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기차를 타고 온 여섯 친구들
당시의 간판은, 동그란 버스표지판 모양의 패널에 버스정류장이라는 글씨를 써서 출입구로 쓰는 철대문기둥 곁에 세운 것이 다였다. 카페라는 글씨와 전화번호도 곁들여 있지만, 건물 색과 잘 구별되지 않는 흰 바탕에 커피색 글씨여서 내가 보기에도 너무 얌전했다.
눈에 잘 안 띄는 간판 탓인지 시골이어선 지 처음 며칠 동안 온 손님들은 대개 우리 카페를 빙 둘러싸고 자리 잡은 이웃들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오랫동안 캄캄했떤 집에 불이 들어와 동네가 환해졌다'는 인사를 했고, 외관에 비해 내부 인테리어가 훌륭하다고 감탄했으며, 출입구가 카페답지 않고 간판이 허술하다고 걱정했다. "간판보고 오는 사람은 없겟어요. 간판 좀 눈에 띄게 달라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야지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유혹적인 간판을 달아도 좋을 만큼 멋진 카페가 되고나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안보다 바깥이 더 근사해선 안 된다는 것이 내 개똥철학이니까.
내 취향에서 하는 말이지만 함창의 거리 구석구석이 매혹적인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오래된 간판들이 많아서다. 그 중의 하나가 함창역 간판인데 특히 석양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는 정말 멋지다. 그래서 해질녘이면 가끔 옥상에 올라가 함창역 간판을 바라보곤 한다.
함창역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길 끝을 따라 돌자마자 있고, 우리 카페에서는 천천히 걸어가도 삼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역사는 텅 비어있고 벽에는 '이곳은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하늘을 가린 그 무엇도 없는 플랫폼에는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긴 의자만 몇 개 놓여있다. 철길을 따라 심어놓은 꽃이 유일한 치장인 셈이니 본래의 순수함을 간직한 귀한 장소임이 분명하다. 하루에 세 번, 부산과 영주를 오가는 무궁화호가 있어서 나라가 친구를 만나러 부산에 갈 때 이용하곤 한다.
카페를 시작한 지 사흘 만인 토요일 밤에 소식을 전해들은 여섯 명의 벗들이 밤기차를 타고 이 함창역에 나타났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민들레>(교육전문잡지)'읽새모임' 장소를 우리 카페로 정한 것이다.
밤 열시 반의 고요한 역사가 아리따운 도시여인들이 조잘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들은 내가 귀촌하기 전, 자녀교육에 뜻을 같이 했던 엄마들이었다. 차례차례 포옹과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카페로 걸어오는 데 삶에 대한 태도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해서인지 십년만인데도 어제만난 듯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우리는 난로를 둘러싸고 앉아 내가 떠나온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며 아이들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월도 비켜간 듯 모습도 마음도 예전과 변함없이 인정 가득한 그대로였다.
다음 날, 집 주위를 산책하고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그녀들은 떠났다. 카페를 열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놀러오지 못했을 테니 카페를 시작한 것은 자기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는 멋진 축하 인사를 남기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집에 손님이 온다면 부담스럽겠지만 카페를 손님이 오는 것은 기쁜 일이니까. 그러나 역시, 이 나이에 밤새워 노는 것은 무리였다. 혼자 남은 나는 졸음과 싸우느라 문 닫을 시간만 고대했고, 열한 시가 되자마자 뒷정리도 미루고 일찌감치 잠에 끌려들어갔다. 그래서 그만 대문을 열어 둔 채 아침이 왔던 것이니.
세 어르신이 이른 아침 카페를 찾은 이유?
이른 아침, '계시오!'하고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마침 연탄을 갈러 마당에 내려서던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출입문 앞에 일흔은 훌쩍 넘었을 게 분명한 어르신 세 분이 서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일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동시에 누구지?하고 머리를 굴렸다. '차 한 잔 먹으러 왔는데 어리로 들어가오?'하고 물음에 사태를 짐작하고 '저, 대문을 안 닫아서…문은 열 한 시에 열어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손바닥을 들어 수인사를 한 어르신이 성큼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연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재빨리 들어가 고양이 세수를 하고 후다닥 두건을 뒤집어 쓴 다음 방문을 열고 바 앞에 섰다. 벽시계가 여덟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여기 저기 문을 열어 보는 등 신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잠시 갈등하던 나는 '영업시간이 어쩌고 할 필요 없이 아침잠 없는 동네 어르신이 놀러 오신 셈 치자, 그냥 차 한 잔 드리고 인사드리면 될 것을'하고 마음 먹었다.
가장 편한 소파가 있는 자리를 안내를 하고 난로를 켜는데 어르신 한분이 '차 넉 잔 들고 오시오'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넉 잔이요?'하고 되물었다. 어르신은 고개를 젖혀 소파 깊숙이 머리를 기대었다. '아가씨도 한 잔 해야지, 젤로 비싸고 맛있는 차로 갖고 와요'하며.
아, 이 상황은 뭐지…하고 난감해 하면서 모과차를 넉 잔 만들었다.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인사도 드리고… 찻값만 안 받으면 되지… 어떻게 처신해야 어르신들도 마음 상하지 않고 나도 실수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가지고 갔다. 세 분 앞에 차를 놓아드리고 마지막 차 한 잔을 들고 머뭇거리는 데 혼자 앉은 어르신이 옆 자리를 가르키며, '여기 앉으시오'했다. 찻잔을 마저 놓고 엉거주춤 앉는 데 두툼한 손바닥이 내 허벅지에 얹혔다. '아이구, 삼천 원 짜리 차 팔아서 언제 돈 벌어'하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화들짝 노란 와중에도 태연을 가장하며 '맛있게 드세요'하고 느긋한 척 다리를 움직여 손을 떼게 만들었다. 마주 앉은 어르신은 어깨를 웅크려 양 팔을 탁자에 얹고는 '아, 이분이랑 잘 알아놓으면 한결 수월 할 거여, 이 근방에서는 제일 잘 나가거든'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이 동네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분들은 동네 어르신들이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시골다방이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 알고 있으며, 그것이 사회악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인 것도 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살아갈 그들이 딱할지언정, 삶의 지향점이 한참이나 다른 이들에게 내 명예나 여성들의 명예를 걸 생각은 없었다. 따끔하게 혼 줄을 내주거나 훈화(?)라도 하면 공감은 커녕 우리 카페는 여느 찻집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어르신들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관성대로 새로운 찻집을 방문하고 마담과 첫인사를 나누는 것뿐이라고 마음정리를 했다. 대문을 안 닫은 것이나 넉 잔의 차를 들고 간 것이며 후회하며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꾸벅 인사까지 햇으니 어르신 한 분이 이만 원을 내밀었다. '이 나이가 되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찻값도 안내고 갈지 몰라, 그럴 땐 꼭 말 해줘야 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하며.
만원만 받아들고 천원을 거슬러 드리니 어르신은 남은 만원을 바라보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 나름 상황파악을 한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농도 걸지 않고 반듯하게 나간 걸 보면.
그리고 다시는 우리 카페에 오신 적이 없는 이 어르신들을 길에서 가끔 뵙곤 한다. 인사를 하면 나를 알아보고 그러는 지 그냥 아랫사람의 인사라 받는 것인지 모를 답례를 한다. 이 정도로 쓴 웃음을 짓는 다면 이 세상 많은 찻집 종사자들에게 실례가 되리라. 그저 두고두고 웃을 수 있는 에로틱한(?) 사건 하나를 선물해준 분들로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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