성이라고 보기에는 시설물들이 지나치게 번화한 편으로, 기득권들이 똬리 틀고 있는 한양을 떠나 새로운 왕도 수원화성에서 왕권을 새롭게 강화하자는 천도의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외적 방어가 목적이 아니라 천도가 목적이었다면 완공 즉시 천도를 단행했어야 했는데, 4년 동안이나 미그적대다가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천도라는 목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39세로 한창 팔팔한 정조가 갑자기 죽은 까닭 중의 하나가 천도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고한 기득권의 벽 앞에서 최후의 왕권은 부서질 수밖에 없었고, 이후 1800년부터 1910년까지 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한 세기 동안이라는 왕권 추락 시대 끝에 망국-식민지라는 그물 속에 조선의 강산과 민인들이 고스란히 떨어지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의 시대부터 시작된 왕권과 신권의 힘겨루기. 조선 전반기까지는 왕족이 강건하여 사대부들의 권력 나눠주기 요구를 억누를 수 있었으나, 중기부터는 심신이 미약한 왕손들이 왕좌에 오르면서 사대부들의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나중에는 영조와 정조 같은 절대 군주조차 사대부들의 의논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신권이 강화되었다.
시대가 갈수록 커지는 국가 규모를 왕 한 사람의 판단과 조치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러므로 정치 발전사 면에서 보면 신권이 강화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러나 왕권과 신권이 총체적 국가경영의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시대마다 어느 한 쪽의 요구에 따라 기울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문예부흥책이 조선의 미래를 통찰한 대국적 견지에서의 정책이 아니라 왕권 강화라는 유일 목표를 향한 어용 정책인 것도 문제였지만, 넓고 깊은 식견으로 조선의 미래를 통찰하지 않고 일신과 가문, 당파의 안위와 부귀만을 탐한 사대부 계층의 의식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부과되었다. 당대의 백성들도 고초를 겪었지만 그들의 후손들 역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나라를 망하도록 한 왕권과 신권은 식민지 시대에도 왜왕으로부터 왕족은 이왕가로, 사대부들은 귀족으로 훈작을 받아서 기득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이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국제적인 유명세를 타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지만, 꼭 한 세기 100년 뒤에는 나라가 망할 정도로 이미 국력이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에 과연 저렇도록 엄청난 토목 공사를 일으켰어야 했을까? 비록 후세에서 말하기는 18세기 영-정조의 100년 시대 동안이 세종 대를 이어 두 번째의 문예부흥기라 하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칭송일 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속내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를 명분으로 내세워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저렇도록 엄청난 토목공사를 벌인 것은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수원화성 축성으로 국력을 탕진한 여파에다가 어린 순조의 승계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급경사를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당파를 떠나 반대 의견을 상소하는 관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오늘날 냉철한 눈으로 수원화성 이후의 역사 전개를 살펴보면, 절대 왕권의 힘이랄까 정조의 고집이랄까, 그러한 의견들이 꺾임으로써 조선은 확실히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유명한 문화유적이지만 그 당시에는 국운이 걸림만큼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였을까. 경제적으로도 허리가 부러질 정도의 큰 짐이었지만 정치적으로도 얼마나 분란이 많았을까. 두 세기가 지난 지금도 수원화성 축조가 무리였다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진데, 당대에는 얼마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반대하였을까. 왕권 강화를 그런 방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통성을 확보한 연후에 시행하였더라면 오히려 왕권과 나라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수원화성을 한바퀴 도는 동안 내내 들었다.
점심으로 경기도민께서 사 주신 갈비탕 한 그릇 잘 먹고 오후 1시 반에 수원을 떠나 안산으로 가면서, 수원화성을 둘러싼 왕권과 신권의 힘겨루기에서 패자는 그들 양쪽이 아니라 전혀 힘겨루기에 관계하지 않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붉게 떨렸다.
성벽을 이룬 화강암 한 개에는 府使 金 머시기 , 僉使 金 머시기 , 閑良 金 머시기, 石手 朴尙吉 등 네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벼슬아치들의 이름은 깎여져 읽을 수 없었으나 석수의 이름은 읽을 수 있었다. 누가 깎았는지 몰라도, 거들먹대는 감독자들은 밉지만 부역 나온 백성들과 함께 땀 흘리며 일한 석수의 이름 삭자만은 차마 지워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수원화성을 세워 놓고 왕과 관료들은 흡족했겠지만, 품삯 약간을 받고 동원되어 고초를 겪은 백성들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얼마나 불평불만 하였겠는가. 2007년부터 이명박정권에 의해 자행된 4대강 사업 역시 국력을 기울인 토목사업으로, 후세에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양반의 역사는 종이에 남지만 민중의 역사는 돌덩이에 남는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공업단지인 안산이 성호 이익 선생의 터전이라니 감회가 새삼스럽다. 여든 살 평생을 이곳에 앉아 쓴 『성호사설』 속에 들어있는 실학정신이 인고의 200년 세월을 지나 비로소 구현된 현장이 바로 안산공업지역이 아닌가. 백성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한 채 머리만 굴리면 되는 공리공론과 몸만 꾸미면 되는 허례허식에 골몰하는 부패한 관료들 때문에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온 우리의 조상들의 업보를 말끔히 씻어낸 현장인 공업도시 안산, 그 중심에 성호 선생이 존재하고 있다니, 역사에는 단절이 없고 인과응보는 섭리라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공업-경제와 전통-문화가 서로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이곳 안산 모델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화 위에 서 있는 경제라야 인간의 삶이 될 수 있고, 경제위에 서 있는 문화라야 생명력이 있다. 경제는 몸이고 문화는 마음인 것, 건강은 몸과 마음 모두를 일컫는 것, 낮에는 땀 흘려 일하고 저녁에는 즐겁게 문화 활동을 하는 삶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에 이 땅의 사람들이 누려야할 최선이 아니겠는가.
잘난 인물이든 평범한 인물이든 자기의 뿌리인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면 어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예수는 자기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했지만, 우리 겨레는 대대로 자기 고장 출신의 훌륭한 인물들을 기념해오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 성호 이익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번듯한 기념관을 짓고 각종 행사를 추진하는 안산시청 공무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야말로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후세에 넘겨주는 큰일을 하는 고마운 분들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성호 선생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개략적이나마 가계와 학문, 학파 형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최영성 교수가 지은『한국유학통사』중권 제2장 <경세치용파의 성립과 사상적 기반>에 성호 이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대사헌을 지낸 이하진의 아들로 1681년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난 星湖 李瀷은 부친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안산의 첨성촌으로 돌아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25세 때 증광시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 진사였던 중형 이잠이 희빈 장씨를 두둔하고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장살 당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고는 이후로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단념한 뒤 평생을 임하에 묻혀 독서와 저술에 정진하였다.
이황의 학덕을 추앙하여 ‘제자의 열에 들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歎不在弟子之列)’거나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함을 탄식한다(歎不與同時)’라 할 정도로 깊이 사숙하였다. 한편으로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은 이익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개혁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익 또한 그들을 가장 시무에 밝은 학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평생토록 안산 첨성리를 떠나지 않고 학문이란 모름 지기 실제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야 한다면서 자신의 높은 식견과 넓은 포부를 저술로 남기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經史子集은 물론 천문, 지리, 산율, 음양, 의약, 복서 및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한 서양 학술이나 천주교에 대해서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학문 범위가 넓었는데, 이 모두가 한결같이 ‘경세치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어 학해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소남 윤동규, 순암 안정복, 하빈 신후담, 녹암 권철신, 등이 저명하였다. 특히 집안에서도 대를 이어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아들인 맹휴를 비롯하여 병휴, 용휴, 그리고 손항인 가환, 구환, 삼환, 중환 등은 모두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었다.
유형원에서 발원한 실학의 학풍이 그에 이르러 강하의 형세를 이루어 실학의 학파적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강하를 이룬 이익의 실학은 다시 경학, 사학, 문학, 지리학, 산학 등 여러 지류로 분화, 실학의 각 분야에 걸쳐 전문 학자를 배출함으로써 한층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경서를 궁구함은 장차 치용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해석하면서 (그 목적을) 천하만사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저 책을 읽는 데 능한 것뿐이다”라고 하면서 경전에서 얻은 지식은 구체적이거나 활용적이어야 한다고 하여 ‘窮經致用 ’을 제창하였다.
한편, 그는 성리학에서 이황의 주리철학을 계승하여 퇴계학을 조술하고 선양하는 데 힘써 『道東錄(李子粹語)』, 『이선생예설』, 『四七新編』 등의 저술을 남겼다. 다만 기성의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준신하는 학문 태도가 아니라, 회의를 통한 합리적 인식과 객관적 실증정신을 존중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그의 저술 전반에 흐르는 기조라 할 것이다.
이익은 종래의 주자학적 학문, 사상 체계를 비판적으로 계승함은 물론, 유교의 근본이념으로 되돌아가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현실을 비판, 검토함으로써, 각 분야에서 바른 정치에 의한 합리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기초적인 작업이 바로 유교경전을 재검토, 재해석하기 위한 『諸經疾書』이고, 이에서 논한 유교의 근본이념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그 폐단과 구제책을 체계적으로 논하여 사회 전반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잡저』, 『星湖僿說』, 『藿憂錄』의 3부작이다.
장황하지만 『한국유학통사』를 더 인용해보자.
「그는 붕당에 대하여 양반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데도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쟁투를 벌이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 하여, 정치, 사회적인 배경과 정세의 분석을 통해 당쟁의 근본 원인을 진단하려는 현실관을 보였다.
또한 “왕도정치는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결과는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재산의 빈부가 균등하지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서로 같지 아니하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토지의 균등한 분배가 곧 왕조정치의 지름길임을 역설하면서 양반 지배층의 토지겸병을 비판하고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폐해를 강조하고 화폐의 유통과 상업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실학적 사고의 언저리에는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이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의식을 확대하고 심화시켜 종래의 정주학적 체계에서 일정하게 탈피할 수 있었으며, 화이관도 일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그의 새로운 사상은 주로 지식계몽에 그쳤고 과학실천과 결부되지 못하였으며, 철학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지 못한 한계성이 있다.」
따스한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에 포만한 몸으로 성호 묘소와 성호기념관을 거닐며, 유물 하나하나를 볼 적마다 문득문득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먼저 성호 가계는 생물적으로 우수한 혈통을 가졌다. 증조부 이상의(1560~1624)는 성호 이익의 조부인 지안 등 모두 7명의 아들을 두었다. 지안의 외동아들인 하진(1628~1682)은 해, 잠, 서, 침, 익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아래도 유수의 학자들이 대를 이었는데, 하진의 직계로 200년 동안 무려 21명의 유명 학자들이 태어나 일가학림을 이루어 이 땅 조선의 삶과 문화를 풍성하게 했다.
또한 성호가 오늘날 실학의 저수지로 일컬어질 수 있는 학문의 바탕을 반계로부터 이었는데, 반계는 아버지 유흠이 이지완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외삼촌이 된 이원진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원진은 성호의 종조부인 이지완의 아들로서 성호에게는 당숙이 된다. 이렇게 연비가 있으니 반계 사후 8년 뒤에 태어난 성호가 장성하여서 당숙 댁에 출입하면서 알게 된 반계의 저술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반계의 학문을 자양으로 하여서 한층 더 발전한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일찍이 실학에 눈뜰 수 있었던 까닭도 1777년 16세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성호가 서거한지 14년 뒤인데 아직 문집이 간행되지 않고 유고 형태로 가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함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보다 여섯 살 위인 매형 이승훈(1756~1801)이 성호의 從孫인 이가환(1742~1801)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매형을 따라 성호 문중에 드나들면서 성호의 저술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형수의 아우인 이벽(1754~1786)과 4촌 매제 황사영(1775~1801) 등과 어울리면서 서학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세에 성호좌파라 불리는 이 사람들 모두 안타깝게도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혈연을 바탕으로 연결 되어 성호학문을 중심으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계, 성호, 다산 세 사람은 혈연으로는 친인척, 지역으로는 경기, 당론으로는 남인, 성리학으로는 주리론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더 큰 공통점은 과거에 급제했든 안했든, 자의든 타의든, 일찍이 환로의 쓴맛을 깊이 보고 인생의 중년기에 20년 가까운 시간 또는 평생을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산이 사숙 스승인 반계, 성호 두 사람과 다른 점은 서학에 깊이 물들어 천주교 신앙을 이해할 경지까지 나간 점이다.
반계와 성호 모두 서학에 대하여 일정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물론 학문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을 함께 보았겠지만 학문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세대 뒤에는 종교적인 면에 집착하는 성호좌파가 형성되었으나 반유교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킴으로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어 실학풍이 쇠잔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실학이 시대적 조명을 받고 그 중심에 다산학이 존재하고 있다. 남북의 많은 지식인들이 20세기에 겪은 민족적 고난을 21세기에 해결할 수 있는 사상으로 실학을 꼽는데, 그 중에서도 반계-이익-다산으로 이어지는 학문을 정통으로 치고 있다. 천주교까지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다산이 속했던 성호좌파의 학풍이 역시 역사적으로 정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대로 ‘이황의 학덕을 추앙하여 ‘제자의 열에 들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歎不在弟子之列)’거나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함을 탄식한다(歎不與同時)’라 할 정도로 이황을 존경한 점에서 정신적인 면에서는 이황의 주기론, 사칠론, 수양론을 수용하고, 학문적인 면에서는 이황의 학문하는 태도와 교육하는 태도를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은 이익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개혁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익 또한 그들을 가장 시무에 밝은 학자로 높이 평가하였다.’라는 점에서 정신적 면에서의 논리와는 별도로 현실적 실천면에서는 타당한 사상을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호가 큰 학해를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앞에서 인용한대로 ‘다만 기성의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준신하는 학문 태도가 아니라, 회의를 통한 합리적 인식과 객관적 실증정신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성호 이전이나 이후에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명멸하였는가. 성호가 살았던 당대뿐만 아니라 이후에 존재했던 많은 학자들이 ‘맹목적 준신’에 만족하였으나 성호는 ‘종래의 주자학적 학문, 사상 체계를 비판적으로 계승함은 물론, 유교의 근본이념으로 되돌아가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현실을 비판, 검토함으로써’ 학문적 지평을 넓혔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서 바른 정치에 의한 합리적인 개혁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조선 후기의 학해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창의성은 학문의 샘물이다. 샘물 없는 학문은 결국 말라 죽는다. 가끔씩 비가 내려도 겨우 숨 쉬거나 이미 죽은 학문이다. 비판적 창의성이 계속하여 보태어짐으로써 학문은 생명력을 유지한다. 고인 물은 반드시 부패하듯이 흐르지 않는 학문은 반드시 부패한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야 하듯이 학문의 본질인 정신도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
그러나 지난 학문사를 되돌아 살펴보면, 이미 비판적 창의성이 고갈되어 수원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감춤 용 보자기를 자꾸 덧씌우는 작태가 많았음을 볼 수 있다. 보자기를 걷어내고 진상을 직시하자는 주장들을 가볍게는 학문적 왕따로, 무겁게는 사문난적으로 몰아 인멸시키려는 모해가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부유들의 학문하는 자세에 반하여 반계, 성호, 다산의 학문하는 자세가 올발랐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배척당하여 쓸쓸했으나 오늘날에는 지극한 존숭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학문의 지평을 멀리 보았다. 부유들이 보는 학문은 자기 집 마당이었으나 그들은 금수강산 전부를 보았다.
18세기 봉건조선의 한갓진 땅 안산 첨성리에서 팔십 평생을 살다간 성호 이익. 경세제민을 위한 많은 방책을 제시하였는데, 토지제도의 중요성을 직시하여 ‘양반 지배층의 토지겸병을 비판하고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지만 조선의 좁은 토지는 늘어나는 인구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상업, 공업, 어업 등의 산업이 발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화폐에 대하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폐해를 강조하고 화폐의 유통과 상업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은 옥에 티가 아닐 수 없다.
당시를 살던 지식인이라면 공통적으로 느꼈을 사회적 위기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기 위하여 모두들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조선은 망하고 말았다. 시대에 맞춰서 수입된 서학 지식이 종교적인 면으로 흐르지 않고 산업적인 면으로 흘렀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덜미를 꽉 틀어잡고 있던 봉건논리들, 왕조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던 지배층의 인식, 모두 역사의 죄인이다.
오후 4시에 안산에서 출발하여 초가을 햇살 아래 잘 익어가고 있는 경기도와 충청남도, 전라북도를 아울러 말하는 기호지방의 벼논 사이와 서해안고속도로를 3시간 동안 달리며 2호차에 탄 일행 45명은 한사람씩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를 했다.
모두가 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이라면 몇 시간이고 말 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분들이지만 자기가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은 1~2분 남짓,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기행 참여 소감, 직업, 사상 등을 압축하여 말하는 걸 보고, ‘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구나.’, ‘나 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구나.’하는 친밀감이 서서히 다가왔다. 사는 곳과 사는 일, 생김새와 성미는 다르지만 실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뜻 이번 실학기행에 참여하여 현재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고 있으니 사흘 도반이 아니겠는가.
모두 의미 있는 자기소개를 하였으나, 실학이 발전하려면 실학과 실용주의 철학의 접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구 대명학회 여욱동 님, 유배문화 연구사인 성만문화원 윤종준 님, 아무 생각 없이 개 같이 살아온 몸을 성찰하는 기회를 갖겠다는 한국IBM 이승재 님, 실학 발생의 시대적 요인과 실학 실패의 대안이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이종오 님 등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특히 경기도경찰청 소속인 8명의 경찰관들이 이번 실학기행을 함께 하게 되니,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 정신이 비로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기뻤다. 봉건국가의 흥망성쇠는 한 왕에 달렸지만, 민주국가의 흥망성쇠는 공무원들에게 달렸다. 국민들도 현명해야지만 국가의 근간인 공무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야만 나라가 평화롭다.
늦은 오후 전라남도 부안군 우반동 뒤 변산반도 기슭을 걸어올라 반계 유형원 선생(1622~1673)이 32세부터 52세까지 20년 동안 머물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현장인 반계서당을 찾았다. 학자 한 사람이 세상을 살다 가면 남는 것은 책과 서재뿐이다. 책은 필사나 인쇄 기술을 통해 오래 가지만 서재는 불과 수십 년, 기껏해야 일백 년 만에 무너지고 만다. 남는 것은 옛 터 뿐, 후세인들이 기려서 세운 관광용 서재만 덩그렇다. 그러나 다행히 반계 선생이 마시던 샘물만은 원형 그대로였다. 지금이야 사용하지 않으므로 개구리들만 풍덩거리지만 그 당시에는 반계 선생이 저술을 하다 잠시 나와 이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마시고는 저 멀리 부안 바다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였으리라.
반계의 일대기를 보면 일년 내내 이곳 우반동에만 칩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방안에 앉아서 책만 파는 궁벽한 학자가 아니라, 세상인심과 백성살이 형편을 관찰하기 위하여 온데 다 돌아 다닌 실천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반계는 서울 태생으로 거기서 32세까지 살아 서울 돌아가는 형편에 훤했으며, 22세 때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 유람, 27세에 경상도 일대 유람, 29세 때 충청도 일대 유람, 30세 때 금강산 우람, 38세 때 호남지방 여행, 40세 때 영남지방 답사 등을 하였는데, 종합하면 조선 팔도를 전부 밟은 것이다. 이러한 직접 체험을 통해 경험과 식견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고 깊어지게 되어 후세에 실학의 비조라고 칭송받는 역작인 『반계수록』을 저술할 수 있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책에서만 보던 실학을 지접 체험하기 위하여 이번 실학기행길에 나선 것이다.
학자에게 있어 젊은 시절의 다양한 체험은 학문을 한층 풍성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책을 통해 이론만을 배운 학자는 자기가 배운 이론에 집착하여 깊이 있게 들어가는 면은 장점이나 다른 이론은 배격하는 습성이 있는 면은 단점이다.
화담이 생의 대부분을 화담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깊이는 무궁하나 현묘에 빠지며, 퇴계가 안동 도산과 한양을 축으로 하여 오가는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원칙성은 뚜렷하나 융통성이 부족하며, 율곡이 젊은 시절에 강릉과 한양을 오가며 견문을 쌓고 한 때 금강산에서 불교학에 심취하는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기론을 바탕으로 한 변화성을 중시할 수 있었다.
이번 실학기행의 안내서인 『실학기행 2012』에서 앞장에 있는 반계, 성호, 다산 세 사람의 초상을 보면, 성호와 다산이 단아한 학자풍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반계는 날카롭게 위로 찢어진 큰 눈과 큰 코, 튀어나온 광대뼈에 비하여 작은 입, 덥수룩한 수염을 가져 학자풍이라기보다는 호걸풍이나 실천가다운 인상을 풍긴다.
성호 이익이 한 학문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인척인 반계가 힘들여 축적한 학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 냉큼 받아먹었기 때문이요, 다산 역시 한 학문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은 16세 때에 인척인 성호의 학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일반화되기도 전에 냉큼 받아먹어서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반계의 학문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갖고, 그가 『반계수록』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체험과 노심초사하였을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의 흐름을 아는 자라면 다산을 말하기 전에 성호를, 성호를 발하기 전에 반계를 반드시 앞세워야 할 것이다.
반계 역시 이황의 학문을 근기학파의 개산조인 미수 허목으로부터 받아 이기론 면에서는 별 고민 없이 주리론을 기반으로 하였다. 많은 성리학자들이 이기 문제에 빠져서 본질론 단계에서 평생토록 허우적거리는데 비하여,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주리면 주기, 주기면 주기로 확정해 버리면 다음 단계 공부로 쉽게 나아갈 수 있다. 반면에 스승 없이 독공하거나 회의가 심한 자는 이기론 단계에서 한 평생을 보내는 수가 있다. 그래서 학문에서는 스승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대나무 매듭처럼 학문이 대를 이어 한 마디씩 성장할 수 있다.
반계, 성호, 다산 모두 퇴계를 사숙하여 리기론에서 주리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비조와 수제자들이 그러해서인지 당대나 후세의 실학자들 모두가 주리론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실학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리기론에서의 기본 명제는 ‘리는 정신이고 기는 물질이다’이다. 우리가 아는 실학의 정의는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학문’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즉 백성들의 삶에서 물질적 풍요를 도모할 수 있는 학문을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리공론’이란 허장성세의 예학, 음풍농월의 사장학, 집요하게 난해한 리기론과 인성론 등으로, 이전의 사변적 성리학의 폐습을 말한다.
그렇다면 물질은 기이기 때문에 실학이 주기론의 입장에 서야함에도 왜 정신을 강조하는 주리론의 입장에 섰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호좌파가 생기고, 리에 집착하다가 리와 천주를 동일시하는 현상이 생기고, 천주만 숭배하는 천주교도들이 많이 생기고, 끝내 조상의 위패와 제사를 없애는 자가 생기고, 봉건윤리에 대한 버릇없는 도전이 괘씸한 조정의 탄압이 생기고, 그리하여 마침내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국력이 쇠약해져서 종내에는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 글 나중에 손암 정약전에 대하여 언급할 때 하려고 했으나, 이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조선 후기사에서 서학과 천주교가 어떤 좌표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금장태 박사의 저서인 『儒敎思想의 문제들』 37p 27행에서 38p 12행까지에 다음과 같은 단락이 있다.
「유교에서는 한 인간이 죽으면 마음과 육신이 분리되고 사라져 가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 사실이요, 다른 부분에서 그 인간은 그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로 그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일부분은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놓이고 나머지 일부분은 후손의 생명을 통하여 이어져 가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자기존재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죽은 뒤에 불멸하는 것은 육신도 영혼도 아니다. 다만 육신과 영혼이 돌아가는 우주 그 자체가 영원하고 후손에로 이어가는 생명이 무궁할 수 있다. 유교적 신념에서는 한편으로 인간의 죽음이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요, 자연에로 돌아가는 것이라 확인하여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후손으로 무궁히 이어진 핏줄의 생명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살아있다는 확신이 죽음에 대한 유교적 달관의 방법이다.
이 글에 사용된 육신, 정신, 죽음, 영혼, 제사라는 낱말을 키워드로 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살펴보자.
인간은 육신과 정신의 합일체여서 그 둘 중 하나가 상실되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육신이 상실되면 기껏해야 ‘누구의 魂’으로 불리고 정신이 상실되면 하등 동물이나 살아있는 肉塊로 취급된다. 인간이 숨을 마치면 육신을 이루었던 물질들은 빠르게 분해되어 우주 속으로 환원되고 육신에 퍼져있던 신경계의 감각과 의식은 소멸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두뇌 역시 육신의 일부로서 활동을 종료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저장된 정신의 결정들, 즉 魂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하여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초기유교 등에서는 육신이 멸하여도 정신은 영혼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공간 어느 때 어디서든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유일신이자 절대적 주재자인 야훼 휘하에 모든 영혼들이 포함된다는 교리를 가지나 불교와 유교는 주재자를 인정은 하되 그 강도가 약한 편으로 영혼 하나하나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인정되고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서는 주재자의 수명은 무궁무진하나 일반영혼들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다고 보면서도 그 기간을 명시하지 않는데, 몇 대 위의 조상에 대한 제사가 없고 나의 바로 앞대의 영혼에 대한 추도식만 있으므로 바로 앞의 영혼만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주재자의 수명 역시 무궁무진하나 일반영혼들은 위로 4대손까지 약 120년간 유효하다고 여겨 정성스레 제사를 모신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주재자인 야훼를 믿는 영혼은 천당으로, 반기독교인 영혼은 지옥으로 가 머문다고 하면서도 때가 되면 부활하여 다시 사람이 된다는 영혼불멸설을 말하고, 불교 역시 공덕 덕분으로 극락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거나 죄업 때문에 지옥에 가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후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짐승이나 벌레 등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말한다. 그에 비해 유교는 부활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고 소멸을 말할 뿐이다.
물론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 부활과 윤회란 어리석은 대중들을 상대로 한 교화 차원의 도구요 방편이다. 그러나 그 도구와 방편들이 초기엔 유효했을지 몰라도 인지가 발전하여 분별력이 향상되면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종교가 자꾸 쇠퇴하면서 사회적 통제의 자리를 법과 권력에 내주게 되었다.
유교에서 제사를 인정하고 정성껏 지내는 까닭이 경험적 사실에 기반 하지 않고 영혼이 120년간 흩어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영혼이 120년간 유효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체험하거나 증명한 사례는 전무하다. 단지 인간은 육신과 정신이 함께 이루어진 존재인데, 죽으면 기의 집합체인 육신의 소멸은 확실하지만 리인 정신의 소멸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리 존중 차원에서 가상한 것이 영혼 120년 유효론인 것이다. 그릇이 깨지면 물이 새 흩어지듯 육신의 기가 흩어지면 정신의 리 역시 흩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즉 영혼이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제사논리란 가상의 것이다. 그에 따른 풍수지리설, 음택론, 조상복덕설, 감응설, 제수설 등 모두 그 가상의 논리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단지 제사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이라면 ‘부모를 통하여 조상과 연결되고 자식을 통하여 후손으로 연결되는 한 매듭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자각하게 하는 점이다. 제사를 통하여 현재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 유전적 존재로서의 자기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역사적 연결고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제사를 통하여 자신과 가족, 친척들의 심성을 순화하고 윤리도덕을 신장할 수 있으며 문중의 친목과 단결을 돈독히 하여 사회 속에서 건전한 한 부분으로 생활하게 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제사가 조상 자랑이나 행세의 방편이 되어선 안 되겠지만 훌륭한 조상에 대한 긍지와 든든한 문중에 대한 자부심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좋은 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사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제사가 복잡한 현대문명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먼저, 꼭이 영혼 120년 유효설에 근거한 4대 봉사를 강조할 것은 없다. 그것을 고수하는 가정은 그대로 계속하고, 일반의 가정들은 바로 윗대 또는 할아버지 대까지 지내는 것이 알맞다. 왜냐면 살아서 대면할 수 있는 분들이 할아버지 때까지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물론 그분들이 평소엔 하늘에서 자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횡액을 막아주고 복을 내리다가 제삿날에 자손의 집에 와 제수를 감응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해주시도록 바라는 자손들의 마음일 뿐이다.
제수 문제에 있어서도 과중한 음식 장만과 심리적 부담이 있다. 기일을 잊지 않고 추모하려다 보니 자손들이 모이게 되고, 제군들이 많다보니 음식을 많이 장만하게 되고, 음식을 많이 장만하다보니 이것저것 제상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제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제군들을 직계로 한정하고 제상에 간소하게 올리면서 제군들이 간소하게 식사하도록 하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며느리들의 과중한 심적 부담과 신체적 부담을 덜어주어서 제사가 조상 추모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제사 올리는 시간 역시 시대 상황과 제군들의 생활에 맞춰 일몰 직후로 하고 곧 이어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제사 올리는 순서도 가가예문이면서 간소하게 해야 한다.
장례 문제에 있어서도 삼일장으로 하고 부고의 범위를 친척과 지인들로 하며, 화장하여 평장으로 하고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서 후손들로 하여금 추억은 하되 매년마다 관리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얼굴을 아는 후손들이 죽은 다음에는 그 비석조차 저절로 쓰러져 묻힘으로서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또한 원에 따라 수목장이나 풍장을 할 수도 있지만 강물이나 바다에 띄우는 것은 2차 오염 때문에 하지지 말아야 한다.
제사를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 유일신이냐 가신이냐 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좁은 관점이다. 조상이 있으므로 자손이 있는 것은 인간 역시 생물인 이상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만고의 진리이므로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손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조상의 영혼이 자손을 보우해주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영혼 자체가 없으므로 도움을 받을 일이 전혀 없으니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또한 조상이 살아있을 때도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성모님’만 숭배하고, 조상이 죽어서도 당대만 추모는 하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로지 그들만 숭배하면 되는 것이지, 일반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 심지어 악마를 모시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멀게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셨을지라도 가깝게는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고 애써 키워주셨으므로 살아계신 부모님께는 효도를 다하고 죽은 부모께는 간소한 제수와 차례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인간의 도리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산 아버지보다 ‘하느님아버지’를 더 소중하게 받들고, 죽은 아버지는 내팽개치고 아득한 ‘하느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초창기에 예수가 식민지배의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가족과 이웃, 유태 민중들을 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인간의 도리를 생각한 바와 크게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개화기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통 유교사회와 충돌이 없었으나, 천주교는 17세기 초에 이 땅에 들어온 이후 18세기 말까지 약 150여 년간 잠복기를 가치는 동안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으나, 교세가 팽창한 18세기 말부터는 유교 전통사회와 크게 갈등을 일으키면서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 때까지 서학 대접을 받으며 비교적 잠잠하던 천주교가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어 조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게 된 것은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의 상례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래도 제사를 지내던 그들이 제사를 폐한 까닭은 1790년 북경에서 윤유일을 통해 보내진 질문에 대해 유교제사를 금지를 지시한 구베아 Gouvea 주교의 회답이 조선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사 문제에 대한 천주교 측의 지시가 어떠했는지 제19장 <제사문제와 유교 ․ 천주교의 이해>의 323p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면, 제사 문제에 대한 대응이 처음부터 일관되지 않고 때때로 상반되게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조선의 천주교인 역시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선 사회 역시 큰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고, 민심을 한 곳으로 모아도 감당해내지 못할 대격변의 19세기 100년 동안을 국론분열과 민심 이반의 내부투쟁으로 지새면서 국력을 갉아먹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의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을 겪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천주교가 명말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예수회의 마테오리치에 의한 補儒論 내지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공자와 조상에게 드려지는 유교전통의 제사를 신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감사와 추모로 보면서 묵인하였다. 그러나 뒤따라 예수회 내부에서도 이견이 생겨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 회에서는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비판하면서 이른바 의례문제 Quaestio de Ritibus라 일컫는 논쟁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황청도 선교단체의 상반된 주장에 휘말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제사금지령을 내렸고 1656년 3월 23일,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유교제사를 묵인하는 허용령을 내렸다. 다시 교황 클레멘스 Ⅱ세는 1704년 1월 20일, 제사에서 神位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死者의 이름만 사용할 것을 허용하였으며, 1715년 3월 19일, 더욱 강경하게 제사를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또 14세는 1715년 칙서를 재확인하여 제사금지령을 확립하는 칙서를 반포하여 100년간의 의례논쟁을 종결짓게 되었다.」
‘마테오리치에 의한 補儒論 내지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공자와 조상에게 드려지는 유교전통의 제사를 신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감사와 추모로 보면서 묵인하였다.’라는 전래 초기의 제사관이 역시 가장 원만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되면서는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가 각자 자기중심적 관점에 따라 제사를 평가함으로써 문제가 꼬이게 되고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즉 배고플 때는 무엇이든지 먹지만 포만해지면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는 것처럼 전래 초기에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발톱을 감추었다가 자리를 잡자 곧 본래의 발톱을 내밀고 제사를 금지하게 되었다. 묵인과 금지가 여러 번 되풀이 되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천주교 교리 자체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세 불리하면 적응이라는 미명 아래 숨었다가 세 유리 국면이 되면 까탈스럽게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이기적 교리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에 조선에서 벌어진 제반 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천주교 교리 자체에 있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동방 선교 조직인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있다. 이미 1742년에 제사금지령 칙서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윤유일의 문의에 답한 1790년에는 그 칙서를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구베아 주교가 좀더 현명했다면 근본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원만한 응용책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갑자기 제사를 폐하는 바람에 당한 탄압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전까지만 해도 서학에 흥미를 느껴 차츰차츰 연구하다가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자생적 조선 천주교인의 역사가 두 세기 200년 가까이 됨에도 불구하고,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 구베아 주교의 판결을 자청한 당시의 조선 천주교 지도부들에게 더 깊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학을 통해 알게 된 천주교의 교리에 공감했으면 그 가르침대로 조선의 현실에 적응하면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외국인 중국 북경교구 주교의 유권해석을 구한 것은 그간의 자주적인 천주교 교리 탐구에 대한 불신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천주교가 외부 충격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하고 알찬 성장을 계속하였더라면 천주교도들이나 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편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땅에 뿌리 내린 조선의 천주교로 충실한 조선 교구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외세인 북경 교구 산하에서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천주교도들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들 역시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 채 불구가 되고 말았다.
종교의 토착화란 근본교리를 위하여 전통을 거부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환경과 전통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 조용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영적인 평화인 이상, 어느 곳에 전래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탄압을 초래한다면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주변을 탓해선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말에 천주교인들이 당한 희생은 물론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인 면이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라보다 지적인 탐구심이 충만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서학을 묵인했는데도 가장 민감한 제사 문제를 건드리는 천주교에 대항해 유교적 가치를 수호함으로써 봉건사회를 유지하려던 조선 사대부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동양 선교에서 제사 문제가 계속 대두되자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제사금지령이 해제되고, 21세기 초에는 로마 교황청 발표로 제사문제가 해결된 것은, 제사가 꼭 동양 사회에 대한 선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유교가 지향하고 있는 조상 추모와 공경심이 집약된 것으로 재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동양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이해가 더욱 깊어진 결과가 아닐 수 없다.
神主 문제 역시 조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表物로 봐야지 거기에 무슨 조상귀신이 깃들어 있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의미부여를 안 된다. 그것은 기독교와 천주교의 십자가, 불교의 불상의 경우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신주가 십자가와 불상이 갖는 전체적 의미와는 비중이 다르다. 하지만 크게 의지하고 보살핌을 받는 유일신이나 자연이 물론 중요하지만 나를 나아주고 길러주신 조상신 역시 소중함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신주를 모시든 안 모시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작은 단위인 가정사 차원인 작은 일이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회적 차원의 큰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절대자인 유일신만이 존재할 뿐 다른 신들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무슨 작은 귀신, 큰 귀신의 위차와 우열을 따지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인간들의 하찮은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몇 십 년마다 인구가 폭증하여 현재로 약 70억이나 되는 데도 불구하고, 혼자인 하느님은 정말로 바빠서 지상의 인간 하나하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지만, 각 가정의 조상신들은 자기 후손들만 챙기고, 각 마을의 동신들은 자기 지역을 챙기고, 지구 위 나라신들은 자기 나라만 챙기면 되므로 전체적 관리자인 하느님에 비해 훨씬 인간들과 가까워 세세하게 잘 챙겨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샤머니즘의 신들 역시 자기가 맡은 나무, 바위, 골짜기, 산, 물, 집, 방, 길, 모퉁이, 바다, 못 등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자기를 숭배하는 인간들에게 보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신교의 교리대로, 유일신만이 존재하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되는 이상은 작은 귀신들이 존재할 수밖엔 없다. 유일신이 찬송가와 기도, 꽃으로 숭배 받을 때 영혼들이 그 뒤에 시립해 있으므로 함께 숭배 받는 것과 진배없다. 즉 십자가 속에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영혼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 이래 죽은 모든 영혼들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신주 속에는 조상신만이 단출하게 들어있으므로 숭배의 범위가 좁고, 십자가 속에는 하느님과 예수가 크게 들어있으므로 숭배의 범위가 광활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가정이든 교회든 대표인 십자가에 추모를 하고, 유교사회에서는 가정 단위로 자기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십자가와 신주는 크든 작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생명의 원천에 대한 고마움의 상징이다. 그렇게 하느님과 조상에 대해 경건한 정성을 표현하는 의례에 문화적 우열의 차이가 언급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이요 불경이다.
산으로 올라가기 전에 입구에서 본 안내판에 ‘반계라는 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류형원은 뛰어난 학문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야인으로만 살았으며, 농촌을 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사람을 넉넉하게 하는 데 학문의 목적을 둔 사람이었다’라는 글이 있었다. 근래에 재판으로 ‘유’가 ‘류’로 바뀌었는데, 그 때 신문에 류관순 열사의 성이 그 예로 언급되었으니 아마도 한 집안인 모양이고, 안내판을 세울 때 후손들이 ‘유형원’을 ‘류형원’으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군청에서 안내문을 만들 때 법원 판결대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사람을’이란 말은 도대체 료해가 안 된다. ‘백성들의 살림을’이 아닐까? 또 글쓴이가 ‘백성들의 삶, 백성들의 사람다운 삶’이라는 깊은 뜻을 담은 것이 아닐까? 우반동 들녘 너머 저 멀리 서해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반계서당을 하직하고 어둑살이 내리는 변산반도 기슭을 내려오며 이 산에 묻혀 한 생애를 보낸 반계 선생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해를 더하기 위해 최영성 박사의 『한국유학통사』에 수록되어 있는 반계의 생애와 학문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의 후손이다. 부친 유흠은 예문관 검열을 지낸 학자로서 인조 1년인 1623년 유몽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죽었다. 그의 집안은 본디 북인 계열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북인이 몰락하면서 남인 계열로 흡수된 듯하다.」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북인가 대부분이 멸문지화를 당하였고 겨우 28가만 살아남았다고 하나 행세를 하지 못하고 엎드려 겨우 살았다고 한다. 유형원이 평생을 학자로서 살았지만, 조상인 우의정 유관이 학자로서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름이 역사에 남고, 광해조 때 집권파였던 북인이 가진 개혁적 의지를 이어받은 핏줄이므로 학문의 방향이 순수이성 분야보다는 실천이성, 즉 경세학 분야로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성호와 다산 역시 남인 계열이긴 하나 그 뿌리는 북인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선조 때에 순수한 남인은 영남 지방 출신이었고 북인은 주로 기호 출신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학맥 가운데에서 반계-성호-다산을 잇는 학맥은 그 바탕이 북인에 근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실학, 그 중에서도 성호학맥이 집권층인 서인-노론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배척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북인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당색이 다르면 혼인도 안 하고 두루마기 고름 모양이 다를 정도로 치열한 대결 구도 속에서 당대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의 조상까지 따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같은 남인에서도 영남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들은 실학에 무관심하였고, 북인에 근원한 근기 지방의 남인들만이 실학을 개척하고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수용한 것을 보면 사색당파의 구별이 역사, 정치,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지식인들이 도덕윤리와 경세시론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는 크게 두 편, 작게 네 편으로 구분된다. 보수와 진보로 대별 되어 좌보수, 우보수, 좌진보, 우진보의 사색당파로 발전한다. 사색이 고르게 교대로 집권하면 태평성대를 유지하지만, 극우보수와 극좌진보가 집권하면 혼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극으로 쏠린 사람들의 심리는 원초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그 불안한 부분을 버티기 위해 무리수를 많이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극우나 극좌는 비워지고 다시 사색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위적으로 탕평해봐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구분된다.
역사에서 개혁성향은 젊은 사대부들이 중심이었던 동인의 것, 그 중에서 첨예한 개혁의지는 북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좌진보라고 할 수 있는 북인들이 품은 개혁성향이 인조반정으로 좌절되고, 다시 응집된 개혁의지가 실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개화파의 좌절로 이어졌다가 식민지 시대엔 애국계몽파로 이어졌다. 해방공간을 수놓았던 좌파들의 개혁운동 역시 좌절하였으나, 다시 응집된 개혁의지가 민주화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비로소 근거지를 마련한 역사의 개혁의지가 다시 단단하게 응집되어 분출하는 날, 겨레의 통합과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
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이후의 조선후반기 정치, 문화, 사회사를 보수파 서인이란 거대집단의 파벌사라고 지칭할 정도로 보수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승리자들이 정사에 남긴 많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이 가진 정당성은 취약하다. 명분의 제일로 내세운 폐비, 살제 문제는 어느 왕조 시대나 왕위 승계를 두고 빈번하게 일어난 각축으로, 부득이 왕권 강화를 위해 단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광해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임해군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의 왕권 도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다면, 광해 역시 왕자 출신이므로 그것이 반란의 명분이 될 수가 없다. 좁게 보면 왕족을 사이에 두고 사대부 계급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일 뿐이다. 또한 과도한 토목공사, 폭정, 간신들의 횡행 등의 죄목 역시 명분으로서는 무게가 가볍다.
광해시대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백성들의 안위 문제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왕세자로 분조를 맡아 동분서주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재위 15년 동안 내치로는 전후복구 사업에 힘써 국가의 틀을 다졌고 외치로는 명과 청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를 펼쳐 호란을 방지하였다. 이러한 업적만 해도 조선조든 고려조든 어느 왕 못지않게 큰일을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보수파들의 옹호를 받은 인조가 즉위한지 4년 만인 1627년의 정묘호란, 13년만인 1636년의 병자호란을 당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하고 아녀자들이 능욕당했는가. 인조의 삼전도 구고배와 신하들의 포로는 그들이 자초한 것이기에 치지도외하더라도 말이다. 반정이 없었다면 당하지 않아도 될 호란이 아니었는가.
인조의 핏줄이 왕통을 이은 조선 후기사에서 감히 어느 누구도 문책하지 못했지만, 4백 년을 지나 민주주의시대인 오늘부터는 그 당시 지배층의 잘못을 엄히 문책해야 한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숭명배청이란 명분론을 내세워 고집을 피우다가 두 번이나 호란을 초래하여 왕을 무릎 꿇게 하고 백성들을 어육이 되도록 한 죄과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잡혀가서 초지일관한 절개는 가상하지만 이미 망한 명나라를 그토록 감싸 안았던 사대주의, 이후 시대를 온통 북벌의 원한으로 들끓게 한 소중화주의 등도 문제였지만, 오랑캐 청나라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는 풍조 때문에 이미 서양 문물과 접촉하여 고도로 발달한 청의 문화와 새 학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사행길에 다녀온 일부 관료들과 재야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미 숭명배청 사상이 골수에 박힌 왕과 주류 세력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처벌당하지 않을 수 없는 본질적 구조였던 것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서 바뀐 중요한 벼슬자리가 2000 개가 넘는다고 한다. 봉건왕조 시대에 숙청당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는 것, 선조-광해 시대에 주류였던 북인세력이 겨우 28가만 살아남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많은 인사들이 처형되었겠는가. 사색당파의 1/4을 도려냈으니 국력이 1/4만큼 위축된 것, 이후 조선의 힘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북인을 중심으로 휘돌던 개혁의지가 철퇴를 맞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복지부동과 눈치 보기뿐이다. 정치와 사회를 서인들이 완전히 장악하자 학문 역시 율곡과 우암의 학맥인 기호학파가 주류가 되고, 변방의 우진보 남인들은 좌보수 쪽으로 옮겨 영남학파라는 비주류를 형성하였으며, 그리하여 그 두 학파 모두 개혁성보다는 보수성이 더욱 짙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학맥에서도 북인에 협조한 월천 조목 계열은 남인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겨우 도산서원 상덕사에 배향되어 있을 뿐일 정도로 거세되어 버렸다.
의병항쟁 지도자로 활약하여 민족의 큰 위기였던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으로 집권 주류가 된 북인들이 가졌던 개혁의지의 바탕에는 남명 조식의 실천사상이 깔려있었다. 남명의 근거지인 영남 우도 지역에 서린 개혁의지가 광해 시대에 잠깐 현실화 되었다가 역풍을 맞아 꺾였지만, 그것이 기호실학으로 부활하여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계-성호-다산이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퇴계의 주리론을 따르고 있지만, 경세론의 실천적인 면에서는 남명의 개혁의지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이 실패하였다면 우리민족사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성군은 못되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런대로 치적을 남긴 이유, 승리자들은 그를 왕자 시절의 명칭인 ‘광해군’으로 부르며 그의 치세를 폄하하지만, 역사를 똑바로 인식하는 자라면 그를 ‘광종’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굴곡진 조선 후반기사를 반듯하게 펴 후세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작업은 인조반정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인에서 흘러 노론으로, 노론에서 흘러 수구파로, 수구파에서 흘러 친일파로, 친일파에서 흘러 우보수파로 똬리 튼 거대한 세력을 정신적으로 거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인조반정은 승자들이 불러서 ‘반정’이지, 사실은 서인들이 광해와 북인을 참살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반란’이었다. 그것이 ‘전두환의 난’처럼 성공했기 때문이지 실패했으면 서인들 모두가 폐족 당하여야 할 만큼 중대한 국가적 변란이었다. ‘전두환의 난’은 그래도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대법원에서 ‘군사반란’으로 확정 판결하였기 때문에 분명히 역사적으로 정리되었지만, ‘서인의 난’은 봉건시대 내내 승자들이 꾸민 역사적 정당성으로 포장되었다. 한 왕조시대는 유한하지만 민족은 영원한 것, 수천수만 년 민족사에서 4백 년은 짧은 것이므로 시대가 바뀌었지만 이제라도 그 시대 승자들의 기록상의 시시비비를 낱낱이 밝히고,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한다. 서인들의 세상이었던 봉건시대를 누추하게 마감한 덕분에 겪은 식민지시대와 분단-전쟁시대를 겨우 극복하고 비로소 민족의 자존과 번영을 도모하기 시작한 21세기 초에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의지 가운데 하나로 ‘인조반정’을 ‘서인의 난’으로, ‘광해군’을 ‘광종’으로 호칭하는 운동이 불끈 시작되어야 한다.
「어려서 외숙인 감사 이원진과 고모부인 판서 김세렴에게 배웠을 뿐 뚜렷한 사승 없이 독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과거에 모두 실패하고는 벼슬을 단념하였으며, 33세에 가서야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처사로 지내면서 독서와 사색, 저술로 일관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약 1백 년 동안은 명성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조 46년 1770년에 왕명으로 『반계수록』이 간행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학문 범위를 보면, 정치 ․ 경제 ․ 군사 ․ 교육 ․ 사회 등 당면문제는 물론 역사 ․ 지리 ․ 언어 ․ 철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광범한 것이어서, 백과전서적 박학자라 하기에 알맞다.」
집권 서인이 장악한 과거에서 몰락 북인의 후예인 유형원이 당선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비주류 집안 출신 인재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등과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인재들은 서른 살 넘어서야 겨우 진사시 정도에 급제하여 양반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등과한 자들도 중책을 맡은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고 미관말직이나 지방직을 떠돌아 다녔다. 한 나라가 번성하려면 출신 차별 없이 모든 인재를 불러들여 모아서 능력에 맞는 자리에 배치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능력이나 도덕성은 불문하고 당색이 같은 인재만 골라 쓴 것은 국가를 쇠잔하게 하는 실책이었다.
과거 급제가 안 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형원으로서는 평생을 궁벽한 시골에서 살며 처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이 마련한 터전에 자리 잡아 독서, 사색, 저술, 여행을 주로 하는 일생을 보낸 것을 보면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계, 성호, 다산 세분이 궁핍하였다면 정좌하여 저술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배가 불러야 여유가 나오는 것, 배가 고프면 사색이나 독서, 저술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일연스님이 「包山二聖遺蹟詩」에서 ‘여린 풀뿌리와 붉은 열매로 밥통을 채우고/누에 배틀 없어도 나뭇잎으로 옷 지으니/쓸쓸한 솔바람소리 이는 험한 바위산/깊은 밤 고요히 밝은 달 바라보며 앉으니/낡은 부들자리 가로누워 아무렇게 잠들어도/꿈 속 영혼은 바깥세상 굴레를 가까이 하지 않네’라고 읊은 도성과 관기의 삶의 모습은 진리에 뜻을 둔 도인이 가질 수 있는 최저한의 상태이다. 그 이하가 되면 굶어죽고, 이 상태에서는 겨우 앉아서 사색 정도만 할 수 있지 독서나 저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사람 그늘은 있어도 나무 그늘은 없다고 한다. 큰 키 나무에 가려서 키 작은 나무들은 제대로 자랄 수 없으나 주위에 우뚝한 인물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음양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상적 인간관계에서는 그 말이 통할지 몰라도 학문 분야에서는 맞지 않다. 물론 스승을 잘 만나야 제자들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큰 나무 그늘에서자라는 작은 나무처럼 절대로 스승의 키를 넘지 못한다. 추호라도 스승의 학문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되며, 가르침과 행장을 대대로 받들어 모시며 학파를 번성케 해야만 한다.
이에 반해 조선 사상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들은 당대에 직접적인 스승이 없이 격세하여 배울만한 분들을 두루 사숙한 경우가 많다. 퇴계, 율곡, 반계, 성호, 다산의 경우가 모두 그러한 것을 보면 모름지기 큰 학문을 하려면 그늘을 벗어난 독창성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반계의 학문이 당대에 쓰이지 못하고 1백 년 동안 무명이다가 왕명에 의해 『반계수록』이 겨우 간행되고, 이후에도 성호-다산학파에만 유행한 것에 대하여 오늘날 안타까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의 정치, 학문적 환경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계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학자들이 그 당시에도 많았을 것이다.
반계-성호-다산학문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로 ‘백과전서식 박학’을 들 수 있다. 세 분 모두 거질의 문집을 남겼는데 시문도 있지만 대부분이 경세론이다. 우리가 실학기행을 하니 세분만이 실학자고 세분만이 시대와 역사를 염려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 당시에도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갖고 경세론과 쇄신론 등을 남긴 학자들이 많다. 이전 시대까지는 주로 리기론, 인성론, 수양론, 치국론 등의 유학 본래적인 분야에 대한 탐구가 많았으나, 반계가 살았던 17세기부터는 지식인 사회에서 인간과 사회, 경제와 국가를 총체적으로 보자는 관점, 즉 백과전서적 박학 흐름이 일어났다. 그 흐름이 바위처럼 짓누르는 보수 기득권의 중압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서 그렇지, 더 억센 기상으로 일어나 바위를 치밀어 싹을 틔웠다면 결코 나라가 망하는 참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려면 민심이 모여야 한다. 민심이 모이려면 지도층 인사들의 선도가 있어야 한다. 선도하는 중책을 맡은 지도층 인사들이 모이려면 바라보는 목표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목표가 여러 개, 그것도 뚜렷하지 못했다. 분명히 시대적 위기를 느끼는 점은 동일한데도 목표가 다르고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다보니 의논 단계에서 200여 년 동안이나 우왕좌왕 하다가 당한 것이 1910년의 패망이 아닌가. 고루한 수구파들이야 역사 발전에 아예 도움이 안 되니 언급할 가치가 없지만, 명색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개혁의지를 불태운 인사들끼리도 제팔 제 흔들기만 할 뿐 전체적으로 화합, 단결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문명이 들어오고 마테오리치가 정착한 명나라를 통해 단편적이지만 서구 문명이 들어 온 상태에서 성리학이 독점한 조선의 위험한 상태를 감지한 지성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미구에 닥칠 위험을 어떻게 방지하느냐에 대한 탐구가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탐구가 이론가들에게서는 주자학 고수, 주자학 개량, 주자학 반대라는 세 방향으로 구분되었고, 실천가들에게는 민란, 반란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결국 조선 후기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의 탐구가 실패하여 조선이 망하고 말았으니 그들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앞으로 도래할 위기에 대처하는 중요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번에 88명이 실학기행을 하는 대상인 반계, 성호, 다산의 학문 역시 나라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역사적 문책의 대상이 아니 될 수 없다.
또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서학과 천주교가 조선 후기역사에서 가진 빛과 그림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학 단계까지는 조정의 묵인과 지식인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종교화 단계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계속해서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서학 단계뿐만 아니라 천주교화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순수한 인재들이 희생됨으로써 국가 역량이 약화되었다.
주자학적 윤리만을 강요하는 고루한 보수주의자들에게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지만, 북경교회의 지시에 따라 부모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이 탄압의 명분을 갖도록 한 무리수를 둔 윤지충과 권상연에게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 그에 더하여, 처형당한 신자들의 원한을 갚고 극심한 탄압 속에서 고통 받는 신도들을 구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는 방법은 오로지 외세에 의존하는 것 밖에 없다는 단견으로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에게 돌아가는 역사적 책임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백서」를 읽어보면, 찬주교 신자들이야 종교가 국가보다 우위이므로 구구절절이 영혼을 울리고 황사영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당시에도 일반 관리와 경향 각지의 선비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이 반역적 내용에 격분하였고 오늘날에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종교적 편집증의 발작으로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흉서’라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다.
탄압의 단계를 넘어 박멸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도록 한 이 두 사건만 돌출하지 않았다면, 신유사옥과 이후에 벌어진 옥사와 같은 참극과 다산, 현산 두 사람의 귀양살이도 없었거나 축소되었을 것이다. 다산은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일단 배교 명분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관직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평생토록 관직에 종사하느라 학문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오늘날 칭송받는 업적인 500여 권이나 되는 저술 작업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인생과 역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결정적인 전환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이든 종교든 정치든, 모든 분야에서 극단의 모험주의자가 설치면 반드시 폐해가 생기는 법, 조선 천주교사에서는 별처럼 숭배하는 순교자들이 조선 국사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는가 하는 점에 대한 성찰이 깊어짐으로써 천주교가 이 땅에 토착화할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과 극단주의자들의 모험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극단주의자들의 모험이 결코 천주의 뜻에 부합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천주교도들이 탄압자인 조선 후기의 사대부와 선비들을 사탄시하는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묵인 내지 방치하던 조정이 갑자기 탄압으로 돌변한 것은 위의 두 사건 때문이다. 탄압할 명분과 기회를 노리던 조정에게, 지식인 사회와 백성들을 격분하도록 한 「백서」는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봉건조선을 속으로부터 무너지게 하는 위험성을 가진 천주교에 대하여 그 당시 사대부들과 선비들이 가졌을 우려와 분노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사옥과 순교에 대한 천주교의 관점이 상당 부분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악마의 세력이 아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통치에 힘썼으며, 선비들은 나라의 기강을 다잡기 위하여 필설을 다해 논설하였다. ‘천주의 은혜를 모든 조선 사람들이 입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을 침탈하여 중국 황제 치하의 한 개 변방으로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읍소한 「백서」를 보고, 분노하지 아니 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죽어야 할 조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번 실학기행에 동행한 김 여사님이 녹우당 주차장에서 하신 말씀대로 “능지처참 감이에요. 이승만이 하고 똑 같아요.”가 200여 년 지난 지금이나 그 때나, 한 없이 다가올 미래에나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보태어 “성지순례 삼아 오신 분들이 몇 되요.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 보니.”하는 말씀에서 그 시대나 지금이나 실학과 서학, 천주교가 서로 얽혀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 논리를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민족적 참극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서학과 천주교에 경사한 사람들은 대체로 양순한 인격을 가진 개혁주의자들로서 종교적 신앙을 깊이 가진 사람들도 많았지만 백성들과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여 주자학이 아닌 곳에서 해법을 찾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도 공산주의를 정권 수립의 도구로 이용한 일부 패권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건국 노선은 순수 공산주의 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국민의 80%’라는 1946년경의 여론조사 통계에서 보듯 대부분이 민족의 미래는 봉건주의나 자본주의가 아닌 순수 공산주의 노선이어야한다고 생각한 개혁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둘 다 보수주의의 까마득한 바위 절벽에 부딪혀 머리 깨져서 죽는 새떼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울린 바위 종소리는 역사에 길이 남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남긴 바위 종소리를 잔잔하게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열자고 나와 일행들 모두가 이번 실학기행 길에 나섰지 않는가.
실학 자체가 내적인 형이상학보다는 외적인 형이하학을 지향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초기 실학자들의 대부분은 주리냐 주기냐 하는 본질 문제에 오랫동안 집착하지 않고, 원리와 현상을 직접적인 관계로 보는 관점에서 주자와 퇴계의 학설인 주리론을 기반으로 하여 경국제민론을 전개한다.
성리학을 내학, 실학을 외학이라고 칭할 때,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줄기 없는 뿌리는 고사하듯 내학과 외학은 밀접한 관계, 아니 한 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다산의 오학론에서 보듯 실학이라 하면 성리학을 단연코 부정한 데서 출발한 학문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에게는 실학이 도덕적 명분을 무시하고 부화한 현실만을 추종하는 학문, 서양 귀신들의 학문인 서학과 천주교만을 집요하게 추종하는 사문난적으로 여겨졌다.
이 둘의 협곡이 자꾸 벌어짐으로써 조선후기사가 참극으로 점철된 바, 그 간격을 좁히고 메우는 작업이 진작에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 한갓 후세 글쟁이의 푸념이지 않을 수 없도록 그 당시의 역사는 실제 상황이었을 것이다. 다산이 오학론에서 반성리학을 첫째로 꼽은 것을 보면 그 당시 성리학의 말폐가 오늘날 사람들의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역시 성리학의 물을 먹고 장성하였는데도 오죽했으면 오학론을 썼겠는가. 그러나 다산의 사상 기반이 주리론인 것을 보면 성리학의 본질적인 면만은 높이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명학이나 불교 등 다른 학문이나 종교에 결정적으로 심취한 기록은 없으므로 일단 성리학자로서 출발한 실학자임은 분명하다. 다산이 성리학자이면서도 반성리학을 주장한 까닭을 천착하는 것이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 뿌리와 줄기의 관계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바인 조선 후기 학문의 난맥상과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여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 곧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실학의 비조인 반계가 기존의 성리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버렸으며, 어떻게 소화하여 후세에 남겼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에 『한국유학통사』중권 619p에서 631p까지 반계의 성리학에 대한 서술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유형원은 어려서부터 문학 ․ 군사 ․ 음양설 등은 물론 도교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공부하여 박학자로서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 세계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다만,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지나치게 사변적, 관념적인 경향으로 흘러 현실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도덕적 자기완성’, 즉 수신제가와 도덕적 수양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한 데 비해, 그는 일단 이것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장 시급한 현실문제에 비중을 두어, 정치 ․ 경제의 개혁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특히 조선 실학사상의 선하를 이루는 이이 ․ 유성룡 ․ 조헌의 학문을 높이 받들었던 점으로 볼 때, 조선 후기 실학의 체계를 수립한 그의 사상적 배경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유형원은 『書隨錄後』에서 ‘천지의 리는 만물에 구현되는 것이요, 物이 아니면 리는 구현될 바가 없어진다. 성인의 도는 만사에 행해지고 事가 아니면 도는 행해질 바가 없다’는 취지를 말하면서, 리와 물, 도와 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한 데서도 그의 학문적 견해가 드러난다.
성리학에 대한 유형원의 견해를 살펴보면, 초년에는 “기 밖에 리가 없다(氣外無理)” 또는 “리는 단지 기의 리이다(理只是氣之理)”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기론적 경향을 지녔다. 그러나 『반계수록』을 완성할 무렵에는 주리론자로서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다. 그는 리기 ․ 사단칠정 ․ 인심도심 ․ 등의 문제에 대해 선배인 구암 한백겸과 마찬가지로 퇴계 이황의 견해에 동조하였는데, 리를 實理라 강조하고 실리로써 實事에 대처하려 하였다. ‘學’으로서의 실학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반계수록』의 저술은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를 볼 때, 유형원을 비조로 한 조선 후기 실학의 사상적 출발점은 성리학을 배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도를 밝히기에 급급하였던 程朱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공리공담에 흐르기 쉬운 도덕 위주의 학풍으로부터 당면한 현실문제로 학문적 관심을 전환시킨 것이라 하겠다.」
「『반계수록』의 두드러진 특징을 들자면, 무엇보다도 중국 고대 이상국가의 상징인 『주례』를 근본으로 하여 三代之治의 이상을 본받으려 한 점이다. 즉, 성호 이익이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폐단을 단번에 씻어버리고 古制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수록』에 담긴 개혁사상은 대체로 復古 또는 尙古的 성격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17세기 중엽의 실학파, 특히 경세치용학파 학인들의 개혁사상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이 ‘복고’ 또는 ‘상고’를 구호로 내세워 사실상 개혁을 외쳤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외치는 ‘복고’의 성격은 ‘因循復古’가 결코 아니었다.
유형원은 사욕에 뿌리를 둔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천리에 바탕을 둔 제도를 구현하자고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옛 道로 복귀하는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 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本’이라 하고 법과 제도를 ‘末’이라 하여, 본만 중시하고 말을 경시하는 도학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즉 법과 제도를 도덕 ․ 윤리의 하위에 두고 이를 경시하는 도학파에 의하면, 선비란 모름지기 평소 도만 강명하고 구체적인 법과 제도 등은 단지 그 대체를 파악하는 데 그쳐야 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체와 절목이 함께 갖추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금 ‘理事不離 : 道器不離 라는 성리학의 이론에 입각하여 강조하였다. 이것은 곧, 天理의 實은 인간의 내면적 體認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와 물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장황하게 인용했지만, 위의 글 단락마다에서 나타난 반계의 생각을 하나하나 꼬집어 살펴보도록 하자.
유형원은 그의 학문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걸쳐 공부하여 박학자로서의 기질을 보여주고, 성리학 내성 부문에서는 퇴계의 주리설을, 외성 부문에서는 이이, 유성룡, 조헌의 실천설을 따른 것을 보면 사변적, 관념적인 성향보다는 구체적, 현실적인 성향이 강한 이론가였음을 알 수 있다.
‘천지의 리는 만물에 구현되는 것이요, 物이 아니면 리는 구현될 바가 없어진다. 성인의 도는 만사에 행해지고 事가 아니면 도는 행해질 바가 없다’는 말에서 리와 물, 도와 사를 연관된 것으로 보는 관점을 알 수 있지만, 반대로 리와 도의 비중을 가볍게, 물과 사의 비중을 무겁게 보는 관점도 알 수 있다. 또한, 다단다기 복잡한 리와 도가 가진 사변성과 관념성을 몰과 사라는 구체성과 현실성으로 덮어버리려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반계가 “기 밖에 리가 없다(氣外無理)” 또는 “리는 단지 기의 리이다(理只是氣之理)”라고 한 초년의 주기설을 40대에 들어서 왜 주리론자로서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는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를 푸는 하나의 키워드일 수 있다. 또한, 반계가 ‘理’라는 말 앞에 ‘實’자를 붙여 ‘實理’라고 한 까닭 역시 반계의 성리학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사실로, 현상을 분석하는 경국제세론은 엔간한 학자라면 일가견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간단명료하지만, 리기 ․ 사단칠정 ․ 인심도심 ․ 등의 본질을 궁구하는 명분론은 엔간한 학자가 수십 년 이상 공부해도 이리송할 정도로 정말 복잡미묘하다. 검은 머리 때 명분론의 늪에 어설프게 빠져버리면 백발이 되어서도 헤어나지 못한다. 겨우 헤어나려고 해도 함께 빠진 동지들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명분론이 ‘사변적이다 관념적이다’라는 말을 듣는 정도를 벗어나 ‘현학적이다’, ‘공리공론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변질된 까닭은 그것을 즐긴 ‘창백한 지식인들’의 기호 탓도 있지만 그 아래가 워낙 깊어 쉬이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자나 퇴계가 현실을 몰랐거나 등한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위에 든 말대로 난세를 맞아 도덕을 바로 세우는 일이 화급하기 때문에 명분론을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고, 인생이 짧다보니 미처 현상론까지 섬실한 절목을 제시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후학들 역시 스승의 명분론도 제대로 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현상론을 논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여타의 성리학자들 역시 명분론에서는 자기대로의 일가견을 가진 지라 와글와글 얼마나 떠들었을 것이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명분론은 깊이를 더하는 장점도 갖지만 자꾸만 혼란스러워지는 단점을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결국 공리공담으로 치부되어 ‘성리학의 말폐’로 지목받게 된 것이다.
반계가 초기의 주기론을 버리고 주리론을 취하게 된 이유도 위와 같을 것이다. 생긴 모습대로 활달한 구체성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주기론은 명분론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외통수이지만 주리론은 늪을 대충 섭렵한 다음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活手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기론을 버리기가 못내 아깝고 주리론에 그냥 들어가기는 뭔가 허전하기에 ‘實’자를 붙이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최영성 박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출발점이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정주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실학의 출발점은 성리학의 명분론과 현실론, 즉 본질과 현상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더 절실한 당면 문제인 민생 파탄과 국가 쇠락에 대한 방책 수립에 치중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오학론에서 제일 앞선 반성리학이란 말을 가볍게 보면 온통 성리학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4학을 보면, 다산이 부정한 것은 성리학이 아니라 성리학의 말폐, 즉 성리학의 피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실학은 성리학에서 나와 자란 새로운 가지이지 성리학과는 무관한, 성리학을 부정한 학문이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실학을 정의하는 제일언으로 ‘성리학의 고리타분한 공리공담을 거부하고’라고 하는 것은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치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조선이 망한 제일 요인으로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꼽는데, 조선이 망한 것은 성리학 때문이 아니라 국왕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다. 무능과 부정부패는 인성의 문제, 즉 도덕의 문제이지 성리학적 담론의 과잉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성론에 대한 궁구가 더욱 치열해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본질론이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학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책들의 주안점은 제도 개선 문제이다. 그러나 제도는 이미 많이 갖추어져 있었다. 단지 그것을 운용하는 관료들의 의식과 능력이 문제였다. 제도도 고쳐야 하지만 관료들의 인성을 바로 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치자들이 집중할 것은 제도 개선도 개선이지만 인성 개선이 먼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마련되어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성이 잘못되어 있다면 법과 제도 자체가 헛돌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잘 사는 세상이라도 도덕이 바로서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뿐이다. 도덕 위주의 학풍이 태풍처럼 불어도 안 되겠지만 당면한 현실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더욱 안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도덕성이 쇠미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현실 문제를 중시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현실 문제를 중시한다는 것이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얻은 재물로 현실 문제를 충족한다면 논리 자체가 한참 잘못 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실학자들이 실학에 몰두하게 된 까닭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백성들의 빈한한 삶과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양심 때문이었지, 현실만을 무겁게 보고 도덕은 가볍게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도덕이라는 본질이 현실이라는 현상을 위해 생략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실학이 가진 맹점 중의 하나가 비로 이러한 점이다.
도덕과 현실을 대립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도덕과 현실은 대립 개념이 아니라 상보 개념, 1층이 도덕이라면 2층은 현실인 이중 구조의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성리학은 기본이고 실학은 그 위에 세워진 새 학문이다.
실학자들이 주리론으로 쉽게 본질론을 정리하고 당면 문제인 현상론에 노력함으로써 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본질론에 대한 궁구를 좀 더 깊이 하였더라면 실학의 바탕이 더 튼튼하지 않았을까. 후기 실학자들에 와서야 주기론이 되었는데, 사실 현상은 리일분수이기 때문에 기의 분야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리론으로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니 유연성이 미흡하여 뻑뻑한 상태가 됨으로서 활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리 자체가 경직성과 유일한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유연성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세계에서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실학의 비조인 반계가 초기의 주기론을 계속 유지한 상태에서 『반계수록』을 썼다면 훨씬 생명력이 있었을 것이다. 주리론을 유지하더라도 일리, 즉 근원으로서의 리가 직접적으로 분수, 즉 각개의 현상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리의 간접적으로 각개 현상에 작용하는 리의 변화성을 중시하였더라면 리도 살고 기도 살 수 있는 논리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복고와 상고를 외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미래 지향적인 목표를 제시하였더라면 실학의 역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보다는 신화로 남은 것을 수백 년 후에 공자가 분식하여 교범으로 내세운 삼대지치보다는, 정주학뿐만 아니라 양명학, 고증학 등의 연관된 학문을 포섭하고, 불교와 도교 등의 교리를 녹여 들이고, 청나라에 이미 들어와 정착한 서학에서 이득 되는 점을 원만하게 뽑아서 영양분으로 삼았다면 실학이라는 범위를 훨씬 넘는 좋은 학문을 창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학이 실권한 남인들 가운데서도 기호남인들의 것만이 되고, 당대를 경영하는 주류인 사대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에는 실학이 본질론에서 기득권을 가진 주자학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봉건사회에서 본질론을 경시하고 현상론을 중요시 하는 학문은 설 자리가 없다. 특히 질박한 삶을 가치로 하는 초야의 선비들에게 실학은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비쳐져서 홀대받기 십상이었다. 그것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주자학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서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성리학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왕과 관리들의 무능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그 무능과 부정부패는 성리학이 아니라 유학 논리의 구조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명료한 목표는 현실주의의 극대화이며, 번쇄한 유학적 논리는 ‘탐욕’을 합리화 하는 과정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일신이 현달하고 가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삶의 목표였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탐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 시절의 지적 단련은 노년기의 명예와 부귀, 자손 번성을 위한 재물 확보를 위한 과정이었다. 유학은 봉건시대에 꼭 알맞은 이념이었지 진리를 찾기 위한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거리를 좁히고자 일어난 학문이 바로 성리학이다. 유학적 교양을 닦은 자들은 벼슬길로만 나갔으나, 성리학자들은 벼슬길로 나가서는 최선을 다하는 관리가 되고 산림에 돌아와서는 진지한 학자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즐긴 성리학적 담론은 결코 공리공론이 아니라 인성을 밝히고자 하는 간고한 궁구였다. 성리학이 거부한 것은 낡은 유학의 굴레였다. 그러므로 실학이 거부한 것은 성리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관료들의 부화한 풍조와 허례허식을 조장하는 낡은 유학이었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 불리듯 구유학에 뿌리를 두었으나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며 새로 싹튼 학문이며, 실학은 구유학이 아니라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리학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구유학자들은 무능과 부정부패, 탐욕 쪽으로 필연적으로 갔지만, 신유학자, 즉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이치와 인간사회의 작동 원리를 깊이 인식하기 위하여 부단히 궁구하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망국의 원인을 성리학자들의 공리공론 때문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구유학과 성리학의 차이를 간과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조선 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구유학자와 신유학자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조선을 망친 자는 구유학자들이었다.
조선 후기사는 제도의 잘못을 추궁하고 개혁하기보다는, 있는 제도라도 바르게 운용할 수 있도록 관료들의 의식을 바로 명징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대였다.
인간은 속이고 제도는 겉이다. 겉을 아무리 단단하고 화려하게 꾸며도 속이 곪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내용이고 제도는 형식이다.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제도에 의해 균형을 유지한다. 인간사회의 균형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제도는 이미 제도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몸이 훌쩍 커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예전의 옷을 강제로 입히면 옷이 터지듯이 시대가 변화하였는데도 예전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면 반드시 분란과 소요가 일어난다. 그 분란과 소요를 예방하기 위하여 실학자들이 제도개혁론에 치중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옷이야 여러 벌 만들 수 있지만 몸은 인위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는 학자라면 옷보다는 몸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즉 표면적 현상보다는 내면적 본질에 대하여 궁구하여야 한다. 조선 후기 사회를 주도한 사대부 계층의 의식과 가치관의 대세가 성리학적 본질론의 중요성에 깊이 천착하면서도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현상론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면 최소한 망국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도 개혁을 부르짖는 실학자들의 절규를 철저히 외면할뿐더러 있는 제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지도층 사대부들의 무능, 인성론의 핵심적인 담론보다 표피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갑론을박으로 수백 년을 지낸 문약한 향당들의 무지 등이 얽혀 빚어낸 역사적 참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인성론에 대한 성찰이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 예를 앞서 언급한 「황사영밀서」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그 한 장의 밀서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조정에서는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천주교에서는 순교란 명목으로 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조선대로 쇠약해지고 외국에서는 조선을 야만국으로 치부하였다. 만약에 19세기 조선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가 ‘조선은 교양과 문화가 발달한 좋은 나라이다’였다면 침탈을 노리는 국가가 적었을 것이고 조선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 도움을 주는 나라가 있었을 것이다. 야만인들이 사는 나라는 나라 대접을 받지 못하기에 어느 국가라도 강국이면 우선적으로 침탈해도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이 정한론을 일으킨 연유 가운데는 국가팽창주의 탓도 있지만, 나약한 조선이 동양의 문제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사영의 손이 일만 삼천여 자를 쓴 것은 그의 마음이 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정신이 그렇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정신이 그렇게 판단한 것은 다양한 정보를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신의 판단’이다. 이 정신의 판단을 잘 하기 위해서는 정보 인식이 정확해야 한다. 황사영은 약간의 성리학적 교양을 기반 하였지만 천주교리에 심취하면서 천주교의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만 인식하게 되고, 신유박해를 피해 토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천주교도들의 참극에 관한 것뿐이었기 때문에 공포와 분노가 치민 상태에서 판단한 것이 밀서를 써서 중국에 보내는 것이었다. 황사영의 정신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밀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엄청난 후과가 밀어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하나의 방향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니, 어찌 정신이야말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인성이다. 그래서 한 인간에게는 인성이 중요하고, 한 학자에게는 인성론에 대한 연구가 기본인 것이다.
여행자가 되어 찬찬한 눈으로 보는 남도의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반계가 있음으로 한결 가깝게 다가왔다. 내 나이 반계와 비슷하니 수인사를 나눈 다음 저 아랫마을 주막에 내려가서 막걸리 몇 잔에 고담준론 나누다보면 달이 뜨겠지. 우리 주흥 도도해지면 우반동 주모 부르는 남도창 한 자락 꺼이꺼이 들을 수 있을까. 언제 다시 한 번 와 볼까. 이십여 년 반계가 머물며 대작 『반계수록』을 쓴 현장을 떠나는 관광버스가 무정하다.
염전이 보이는 서해안 지방도로를 달리다 길가 음식점에서 다양한 젓갈을 반찬으로 한 상 잘 먹고 2012년 9월 7일 저녁 8시에 목포 신안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출항하는 여객선 동양골드 2층에 앉아 약간의 해무가 낀 목포 앞바다를 나서 망망대해 두 시간을 보내고 흑산도에 도착했다.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가도가도 아스라하기만한 수평선, 콩알보다 작은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지구가 참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쾌속선으로 두 시간만 달리면 닿지만 수백 년 전에 유배객들이 흑산도를 찾을 적에는 하루 길이었다니, 그것도 파도가 심하면 귀양길이 곧바로 황천길이었다니 그 사람들의 심정이 오죽 아득했을까. 흑산도를 중심으로 백여 개의 섬을 묶어 흑산도면이란다. 사람이 살까 싶은 절해고도에도 4천여 명의 인구가 산단다. 둘러보니 바닷가에 정말 손바닥만 논밭 몇 뙈기만 보이는 이 곳에 그만한 인구가 산다니, 그들이 무엇을 먹고살까 궁금했다. 누군들 대처에서 살기를 바라지 이런 궁벽한 섬에서 살기를 바라랴. 하지만 모진 것이 목숨이니 살 길을 찾아 흘러흘러 들어온 삶들이 아니겠는가. 지금이야 어업, 양식, 관광, 행정 등의 생업 때문에 이만한 인구가 모여 살지만 수백 년 전에는 인구가 기껏 수백 명, 아니 수십 명박에 되지 않았을까. 그것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뭍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지은 죄를 불문하고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이런 곳에 귀양살이 하러오는 죄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기야 목이 붙어 있어 숨 쉴 수 있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 임금의 은혜에 얼마나 감읍하였을까.
섬 일주버스를 타고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 능선에 서니 높이 솟은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나암 몰래 서어러운 세에워어른 가아아고~’, 이미자의 애절한 목소리가 전하는 노래말에 담긴 사연과 절해고도 흑산도의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져 나이 지긋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이 고장 사람인 버스기사의 말을 들으니, 처음에 작사자가 지은 제목은 ‘흑산도 아이들’이었는데 작곡자에게 보였더니 ‘흑산도 아가씨’로 고쳤다고 한다. ‘아이들’에서 ‘아가씨’로 바뀌는 바람에 얼마나 큰 이미지가 풍선처럼 부풀었는가. 덕분에 노래도 살고 가수도 살고 흑산도도 살고 우리 국민들의 정서도 윤택해졌으니, 정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격언처럼 몇 자 말이 던지는 묘미, 언어의 에너지가 얼마나 신기한가.
해안가 절벽 따라 겨우 낸 잔도를 타고 입심이 좋은 기사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아슬아슬 달렸다. “전에 낸 관광홍보물에는요 흑산면의 섬이 백 개 남짓이었는데 이번 홍보지에는요 배 이상 늘었어요. 저기 보이지요 저거요 섬이 아니라 여예요 여.” 해안가에는 수만 년 동안 파도에 깎이며 갈매기 세 마리가 앉으면 딱 맞을 조그마한 바위가 듬성듬성 있었다. 섬이 많다는 홍보도 좋지만 여와 섬을 구분하는 이 고장사람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어 그거요 목포 쪽 사람들은 푹 삭혀서 먹지만 여기 흑산도 사람들은 싱싱한 날 것 먹어요. 옛날에 홍어가 거기까지 가자면 며칠 씩 걸리는 바람에 상한 거예요.”라는 말에서는 자기 고향 흑산도에 대한 긍지를, “저기 보이는 게 전복 양식장이지라우. 그런데 전번 태풍 때문에 절단이 났지라우. 그런데 말이요 저기 와서 낚시하는 사람들 있더라구요. 마을 어민들은 양식하던 전복을 전부 놓쳐서 애태우는데 그걸 낚시질하더라구요. 부두 근처 식당에서 파는 것들이 전부 그거지라우.”하는 입담에서 이장 출신으로 어민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손암 정약전(1758~1816)이 천주교도라는 죄목으로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사화 때 화를 입어 유배를 와서 15년 동안 살다가 59세에 죽은 사리마을 북쪽 산록에 있는 사촌서당은 근래에 군청에서 한창 관광지로 개발 중인 듯 여러 가지 시설들이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현산어보』가 저술되고 호구책이었을 서당 역할을 했던 사촌서당은 이름만 남았을 뿐, 옛 건물이 마멸된 자리에는 짚처럼 보이게 노란 페인트칠을 한 시멘트 지붕을 덮은 깎은 나무기둥 건물 한 채만 덩그랬다. 찢어진 창호지 안으로 들여다보니 뉜가 살았음직한 흔적인 낡은 침대와 가구 등이 늘려있었다. 기사의 말로는 흑산도에서 이곳이 가장 궁벽한 곳이었다는데, 그래도 옛날에는 바다를 뜯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하는 생물들이 많았는지 주변에는 빈집과 집터들이 꽤 많았다. 요즈음 우리나라 어느 농촌이나 어촌이나 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 역시 면소재지로 목포로, 서울로 살길을 찾아 거의 다 떠났다고 한다.
『현산어보』가 학술적 가치를 갖는 이유는 한국 어족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자연과학 서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암이 다산 정약용의 형이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탔다고도 볼 수 있다. 20세기 후기에 들면서 실학이 뜨고, 실학의 중심으로 다산이 뜨고, 다산에 대한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애정과 연구로 확장되면서 『현산어보』가 학술적인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천주교도들에 의해 순교자 내지 성인으로 추앙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유배형을 받을 정도로 신실한 천주교이지만 감시를 받는 죄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산도 곳곳에 천주교회인 공소가 있는 걸 보면 손암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산은 많은 저술을 하며 길고 긴 유배의 시간을 보냈지만 손암이 남긴 저술이 『현산어보』에만 머무는 걸 보면 15년이란 유배생활이 참으로 지루했을 것이다. 그 지루함 속에서도 다행히 이웃 어부의 도움을 받아 『현산어보』라도 썼기 때문에 이름 석자가 남은 것이다.
실학을 언급하자면 처음이든 끝이든 다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다산을 언급하자면 서학의 범위를 넘어서 천주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첫째부인 의령 남씨에게서 약현을 얻고, 둘째부인 해남 윤씨에게서 약전, 약종, 약용 등 3형제와 딸을 얻었으며, 셋째부인 김씨에게서 아들 약황과 딸 둘을 얻어 모두 5남 3녀를 슬하에 두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부인 소생들 4남 1녀 모두 천주교에 깊이 관련되어 자의든 타의든 화를 당하였다. 맏이인 정약현의 부인은 이박만의 딸로서 이씨 친정 아우인 이벽이 다산을 이가환과 연결시켜 다산이 소시 적에 성호의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위는 바로 저 유명한 신유사옥의 사단을 일으킨 황사영이었다. 둘째는 이번에 찾은 정약전이으로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로 몰렸으나 간신히 목숨은 구하여 아득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며, 셋째는 신유사옥 때 배교를 끝내 거부하고 장렬하게 능지처참 형을 당한 정약종이다. 넷째인 정약용은 배교선서 덕분에 겨우 구명하여 형 약전보다는 그래도 여건이 좋은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다. 더하여 누이의 남편인 이승훈 역시 신유사옥 때 중죄인으로 처형을 당하였다. 새어머니 김씨의 소생인 이복동생 셋은 천주교와 무관하여 횡액을 당하지 않았다.
다산의 집안이 풍비박산 난 연유는 천주교 때문인데, 그 연원을 살펴보면 다산의 큰형수인 이박만의 딸 이씨에게서 연원함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아우인 이벽이 이가환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이벽이 비슷한 연배인 사돈집의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또한 매형인 이승훈 역시 처남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에게 천주교 신앙을 깊이 심어주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1785년 봄 서울 명례동 김우범의 집에서 수십명의 천주교도가 모여 조선교회를 창립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벌어진 천주교도 탄압이 몇 년간의 소강상태를 보이다, 1801년에 신유사옥으로 한꺼번에 폭발한 뇌관은 <황서영의 백서>였다. 결국 문중에 사위 하나 잘못 들이는 바람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18년 동안의 유배형을 당하는 바람에 조용히 앉아 학문을 닦아 저술할 시간을 얻었으니, 역사적으로 보면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이 시련기 없이 계속해서 벼슬길을 걸었다면 당연히 고관대작으로 현달했을 것이고 당대엔 부귀공명을 누렸을지 몰라도 50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쓰진 못하였을 것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일년은 삼백육십오 일이며, 인생은 초로와 같아 검은 머리가 금방 반백이 되니, 정력이 제아무리 출중한 자도 벼슬 길과 학문 길을 병행하기가 어렵다. 만약 이에 반한다면, 그가 지은 책은 대부분이 모작이거나 대필이지 않을 수 없다.
얘기가 번진 김에 학인의 생애와 학문을 하는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조선학문사에서 안타까운 것은 율곡 이이가 49세에 죽고, 고봉 기자헌이 40대 초에 술병으로 죽었으며, 중봉 조헌이 40대 초에 임진왜란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 율곡이 다만 십 년이라도 더 살았다면 학문이 더욱 깊이 익어 임진왜란에 대한 방비가 강화되었을 것이고, 고봉이 이십 년만 더 살았다면, 중봉이 다만 십 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 유학사가 지금과는 판이하게 서술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제 목포로 가는 길에서 의병장 곽종석의 손자인 상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곽진 교수로부터 <호남의 한국사상사, 학술사에서의 위치>를 제목으로 호남과 영남의 학계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문득 생각났다.
정치사상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광주, 나주, 장성 지역을 호남으로 부르고 안동, 예안, 상주 지역을 영남으로 부르는데, 영남에 비하여 호남이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호남의 학자들은 수명이 짧았다는 것. 하서 김인후가 52세로 고봉 기대승이 46세로 졸하니, 물리적, 육체적 기반이 부족하여 후학들을 배양할 시간이 없었고 또한 자손들도 번성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호남의 학맥이 충청도로 올라가 김장생, 김집과 같은 충청학맥이 강화되었는데 그 기반은 호남에 두고 있다.
둘째로 인조반정 후에 조정에서는 영남은 어루만지며 학문에 집중하도록 하였으나 호남에 대하여서는 배려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묘종사자를 보더라도 전체 16명 가운데 영남이 8명, 경기가 4명이나 되나 호남은 없다. 그러나 해남에 기반한 윤선도의 소론계는 홀대받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호남은 학문보다는 예술이 발전하였으며, 다산학문은 호남학의 정수를 흡입한 데 기반을 두고 있다.
셋째, 조선의 토심은 약 15Cm 정도이나 중국은 6~7m가 된다. 그래서 건축이나 조형에서 조선은 석재인 화강암을 주로 이용하고 중국은 황토를 이용하는 등의 과학기술 차이가 있으며, 석재의 질을 따지는 것도 실학시대 이후에 나왔다.
넷째, 목민심서, 경새유표 등의 일부 책이 동학의 추종도서가 됐다는 연구가 있고, 일제시대에 성리학자들이 실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노예경제사』를 지은 백남훈 등의 실학자 일부가 월북하였다.
마지막으로, 북경대학교의 연구주제가 공자는 누기인가, 공자는 왜 가난했는가, 공자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등의 세 가지인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신화의 세계를 리얼리즘의 세계로 바꾸고, 중산층 의식을 길러서 사람 사는 세상, 개관적 이치가 지배하는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학기행 길에서 의병장의 손자로부터 실학정신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으니 새로운 시각이 열리며 이번 여행이 무척 의미가 있겠구나 참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서해 구월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사촌서당 마루에 앉아 실학 전문가인 박석무 이사장으로부터 들는 이야기가 무척 재미가 있었다.
손암이 인근 신지도에서 몇 년간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이곳 흑산도 사촌마을에 온 후에도 서당을 열어 생계를 이었다고 하나 살기가 매우 곤궁하였단다. 손암이 술을 좋아했다고 하는 말이 박 이사장의 입에까지 오른 걸 보니 아마도 유배 생활의 고독과 비애를 술로 달랜 것 같다. 귀양 왔지만 온순한 성품의 서울 양반이고 술꾼답게 호걸스러웠는지 몰라도 이웃의 눈에 들어 새장가를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늙은 처녀나 바다에 남편을 잃은 아낙네가 아니었겠는가마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유배생활의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을 뿐더러 슬하에 아들 둘을 낳았다고 한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유배 오기 전에 스무 살 남짓 되어 요절하는 바람에 아랫대가 끊어졌다가 절해고도에 귀양 와서 새 장가도 들고, 다행히 아들 둘을 낳았으니 손암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흑산도 아들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미국에 사는 사람도 많고 정씨네 문중세의 절반 이상을 이룬다는 박 이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제 곽진 교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에서 “호남의 학자들은 수명이 짧았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아무리 재능이 우수한 인재도 사람 인연을 잘못 만나면 온갖 고초를 겪고, 생물적 수명이 짧으면 학문과 자손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반대로 손암이 비록 육십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상민출신일망정 튼튼한 신체를 가진 여자를 만나 아들 둘을 얻어 자손을 번성케 하였으니, 인생은 재천이요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절하지 아니한가.
초가삼간도 못될 만한 움막을 짓고 살았음직한 집터를 동그랗게 에워싼 돌담이 옛날에는 이곳에 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흔적 하는 마을 돌담길을 돌고 돌아 내려오다니 거친 풀이 우거진 곳에 서 있는 유배문화 안내판이 보였다.
신안군청에서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가 펴낸 『흑산도 유배문화공원 학술연구보고서』를 바탕으로 하여 써 놓은 유배문화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백제 3왕자를 비롯한 고려 의종 2년 정수개가 문헌상 최초의 흑산도 유배자이며, 왕의 특별하교로 제주, 거제, 진도 다음으로 빈도수가 높아 조선조까지 고관대작뿐만 아니라 지방관리, 선비, 나인, 중, 평민 등 다양한 신분계층의 130여 명이 갖가지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인들의 생활은 학문적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토호처럼 횡포를 부리는 등 민초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유배자 중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 송정사의 집필과 사촌서당, 면암 최익현이 진리 일신당이라는 서당에 머물면서 학동들을 가르쳐 섬문화의 튼실한 뿌리로서 유배문화가 섬주민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주요 유배인들의 유배년도, 유배인, 유배이유는 다음과 같다.
「1693년 나인 정숙 해괴한 짓, 1694년 사간 리징명 간언, 1694년 정순억 과욕, 1721년 부제학 홍계적 당론, 1725년 목룡 역옥, 1735~1752년 리태중, 조태연, 좌의정 김재로, 이양천 당론, 1755년 심정연의 처 역옥 연좌 비, 1761년 리형모 불경죄인, 1770년 오득 어의를 도둑질, 1771년 환노 전폐, 1772년 녕원군수 정세주 환곡의 발매, 1773년 전 정언 황승원 패초를 어김, 1775년 이조판서 이담 탐욕, 1778년 옥구현감 정택부 역적 이찬 옥사, 1782년 차비내인 월혜 역옥 연좌, 1784년 금하재의 아내 임이 대역죄 연좌, 1785년 화엄사 중 윤장 정감록, 1794년 승지 이익운 간언, 1801년 정약전 사학 죄인, 1806년 김일주 역옥, 1817년 홍찬모 역옥, 1842년 장흥부부 홍약필 상납색리에게 뇌물 요구, 1844년 서영순 국청수인, 1853년 리규화 자신에 한하여 정배, 1858년 전 현감 박경선 투서하여 무함, 1873년 박우현 상소, 1876년 최익현 상소, 1895년 유진구 모살죄, 1898년 김홍륵 뇌물수수」
중죄를 지은 주범이었다면 능지처참 형이나 사약을 받았을 게 당연하지만 종범이라서 목숨만은 부지한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이들의 유배생활이 앞에서 한 문장으로 언급했듯이 무슨 초호처럼 행세할 형편은 못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들이야 주변사람들의 질시에 버티겠지만 ‘심정연의 처’와 ‘금하재의 아내 임이’같은 여자는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둘 다 역옥에 연루되어 유배 왔는데, 원인은 남자 잘못 만난 탓이다.
상소와 간언을 올리다 국왕의 역린을 건드려 유배 온 충신들도 있지만, 역옥, 탐욕, 정감록, 뇌물, 무고, 모살 등의 나쁜 죄를 지어 유배 온 자들이 훨씬 많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죄목은 ‘해괴한 짓’, ‘어의를 도둑질’, ‘국청수인’, ‘자신에 한하여 정배’ 등이다. 정약전의 죄목인 ‘사학죄인’은 어느 쪽에 해당할까 궁금하다.
그런데, 이 안내글을 쓴 사람이 그랬는지 목포대학교 연구소 사람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와 ‘리’ 두개의 성 표기와 ‘녕원’이라는 두음법칙에 반하는 표기가 있다. 십여 년 전엔가 법원 판결로 ‘리’와‘류’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안내문을 지을 때 ‘사간 리징명’과 ‘리태중’, ‘리형모’, ‘리규화’ 등의 후손들이 어찌 알고 찾아와서 대법원 판결대로 ‘리’로 성씨 표기를 하여달라고 요청하여서 그렇게 슨 모양이다. 살펴보면 네 사람은 죄목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인 바, 그들의 후손들 역시 조상의 핏줄대로 ‘이’라는 평범함보다 ‘리’라는 특별함을 즐기고, 조상이 목숨을 걸어 간언을 올리고 정의로운 당론을 지키기 위하여 분투하다 누명을 쓰고 흑산도 유배를 당한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흑산도까지 찾아와 조상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흑산도에 유배 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온전히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역적의 죄로 유배 온 여자들, 이미 노비가 되었으니 사대부집 부인 행세는 못했을 것이니 관리나 지역 유력자의 소실이나 첩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리하여 그녀들의 자손들 역시 흑산도에 뿌리내렸을 것 아니랴. 남자들이야 자기가 저지른 짓 때문에 귀양살이 하지만, ‘심정연의 처’와 ‘금하재의 아내 임이’는 부모가 정해준 대로 시집갔으나 아차 하여 노비 죄인으로 떨어져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팔자를 한탄하며 얼마나 울었을까. 200년 동안 서리고 서린 두 여인의 한이 ‘흑산도 아가씨’로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닐까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이번 실학기행에서 네 번째로 만나는 인물인 최익현(1833~1906), 일제시대인 1924년에 그의 문하생들이 지장암 아래에 세운「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는 흑산도 천촌리 입구에 외롭게 서 있고 뒤로는 지장암에 새겨진 ‘箕封江山 洪武日月’ 넉 자, 물씬 그의 체취가 풍겼다.
『한국유학통사』하권 425p에서 435p까지 서술된 최익현에 관한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면암은 14세 때 화서 이항로 선생 문하생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23세인 철종 6년 1855년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을 거쳤다. 강의한 성품으로 학문에 독실하여 김평묵 ․ 유중교와 함께 ‘화문삼걸’로 꼽혔다.
36세인 고종 5년 1868년에는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국민부담의 가중, 당백전의 발행에 따른 재정파탄 등을 들어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였다가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41세인 고종 10년 1873년에는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에 대하여 다시 비판, 탄핵함으로써 대원군이 은퇴하고 고종이 친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군부를 논핵하여 이간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이로부터 민씨 일파와 은밀히 결탁하였다는 의혹을 줄곧 받았다.
44세인 1876년 강화도조약 때에는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려 척화소를 올려 “우리의 힘이 강하지 못한 여건에서 적의 위협에 굴복, 화의를 한다면 앞으로 더 큰 위험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화의를 격렬히 반대하다가 다시 흑산도에 3년 동안 유배당하였다. 그의 척왜론은 왜가 강하고 우리가 약하다는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게 전제되어 있었다. 그 뒤에도 갑오개혁과 단발령에 반대하고 척왜와 매국적신의 처형을 주장하다가 일본군에 구수되었으며, 73세인1905년 을사늑약 때는 ‘請討五賊疏’를 올리고 8도의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日虜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궐기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1906년에는 임병찬 등 문인들을 이끌고 전라도 태인 ․ 정읍 ․ 순창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관군에게 패배, 한성으로 압송되었다가 대마도에 유배당하였으며, 그곳에서 적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하다가 순국하였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항로를 ‘活理翁’으로 받들기도 하였으며 ‘理主氣客’, ‘理帥氣卒’의 관점을 확고하게 지켰다. 주자와 송시열의 의리사상을 몹시 존숭하였으며, 이항로의 실천적 사상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주리설에 입각하여 척사위정운동의 선봉에 섰다. 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은 강인하고 실천적인 의리정신의 원동력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최익현은 송시열 학문의 전체대용이 우주에 충만하고 고금을 관철하였다고 평한 다음, 송시열의 학문의 대강을 첫째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 둘째로 黑水인 이단 및 사문난적을 공격하고 주자를 호위하는 것, 셋째로 명교를 부식하고 도학을 천명한 퇴계 ․ 율곡 이하 여러 선생을 본받고 추념하는 일 등으로 묶어서 말하면서 송시열의 전도적 위치를 옛 성인과 나란히 두었다. 이것은 최익현의 문명사관과 함께 존화양이에 대한 신념의 극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최익현은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주자학도였다. 중화사상에 입각, 화이의식에 바탕을 두고 충군애국을 지상목표로 하여 척사위정의 기치를 내세움으로써 반개화적인 보수 세력의 이론적 실천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대개 63세인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종래 서양을 이적금수로 보아 배척하고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던 관점에서 벗어나 서양과의 수교 내지 협력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가 이때에 와서 서양 중심의 국제사회를 긍정하고, 항거의 대상을 일본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평화적인 외교 방법으로 한민족의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던 현실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을미개혁 당시 내무대신 유길준이 그를 수구파의 우두머리라 하여 효유를 목적으로 편지를 보내 “오늘의 형편은 경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먼저 단발하셨으니, 신하는 임금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한데 대한 「擬答書」에서 “국가의 법이 비록 매우 주밀하고 아름다울지라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바로잡아야 한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변경하는 것이 참으로 옳으며 고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경장과 개혁에도 본말과 경중의 구별이 있다. 삼강오상과 존화양이의 대경대법은 근본이요, 부국강병하는 일과 기예 ․ 술수는 말엽이다. 지금 한갓 弊法을 경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만 보고, 강상을 떨어드릴 수 없으며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문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한갓 부강으로 열강과 병립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요, 강상이 이미 떨어지고 화이의 구분이 없어지면 상하의 질서가 없어서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비록 부강하고자 할지라도 이미 패망할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입증하였다. 여기서 그를 비롯한 화서학파의 척사위정론이 어디에 기초하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유배 유적이 흑산도에 있어서 일정에 포함되었지만 사실 이번 기행의 주제인 실학과는 거리가 먼, 아니 실학자들이 배척하고자 하였던 주자학의 말폐에 해당하는 학문을 이은 인물이 바로 최익현이다. 실학자요 천주교도인 정약전과 정통 주자학자요 주리론자인 최익현이 70여 년의 격세를 두고 십여 리 남짓한 이웃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니, 사촌마을에서 진리마을로 가는 길은 실학과 성리학이 만나는 길이다.
주리론자의 원칙성과 강직함을 칠십 평생토록 빈틈없이 표출한 최익현, 그의 생각대로 세상이 굴러갔더라면 조선 말기의 그 많은 혼란과 경술국치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강경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둥글둥글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넓은 것. 난세를 맞이하여 강경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온건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가를 최익현의 일생을 통해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 동안 조선의 집권 주류 세력이 된 서인이 분화한 노론과 소론, 시파, 벽파의 파쟁도 결국 순조 등극 이후부터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등 몇 몇 문증이 지배하는 과두정치 체제 속에서는 소멸되어 버리고, 학문적 교양보다는 천박한 정치적 이해관계 위주의 사고를 하는 외척들의 발호로 인하여 성리학도 차츰 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 치세 때까지만 해도 움터 자라던 실학의 꽃망울이 신유사옥이라는 독한 꽃샘추위를 당하는 바람에 서학, 천주교와 함께 엮여 절멸하고 말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하는 사건으로 발생한 1791년 11월의 신해사옥이 서론부분이라면 1801년 2월의 신유사옥은 본론 부분, 이해 10월에 터진 황사영밀서 사건은 결론 부분으로서, 이 10년 동안이 천주교사에서는 가장 잔혹한 순교의 시대로 경배 받지만 한국사에서 국운을 가를만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 때 갈 길을 잘 정해야 하는데, 그만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200 년 동안 후손들이 개고생을 하게 되었다. 1801년도에만 국한시켜 역사의 책임을 물어보면, 가장 무거운 책임은 정조에게 돌아간다.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서학과 천주교 문제가 순리로 풀리지 않았을까. 또 순조가 좀 더 장성한 연후에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의 섭정과 안동 김씨 외척들의 세도정치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곽진 교수의 말대로 명이 짧은 걸 어떻게 하겠나 인명재천이요 나라의 운수인 것을.
사족을 단다면 정조는 영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순조를 낳은 원빈 박씨라는 밭의 토질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후궁을 들일 때 색기만 보지 말고 영리함을 반드시 살펴야 했는데 살살 꼬리 치니 덥석 물었다가 나온 소생이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일고여덟 명씩 생산하던 씨와 밭이 중기로 접어들면서 시들시들하더니 명종 대에 와서 씨가 부실해지고 밭이 척박해지면서 정비 출생이 귀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혈통이 무반이고 상대 할아버지가 여자를 탐해 삼각관계를 하다가 쫓겨 간 것을 보면 정력 하나는 확실하게 센 모양인데, 거기에다가 함경도에서 백여 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여진족의 밭에다 씨를 뿌렸으니 오죽 튼튼했겠는가. 그러니 정실 소생으로 팔 왕자 구 왕자 생산은 거뜬했고 공주, 서자, 옹주들은 부지기수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토록 튼튼하던 씨도 고량진미에 운동부족, 매일 밤 침소에 궁녀를 갈아들이기를 몇 대 동안 계속하니 어찌 무쇠 같은 씨인들 비실비실 녹아나지 않겠는가. 이런 이치로 하여 중국의 왕조는 길어야 3백 년, 거의 2백 년 기간 동안 십 몇 대 정도의 왕 다음에는 자연적으로 쇠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곤 다시 튼튼한 씨가 폐허에서 자라고.
그런데 조선은 두 배인 5백 년이나 왕조를 유지한 까닭은 왕종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봉건왕조를 떠받드는 사대부들의 골수에 충효정신이 꽉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즉 성리학의 명분론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태종, 세종, 명종 같은 영리한 왕들과 기득권 계급이 고삐 하여 꿴 ‘고려 충신 정몽주’, ‘절의충신 사육신’이라는 명분, 성리학의 제일 교조인 충효와 불사이군의 명분 앞에 왕에 대한 불경은 전혀 용납될 수가 없었다. 중종의 후궁 소생 아들에서 나 방계인 선조가 방계 왕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효종과 현종 등 몇 말고는 줄줄이 후궁 소생. 왕통이 미약하니, 나중엔 씨가 말라 강화도에까지 가서 씨를 빌려올 지경이 되니 자연적으로 궁중에선 왕위 계승을 노린 암투가 벌어지고, 그에 연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대부들의 정쟁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이걸 보면 중기 쯤 되어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신권 강화 구조를 만들든지, 그게 안 되면 태종처럼 절대왕권을 휘두르든지, 약한 씨가 도저히 튼실해질 가능성이 낮거나 없으면 아예 씨를 바꾸든지, 양단간에 결단하였더라면 나중에 20세기를 사는 후손들이 왜놈들의 종노릇을 안 해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늦어도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엔 정치혁명이든 역성혁명이든 있어주었어야 백성들의 삶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반역이나 민란 같은 소요는 제외하고, 인조반정에 반대한 이괄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혁명 같은 것이 성공하여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다.
소설이지만,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으로 온 백성들의 흠모를 받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모진 마음으로 살아남은 다음,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을 기반으로 한 세력을 동원하여 이성계처럼 새 왕조를 열었다면 어땠을까. 이성계가 새 하늘을 열 수 있었던 까닭은 백성들과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신망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 신망은 그가 평생토록 남북강산을 종횡으로 쏘다니며 홍건적, 왜구 등의 침략을 막아낸 훌륭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썩은 고려를 베어내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뤘기 때문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성계의 반란’이 아니고 역성혁명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순신이 서해와 남해의 뱃길을 막아 수운에 능한 왜적들이 바다 길로 군대와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핍케 하여 죽어가는 조선을 간신히 살려놓았으니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이성계와 비교한다면 왕권이 튼튼했고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이다. 이런 점을 염려해서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려 했고, 정유재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군자답게 최선을 다해 왜적을 물리친 다음에 스스로 죽어 멸문지화를 막고자 한 것 아니겠는가 장황하게 횡설수설 해본다.
두 번째 책임은 대왕대비 김씨에게 돌아간다. 자기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라서 그런지 열두 살 순조가 왕이 되고 오랜 기간 동안 섭정을 하면서 자기 친정 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왕권을 미약하게 한 원죄가 있다. 명분과 능력도 없이 문중 출신 대왕대비 덕분에 꿰찬 벼슬자리는 토색질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아주 유효한 갈퀴였을 뿐이다. 달달 긁힌 조선의 백성과 강산은 피골이 상접할 수박에 없었다. 아마 자기 친자식이었으면 출가외인 의식이 투철해 순조의 왕권을 보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보수적인 신료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신유사옥을 일으키도록 한 것은 역사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 중반의 성리학계에도 중심 학설에 따라 주리론, 주기론, 절충론 등의 세 학파가 있었고, 지역에 따라 영남 좌도학파, 영남우도학파, 기호호론학파, 기호낙론학파 등의 네 학파가 있었다. 기호학파도 주리론, 주기론, 절충론으로 또 나누어졌다. 그 아래 주리론자들도 스승에 따라 또 많은 학파로 나누어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가해지자 개방과 수구에 대한 의견이 각 학파마다 달랐으나 차츰 의견이 조율되면서 개방파와 수구파의 둘로 정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양문명이 유입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다수 학파가 개방 쪽으로 의견을 모았으나 유독 화서 이항로의 문도들만은 개방을 반대하고 척사위정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정통 기호유림을 자처하던 임헌회와 그 문하에서 개항 이래 척사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이미 대세가 개방임에도 불구하고 화서학파들이 위정척사운동을 끈질기게 벌림으로써 국론이 분열되어 사기를 집중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1873년 면암이 올린 상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국가개혁을 이룰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말은 것은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을미늑약에 분노하여 거병한 중심세력이 화서학파였지만, 개화 초기에는 참으로 답답한 시국관을 가지고 개혁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1870년대 경에는 일본이 아직 국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그렇게 큰 위협요소가 되지 못했다. 이때 온 조정과 사림이 정신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 유신운동을 시작했더라도 결코 후발주자는 아니었다. 아직 침략의 기운이 약해서 자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환경이었는데도 송시열의 학문을 고대로 답습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화서학파들 때문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앉은 채로 침략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63세인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종래 서양을 이적금수로 보아 배척하고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던 관점에서 벗어나 서양과의 수교 내지 협력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니, 1873년의 대원군 탄핵상소 이후 22년 만에 비로소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틔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에 이미 조선은 회복 불능의 강펀치를 맞고 글로기 상태. 자기 학문에만 몰두할 줄 알고 다른 데는 볼 줄 모르는 학자의 한계가 결국 온 백성들에게 화를 입히기도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두려울 따름이다.
송시열의 학문이 갖는 장점도 많지만, 그를 지나치게 추종하는 후학들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조선 후기사가 얼마나 편벽되게 흘렀는가. 송시열을 모신 만동묘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 만동묘와 교육의 기능을 상실한 채 향당들의 소굴이 된 서원을 철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송시열을 송자라 부르며 성인으로 받드는 화서학파 출신의 최익현이 개혁운동의 중심인 대원군을 탄핵한 상소를 올린 것은 역사 발전에 거역하는 일이다. 또 1976년에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은 비록 불평등하지만 국제사회 속으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모두가 찬성하는 것 보다는 일부 반대 의견이 있음으로써 조약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도 있지만, 협상 전략적인 고려도 없이 청나라 외에는 전부 도적이니 일본과는 수교해선 안 된다고 사생결단식으로 반대해서는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척사위정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은 외국과의 수교란 스스로 담장을 허물어 도적들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라 여겨 극력 반대하였다. 그들이 내건 명분은 나라의 힘이 약한 상태에서 문호를 개방하면 일방적인 피해를 입어 망국에 이른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포수에 쫓긴 꿩이 풀숲에 머리만 처박고 안심하는 것처럼 결코 혼자 은둔할 수가 없는 국제사회의 격랑을 외면하는 자충수가 아닐 수 없었다.
1895년 을미개혁 당시 유길준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서에서 최익현이 말한 “한갓 부강으로 열강과 병립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요, 강상이 이미 떨어지고 화이의 구분이 없어지면 상하의 질서가 없어서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비록 부강하고자 할지라도 이미 패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에서 그 당시 화서학파 주류의 학문관과 경세관을 읽을 수 있다.
먼저 ‘강상’, ‘화이’, ‘질서’ 등은 정통주자학자들의 주리관이 응집된 말로 그들의 가치관을 떠받드는 기둥어이나, ‘부강’은 청명한 마음을 어지럽히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유혹자로서 없어도 되는 말이었다. 앞의 세 말은 지배층인 유식한 사대부와 선비들의 것으로 즐겨 입에 담지만 뒤의 것은 입에 올리기를 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앞의 세 말보다는 뒤의 한 말 ‘부강’이 더 절실했다. 지배층이 세 말을 희롱하며 유유자적하는 그 때, 현장에서는 백성들이 일신의 ‘부강’을 위하여, 즉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생계에 골몰하는 백성들에겐 ‘강상’, ‘화이’, ‘질서’는 사치품이었다. ‘강상’, ‘화이’, ‘질서’를 화두로 하는 조선 주리론자들의 한계가, 주리론이 가진 경직성과 규범성이 조선사 전부를 관통하여 한 창에 꿰고 말았다.
실제가 이러함에도, ‘강상’, ‘화이’, ‘질서’를 명분으로 하여 변법과 개방을 반대한 것은 백성의 삶과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주자와 대명황제를 먼저 받드는 사대주의의 소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지구 위 모든 나라가 ‘부강’을 위하여 노력하는데, 조선만이 주자학의 명분을 내세워 문호를 폐쇄하고 은둔하려고 드는 것은 참으로 고루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강상’과 ‘질서’는 공자 시대에도 강조되었다. 그 당시의 세태가 공자의 눈 수준으로 볼 때는 매우 문란했기 때문에 요순우탕의 고법을 회복하자고 ‘강상’과 ‘질서’를 강조하여 유학을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지배층들의 도덕심은 문란했을지 몰라도 민초들은 자기 삶의 영역에 충실하며 살았다. 논어에서 보듯 공자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지배층들과 교제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도덕에 유난히 관심하였지, 민초들과의 교감은 없었다. 민초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민초들은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하찮은 존재, 호령 한 마디와 법 한 줄로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지배층들이 자기들의 권력욕을 위해서 민초들을 마구 베어 말먹이로 삼았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웠지 가만히 놔두었으면 민초들은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강상’, ‘화이’, ‘질서’는 지배자의 논리이고 ‘부강’은 백성들의 논리인 것이다. 1800년대 후반기를 사는 조선 백성들에게 절실한 것은 ‘부강’이었다. 가족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은 오로지 외길, 구태를 확실하게 벗어던지고 나라의 문호를 활짝 열어 빨리 ‘부강’해지는 것이었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외적이 감히 넘보지 못하지 못할 만큼 ‘부강’해지진 못하더라도 맞은 펀치의 반이라도 갚을 수 있는 ‘작은 부강’이라도 조속히 마련하는 것이 민초들과 양심적 지식인들의 절실한 희망이었다. 이러한 희망을 좌절시킨 원흉은 여러 가지이다.
최익현이 ‘강상’과 ‘화이’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말은 인륜과 사회의 관계를 직시한 통찰로 맞는 말이다. 또한 1906년 의병항쟁이 실패로 돌아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국하기 석 달 전에 남긴 「遺疏」에서 “ 반드시 왜적들이 망하고야 말 형상들이 있으니, 그것은 이제 멀어봐야 수십 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나라와 아라사 양국이 밤낮으로 왜적에 대하여 이를 갈고 있으며, 또한 영국 ․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왜적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조만간에 반드시 서로 왜적을 공격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초기의 편협한 국제관을 벗어나 시대와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혜안이다. 적지에서 적이 주는 곡기를 거부하고 목숨이 다해가면서도 피를 토하며 한 말, 자신이 순국한 뒤에도 끝내 광복을 이룩하고야 말 우리 겨레에 대한 신뢰였다. 이런 면을 살펴보면, 척사위정운동의 순수성과 장렬함은 역사적으로 인정받지만 시대성과 현실성에 어두웠던 화서학파, 면암의 한계를 익히 알 수 있다.
경국제세의 기본은 자충수가 아니라 한 뼘이라도 영역을 획득하려는 진취수여야 한다. 187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외교는 경국제세의 기반이었다. 수교란 담장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담장은 그대로 두고 대문만 여는 것인데도 식구 일부가 지레 겁을 내어 문을 못 열도록 막아 소란스러웠으니, 밖에서 대기하는 장사꾼들이 보기에 얼마나 만만한 집이었겠는가. 겨우 문이 열리자 와 하고 떼를 지어 들어와서 물건을 비싸게 파는 것으로 부족해 집안 보물과 세간 등을 뺏어가지 않았는가.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1870년대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한 조상들의 업보 때문에 후손들 3대까지 개고생을 한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은 조선이 죽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정변을 주도한 젊은 혁명가들의 뜻은 시대적 의미를 충분히 가지나, 정변이 실패한 후 그들 개화파가 일본으로 망명하더니 결국 친일파로 변신하고 결국 매국노가 되었다. 그에 반해 화서학파의 학자들은 의병운동에 앞장서고, 식민지 시대에도 그 맥을 이어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에 동학교도들 다수가 친일파가 되어 일제의 향도 역할을 하였으니, 개화운동이 정통성리학에 연유하는 게 아니라 실학운동에 근원하고 있는 점에서 실학의 후과가 그리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에 반해 보수파인 정통 정리학자들은 자기들의 조정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일제에 투쟁하였으니, 애국심 차원에서는 개화파보다 훨씬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화 전후에 걸쳐 일부는 침략에 항거하였지만 대부분의 식자층과 관리들은 합방이 대세라고 체념하였으며, 백성들 가운데에는 많은 수가 선진일본에 대한 외경의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 내내 차별대우를 받아온 천민들은 조선 조정의 통치를 부정하고 일제의 보호를 자청했다고 한다. 일진회, 보천교, 형평사 등의 친일 단체가 건의한 합방청원을 일제가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태풍이 위에서 아무리 휘몰아쳐도 아래 잡초들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납작 엎드려 있으면 되고,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면 된다. 백성들에게는 직접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국가나 권력보다는 하루하루의 생계가 훨씬 소중한 것이다.
국가란 것이 조그마한 혜택은커녕 평생 동안 고혈만 짜대니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5백년 내내 피를 빨아 먹기만 하던 흡혈귀가 비로소 비실비실 대고, 문물이 우수하고 경우가 바른 일본이 백성이 아니라 국민으로 대우하여 잘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니, 이참에 주인을 갈아보자는 단순한 억하심정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성을 살리고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는 존재 가치가 없다. 조선조에서는 왕의 소유물이자 관리들의 수탈 대상이었지만 일본의 국민이 되어서 비로소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그 영향으로 식민지 36년 동안 많은 국민들이 일제에 부역하면서도 별로 죄의식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물론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대중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많은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
저렇게도 중화가 좋은가. ‘箕封’이라, 기자가 조선 땅으로 왔든 안 왔든 그는 외래 귀족이었고 이 땅에 옛날부터 사는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들의 조상이었다. 그러니 기자가 와서 봉한 땅이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 겨레의 땅인 것, ‘洪武’라 1368년 명 태조 주원장이 1년부터 1398년 명 태조 31년까지의 연호하고 우리 땅 금수강산을 비추는 해와 달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암벽에 저렇게 큼지막하게 새겨놓았단 말인가. 지금 저 여덟 자를 보는 내 마음이 쓸쓸하다. 그러나 ‘錦繡江山 朝鮮日月’이었으면 얼마나 싱싱하였을까. 주자, 율곡, 우암, 화서, 면암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사대주의가 흑산도 외딴 암벽에서 확실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려 말부터 이 땅에 들어온 성리학의 여러 유파들 간의 경쟁에서 이긴 주자학파. 그 주자학파들 간의 경쟁에서 이긴 율곡학파의 순맥이 뭍을 떠나 이리도 멀리 흑산도 한갓진 바닷가 암벽인 지장암에, 조선은 망했지만 기자가 봉한 땅은 명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며 여덟 자로 깊이 파여 있었다. ‘箕封江山 洪武日月’이 그 좋은 한양을 떠나 왜 이런 절해고도 암벽에 새겨져 끝맺었는지, 그 책임을 거슬러 올라 화서학, 우암학, 율곡학, 주자학, 성리학, 유학에다 물어야 할 것이다. 흑산도 지장암은 500년 조선 유학의 무덤이었다.
최익현이 흑산도에서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까닭이 1876년 병자수호조약 반대 때문이니, 타의에 의한 늦은 개화가 망국의 병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흔적을 밟아보는 나그네의 심사가 그리 즐겁지만은 아니하여 긍정과 부정, 비판과 숭상 사이를 괘종시계 추처럼 왔다갔다 되풀이 한다. 한 세기의 시차를 둔 황사영과 최익현을 비교해 보자.
물론 황사영이 1790년대의 대표적인 천주교도가 아니고 최익현이 1870년대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는 아니지만, 두 사람 마음의 갈피에 따라 이 땅의 역사가 휘청하였으니 한 시대 마디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사상이 상극이어서 가해자와 피해자였으나 극과 극은 통하는 것처럼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첫째로는 편견과 아집으로 꽉 찬 성질, 둘째로는 중국을 향한 열렬한 외사랑인 사대주의이다.
그러나 역사에 남긴 이름 석자의 가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중에 국운이 쇠하여 만주로 돌아가야 할 때에 대비하여 영고탑보다는 조선 땅이 훨씬 비옥하니,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취해 한 지방으로 삼으라고 청나라 황제를 꼬드기소서”라는 간교한 술책을 쓴 황사영이야 만고의 민족반역자이지만, 검은머리 때까지는 고루한 보수주의자이자 사대주의자였으나 반백부터는 강렬한 실천가이자 뜨거운 우국지사였던 최익현은 청사에 길이 빛날 애국자이다. ‘箕封’과 ‘洪武’를 빼고 ‘江山日月’이 그의 공적을 길이 비출 것이다.
흑산도비치호텔에 여장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요즘은 관광객들이 홍도로 많이 가는 바람에 이곳 흑산도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관광 수요가 줄어들었다고 하나 그래도 일주해보니 곳곳이 비경이었다.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세 시간 동안 자산문화관에서 실학강좌 시간을 가졌다. 먼저 박석무 이사장의 사회로 참가자 88명 모두가 자기소개를 하였다.
나는 “성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처사로서 실학과 성리학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이번 기행에 참가 하였습니다”라고 자기소개 말을 한 다음, “박석무 이사장, 성리학과 실학의 접목은 어떠하며 남북통일에 밑거름으로서의 실학의 가능성은 무엇인지요”하고 질문하였으나 다음날 헤어질 때까지 답이 없었다.
각자가 하는 말씀을 들으니 모두가 한 생각을 가진 분들로 새삼스럽게 동지의식을 느껴 이번 실학기행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을 매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한국박물관 협회 김종규 회장님을 뵈니, 나라가 망한지 한 세기만에 다시 외교 분야에서 정통성을 잇는 큰일을 하셨다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이렇게 민족과 나라의 정통성을 잇는 노력이 계속됨으로써 근대 한 세기의 상처가 아물 수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상처인 남북분단이 아물 수 있다. 물론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아 있다. 시대가 흐르면 그 흉터도 아득히 멀어질 것이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흉터를 구태여 감출 필요는 없다. 흉터를 보며, ‘다시는 이런 상처를 당하지 않아야겠다’라는 다부진 결심을 거듭해야 한다.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원인을 우리에게서 찾는 게 맞다. 일제의 침략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은 맞지만 일제가 먹지 않았으면 주변 강국들뿐만 아니라 구미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냉큼 삼켜버렸을 거다. 중국은 예로부터 조선을 조공국가로 여겼기 때문에 국권을 없애고 변방으로 삼으려는 영토욕은 없었겠지만, 미국, 일본, 노국, 영국, 법국, 덕국에다가 스페인, 포루투칼,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등 크고 작은 포식자들은 금수강산을 아주 좋은 먹이로 노렸다. 그 중에서 일본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친 다음에 강적인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을 통해 조선과 필리핀을 나누어 먹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은 자연의 바탕이다. 인간은 동물로서 자연에 의지해 존재하니 인간의 집합인 국가 역시 자연법칙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성과 양심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은 소수의 소유일 뿐, 실제상황으로 살아가야 하는 다수에게는 지성과 양심이란 배부른 자들의 헛소리로 들리고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원초적인 본능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도자들은 자강불식하기는커녕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워 개화를 반대하는 측과 서양문물에 혹하여 조급한 개화를 주장하는 측으로 갈려 싸우기만 하다가 시간을 다 소진하고, 침략이 눈앞에 닥쳐오자 더 큰 포식자에게 빌붙어 도와주기를 애원하기만 했으니, 되돌아보면 볼수록 가슴 아픈 근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남 탓하기보다는 우리 탓하며, 가슴에 박힌 한을 차근차근 꺼내 저 맑은 조선의 가을 하늘에 널어 말릴 때이다.
분한 마음이야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진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조용히 생각해보면 당한만큼 갚아주어야 한다는 정책은 하지하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당할 나라도 없거니와 갚는다 해도 우리에게 워낙 피해가 클 것이다. 우리가 비록 20세기 백 년 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발전하게 된 까닭은 우리 한민족의 바탕이 동방예의지국 백의민족이란 말 그대로 심성의 바탕이 금수강산을 닮아 곱고 착하기 때문이다. 심성이 착하면 고생은 하지만 끝내는 영화를 본다. 반대로 심성이 악독하면 한 때는 번성하지만 멀지 않아 쇠락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공룡이 수 억 년 동안 번성하였지만 워낙 포악하였기 때문에 먹이감이 줄어들자 자기들끼리 잡아먹다가 멸종하였으며, 강대국들이 서로 무력을 경쟁하다가 충돌하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것이 그 사례가 된다. 앞으로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온순한 포유류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듯이 온순한 심성을 가진 국민들은 서로 협조하면서 생명을 잘 유지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하고 번성할 기대를 맞이하고 있으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먹이 감이 소진되어 멸망한 공룡시대처럼 자원을 모두 소진한 인류가 자원쟁탈전을 벌이다가 공멸할 가능성이 차츰 증가하고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때는 완전히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 법칙이 난무할 건데, 심성이 착하기 만한 우리 민족의 미래인들이 그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가 오늘을 사는 조상으로서 정말 걱정된다.
문제를 푸는 슬기로운 방법은 역시 양심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인류끼리의 협조일 수밖엔 없다. 상쟁하다가 공멸하기 보다는 무리동물의 장점인 단결심과 협동심을 발휘하여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목표는 평화로운 생존 보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만의 번성을 고집하지 말고 알맞은 인구 유지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자원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지구적이자 사회적인 협약이 세워져야 한다. 심성이 착한 우리 민족이 그러한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오후 5시부터 1시간 남짓 관광선을 타고 대흑산도 북쪽에 있는 다물도 지역의 파도가 만들어놓은 조그만 섬과 기암절벽을 감상하였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아닌가. 자연이 시간과 파도라는 도구로 만들어 놓은 저 작품을 보며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인간 역시 자연이 빚어놓은 한 작품이 아닌가.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감탄이 소중하고, 자아에 대한 성찰이 빛나는 것 아니겠는가. 눈을 외부로 돌려 자연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내부로 돌려 자아를 관찰함으로써 얻는 즐거움도 많다. 참선하는 스님들이나 작품 하나에 집중하는 예술가들, 신 앞에 경건한 종교인이 느끼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 아니랴. 미루어 짐작컨대 격물치지하며 리기론과 인성론을 궁구하던 젊은 시절에 선비들 가슴 가득히 그 즐거움이 넘실대지 않았으랴.
초가을빛 파도를 타고 흔들리는 관광선 2층 갑판에 서서 황해 수평선을 보며 딸자식을 생각한다. 딸 하나 있는 것 바다 건너보내고, 대륙으로 보내고, 늙은 애비는 아득한 수평선만 본다. 지구 위 어디라도 앉으면 내 마당 아니랴. 풀씨 하나 바다를 건너다/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같다/ 무생물은 침묵으로/ 생물은 소리로 말한다/ 인간생물 희로애락애오욕의 하모니/ 둥근 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평화다. 안정된 눈으로 보면, 그가 나에게로 접근한다.
저녁식사는 부두가 식당에서 남도 소주 몇 잔 마시며 안주 삼는 흑산도 출신 홍어 맛이 상큼했다. 경비의 대부분을 대준 경기도민들에게 감사하며 이번 기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지 하는 마음이 뭉클 들었다. 마침 경기도 경찰청의 여덟 명 젊은 경찰관들과 2층 방에서 함께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주제넘게 한 마디 하였다.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를 읽어보면, 목민관인 수령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어요. 아전들이 수령을 속여먹는 수단까지 자세히 써놓았어요. 저는 조선이 망한 제일 병인이 탐관오리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장차 경찰공무원의 핵심 간부가 될 분들이시니까 다산 선생의 청렴결백한 정신을 잘 계승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거두절미 하고 불쑥 말해서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는지, 답사가 일선경찰의 쫀쫀한 비리를 지적하는 것에 대한 반성으로 돌아와서 좋은 자리에서 내가 실례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 경찰이든 교육이든 행정이든 법원이든 경제든 군사든, 우리나라 각 기관을 움직이는 동력인 공무원들이 정직하고 유능하면 국민들이 평안하고 사회가 안정된다. 공무원이 되어 사업가처럼 부자로 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나라 일을 하는 데 긍지와 보람을 찾으며 국록만을 받아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지, 성공한 친구의 부귀만큼 누리기 위해서 자기 직책을 이용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다가는 언젠가는 들통이 나서 패가망신하고 만다. 설혹 재직기간 중에는 들통 나지 않더라도 더러운 재물로 키운 자식들은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부정과 부패는 나 자신을 갉아먹고 가족을 병들게 하며, 사회를 혼란하게 하게 하여 마침내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병균이다. 나라가 망하면 우리 후손들 모두가 다시 노예의 구렁텅이에 함몰하고 만다. 나의 가족과 후손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짧은 생각보다는 우리 모두가 서로 의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가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받침이라는 긴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마침 인사 차 2층으로 올라와 옆자리에 앉은 김세종 연구실장님께 “책에서 읽으니, 북한에서도 실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성하다는데 실상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안동지방이라면 “~어떠하이껴?”라고 말했을 것이다. 외지에 오니 사투리는 쑥 들어가고 표준말을 쓰게 된다. 하지만 영남인 특유의 꺽꺽한 억양과 거센 발음만큼은 숨겨지지가 않는다. 영남인들은 심지가 굳고 부지런한 면은 좋으나 자기주장이 강하며 감정이 부드럽지 못한 면은 보충해나가야 한다. 영남인들은 타 지역 사람들의 말씨에 대하여 “그 사람들 말 들으면 간지럽다”라고 평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유의 강직성 유전자로 볼 때는 ‘간신 이미지’겠지만 보편적인 문화의식으로 볼 때는 세련되고 살아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오후에 시내를 산책하다가 저 앞에 가는 여고생 대여섯 명이 지껄이는 말을 들으니, 말이 서로 서로 섞여서 그런지 내가 가는귀를 먹어서 그런지 10여 미터 앞에 가는 그들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 교환수업 왔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가까이 다가가서 들으니 귀에 익은 사투리 접미사 몇 개가 들렸다. 내가 들어도 경상도 억양은 억셌다. 거기에다 학생들이 차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함께 지껄이니 상호 충돌로 말미암아 알아듣기가 더욱 어려웠다. 서울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가족과 두세 마디만 하면 옆 사람이 씨익 웃으며 “경상도에서 왔죠?다. 친구 둘이 대화를 하면 우리 경상도 사람이야 듣기 좋지만, 타 지역 사람들은 싸운다고 힐끔힐끔 본다. 그래서 10년 가까운 서울 유학과 직장 생활을 거쳐 지금은 중국 산동성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고 있는 딸아이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경상도 밀투와 억양을 서울-경기 식으로 부드럽게 하라는 당부를 한다. 또 이번에 충남 부여 출신인 며느리로 보게 되었는데 얼마나 말씨가 부드럽고 살핌성이 있는지! 한 생애 살다보니 말투라는 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낄 적이 많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뜻을 가진 말투라도 부드러움과 강함에 따라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효과가 다르다. 세 치 혀가 사람을 살렸다 죽였다 하며 천하를 움직이기도 한다.
“아 예, 북한 실학이 70년대까지는 강하다가 요즘 김정일부터는 쇠퇴했지요” “주체사상 때문이지요?” “예”.
‘주체사상’이라, 북한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남한보다 경제력이 우월했다는 게 공식적인 평가이다. 나는 197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는 강제노동과 강제학습으로 쉴 틈이 없으며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라는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웬걸,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내가 공교육을 받던 그 시절엔 북한이 경제력 면에서 우리보다 나았다네.
그런 북한이, 주체사상이 세워진 1970년대 중반부터 사양길로 들어서더니 마침내 1990년대 후반엔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참담한 기아를 겪으며 숱한 북한주민들이 굶어죽다니, 문제의 병인은 ‘주체사상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 북한의 경제력이 발전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바탕은 물론 공산주의이지만, 실제로는 실학사상이 현장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원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인데, 항일전선의 필요에 의해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해 활동했고, 소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으므로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소련군에게 업혀 정권을 수립했지만, 그것은 다른 조직이 목표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 수립이후 1970년대 초까지는 겉은 공산주의이지만 속은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대로 순항하던 노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일 것이다. 남에서 소위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일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자, 북한도 정권 수립 이후 지금까지 김일성 혼자 수상, 총비서 등의 직함으로 일인 지배체제를 강화해왔지만, 북한에 존재하는 반김파 제압과 동시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남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일인지배 체제를 더욱 굳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선전선동을 도구로 하여 김일성을 우상화 하는 것이고, 그 사상적 핵심으로 주체사상이 제시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받들어왔던 실학사상은 자연스레 쇠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학은 망국의 비애와 분노를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의 후예라면 누구나 실학을 대하는 마음은 같다. 그러므로 북한의 학자들 역시 실학 연구가 백안시되고 뜬금없이 주체사상이 부각되는 데 대하여 학문적인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주체사상이 부각 된지도 벌써 한 세대가 지났다. 그 중심이었던 김일성과 김정일도 이제 고인이 되었다. 주체사상만을 추구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하여 남한은 ‘침략전쟁’이라 부르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이 그 공동의 적을 궤멸시키자마자 경쟁 대상을 서로로 바꾼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김일성이 과욕을 낸 까닭 중에 중요한 축은 그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전제군주론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북한이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된 것이니,
어느 사상이나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젊은 김정은이 통치하는 2012년 이후의 북한은 어떤 노선을 걸어야 국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북한의 지배층 엘리트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한 시대의 정신적 가치와 목표를 연구하는 학자들, 그 핵심인 사상가들은 더 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남한에도 적용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확장에 따라 경제력은 향상되었지만, 그것이 영구한 우리의 재산이 아니라 세계정세와 경제 환경, 조건의 변화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란 데 불안의 근거가 있다. 또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에 따라 조선 판박이 신계급사회의 구조가 고착되고 있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2012년에 남북이 품고 있는 고민을 각각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어 뾰족한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성리학과 실학이 해결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성리학으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인간과 사회, 국가의 법칙을 관찰하며, 마음과 몸을 다스려 치인치세의 길에 성실한 것이 바로 성리학의 열매인 실학의 길 아니겠는가. 나라의 패망을 막고자 절치부심하던 실학자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근용 님과 성리학과 실학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몇 잔, 이동광 님과 목민심서에 대해 이야기 하며 몇 잔. 부두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올라오는 깊섶에서 또르릉 또르릉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아하 저 소리는 육지인 안동에서 듣던 소리, 이 아득한 흑산도에서도 들리다니 저 풀벌레는 도대체 어떻게 바다를 건너왔단 말인가. 곤충들뿐만 아니라 풀이나 나무 등 식물들도 똑같다. 섬사람들이 일부러 배로 실어 날랐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아득한 옛날 황해가 대륙이다가 지각운동으로 바닷물이 채워질 때 섬에 남은 생물들의 자손들이 아니겠는가.
남도 바다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산다/ 바다를 파헤치며 생긴 모습대로 살아간다. 미취에 물든 눈으로 바라보는 흑산도의 밤, 저 멀리 사람이 자는 집이라고 표시하는 전등 빛 몇 개가 점점이 가물거린다. 이 절해고도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욕심 없이 하루하루 잡초처럼 살아가는구나.
아침 흑산도 포구는 떠나는 이들로 수선스럽다. 오전 9시에 출항한 파라다이스호를 타고 비구름이 잔뜩 흐린 서해 바다를 달리는 두 시간 내내 조용한 관광객들, 남은 인생에서 다시 찾기는 어려운 흑산도를 떠나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가을비에 젖는 목포항에 얇은 애수가 깔려있었다. 비도 추적추적 내려 분위기 띄우는 데, 내 애창곡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가 울려 퍼지는 선술집에서 목포 막걸리 한 주전자에 홍어 한 접시면 딱 좋을 텐데 갈 길이 꽉 짜여 있으니 상상 속의 한 장면으로 남길 수밖에. 이제 가면 서남해 각각의 섬을 찾아가는 뱃길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목포항 대합실, 언제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기행 3일째 마지막 날의 일정은 강진, 해남이다.
목포에서 강진까지 가는 길, 차창에 비치는 남도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 능선이 품고 있는 들녘 사이를 흐르는 냇물이 먹여 살리는 마을과 마을의 작은 지붕아래 한 가족이 삶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영남이나 호남이나 똑 같은데도, 지난 세월 돌아보면 참 한심한 것이, 전라도는 무슨 괴물들이, 빨갱이들이 사는 곳으로 수구파들이 얼마나 매도하였던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지역감정과 용공조작의 더러운 수법으로 먹고사는 족속들이 아직까지도 끄떡없으니, 정말 나쁜 놈들이다. 깨인 사람들이 내뿜는 지성과 양심의 힘으로 지워야할 슬픈 유산이다.
강진읍사무소 앞 남문식당에서 남도 점심 한 상 곱게 받았다. 박석무 이사장님을 생각하며 정성껏 차렸다는 음식은 맛이 있었다. 남도 특산품인 갖가지 젓갈의 맛에 밥을 한 그릇 반이나 먹었다. 가을비 촉촉이 맞으며 찾은 곳은 사의재.
다산은 1797년 6월 22일 장문의 「변방사동부승지소」를 올려 일단 천주교도라는 굴레를 피한 후 1797년 7월부터 1799년 4월까지 곡산부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평안한 생활을 하였다. 1799년 5월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반대파들의 참소로 7월에 체직이 허락되면서 벼슬살이를 마감하고, 1800년 6월 정조가 세상을 뜨고 난 후에도 소내의 별장으로 돌아가 형제들이 함께 모여 날마다 경전을 강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01년 2월 신유사옥이 일어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19일 동안 문초를 받은 후 출옥되어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큰형인 손암은 신지도로 유배되고 바로 위의 형인 약종은 옥사했다.
장기에서 『기해방례변』를 저술하고 「백언시」를 지으며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해 10월 「황사영밀서」 사건으로 손암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전번엔 다행히 목숨이라도 건져 귀양이라도 갔지만, 덜컥 이번엔 온 조정 신하들과 백성들이 분노하는 「황사영밀서」 때문에 다시 잡혔으니, 그것도 황사영이가 조카사위이니, 이번엔 운 좋으면 사약이고 보통이면 효수임은 명약관화 한 일이 아니랴, 인간 정약용이는 얼마나 절망하였겠는가. 천만다행으로 11월에 다산은 강진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길고 긴 귀양살이를 시작하였다.
강진에서 귀양살이가 처음으로 자리한 곳이 사의재였다. 다산이 이름을 그럴듯하게 붙여서 그렇지 사실은 동네 우물가에 있는 조그마한 주막집 골방이었다. 비록 흙으로 담을 쌓아 위에 몇 개의 서까래를 걸치고 짚으로 덮은 토막집 골방이지만 일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이한 다산에게는 어느 기와집 온돌방보다 절실하였을 것이다. 마침 주모의 아들이 강진현 포졸이어서 귀양 죄인을 감시하기가 편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다산의 성품이 학자답게 점잖고 후덕하였기 때문인지 주모로부터도 괜찮은 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훗날에 쓴「상례사전서」에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그 곳 백성들은 유배 온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으로 보아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이윽고 나는 창문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혼자 앉아 있게 되었다. 누구와도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글로만 읽고 말로만 듣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당시의 고통을 아는 체 하지만, 1801년 겨울 전라남도 강진현 주막거리 움막집 골방에 사는 다산이야말로 어마나 춥고 배고팠겠는가.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그토록 처절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했기에 후일의 다산학문이 있는 것, 정말 불행 중 다행 아니랴.
몇 년 전에 강진군에서 실제보다 훨씬 멋지게 복원한 사의재 뒤뜰에는 주모와 함께 그의 딸이 동상으로 서 있다. 전해오는 민담에는 다산이 주막집 딸과 낳은 자식이 있었는데 다산이 귀양이 풀려 귀향한 후에 그 자손이 찾아 온 것을 집안사람들이 기피했다고 한다. 정사가 아니라서 대접 받지 못해서 그렇지 야사나 민담이 정사보다 훨씬 더 진실을 담고 있는 수가 많다. 학자로서의 다산만 볼 게 아니라 30대 후반의 혈기방장한 장년으로서의 다산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 민담이 시실일 가능성이 높다. 손암이 흑산도에서 여인의 수발을 받고 자손을 보았듯이 다산이 여인의 수발 없이 18년이나 되는 긴 긴 귀양살이를 하기는 불가능했음은 분명하다. 그도 남성인데 정욕을 주체하기가 난감하였을 것이다. 사실이라면 주모는 장모, 포졸은 처남이 되나? 물론 다산 생전이나 사후나 밝은 하늘 아래에 내세울만한 일은 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핏줄의 힘은 세월을 초월하는 법, 이 땅 어딘가에는 그 민담의 후손들인 정씨들이 ‘나는 다산 할아버지의 후손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슴속 깊이 품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다산이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초기 4년 동안에 의식주를 보살펴 주었던 주모의 공덕을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기념식마다 다산을 기려 잔을 올리는 후학들은 큰상 아래에 조그마한 상을 차려 주모에게 술 한 잔을 올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분의 차이를 떠나 고마운 이를 대접하는 실학정신이 아니겠는가.
정적들의 칼날을 피해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다산 역시 인간이므로 두 번째 귀양살이 초기에는 인간적으로 많은 고뇌와 좌절을 겼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학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해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서 많은 책을 지었다. 그 다짐이 「사의」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박석무 지음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376p에 서술된, 다산이 두 해 뒤인 1803년 11월에 지은「사의재기」는 다음과 같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라는 것은 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義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그도 인간이니 우선은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화급하였을 것이다. 마음도 울적하고 몸도 쇠약한데다가 조악한 음식을 먹다보니 겨울 하루를 넘기는 것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 사람은 어찌해서라도 살아가는 법, 추운 겨울이 수그러지고 따뜻한 기운이 도는 1802년 봄부터는 마을 사람들의 경계가 좀 느슨해지면서 아전들의 아이들 몇을 가르치는 낙으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또 이때부터 마음과 몸을 추슬러 본격적으로 학자로서의 역할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을 성찰하는 「사의」를 지은 것이리라. 그것은 절대절망에서 自起하기 위한 의지였다. 궁형을 받았으나 폭하지 않은 사마천의 의지와 상통하는 선비의 의지였다.
齋는 어디에나 있다. 한 선비의 의지가 고인 곳이라면 주막 골방도 재가 된다. 禪房은 어디에나 있다. 한 승려의 의지가 고인 곳이라면 암벽 그늘도 선방이 된다. 교회는 어디에나 있다. 한 기독교인의 의지가 고인 곳이면 헛간도 교회가 된다. 꼭 수천 권 책으로 꽉 찬 齋가 있어야 독서와 집필을 하고, 따뜻한 선방이 있어야 좌선을 하고, 웅장한 건물이 있어야 하느님이 굽어보시는 게 아닐 진데, 예나 지금이나 으리으리한 데에 있어야만 지극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소박 속에서 반짝이는 순수를 언제쯤이면 찾을 수 있으련가.
귀양살이 이전의 다산은 이미 수양론을 마쳤기 때문에 「사의」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귀양살이를 시작하면서 와르르 무너진 수양론을 다시 쌓기 위해선 단단한 결심이 필요했고, 그 결심이 응축된 것이 「사의」이다. 즉 1801년 겨울의 다산은 反 「사의」였다고 볼 수 있다. 혼돈의 생각, 초췌한 용모, 분노의 말, 불안한 동작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었다면 몇 해 안 가서 다산이 파멸하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경을 면밀하게 성찰하고 불끈 다시 일어선 다산, 명색이 선비요 학자인 내가 이런 꼴을 보여서 되겠는가 하는 자각심을 회복할 수 있었던 다산이었기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위인과 범인의 차이란 한 결심에 달린 것이다.
네 가지 항목이 다 좋은데, 용모와 언어 면에서는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나 여러 사람 앞에서라면 어느 정도 엄숙한 표정과 몸가짐을 갖는 게 맞지만 하루 종일 엄숙한 용모를 짓기란 참 피곤한 일이다. 혼자 있을 때는 풀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단단히 묶는 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 이중 표정의 위선이 굳어지기 쉽다. 본인도 피곤하지만 상대하는 사람도 심적 부담감과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연스러운 표정과 용모를 갖는 것이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 좋을 것이다.
과묵이란 꼭 필요한 말만 한다는 것인데, 인간이 다른 동물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게 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어느 자리에서라도 보면 말이 많은 사람은 나중에 수답다는 평을, 과묵한 사람은 점잖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불필요하거나 남을 흉보는 등의 난잡한 말을 분별없이 토로하는 것은 삼가야하지만, 자기 속에 든 생각을 감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과묵도 좋지만 입을 꾹 닫고 있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누구나 ‘저 놈이 무슨 꿍꿍이속을 갖고 있을까?’하는 궁금증 섞인 불쾌감을 갖는다. ‘말 한 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은 사죄와 설득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말 한 마디, “수고 많으십니다”라는 위로의 말 한 마디, “날씨가 좋습니다”라는 친밀감 표현의 말 한 마디에도 해당된다.
다산 정약용 연보에 기록된 이 사의재 기간 동안의 저작물에 대하여 살펴보면, 1801년 겨울부터 1802년 겨울까지 1년 동안은 주로 시를 지었는데, 초기엔「사평별」, 「석우별」, 「하담별」등의 別試를, 중기엔 「고시27수」, 「독좌2수」, 「객중서회」등의 정통한시를, 후기엔 「탐진촌요 20수」, 「탐진농가」, 「탐진어가 10장」등의 지역성과 민생을 담은 긴 참여시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개인적 한을 중심으로 한 시를 쓰다가 차츰 고시의 세계로 다시 침잠하며 정신을 수습하고, 본연의 관심사인 사회성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03년 봄부터 1805년 겨울에 보은산방에 기거하가 시작한 때까지 3년 동안은 「단궁잠오」, 「조전고」, 「예전상의광」, 「아학편훈의」, 「정체전중변」 등의 본격적인 학문 탐구와 저작 활동을 하는 동시에 「애절양」, 「충식송」, 「황칠」, 「전가만춘」 등의 사회시와「사의재기」, 「오작」,「하일대주」,「독소」,「우래 12장」,「구우」 등의 서정시를 지었다.
다산은 1805년 겨울에 지기이자 제자인 아암 혜장선사의 배려로 환경이 주막집보다 훨씬 좋은, 읍내의 동쪽 5리 지점에 있는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기거하다가 1년 뒤인 1806년 가을에 제자 이청의 집으로 이사 가서 1808년 봄까지 살았다.
마흔 일곱 살인 1808년 봄부터 귤동마을 해남윤씨 유지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산정자인 ‘다산초당’에 자리 잡아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다산학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지금도 귤동 해남윤씨들이 건재한 까닭 가운데 하나로 그 당시에 다산을 도운 공덕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가을비 구구죽죽 내리는 산길을 걸어올라 다산초당을 찾은 오후 네 시. 새로 잘 지은 초당과 동암 서암이 낯설었지만 이곳이 다산 선생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의 대표작을 포함해서 그 많은 책을 쓴 현장이라니 감회가 진했다.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이곳을 찾는 이들은 한 생각 하고 한 뜻을 가진 우국지사들이다. 실학의 결산지를 직접 밟아봄으로써 이 땅 금수강산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얕고 짧은 생각으로 어찌 다산의 높은 공덕을 칭송하겠는가마는 이왕에 다산에 올랐으니 몇 자 어설프게 나열해본다.
登茶山 등다산 다산에 올라
秋雨漸濕湖南情 추우점습호남정 가을비에 슬며시 젖어라 호남의 정
誰有問道登艸堂 수유문도등초당 뉘 있어 도를 물어 초당에 오르나
蓮池素涓古今聲 연지소연고금성 연지 작은 물줄기는 고금의 소리
山茶丁石先生影 산다정석선생영 산다나무 정석에는 선생의 그림자
宮刑十八磨丹心 궁형십팔마단심 모진 귀양살이 십팔 년 붉은 마음 갈더니
隔世二百哉針定 격세이백재침정 이백 년 세월 넘어 비로소 찾은 바늘
製絲實學縫南北 제사실학봉남북 실학을 실로 삼아 남북을 꿰매어서
朝鮮家家滿笑紅 조선가가만소홍 새 아침 집집마다 가득해라 웃음 꽃
반계와 성호가 그러했지만 다산 역시 퇴계철학에 심취하여 주리론을 긍정하였다. 리기론과 인성론, 사칠론 분야에서 퇴계철학을 이었지만, 학문하는 자세와 제자를 교육하는 정성 면에서는 퇴계를 모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에 내가 쓴 글 가운데, 다산이 퇴계에 비추어 자기의 글 쓰는 습벽에 대한 반성을 하는 것에 대하여, <1563년 퇴계가 李仲久에게 답한 편지>와 <陶山私淑錄>의 한 편 글을 서로 비교하면서 ‘退溪와 茶山의 창작의지와 표현욕구 비교’라는 제목으로 논평한 것이 있어 덧붙여 본다.
「제가 쓴 <陶山記>와 <陶山雜詠>이 그대의 책상 위에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너무도 땀이 나고 송구스럽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지어서는 안 되지요. 산에 사는 사람에게 아무 일이 없다보니 그저 필묵으로 장난을 치며 즐긴 것뿐입니다. 글상자에 감춰두고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뜻을 같이 하는 벗 여럿이 멀리서 나를 찾아와 사흘 밤을 자고 갈 때 선물할 것이 없어 경계를 깨뜨리고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벗들이 가져가겠다고 조르기에 막지 못하고 퍼뜨리지나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요. 그런데 벗들이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었나 봅니다. 아니면 그 글을 베낄 때 아이들이 베껴서 내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남이 모르게 하려면 차라리 짓지 않는 게 낫다고 합니다. 이미 짓고서 다시 비밀에 부치는 짓은 옛사람들이 비웃은 바인데 제가 이러한 경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 1563년 퇴계가 李仲久에게 답한 편지에서 -
나는 평소에 큰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글을 지어내고, 지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버릇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써내려가고, 글을 짓고 나서는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좋아한다. 문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내 주장이 흠이 없는지 편벽된지 아니면 만난 사람이 가까운지 먼지를 미처 헤아리지 않고 급히 보여주려고 건넨다. 그러므로 남에게 한바탕 말하고 나면 뱃가죽 안과 상자 속에는 한 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로 인하여 정신과 氣血이 흩어지고 새어나가서 쌓이고 익어가는 맛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리하고서야 어찌 性靈을 함양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와서 점검해 보니, 모두가 輕淺 두 글자가 빌미가 된 결과다. 이것은 덕을 숨기고 수양하는 공부에 크게 해로운 데 그치지 않는다. 비록 주장이 현란하고 글 솜씨가 화려하다고 해도 차차로 천박하고 값싸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지금 선생의 말씀을 읽고 보니 느끼는 바가 한결 크다.
- 퇴계 사후 224년이 지난 1795년, 충청도 청양 금정찰방인 34세의 다산이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글 한 편을 읽고 그 독후감을 써서 모아둔 글들을
나중에 묶어 <陶山私淑錄>을 발간했다. 금정찰방직의 어느 날 다산이 퇴계가 1563 년에 이중구에게 답한 편지를 읽고 난 느낌을 적은 글이다. -
퇴계와 다산, 두 거인의 살아생전 진면목을 후인들이 알 수 있도록 그들이 손수 써서 남긴 글이 매우 많지만, 남들보다 문자를 더 많이 아는 그들이 가진 창작의지와 표현 욕구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은 희소하다.
200여 년이란 시간적 거리를 갖지만, 앞의 글은 퇴계가 60대 초반에 쓴 글이고 뒤의 글은 다산이 30대 후반에 쓴 글이다. 두 글은 비록 단문이지만 그 속에는 두 선생의 창작의지와 표현욕구의 원형질이 녹아있어 관심을 끈다.
30대의 다산은 60대의 퇴계가 쓴 글을 보고 매우 감명 받았다. 퇴계의 조심스러운 성품 그대로 자신이 쓴 시문이 남에게 읽힌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글 상자에 꼭꼭 숨겨두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퇴계를 보고, 즉흥적으로 글을 쓰고 자랑삼아 발표하길 좋아하는 자기를 반성한다. 다산 학문의 원본은 博學多識으로 주로 경세학이다. 그에 비하여 퇴계 학문의 원본은 深學穿識으로 주로 心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창작과 발표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확연히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詩 보다는 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퇴계가 <陶山記>와 <陶山雜詠>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해서 부끄러워 한 것은 그것이 자기 학문의 정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心學을 주전공으로 하고 詩나 記는 여가 시간에 휴식 삼아 즐기는 정도의 것으로 여겼다. 心學 분야에 있어서 퇴계가 전개한 학문과, 자기 학문에 대해 타학자들이 반박에 대해 반론한 것들을 살펴보면 논리 전개가 매우 집요하고 꾸미는 인사치레 정도의 허사 몇 마디 말고는 추호도 자기 이론과 근거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거나 수정하는 법이 없다.
앞의 글에서 보듯 퇴계는 주자성리학문은 존중했지만 시와 기 등은 雜文으로 여겨, 자기 학문이 세상에 널리 퍼짐에 대하여선 어떠한 부담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시와 기 등이 세상에 퍼짐에 대하여선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한 현상은 조선조 학자들 대부분이 갖는 학문관과 문학관이었다. 그것은 감성적 표현인 시는 학문을 쉬는 틈을 이용해서 하는 餘技로 여기고, 논리적 전개인 학문은 사대부가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는 관료적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인생관을 가진 인사들 대부분의 일생을 관통하는 정신의 중심축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위 퇴계의 답서에서 보듯 ‘이러한 것들은 본래 지어서는 안 되지요’, ‘그저 필묵으로 장난을 치며 즐긴 것뿐이지요’, ‘선물할 것이 없어 경계를 깨뜨리고 꺼내 보여주었군요’, ‘퍼뜨리지나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으나’, ‘아이들이 베껴서 내보냈는지도 모르지요’, ‘이미 짓고서 다시 비밀에 부치는 짓은 옛사람들이 비웃은 바인데 제가 이러한 경계를 범하고 말았군요’ 등의 구차스러운 변명을 중언부언 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퇴계의 이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자기의 중년기 30대 중반의 집필 활동에 대하여 깊이 반성했다. 그렇지만 퇴계의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장치한 겸사가 지나쳐서인지 시와 기에 대한 하대가 글의 전면에 뚜렷이 드러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퇴계는 자기의 학문을 정리한 文에서는 추호도 물러섬이나 감춤이 없다. 그의 文 곳곳에도 겸사들이 장치되어 있지만 조금만 뒤집어 보면 그것이 형식적인 치레임이 곧 드러난다.
그러나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전편을 통해서 겸사를 치렁치렁하게 달아놓으면서 유독 시와 기에서만은 그것들을 심심해서 지은 잡문이라 하며 감추려고 한다. 천하의 금도인 ‘경계’를 두 번이나 깨뜨리고 범하였다는 말을 쓰면서도 이왕 공표 되었으니 은근히 세상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시와 기 분야에선 수승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승한 작품이 못 되니 감추는 척 하고, 어찌해서 세상에 퍼져나가 세인들이 왈가왈부 하더라도 본래부터 자기가 하대한 것들이기에 별로 괘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陶山雜詠>은 좋은 시임에 틀림없다. 수천 편의 그의 시가 대부분 여흥 소일거리 수준이지만 <陶山雜詠> 만큼은 산수에 묻혀 사는 학자의 흉중이 잘 드러나 있는 수작이다.
적어도 시에 있어서만은, 방관하는 듯한 이러한 태도가 시인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무릇 작가라면 시든 문이든 자기의 심혈을 짜내어 쓴 작품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시도 정신의 작용 흔적이고 문도 정신의 작용 흔적이다. 짧든 길든 둘 다 작가의 치열한 정신 작업 결과이다. 그럼에도 어느 한 쪽 편만 들고 다른 한 편은 소홀히 여김은 작가 자신 정신의 균형미를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다산은 퇴계의 편지를 읽고, 성리학 연구의 선배인 퇴계의 학문과 학문하는 태도에 대하여 감명을 받고 존중만 할 줄 알았지, 퇴계가 이 글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의는 놓치고 있다. 퇴계의 겸사 속에 감추어진 구차스러운 변명에 대하여 정확한 비평을 하지 못하고 있다. 주자성리학이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시대적, 공간적 환경, 사숙을 하며 존경하는 학문 선배인 퇴계 등의 이유로 하여 다산은 이 편지 속에 담긴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금정찰방 시절에 쓴 그 글에서 볼 수 있는, 다산에게 주어진 반성은 계기는 그 출발점부터 어긋나 있다. 시든 문이든 작가라면 누구나 가져야만 할 창작 의지와 표현 욕구에 대한 진실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 담긴 퇴계의 그 편지를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발표하는 자기의 작가적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반성하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퇴계는 매우 노회한 겸사를 사용하며 시와 기 등의 부문에서의 자기 역량의 한계를 자인하는 글을 썼음에도, 다산은 시와 기라는 부문이 아닌 학문과 논설 부문에까지 범위를 넓혀서 퇴계가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읽고 있다.
다산은 매우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의 편지에서 보는 여러 문장들,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글을 지어내고, 지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버릇’, ‘글을 짓고 나서는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버릇’, ‘문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내 주장이 흠이 없는지 편벽된지 아니면 만난 사람이 가까운지 먼지를 미처 헤아리지 않고 급히 보여주려고 건네는 버릇’이 있는 다산은 전형적인 문필가이다.
이어진 글에서 그가 ‘그러므로 남에게 한바탕 말하고 나면 뱃가죽 안과 상자 속에는 한 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로 인하여 정신과 氣血이 흩어지고 새어나가서 쌓이고 익어가는 맛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리하고서야 어찌 性靈을 함양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지만, 그러한 반성이 갖는 의미와 비중보단 앞에서 스스로가 열거한 여러 ‘버릇’들이 훨씬 빛난다.
‘정신과 氣血’, ‘쌓이고 익어가는 맛’, ‘性靈을 함양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 등은 다산이 갖는 ‘여러 버릇’들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오히려 강화 된다. ‘버릇’들이 자의든 타의든 강제로 꺾였다면 결코 그 거대한 작품들이 생산될 수 없었다. 이후의 다산의 업적 등을 보면 다산의 반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이어서 ‘輕淺’을 말한다. 물론 글은 ‘重深’ 하여야 한다. 하지만, ‘천박하고 값싸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되어선 안 되지만 ‘주장이 현란하고 글 솜씨가 화려한’ 것이 무조건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시든 문이든 작가 자신이 의지와 정서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면, ‘현란과 화려’라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작품 창작 표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지금 선생의 말씀을 읽고 보니 느끼는 바가 한결 크다’라는 다산의 결어가 갖는 의미는 무겁다. 선생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최대한 자기화한 결과로 그 거대한 작품들이 -시든 문이든- 생산되었다. 선생의 말씀이 갖고 있는 근본 의미인 창작과 발표에서의 ‘겸손’을 단순하게 받아들였기에, 정직하지 않게 받아들였기에 30대 중반 자기의 작업 태도를 발전적으로 반성한 다산은 자기의 ‘여러 버릇’들을 더욱 심화하여 내면세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다산이 선생의 말씀을 과중하게 받아들여 창작과 발표에 있어서 그의 ‘여러 버릇’들을 억제하였다면 오늘날 남아있는 그의 저서들은 매우 ‘輕淺’하였을 것이다.
다산이 가진 多思 多作 多辯의 버릇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탐구하고 작문하는 일생이 가능하도록 한 원동력이다. 물론 다산이 반성문에서 갈파하듯 그것들이 지나치면 정신력이 과소비 되거나, 문자는 알지만 능력이 다산에게 못 미치는 타인들로 하여금 질투와 시샘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다산이 그러한 작은 방해물들을 너끈하게 타고 넘었기에 오늘날의 다산학이 있는 것이다. 조금도 굴하지 않는 多思 多作 多辯의 버릇이 있었기에 더 큰 학문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퇴계처럼 자기 글, 詩와 記에 대한 지나친 겸사보다는 다산이 전개한 多思 多作 多辯의 글쓰기와 발표 태도가 오히려 역동성이 있어 후세 역사에 더 보탬이 된다.
다산은 ‘輕淺’ 두 글자란 덕을 숨기고 수양하는 공부에 크게 해로운 데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현란한 주장과 화려한 글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輕淺’ 두 글자 때문에 차차로 천박하고 값싸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일반적인 면에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산의 이후 역사적 업적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輕淺’이란 멀리 뛰기 위하여 한 번 움츠리는 개구리처럼 더 큰 문필사업을 하기 위한 정신의 청소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글이 ‘輕淺’하면 세상에 언어 공해만 끼친다. 출판 환경이 열악하던 옛 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출판문화가 왕성하고 발표 기회가 다양하며 인터넷 등을 통해 디지털화, 사유화 된 현대엔 온갖 ‘輕淺한 글’이 난무하면서 세상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쓰고 쉽게 발표하고 쉽게 문명을 얻고자 도모하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쓴 글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 등 이러한 것들이 '병통'이지, 평생토록 치열한 정신 작업을 궁구한 다산이 말한 ‘輕淺’이란 ‘多思 多作 多辯의 버릇’을 의미하는 것으로 좋은 '병통'이다.
200여 년 전 선생의 한 편 글을 읽고, 지금까지의 자기 글쓰기 태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정신과 氣血’, ‘쌓이고 익어가는 맛’을 청소하고 재충전한 다산이야말로 그릇이 큰 학자 아닌가. 다산의 한 편 글 이후 200여 년이 지난 2008년 한여름 칠월 어느 날 무더위 속에서 兩 선생의 兩 글을 비교해보는 兩白 나의 창작의지와 표현욕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그릇 크기는 어디쯤인지 스스로 궁금하다.」
- 『兩白集 秋 疏論筆談』에서 -
백련사 가는 오솔길 가에는 비에 젖는 산다나무들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의 많은 호 가운데 유독 다산은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이 산에서 10년을 보내며 후세에 남는 책들을 썼으니 어찌 ‘다산’을 호로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산의 능선을 따라 반시간 남짓 걸어 산 뒤의 깊은 골로 들어서니 고색창연한 백련사 역시 가을비를 맞고 있었다. 1805년 초여름, 다산이 혜장선사 아암을 만나 학우이자 사제 간으로 인연을 맺고, 1811년 40세를 일기로 아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를 마시며 함께 시, 주역, 논어를 논하며 비로소 학자다운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아암도 고맙지만 백련사는 더욱 고맙다.
백련사를 하직하고 서남향으로 30분을 달려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을 찾았다. 15세기 중엽에 지어진 녹우당의 사랑채 현판에 걸려있는 ‘綠雨堂’ 당호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이서가 쓴 것이다. 또 이곳 해남윤씨는 다산의 외가이기도 하니 실학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답사한 실학의 흐름을 보면 경기도 남양주 소내의 ‘여유당’과 이 ‘녹우당’을 양 끝점으로 기호지방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축이 있다.
귀가의 방향이 서울이 아니기 때문에 녹우당 주차장에서 대구 여욱동 선생, 여수 김창환 씨 등 두 사람과 함께 일행들과 헤어졌다. 해남버스정류장에서 여 선생을 먼저 보내고, 광주행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김창환 씨와 대화를 나누며 비로소 답을 얻었다. 내가 실학기행에 참가 신청을 하고 안동역에서 서울행 신새벽 열차를 탄 까닭, 성리학자로서 실학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얻었다.
문 : 성리학과 실학의 접목이 화두입니다.
답 : 성리학의 근본을 충실히 하고 실학을 해야 성공인데, 제도 개혁에만 치중했다. 제도는 이미 좋은데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 : 그래서 제도보다 인성이 중요합니다. 성리학에 충실 하는 것이 곧 실학정신의 정수입 니다. 현상, 생활 발전만이 목표가 아닙니다. 다산정신은 청렴, 자각, 입지입니다.
답을 들으며 이제부터 재미있는 대화를 본격적으로 나누려는 데 여섯시 반 광주행 버스가 문을 열었다. 이제 지식과 지혜는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다. 실학을 화두로 삼아 시대를 통찰하려는 노력은 유학, 국학, 한문학교수들만의 보도가 아니라 민중 속 지식인들의 것이다. 여수 공단의 한 회사원인 김창환 씨와 버스정류장에서 주고받은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내공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택시비를 선뜻 먼저 내는 그 마음이 고맙다. 직장인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다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인문학을 탐구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한 걸음 다가온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이번 실학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다 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남북 칠천만 인구 중에 해마다 실학기행에 참가하는 사람만큼은 생각이 품질보증이다.
해남에서 광주까지 저녁 어스름으로 보는 풍경, 어디가도 내 눈에 익숙한 것들이다. 다시는 남도의 사람들이 오일팔의 주검 앞에서 울도록 해서는 안 된다. 남도의 아름다운 강산에 곱게 피어난 순정을 존중해야 한다. 광주버스터미널에 넘치는 남도의 젊은이들, 그들의 활력을 가슴 가득 느끼며 대구행 차표를 끊었다. 자정 가까이 대구에서 영천까지 택시를 타고, 영천 발 0시 40분 열차를 타고, 꼭 72시간 전에 열차에 올랐던 그 자리에 내렸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충청북도를 지나 강원도를 지나 경기도를 지나 서울까지. 서울에서 모여 경기도를 답사하고 전라북도를 답사하고 전라남도에서 하루 밤 자고 황해 바다를 지나 흑산도를 답사하고 하루 밤. 목포를 지나 강진과 해남을 밟고 광주를 지나 대구를 지나 경상북도 영천에서 열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다시 안동. 타원형으로 한바퀴 2박3일 동안 돌아본 강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강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없다면 적막강산일 뿐, 뭇 사람 중에서도 한 생각 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2012년 가을 실학기행때문에 강산이 더욱 아름다웠다.
2012년 9월 18일에 시작하여
2012년 10월 13일 20시 21분, 내일 아들 결혼식을 16시간 앞두고
열락연재에서 草稿하며 筆을 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