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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한 세가지 비결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무수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소녀시대를 빗대어 ‘소시 가든’을, 무한도전 인물을 대입시켜 무한 가든을 패러디 하기도 했습니다. 백지영의 OST “그 여자”와 현빈의 “그 남자”가 공전의 히트를 했으며, 드라마에서 나온 책들이 매진되기도 했습니다.
"왜 자꾸 그 여자 생각을 하지?", “깨알 같은 수다를 뒤로하고 아직도 불쑥불쑥 눈앞에 나타나는 여자”, “길라임 씨 언제부터 예뻤나?, 작년부터...”, “액션에서 라벤더 향이 묻어나는 그녀” 등의 명대사를 쏟아냈습니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현빈은 ‘시크릿 가든' 중 김주원(현빈) 명대사 5개를 골라 1위부터 순위를 정했습니다.
현빈 명대사 1위로 “문자왔숑”을, 2위는 “제게는 이 사람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 3위는 “귀족적인 마스크에 거침없는 기품”, 4위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예뻤나? 작년부터?” 5위는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를 꼽았습니다. <시크릿 가든>이 재미있는 이유는 첫째도 현빈, 둘째도 현빈 때문이다. 당연한 말씀! <아저씨>의 원빈에서 또 다른 ‘빈’으로 갈아탄 누나들처럼, 나도 현빈이 나오는 부분만 편집해서 하루 종일 반복 시청하고 싶다. 심지어 현빈이 군 입대하는 날, 버선발로 뛰쳐나가겠다는 누님들이 주변에 한가득이다. 길라임은 하지원의 모호한 매력이 잘 스며든 캐릭터지만, 애초에 이 드라마의 무게중심은 현빈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듯하다. 작가 스스로도 김주원(현빈) 쪽에 더 애정을 쏟은 티가 역력해 보인다. 영혼이 뒤바뀌었을 때도 김주원의 영혼을 뒤집어쓴 길라임 쪽에 더 눈이 간다.
누구라도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현빈보다, 재벌가 사모님을 골탕 먹이는 하지원에게 더 끌릴 것이다. 캐릭터만 놓고 보자면, 김주원이 몇 수 위다. 그러니까 길라임이 예쁘고 멋있는 이유는 그녀가 정말 멋진 여자여서라기보다, 김주원이 인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짓 해서 마음 뺏고 이상한 술 먹여 몸 뺏고 남의 파티에 와서 입술까지 뺏은” 길라임 때문에, 김주원은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풍경을 동화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거기다 영혼이 바뀌는 바람에 평생 모르고 살았어도 좋을 서민 체험까지 했으니, 이 드라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현빈 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주원은 김은숙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 중 가장 가이드라인이 분명하다. 바꿔 말하면 남성 캐릭터에 대한 판타지가 절정에 이른 것이다. 우월한 외모에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떠서 만든 패션, 무엇보다 가난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행여 김주원의 모친 문분홍 여사(박준금)가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 해도, 오랜 세월 축적된 귀족적인 풍모는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야”란 호언장담이 허풍만은 아닌 것이, 김주원의 위기 관리 능력은 가히 제임스 본드급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길라임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 같아도 경영에 빠삭하고, 전세기를 보내 할리우드 스타 감독까지 불러들일 정도다(이건 좀 심했다!). 한심한 남자가 “저한텐 이 사람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라고 했다면 싸구려 고백이 되었겠지만, 김주원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에겐 정말 길라임을 김태희나 전도연으로 만들 능력과 의지가 있다. 사실 길라임으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여자들의 빤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상투성에서 벗어날 때는, 오직 김주원과 함께 있을 때다.
이쯤 되니 알겠다. 그 많은 재벌 캐릭터들 중에서 왜 유독 김주원에게 눈길이 가는지를. 길라임은 계급의 벽 앞에서 번번이 상처를 받지만,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인어공주’밖에 될 수 없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순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된다. 김주원에겐, <꽃보다 남자>(KBS2, 2009)의 ‘구준표’(이민호)도 <파리의 연인>(SBS, 2004)의 ‘한기주’(박신양)도 가지지 못했던 적극성과 뚜렷한 기준이 있다. 무릇 세상의 모든 연애에는 피곤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김주원과 길라임의 연애는 현실적인 벽이 있음에도 부드럽게 흘러간다.
천하의 김주원이 반했으니, 길라임으로서는 반짝거리는 존재감을 유지하면 그만이다. 현실에서라면 악독한 재벌가 사모님이었을 문분홍-문연홍(김지숙) 자매조차 ‘은방울 자매’처럼 귀엽게 느껴지는 건, 다 김주원의 쿨한 대처 방식 때문이다. 많은 여자들이 그 흔한 고백 한번 듣자고 무수한 떡밥으로 견인할 동안, 김주원은 “당신의 액션에선 라벤더 향이 나” 같은 오글거리는 찬사를 하루에도 백만스물두 번씩 늘어놓고 있으니 누나들 가슴에 불이 날 수밖에. 그러나 현실에서 김주원을 만날 확률은 내가 김태희나 전도연이 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기에, 오늘도 이 누나는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박삭”만 되뇌인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아서 지혜롭게 가꿀 수도 있고 거친 들판처럼 버려둘 수도 있다. 하지만 가꾸든지 버려두든지 반드시 싹은 돋아난다.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어디선가 쓸모 없는 잡초 씨가 날아와 무성하게 자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잡초는 뽑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는 것처럼, 마음이란 정원에서 비뚤어지고 쓸데없고 불순한 생각들을 없애버리고 옳고 유익하며 순수한 생각이 꽃피고 열매를 맺는 완벽한 정원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 한다. <제임스 앨런, “생각하는 그대로”>
타샤의 정원
'힘들지 않나요?' 라고 묻는 분들도 계시지만, 난 정원의 나무나 꽃에게 특별한 걸 해주지는 않아요. 그저 좋아하니까 나무나 꽃에게 좋으리라 생각되는 것, 나무와 꽃이 기뻐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잡초 뽑기나 물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필요한 비료를 제대로 주기만 하면 정원은 그에 화답해 줍니다. - 타샤 튜더의《타샤의 정원》중에서 -
정원사와 정비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종류는 정비사 같은 사람이고, 정원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비사는 자기에게 맞게 사람을 뜯어고치는 사람이고 정원사는 상대가 한 알의 씨앗처럼 스스로 자라도록 물을 주고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의 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정원사처럼 물을 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보는 것이다. 자라는 것은 자기이며, 키우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이 시편은 두개의 시(1-6절; 7-13절 +14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이유는 두개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이 서로 다른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제 1연 (1-6절)은 매우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는 극복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감사의 나팔을 부는 제사를 드리며, 찬양하며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매우 긍정적이며 확신에 찬 마음인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제 2연 (7-13절)에 가게 되면, 매우 불안에 떠는 듯한 모습입니다. 어디엔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주님께 그저 안타까운 그 마음으로 울부짖는 그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13절에서 약간의 확신이 보이는 듯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불안합니다.
하나의 시편에서, 어떻게 두개의 다른 신학과 신앙의 모습을 가진 주인공이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 시편의 어려움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려는 학자들은 이 제1연과 제2연에서 공통적인 점들을 찾아냅니다. 예를 들면, 1절과 9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2절과 12절에서 적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3절, 8절, 14절에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3절 12절에서 일어난다는 단어가, 4절과 8절에서 구한다는 단어가, 4절과 13절에서 생명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두개의 연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한 것이며, 동일한 주인공의 노래라고 주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과 신앙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불안해하는 그런 삶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이 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그런 것 같습니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일에는 매우 담대하고 승리하며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에게도 극복하지 못하는 인생의 문제는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처럼, 모두에게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한 동일한 사건이 문제가 안 된다거나, 혹은 동일한 사건이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연은 모두 두려움이라는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확신이라는 주제가 1절과 13절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확신과 두려움이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요? 확신은 두려움 속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기에 시편 저자는 자신의 확신을 두려움과 비교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영역을 넘어선 두려움이었습니다.
결국 이 두 연은 한 인생의 두 가지 양면을 보여주는 아주 절묘하고도 적나라한 노래인 것입니다. 자신이 늘 잘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긍정적이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극복하지 못하는 인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 앞에서 그는 불안해하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모습을 바라본 제사장은 14절에서 기다리라고 외칩니다. 그것도 강하고 담대하게 기다리라고 요청합니다. 기다리는 데 어찌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가가 어려운 점이지만, 어쨌든 기다리라고 조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시 속에서 시인의 삶과 그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날 수 있기 위해서 3가지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밀을 간직하는 법 가까이 볼수록 비밀이 보입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비밀이 생겨납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비밀을 만드는 것이고, 믿음은 그 비밀을 아름답게 간직해 가는 것입니다. 비밀을 간직하는 법도 기술이며 경쟁력입니다. 비밀을 갖게 되는 것과 그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아는 것, 그리고 오직 자의에 의해서만 그 비밀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 바로 이것들이 한 개인을 형성하는 첫째 단계다. - 폴 투르니에의《비밀》 중에서 -
첫 번째는 확신의 비결입니다.
내 안의 비밀
꾀꼬리와 멧새와 같이 작은 새들이 유전적인 본능에 의해 행동하듯이 나의 정신 또한 하나님께서 아로새겨 놓으신 교훈들을 본능적으로 붙잡을 수 있게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에 순종함으로 그 물결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필립 얀시 &폴 브랜드의 ‘육체 속에 감추어진 영성’ 중에서-우리는 이제 육체로 사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 즉 영적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결정했던 모든 환경과 유전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빛의 사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이 이 놀라운 비밀을 이제 세상에 전하며 감추어진 주님의 빛을 드러낼 때입니다.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주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오늘 우리 삶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소망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현실의 어려움을 만나서 두려워 떨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떠나시지 말 것을 강청하고 있지만, 그러나 1연과 2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하나님이 바로 그의 구원자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주님을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노래했으며, 9절에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더군다나 고통 속에서 떨고 있음에도, 13절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첫 글자가 어렵습니다만, 한글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것이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적들이 일어나고,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서 나를 대적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강포를 행하려 일어난다 하더라도, 지금 나의 삶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믿는 한 가지는 나는 결국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비밀
감사와 행복은 한 몸이요, 한 뿌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깃들고 그 행복 속에 더 큰 감사가 자라납니다. 삶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비밀은 날마다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공수길 목사의 ‘행복유전자’ 중에서-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늘 부족하게 여겨지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을지라도, 알지 못하고 깨닫진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불평 대신 감사를 선택할 때 우리 삶에 행복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간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사는 것으로써 믿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바로 이 순간까지도 탐구하고 있다. 온전한 삶이란 인생의 의무, 문제, 성공과 실패, 경험과 곤란 가운데에서 온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팔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게 된다. - 디트리히 본훼퍼
오늘의 시편에 16번 등장하는 여호와란 단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한다는 단어입니다. 4절에서 두번 나오고, 8절에서 두번 나옵니다. 공통적으로 1연과 2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쟁을 했을 때도 그는 구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의 성소를 방문할 수 있기를 구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그는 그분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가려지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늘 바라보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구했습니다.
약 513-16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오면, 우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주님께 운전대를 넘겨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보더라도, 고난에서 이기고 지는 행위는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직접 적과 대면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3절 마지막에서 그는 단지 확신한다는 말만 할 뿐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이 그를 숨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주변에 있는 적들 위에 높이 들어 올려 주십니다.
이 시편 기자는 감사의 나팔을 불며 제사를 드리고 찬양하기만 합니다. 고난을 만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넘기십시오. 그분은 나보다 훨씬 더 그 고난을 잘 알고 계시며, 그 고난을 이기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행복의 문을 여는 비밀 번호
일상의 풍요로움은 욕심 그릇을 비워서 채우고 자신의 부족함은 차고 매운 가슴으로 다스리되 타인의 허물은 바람처럼 선들선들 흐르게 하라. 생각은 늘 희망으로 깨어 있게 손질하고 어떤 경우도 환경을 탓하지 말며 결코 남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미움은 불과 같아 소중한 인연을 재로 만들고 교만은 독과 같아 스스로 파멸케 하니 믿었던 사람이 배신했다면 조용히 침묵하라. 악한 일엔 눈과 귀와 입을 함부로 내몰지 말고 선한 일엔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탕진하여 삶의 은혜로움을 깊고 깊은 사랑으로 완성하라.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 - 헬렌 니어링, <소박한 밥상> 중에서
세 번째는 기다림의 비결입니다.
천국을 만드는 비결
이 세대에, 천국과 이 땅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에게 붙잡힌,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자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을 알고, 스스로 훈련받기 위해 모인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다. - 리차드 포스터 -
고난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노력해도 내 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피하거나 막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주님은 주님 앞에 확신을 가지고 기도로 나아가라 말씀하시면서, 기다릴 것을 요청하십니다.
고통 앞에 서 있을 때, 누가 기다릴 수 있을까요? 확신이 없는 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의 주권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항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음을 주님께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다가온다면, 가만히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절대 확신의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강하고 담대하게 기다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강함과 담대함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이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주님이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처럼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만져 주시면 다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의 비밀
요즘 내게 있어 가장 놀라운 것은 아침에 해가 뜨는 것입니다. 아침에 빛이 퍼지면서 어둠이 물러가고 차츰 만물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신기할 수 없습니다. 하루의 출발이 부드러움으로 시작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빛의 부드러움, 뚜렷하지 않음의 부드러움, 재촉하지 않는 부드러움, 조용함의 부드러움이 아침에 가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하루의 노력, 하루의 괴로움, 하루의 아쉬움을 아는 듯 아침은 늘 새롭고 부드럽게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열립니다. 하루가 ‘쨍’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면서 시작하면 얼마나 힘들까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침은 부드럽고 촉촉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깨웁니다. - 행복한 동행 - 삶의 행복한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내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아침처럼 시작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