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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민군에게 무전기 작동법을 가르쳐 준 북한군?
중학생 특공대의 도청 공격
증언자 : 최종북(남)
생년월일 : 1965.(당시 나이 15세)
직 업 : 중학생(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무진중학교 3학년이던 최동북 씨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청 공격 특공대원으로 뽑혀 활동하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대검에 찔리고 전신을 구타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 물러가라
나는 1980년에 무진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5월 19일 학교에 갔는데 어쩐 일인지 수업을 오전만 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집에 가서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말고 가정학습을 하라고 했다.
집이 주월동이었던 나는 집에다 책가방만 던져놓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전날 금남로에 나갔다가 대학생 형들과 공수부대들이 투석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날 학교가 일찍 끝난 것과 그 일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성국민학교 부근에 있는 대창주유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시민들과 공수대들이 대치하여 돌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여 분 가량 서로 밀고 밀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민들이 광주공원 쪽으로 밀려갔다.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시위대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갔다. 공원 앞에서도 여전히 공수부대원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또한 군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곧 이어 몇십 명이나 되는 공수부대원이 성난 얼굴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해 왔다.
그것을 본 시민들이 흩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도 개패듯
공원 실내체육관 광장에서 어떤 청년이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워커발로 채이고 곤봉으로 두들겨맞고 있었다. 살려두지 않겠다고 소리지르며 공수부대원이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둘러댔다. 이것을 본 어떤 할아버지가 나서서 자기 손자라고 그만 좀 때리라고 애원하며 말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힘없는 노인을 곤봉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노인네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이놈! 감히 손자라고 입을 놀려?"
그들은 워커발로 등을 짓이기고 사정없이 차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시민들 틈 사이에 끼어 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서 이것을 목격하였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이 화가 나서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모두들 '시민들을 죽이지 말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외쳐댔다. 그러자 공수부대원은 몽둥이를 들고 마구 뛰며 시민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붸아왔다. 나는 얼른 대성국민학교 옆에 있는 대창주유소 쪽으로 뛰어갔다.
이런저런 것을 보면서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비가 촉촉히 내렸다. 밤 9시쯤이었다. 시민들은 각목과 병, 식칼, 몽둥이, 곡괭이를 들고 나와 대창주유소에서 차를 못 다니게 길을 막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이 오면 대치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양동시장으로 갔다. 양동시장의 상가는 거의 셔터를 내리고,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공수부대원 10여 명이 탄 지프차가 오더니 모여 있는 사람들을 곤봉으로 때리며 닥치는 대로 붙잡았다. 엉겹결에 당한 일이라 도망치지 못한 나는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곤봉에 맞고 잡혔다. 잡힌 사람은 열 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 어떤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저 아이는 놓아주시오. 어린 놈이 뭔 죄가 있다고 그러요."
"너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는 중이어요."
나는 얼른 그렇게 둘러붙였는데 속으로는 무척 겁이 났다. 다른 사람들을 마구 짓밟고 때리는 것을 몇 번 보아왔던지라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한 공수부대원이 나더러 돌아가라고 했다.
"어린 자식이 어디를 쏘다녀, 저녁도 늦었는데. 이런 시각에 돌아다니는 놈들은 다 죽여도 시원찮은데, 어서 가!"
나는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집에까지 걸어가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저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잔인하게 짓밟는 것인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 것인가 쓰러져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길 가던 처녀를 희롱하다
20일 이날도 나는 집에서 나오기 위해 가방을 챙겨들었다. 어머니께서 당부하셨다.
"집에서 공부하거라.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하는데 안 나가는 게 좋겠다."
나는 곧 돌아오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에는 계속 전날 공원에서 보았던, 할아버지가 공수부대원한테 맞고 끌려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시민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도리어 그 군인이 시민을 해치고 있었다. 나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고 나도 시민들과 합세하여 공수부대와 맞서 싸우리라 생각했다. 나는 공원을 지나 태평극장 쪽으로 갔다.
공수부대원들이 태평극장 앞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태평극장 앞의 인도변으로 아가씨 두 명이 지나갔다. 공수부대원이 아가씨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거참 이쁘게 생겼네. 어디를 가는 거지?"
아가씨들은 대꾸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경계를 하면서 뛰듯이 걸어갔다. 그러자 공수부대원이 아가씨들에게 다가가서, "야! 이년들아. 왜 대꾸도 안 해!"
하고 욕설을 퍼붓더니 벌써 놀라서 뛰어가는 아가씨들을 "잡아라!" 소리치며 뒤 쫓아 갔다. 아가씨들은 광주공원 쪽으로 죽어라 도망쳤다. 시민들이 이것을 보고 아가씨들을 구하기 위해 소리치자 공수부대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는 동안 젊은 남자들 열대여섯 명이 공수부대원에게 잡혀갔다. 붙잡힌 사람들은 몽둥이로 두들겨맞은 다음 옷을 거의 다 벗고 팬티만 입고 손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곧이어 트럭에 실렸다. 차 안에서도 청년들은 공수부대원에게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픽픽 쓰러졌다. 나는 시민들 틈에 끼어 이러한 광경을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 위험천만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공수부대원의 만행을 보고 차츰 분노가 치밀었다. 그날은 저녁 8시에 집에 돌아왔다.
중학교 3학년인 나도 시민군에 참여
5월 21일 새벽 6시경 집 근처 백운동 로터리 쪽에서 경적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와 거리로 나가보았더니 백운동파출소가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경상도 차라고 하여 외곽에서 들어온 트럭에 불을 붙였다. 석유통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불길이 활활 치솟아올랐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시민들은 온통 분노로 들끓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아칩밥을 먹고 나서 다시 구경을 하고 싶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백운동 로터리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성난 상태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곡괭이를 들고 있기도 하였고, 몽둥이와 칼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백운동 로터리에 공수부대원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쳐부수겠다는 등등한 기세였다. 대동고 건너편 버스 종점에서 까만 천으로 복면을 한 시민들이 버스를 내달라고 하면서 회사측과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는 것을 봤다. 이것을 보고 나서 나는 까치고개로 갔다.
새남교회에 군인이 진주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각목 등 각종 연장을 들고 공수부대원과 투석전을 벌였다. 평소와는 달리 시민들은 분노에 가득 차 한치도 물러 서지 않겠다는 듯 치열하게 싸웠다. 공수부대원들은 나주 쪽으로 후퇴하며 밀려나갔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군인 앰뷸런스가 시내 쪽에서 나주 가는 길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시민들은 그 차를 막아세웠다. 그런 후 차에 있는 군인에게 내리라고 했다. 그 군인은 머리에 부상을 당해 피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어떤 시민이 군인을 때리려 하자 운전병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상무대 군인이오. 내가 군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지금 사람이 다쳤으니 그냥 보내주시오."
"군의관증을 내! 그리고 권총도 내놔!"
"권총은 없습니다."
이때 시민들이 군인을 보내주자고 했다. 군인이라면 치를 떨던 시민들이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선뜻 보내주었다.
나는 시민들이 노하게 된 이유를 차츰 분명하게 파악하기 시작했고, 나도 그들과의 대열에 끼어 함께 보내게 되었다. 신우아파트까지 걸어가는 동안 시민들이 차를 타고 각목으로 차를 두드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차에 탄 사람들은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도청으로 나갑시다. 시민 여러분, 이 차를 타십시오." 외치며 절규에 찬 목소리로, "전두환을 찢어죽이자."고 소리를 높였다.
차가 몇 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도청으로 나가고 싶었다. 중앙고속버스 차를 탔다. 차에서는 동네 친구와 학교 친구들을 다섯 명이나 만났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가톨릭센터 앞에는 공수부대원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청과 전일빌딩 앞 군데군데에서는 아직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톨릭센터에서 광남로를 지나 대인시장 쪽으로 돌았다. 시민들이 음료수와 주먹밥을 박스에 넣어서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음식을 나눠먹고 나니 더욱 사기가 충천하였다. 음식을 먹고 다시 차를 타고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총을 쏜다기에 전남대 입구 쪽까지만 갔다. 나는 차를 타고 시내를 쏘다니는 것을 재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광주시민들을 죽이는 공수부대원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무엇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총 배급받고 사격교육 받아
전남대에서 백운동으로 가서 백운동 일대를 돌고 도청 쪽으로 가니 오후 2시가 되었다. 광남로에서 나는 차에서 내려 한일은행 본점으로 걸어갔다. 시민들이 투석전에서 계속 밀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명의 남자 시체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공수부대가 그 시체를 끌고 가서 트럭에 실었다. 햇빛에 이상한 빛을 내며 반사되는 붉은 핏덩이가 온몸에 엉켜붙어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죽은 시체를 처음으로 본 탓인지 속이 메슥메슥하였다. 군인 트럭은 도청 쪽으로 갔다. 총에 맞은 시체를 곳곳에서 발견한 시민들은 더 이상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분노했다.
차량들도 어디서인지 곳곳에서 시민들이 탄 채 개선장군들 마냥 시내로 나왔다. 한일은행 아래로 시민군이 탄 트럭이 왔다. 카빈총, TNT, 수류탄, 권총을 가지고 왔다. 예비군복을 입은 27세 가량의 청년이 한일은행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나누어 주었다.
"광주시민은 더 이상 총에 맞아 죽을 수만은 없습니다. 광주시민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죽음을 다해 싸울 수 있는 사람만 총을 받으시오."
청년들은 너도 나도 손을 내밀며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이, "넌 아직 어려. 너도 죽음을 다해 싸울 수 있어?" 하고 나를 뜨악하게 내려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카빈총을 나누어 주고 실탄을 주었다.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시 나도 싸울 수 있으니 총을 달라고 긴장한 눈길로 청하였다. 나중에 나에게 카빈 한 자루와 실탄 30발을 주었다. 총을 받은 사람들은 지프차를 타고 사격교육을 받기 위해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 앞 광장에는 3백-4백 명 정도가 사격교육을 받기 위해 대기해 있었다. 총기조작법과 수류탄 사용법을 조를 갈라 교육을 받았다. 약 30분이 지난 후 나도 총에 실탄을 넣어 연습을 하였다. 벽을 향해 다섯발 씩 적중시키는 사격연습이었다. 나는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적중시켰다.
15세로 32명 특공대에 당당히 뽑혀
사격하는 정도에 따라 특공대를 선별한다고 하였다. 사격연습은 약 한시간 동안 하였다. 그러고 나서 특공대를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뽑히는 자격은 처자식이 있는 사람과 독자, 장남인 사람은 제외하고 사격술이 뛰어난 남자였다.
나는 15세 먹은 독자였지만 독자라는 것을 숨겼다. 32명이 뽑힌 특공대에 나도 합격을 하였다. 두려움이 없었다. 며칠 사이 나는 어린 중학생이 아니라 정의와 분노에 가득 찬 시민군이 되어 있었다. 장교 출신으로 예편한 듯한 지휘관이 선발된 특공대에게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라고 엄한 훈시를 하였다. 태극기 한 장과 카빈총 한 자루, 수류탄 2개씩을 분배하여 주었다. 그리고 지프차 1대에 무전기 하나를 주면서 본부에 알릴 수 있는 신호작동법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공수부대의 상황을 언제고 타진할 수 있는 무전기의 작동법도 알려주었다.
선발된 특공대는 금남로로 갔다. 시민들은 금남로 길목길목에 숨어 공수부대와 시민군이 대치하여 있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공대는 도청과 전일빌딩, 관광호텔에 있는 공수부대원의 군저지선을 돌파하기로 하였다. 17명이 탄 지프차는 도청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동명여중을 지나 서석국민학교로 먼저 갔다. 우리가 탄 지프차 앞에서 30명의 시민이 탄 트럭이 무장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지프차에서 앞차에게 경적을 울리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화순으로 가서 화순광업소 무기를 뺏어와야겠다."
그들은 우리에게 잘 싸우라고 손을 흔들며 갔다.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관해서 뚜렷한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단 어떻게 해서든지 군저지선을 돌파하자는 데에 모두 한뜻이었다.
우리 차가 서석국민학교에서 나와 장동으로 나왔는데, 우리와 같은 특공대의 다른 조가 갑자기 도청으로 돌격해 나가는 것이었다. 내가 탄 트럭에서 미리 약속된 암호의 사격을 보내 그곳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도청 쪽으로 나가더니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고 운전수가 죽었다. 학생 두 명이 뛰쳐나와 도청을 향해 최루탄을 던지고 나서 장동주유소로 도망가다가 그들도 총을 맞았다. 지프차를 타고 있던 나는 그들을 구하려고 공수부대원을 향해 총을 쏘려고 했으나 실탄이 떨어져 쏘지 못했다.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했다. 수류탄을 보내달라고 했다. 부상자 한 명을 병원에 후송하려 했으나 병원으로 가는 차가 없었다. 조금 지나니 시민군이 탄 버스가 와 병원으로 실어보냈다.
특공대 도청 공격
이때 실탄을 지급받았다. 하늘에서 헬기가 떠들어댔다.
"시민 여러분, 모두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몇 명의 폭도들로 인하여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 집에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화가 치민 우리는 헬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총을 쏘았다. 농장다리에서 지하상가로 갔더니 소방차가 불타고 있었다. 아마도 석유통에 구멍을 내어 누군가 불을 지른 듯했다.
그때 본부에서 1호차에 타고 있는 특공대원이 총상을 당했다는 무전이 왔다. "도청으로 진격하다 당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는 "도청으로 가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본부에서 "오지 말라. 더 이상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총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나와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이 죽어 있었다. 우리는 격분했다. 시체를 기독교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전일빌딩으로 사격을 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결과는 특공대원 3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순간 '나도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남로는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의 아우성소리,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계속 되다 쥐 죽은 듯 조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수천, 수만의 눈들은 숨어서 도청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 쓰러져 간 시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시민들로 구성된 수송대가 적십자병원 완장을 차고 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차에 실려갔다.
금남로 3가에서 젊은 청년이 도청으로 갈 사람은 21명만 트럭에 타라고 했다. 목숨을 던져 싸울 사람만 나오라고 했다. 50여 명이 달려나와 서로 차를 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청년이 총를 쏘면서 20명만 타라고 했다. 곧이어 20명이 탄 트럭이 도청을 향해 갔다. 또다시 총소리가 진동했다. 트럭에 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프차에 탄 우리 일행 5명은 군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분수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진격했다. 분수대로 돌진해 가는데 갑자기 차의 기름통이 고장났다. 그곳에 머뭇거리면서 본부에 연락을 했다. 본부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시 차를 몰고 나가고 있을 때, 운전사가 공수부대원의 총에 맞고 죽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운전하고 가다 분수대에 처박히고 말았다. 지프차는 뒤집어져 분수대에 빠졌다. 차에서 빠져나오려다 3명이 죽었다. 나는 분수대에 처박힌 차에서 빠져나오느라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어렵게 간신히 빠져나와 분수대 아래로 기어나왔다. 도청에서는 연방 총을 쏘아댔다. 총에 맞을까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수협 쪽으로 기어서 갔다. 총알을 피해 가며 정신없이 기었다. 내가 수협 앞에 왔을 때, 3명의 공수가 내 손을 군화발로 밟았다. 그들은 대검으로 내 팔을 찍고 군화발로 차더니 웃통을 벗겨 YMCA로 끌고 갔다. 고개도 못 들게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마구 찍었다. 놈들은 무자비하게 전신을 구타했다.
YMCA에 도착해 나를 입구에 세워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발에다 총을 쏘았 다. 그 당시 나는 총을 맞은지도 모를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다리와 무릎에 또 총을 쏘았다.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은 공수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때 나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공수들은 전라도 말을 했다.
"죽은척 하지 마, 이 자식아!"
공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의식이 거의 없어 몸이 축 늘어졌다. 몸의 감각도 거의 없었다. 얼마 후 계엄군이 YMCA로 나를 끌고 가더니 화장실 좌변기에 나의 머리를 처박아넣었다.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때 밖에서 갑자기 철수한다고 "시체를 빨리 실어!"라고 외치면서 무척 서둘러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버려둔 채 갔다. 조금 있으니 시민들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좌변기에 쳐박힌 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들은 좌변기에서 내 머리를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머리가 잘 빠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만 들었다. 머리가 빠지자 내가 '살려 주시오'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그들이 나를 금남로 어느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하룻밤을 잤다. 깨어 보니 의사가 있었다.
"너 누구냐?"
"나는 특공대 1소대원이오."
"너는 꼭 살아서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의사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퇴원하겠다고 의사에게 말했더니 지프차가 병원으로 와서 백운동 집으로 나를 실어다주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접어들자 철로에서 어머니가 뛰어오셨다. 어머니는 지프차 옆으로 달려들더니 나를 발견한 후 엉엉 소리내 우셨다.
집에 도착하니 배가 무척 고팠다. 물을 달라고 했다. 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끝내 우겨 물을 두 바가지나 마셨다. 별탈은 없었다. 그리고 밥도 많이 먹었다. 삼촌이 집에 와서 나를 보더니 기독교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실이 없었기 때문에 바닥에 누워 치료를 받았다. 의식이 돌아오고 몸도 차츰 좋아졌다.
부상보다는 주위의 냉혹한 눈들이 가슴아파
광주민중항쟁이 진압되고 계엄군이 광주시내를 장악하고 난 후 1980년 6월 초에 보안대 사람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병원 의사는 미리 나에게 말하기를 어디서 총을 맞았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집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라고 하며 거짓말을 해야만이 탈이 없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때 부모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무슨 위험한 일이 있으랴 싶어 염려하지 않았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였다.
그렇지만 보안대 직원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보안대 직원은 며칠 동안 찾아오더니 나를 데리고 가려 하였다. 아버지는 강경하게 막았다.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나를 데리고 가려 하느냐며 만류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의사는 집에 가 있으라며 강제퇴원을 시켰다.
집에 돌아와 그 이후 6개월 정도 투병생활을 하였다. 학교는 다니지 못했고 중학교 3학년이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하여 원서를 냈다. 도교육위원회에서 내가 5·18 때 참가한 사실을 알고 원서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학교에 연락이 왔다. 하는 수 없이 실업계 전남공고로 원서를 내었으나 이곳에서도 원서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의 시험성적은 고등학교에서 받아주지 못할 만큼 형편없진 않았다. 오히려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하지 못했던 시기에 비해 훨씬 좋은 성적이었다.
비참한 심정으로 숭의실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교육정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회의하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성장을 이런 비인도적인 처사로 저해하는 것에 차츰 비판적으로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의 적성에 맞지 않은 과목 탓도 있었지만 교육제도에 환멸을 갖기 시작하면서 선생님의 말씀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문제학생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보다도 선생님께서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이상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는 졸업을 시켜줄테니 학교는 그만 다녀도 괜찮다고 권고휴학을 시켰다. 즉 학적은 그대로 둘테니 자진휴학을 하여 가정학습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나 역시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책 보기를 좋아하였고 조금만 공부하면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나보다 학년이 높은 친구가 대우중공업의 노동자로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함께 자취를 하였다. 나도 취직이나 할까 하여 대우중공업 입사시험 준비를 하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시험에 합격하여 대우중공업에 취직을 하였다. 노동일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아 의외로 보람을 찾기 힘들었다.
3개월을 다니고 나서 광주에 내려왔다. 광주에 내려와서 집에서 대학입시 준비를 하였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런 학교의 처사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학생으로서의 나의 행위가 퇴학을 시킬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적을 그대로 둔 것 같기도 했다.
이듬해에 전남대 공대를 합격했지만 어머니께서 전남대는 데모 잘 하는 학교라고 절대 못 가게 했다. 어머니는 5·18 때 다친 나의 상처를 뼈저리게 아파했고 그 이후로도 나의 성장과정을 보며 너무도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목포대학교 핵의학과에 입학하여 지금은 학과에 열중하고 있으며 한국병원 방사선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의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며 약하고 가난한 자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의료인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내가 가는 어떤 길이든 민중을 희생시키고 약탈하는 곳에서는 언제고 나는 나의 무기를 들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학업에 열중하기도 하겠지만, 사회 속에서 부대끼는 민중의 고통을 치유하는 진정한 의료인이 되는 것이 더 간절한 소망이다. 고통받아 본 사람이 고통을 알 수 있듯 현재의 나의 걸음걸이가 한편으로 바로 걷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고생을 해보았기 때문에 나는 언제고 힘없는 자의 상처를 돌보는 데 나의 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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