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게까지 율곡의 학행을 강조했던 다산의 율곡관은 정치발전론 전개의 내부요인 즉 정치철학적 측면에서도 ‘만남’의 모습을 낳게 하였다. 특히 율곡이 정치발전론 곳곳에서 ‘務實’을 강조하고 있었던 점은, 그야말로 실학자와 다를 바 아니었고, 다산의 행동 중심적 사고체계는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堯舜之治’ ‘仁政’으로 지칭되는 이상사회를 향한 율곡과 다산의 정치철학은 경전의 본의를 재확인하고 역사 속의 正邪를 직시하며 현실에 개혁론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시대와 학풍을 넘어서 율곡과 다산 사이에 ‘만남’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정치철학적 소통요인은 다음과 같이 확인되었다. 첫째, 율곡과 다산의 정치철학적 사유구조는 ‘爲政在人’의 명제와 왕권안정의 현실을 전제하여 ‘修己治人’의 논리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특히 이러한 논리를 따라 『성학집요』의 기본내용을 구성하는 것이었고, 다산은 자신의 저술에서 경학부분은 ‘수기’의 내용으로 一表二書는 ‘치인’의 내용으로 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도덕적 가치구현과 정치적 사회안정을 동일시하며 특히 현실적인 ‘隋時處變’論에 인식이 같았다는 점이다. 율곡과 다산은 생존의 변화 원리를 깊이 헤아리며 성실히 따르는 태도를 삶의 正道로 보았으니, 이를 따라 경장·변법의 개혁론이 개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그러한 변화는 곧 誠實과 實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율곡의 무실주의와 다산의 행동주의는 그 동질적 표상이었다. 그들은 위정자의 실천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無爲의 堯舜’에서 ‘有爲의 堯舜’으로 관점을 전환시키는 데에도 태도를 같이하였다. 넷째, 그 실천론의 중심에서는 항상 백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民瘼’의 해소를 정치의 제일과제로 인식한 율곡과 다산은 마치 왕실과 조정을 향한 백성의 대변자인 양, 그 모든 개혁론의 핵심에서는 항상 민생문제를 거론하고 있었다. 이를 뒤로하고서는 율곡의 상소문이나 다산의 一表二書는 애초부터 나타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섯째, 그와 같은 변화와 민생 중시의 개혁론 저변에는 바로 평가주의가 깊이 작용하고 있었던 점에서 또한 율곡과 다산의 만남을 볼 수 있었다. 율곡은 그 영역을 교육자에까지 넓혀 오늘날의 ‘교사평가제’와 같은 시안을 발의하는 것이었고, 다산은 공직자의 복무 내용 그 모든 것을 바로 평가대상으로 삼는 考績論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은 율곡과 다산의 정치철학적 만남 그 핵심에서는 성실성을 기반으로 한 이상과 현실, 앎과 실천, 전통과 개혁 등의 양면성이 하나로 지향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보편적 의의가 드높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의 연구는, 학파주의·분열주의적 태도에서 회통주의·보편주의의 차원으로 그 관점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유학의 진면목을 오늘에 되살려 爲民을 향한 정치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은 활용성을 갖는다. ① 조선시대의 유학사상사 및 정치사상사 연구 확장의 기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② 정치철학 관련의 논의를 다양화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다. 율곡과 다산이 공통적으로 보인 정치비판과 그 개혁방안은 진정한 정치문화 발전을 위한 현대인의 관심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③ 각종의 교육자료와 연수교재 개발의 중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한국사상 및 전통윤리 담당 교사 연수는 물론, 자기 혁신을 꾀하는 정치인 워크샵에서 그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대본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④ 선현의 세계를 이해하는 지식인의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성리학자로서의 율곡과 실학자로서의 다산은 학파의 제한성을 넘어 仁政 구현에의 선봉장으로 확인되므로 오늘의 지식인에게 그 지도 역량을 드높이는 하나의 모델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