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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골 3:1-4)
할렐루야! 주님을 사모함으로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골로새서 2: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말씀 가운데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한번 따라해 볼까요?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모든 위의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전 함께 읽었던 골로새서 2:12절과 3:1절 말씀을 살펴보면,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에베소서 2:5-6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 그대로입니다.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죽은 적이 있습니까? 다시 살아난 적이 있습니까?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무슨 의미입니까? 육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렇지요.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 육신에 속해 있던 사람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같이 죽고,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다시 난다”, “거듭난다”, “중생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중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이 주님을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로운 존재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벌써 죽었다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욕심이 죽지 않고, 내 자랑이 죽지 않고, 자존심이 죽지 않고, 성질이 죽지 않고, 정욕과 이성의 자랑과 허영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고, 그렇게 해서 생긴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덜 죽어서 버둥거립니다. 아직도 설죽어서 그렇게 생각도 복잡하고, 문제도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이미 죽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이런 이야기야 있지 않습니까? 어떤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신부가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몰래 전화를 걸다가 들켜 가지고 얻어맞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결혼과 동시에 이제는 옛 생활, 옛 친구를 다 잊어야 합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할 것 없이 딱 끊어 버려야 됩니다.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죽음은 회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죄를 완전히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고, 죄악된 과거와 관련을 아주 끊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고맙고, 은혜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크고,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는 순간 내 모든 것, 내 욕심, 나 중심적인 교만, 세속적인 욕망과 고집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봄날에 눈 녹듯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큰 물살에 더러운 것들이 다 실려가듯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을 쳐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버둥거리지를 않습니다. 두 구조대원은 그제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 목까지 끊어 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하고 건져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율법 앞에 죽고, 은혜 앞에 죽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성자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 보고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 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도 없고, 중상모략을 당해도 말이 없습니다. 사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온갖 중상모략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왜요?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0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5: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다 못박아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율법 앞에 죽고 이제는 은혜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의 나 된 의미, 나의 나 된 목적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제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에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12절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내 이상입니다.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잠깐 되는 쾌락은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 놓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가련하고 처절한 모습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참된 생명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에 돌아온 탕자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직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서 삽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오직 돌아온 감격과 감사, 그것으로만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복이 나의 복이요,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 됨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복과 기쁨이 돈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께 있음을 깨닫고 이제야 진정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왜 탕자 이야기를 하신 줄 아십니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은 것입니다. 죽어 버리면 편합니다. 걱정에 매이고, 근심에 매일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로운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 광부가 노다지를 찾아낸 그 기쁨과 수고의 보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씨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은 설명으로 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도 그렇습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를 집어들고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말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 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의 손에 있는 씨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씨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기 위하여 주의 전에 나온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새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그렇지요. 한 마디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태어난 우리들은 무엇을 찾아야 하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어거스틴을 아시지요. 그가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희한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그를 심문합니다. ‘너는 누구냐?’ 어거스틴은 대답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의 머리와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통곡을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움으로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속과 겉이 일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전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이전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찾아야 하고, 그분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아모스 5:4절을 보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살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가 그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 모두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언제나 주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은 불후의 명작입니다. 그 그림 뒤에 숨은 이야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느 동료 화가와 크게 다툰 일이 있다고 합니다. 다투고 나니 분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가룟 유다를 그릴 때 자기와 다툰 화가의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니, 도무지 잘 되지 않아 그리다 실패하고, 그리다 실패하고, 몇 번씩 그러는 중에 자기 자신이 반성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을까?’ 그런데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얼굴을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로 집어넣은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지?’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다른 얼굴로 그리고 나니까 예수님의 얼굴의 구상이 떠올라 예수님의 얼굴을 바로 그리게 되고, 지금까지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에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다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입니다. 긴 세월동안 최선을 다하여 그림을 다 마무리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칭찬을 하는데,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보고, 그 잔이 너무 실감난다고, 너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빈치가 붓을 가져오더니 그 컵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주님은 바라보지 않고, 잔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고 훌륭하고, 멋지다 하더라도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위에는 누가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고, 하늘 나라를 항상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언제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합니다.
하늘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바다나 강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산과 바위와 나무와 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들의 푸르름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음식을 대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물건을 만들 때도, 학생을 가르칠 때도, 주부가 밥을 지을 때도, 아이를 키울 때도, 정치를 하면서도, 사업을 하면서도, 국토를 방위하면서도, 환자를 치료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위엣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 그리스도의 진리의 교훈, 그리스도의 깨끗한 생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당하신 고난,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인내와 자비, 그리스도의 긍휼과 능력을 생각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 때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그 말씀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를 생각했습니다. 주님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살 때도 그리스도를 생각했고, 죽을 때도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성 프랜시스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간절히 생각했던지 두 손바닥에 주님의 못자국의 흔적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고상한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고상한 것을 늘 생각하면 인격이 고상해집니다.
빌립보서 4: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엇을 보나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잠깐 있다 없어질 것보다는 영원하고, 복된 하늘나라의 것을 생각하고 사모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땅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비로운 천국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바로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먼 훗날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바로 이 땅, 이 곳에서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이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게 되면, 슬퍼하던 자가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자가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실망하고 낙심하던 자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하고 용기 있는 자가 됩니다. 미워하던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받기만을 좋아하던 자가 주기를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던 자가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던 자가 남을 위로하는 자가 됩니다.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던 자가 기쁨과 즐거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소유하고자 몸부림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 아닌 위의 것을 참고, 위의 것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풍성하게 받아 이 땅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와 지바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내 안에도 계시고, 내 앞에도 계시고, 내 뒤에도 계시고, 내 우편에도 계시고, 내 좌편에도 계시고, 내 위에도 계시고, 내 밑에도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직 눈을 들어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