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착기
- 7세기 이 후부터 본격적으로 정착 시작, 그러나 산악 지역의 특성상 교류와 정치적 통합의 어려움이 존재했음. 이에 따라 세르비아 지역의 여러 족장(Zupan)들은 정치적 연합체 창출을 위해 노력했음. 9세기 중엽 한 때 대족장(Veliki zupan)인 블라스띠미르(Vlastimir)를 중심으로 세력을 추구했으나, 불가리아와 이 후 비잔틴의 견제로 실패했음.11세기에 뽀드고리짜(Podgorica-> 현재 몬테네그로의 수도) 근처에 해안을 근거로 제따(Zeta) 공국과 두끌랴(Duklja) 공국 그리고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한 라슈까(Raska)공국을 건설했음.
2) 건설기
- 1169년 라슈까에 대족장이던 스테판 네마냐(Stefan Nemanja: 1165-1196, 1166-1195?)는 비잔틴에 대항하여 세르비아 독립왕조건설을 추구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1186년에 제따공국을 복속하고, 1190년에 모라비아 전투에서 비잔틴에게 크게 패배하기에 이르고, 비잔틴으로부터 봉신관계를 강요받게 된다.
네마냐의 업적으로 국가와 교회사이의 강력한 연대를 추구하게 되었고, 많은 교회와 사원을 증축, 보구밀(Bogumil-> 다음 기회에 따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의 확산을 저지시키고, 1196년 은퇴 후 승려가 되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아소스(Athos)산에 힐란다르(Hilandar) 사원을 수립했음.
3) 전성기
- 스테판 네마뉘치(Stefan Nemanjic: 1196-1228, 1195-1227 ?)는 네마냐의 둘째 아들로 비잔틴 공주와 결혼하고, 4차 십자군 전쟁 이 후 비잔틴이 쇠락하자 기회를 이용 세르비아 왕조 국가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자신의 칭호도 대족장에서 "왕(Kralj)"으로 바꾸고, 1217년 왕관 부여와 함께 "최초의 왕(Prvovencani)" 로 불리운다. 왕조의 정치로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가리아 지배 하에 있던 오흐리드 교구 하에 있던 세르비아 정교회를 독립교구로 발전 시키며, 교구도 쥐짜(Zica)에서 뻬츠(Pec-> 현재 코소보 내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옮기게 된다. 교회, 사원 증축과 교회 서적들 번역 작업도 활발하였다. 이 당시 종교의 독립은 정치적인 독립과 같은 맥락이었다.
- 스테판 두샨(Stefan Dusan: 1331-1355)은 1346년에 스코폐(Skopje->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 에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왕'으로 추대된다. 스도를 오흐리드로 천도하기에 이르고, 영토를 대폭적으로 확대하며, 자칭 비잔틴의 계승자로 "짜르(Car-> 황제)" 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교구를 뻬츠로 옮겨 세르비아 정교회 발전에 노력하였고, 유럽과 동방지역을 잇는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비잔틴 법전에 기초하여 세르비아 법전(Zakonik)를 완성하였다. 비잔틴 왕위 계승에 관심을 보이며, 비잔틴의 도움 요청으로 말미암아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가 1345년 오스만 투르크 정규군의 최초 유럽 침투 였으며, 1345-1349년 사이에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4) 쇠락기
- 스테판 우로슈(Stefan Uros: 1355-1371) 때는 두샨의 사망이 후 투르크의 침략 가속화로 세르비아 세력이 약화되었다.
- 제1차 마리짜(Marica) 전투(1363)
- 제2차 마리짜 전투(1371) -> 형제들인 부카쉰(Vukasin)과 우글레슈(Ugles) 사망 이 후 몇 달뒤 우로슈도 사망. 이에 따라 세르비아의 귀족들은 투르크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된다.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왕자(Knez Lazar Hrebeljanovic: 1371-1389)는 주변 기독교 국가들과 연합을 추구하여, 제1차 코소보(Kosovo) 전투(1389년 6월 28일) 에서 투르크의 무라드(Murad) 1세와 함께 사망하였고, 투르크의 계승자인 바예지드(Bayezid) 1세는 당시에 소아시아를 통하여 유럽으로 진출하고자했던 몽고의 투르크 침입으로 세르비아로의 진격을 포기하게 된다. 이 후에 스테판 라자레비치 영주(Despot Stefan Lazarevic: 1389-1427, "Despot(데스뽀뜨)" 라는 표현은 오스만 투르크 지배 하에 있던 기독교 영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는 투르크의 쇠락 속에 비잔틴의 계승자로 자청하며, 1413년에는 투르크 재건이 후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라즈 브란꼬비치 영주(Despot Djuradj Brankovic: 1427-1456)는 이웃 국가들 특히 헝가리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헝가리와 투르크는 협상을 맺는다. 그 내용은 주라즈 브란꼬비치가 세르비아의 지배자가 되는 조건으로 헝가리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르비아는 수도를 베오그라드 근교의 스메데레보(Smederevo)로 옮기게 된다.
1437년 투르크는 헝가리와의 협상을 어기고 헝가리를 침입하기에 되고, 1444년에 세르비아, 알바니아의 기독교 연합군으로 구성된 바르나(Varna)십자군을 결성하여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으나, 계속된 투르크의 승리로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도 투르크가 승리하게 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 하로 넘어가게 되고, 1459년에는 스메데레보 마저도 투르크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이 후 오스만 투르크는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쳐들어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