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여행기 9] 셋째 날(12월 19일)
남원읍에 있는 유일한 모텔 <기풍장>에서 자고 싶지 않아 남원읍내 길을 서너 차례 이상 왔다 갔다 했지만 끝내 다른 숙소를 찾지 못했다. 민박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남원포구 근처의 민박집에도 가봤지만 쥔 남자가 무뚝뚝한 말투로 방이 없다고 했다. 결국 그 모텔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모텔은 방이 따뜻하고 더운 물이 나온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나쁘지는 않을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안내 데스크에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혼자 잘 거니까 깎아달라고 했더니 오천 원을 깎아주겠단다. 값은 이만오천 원. 남자는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면서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순전히 내 느낌이었지만. 방은 3층이었다. 긴 복도의 입구에 있는 방.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나를 맞이한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조금 있으면 따뜻해지겠거니, 하면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다른 날은 저녁 식사를 먼저하고 씻었는데 이 날은 먼저 씻고 싶어졌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더니 피로가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씻고 나왔는데도 방바닥은 냉골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썰렁했다. 해서 안내데스크로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방이 왜 이렇게 추워요?
지금 난방을 올려서 그래요. 금방 따뜻해질 거요.
남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따뜻해진다니까 그러려니 하고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디서 무얼 먹어야 하나, 하면서 걷는데 순대국집이 보인다. 멀리 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거기로 들어갔다. 순대정식을 먹었다. 입맛이 도는 게 감기가 어느 정도 나아가는 것 같다. 다행이다. 빵집에 들러 빵을 2개 산 뒤 다시 모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은 여전히 춥고 썰렁하다. 이 노무의 방이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더러 따뜻하게 데워달라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안내데스크로 전화를 했더니 이번에는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방이 너무 춥다, 왜 이러냐고 항의를 했더니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란다. 아저씨가 너무 늦게 난방을 켜서 그런 거라나.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내방만 이렇게 추운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경우, 현장 확인이 필수. 해서 확인에 들어갔다. 내방 바로 앞방으로 간 것이다. 이 모텔은 방을 잠가두지 않았다. 그래서 앞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앞방의 문을 여니, 따뜻한 공기가 확 느껴진다. 내방과 엄청난 온도 차이가 난다. 이럴 수가. 아무리 모텔비를 깎았다고 이렇게 따뜻한 방을 놔두고 냉방이나 다름없는 방을 주다니.
다시 안내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아줌마가 전기요를 가져다준단다. 이미 욕실을 사용했으니 방을 바꾸어 주기가 난감하다는 기색을 비치면서. 방을 바꿔달라고 항의를 할까 하다가 커다란 전기요를 끙끙거리면서 3층까지 날라다준 아줌마를 생각해서 관뒀다. 어쩐지 이 집에 오기 싫더라니... 침대 위에 전기요를 깔고 온도스위치를 최대한 올렸다. 그런데, 어찌된 건지 이노무 전기요도 금방 따뜻해지지 않는다. 아, 오늘은 추운 방에서 자야하는 운명인가 보다.
길 위에서 잠든 개를 만났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은근히 화가 치민다. 내 돈 주고 자는데 냉방이 말이 되나, 싶어서. 해서 다시 항의전화를 했다. 이 아줌마,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난방을 제 시간에 켜지 않은 아저씨 탓을 하면서.
근데,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혹시 난방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전화를 끊은 뒤, 나는 혼자 툴툴거렸다. 이 모텔에서 절대로 자지 말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야겠다, 하면서. 그런데, 조금 뒤 방안의 전화벨이 울린다.
예약이 취소된 방이 있는데, 거기로 가세요.
이 아줌마,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방을 바꿔주기로 한 것이다. 이 한적한 동네에 모텔을 예약하면서 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냥 그렇게 핑계를 대는 거지. 아무튼 나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짐을 챙겨 방을 옮겼다.
그 방은 바닥도 따뜻하고, 공기도 따뜻했다. 내가 먼저 들어갔던 방과 확실하게 온도 차이가 났다. 진즉에 바꿔줄 것이지. 그래도 모텔 쥔이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하긴 그 방에 계속 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방이 춥다고 안내데스크에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방으로 옮기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방바닥이 울리는 것 같더니 스피커에서 나오는 듯한 음악소리와 더불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아, 이런. 그제야 모텔 입구에 붙어있던 단란주점 간판이 생각났다. 이 모텔은 단란주점이 같은 건물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이 앞섰다. 밤새도록 저 노랫소리를 들어야 하나? 편하게 단잠을 자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단란주점의 노랫소리라니. 이럴 바에는 차라리 찜질방으로 가는 게 나을 뻔 했다는 후회가 생긴다. 이 모텔의 간판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이렇게 맞아 떨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눈을 감았는데 노랫소리는 귀에 착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크게 들린다.
그 소리에 신경을 쓰다가는 아예 날밤을 샐 것 같아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작정한다. 물론 작정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이 12시가 조금 넘자 노랫소리는 그쳤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단란주점의 경기가 그리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밤새도록 북적이지 않은 것을 보니. 나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온 종일 걸어서 다리가 묵지근하고 발가락 끝이 무엇엔가 심하게 눌린 것처럼 아팠지만 참을 만 했다. 내일 아침이면 묵지근한 다리는 가벼워져 있을 것이고, 발가락 끝의 통증 또한 많이 사라질 것이다. 단란주점의 노랫소리가 그친 다음에도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낯선 모텔에 혼자 누워 자는 밤은 참으로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