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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자랑스런 조상을 한 분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나, 우리 모정 마을의 자랑스런 조상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다른 분들도 물론 훌륭한 조상들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다른 분들도 자신들의 조상 이야기를 올려 주길 바란다.
상동면 고정리 모정 마을의 창건자 양무공 김태허 장군(1555-1620)
김태허 장군이 은거하기 위해 지은 정자, 박연정(모정강정)
모정 마을을 창건한 사람은 조선 중기의 무신, 양무공 김태허 장군이란 분이다.
이 분은 누구인가?
임진년,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전란 주요 공신들은 30여명쯤으로 압축되는 데 양무공은 바로 이 공신중의 한 분으로 이후 승승장구하여 무관 최고위직 까지 오르게 되는 전쟁영웅이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가장 공훈이 큰 선무공신으로는 물론 이순신이 제일 먼저로 오르고 다음으로는 임란중 도원수(총사령관)로 분전했던 권율, 그 다음으로는 원균이다.(원균에 대한 폄하는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고 당시에는 꽤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논공행상에는 위 세 분외에 공신의 후보로는 28명의 명단이 더 올라와 있었다.
우선 실록의 차례대로 열거하면,
1등공신 이순신( 李舜臣 ) 권률( 權慄 ) 원균( 元均 )
2등공신 신점( 申點 )권응수( 權應銖 ) 김시민( 金時敏 ) 이정암( 李廷馣 )
이억기( 李億祺 )
3등공신 정기원( 鄭期遠 ) 권협( 權心+夾 ) 류사원( 柳思瑗 ) 고언백( 高彦伯 )
이광악( 李光岳 ) 조경( 趙儆 )권준( 權俊 ) 이순신( 李純信 )
기효근( 奇孝謹 )이운룡( 李雲龍 )
* 선조조 선무공신 후보
이원익( 李元翼 ) 곽재우( 郭再祐 ) 우치적( 禹致績 ) 배흥립( 裵興立 ) 박진( 朴晉 ) 김응서( 金應瑞 ) 정기룡( 鄭起龍 ) 한명련( 韓明璉 ) 안위( 安衛 ) 이수일( 李守一 ) 김태허( 金太虛 ) 김응함( 金應緘 ) 이시언( 李時言 )
물론 밑의 후보자들은 선무원종공신이라는 명예의 호칭으로 따로 예우되는데 김태허 장군은 당연히 선무원종1등 공신에 책봉된다.
당시의 행정부가 공식적으로 평가해 준 장군의 임란중 전공은 무엇인가?
우선 그 내용을 편하게 따라가 본다.
박연정의 '충의문'편액. 글씨는 구한말 경상도 일대에 명성을 떨치던 명필, 아석 김종대가 쓴 것이다. 자료를 검색해 본 결과, 그는 김해 한림면 출신의 유학자로 한 떄는 대원군에 의해 손자의 글씨스승으로 임명되기도 했다고 한다.
장군은 1555년 5월15일에 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대사동에서 태어났으며 26세에 무과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란중 경상도 상주일대에 명성을 떨쳤던 정기룡과 동갑이었지만 그보다 6년 먼저 출사한 것으로 계산된다.
첫 벼슬은 옥포만호, 거제도 부근의 수군 주둔지로 만호의 부락을 책임지며 바다를 지키는 말직이다. 그곳에서 인상적인 활쏘기로 순찰차 내려왔던 유성룡의 눈에 띄기도 하지만 이내 임기를 다하고 다음 보직을 기다리는 산직의 신세로 고향에서 쉬게 된다. 그의 후임으로는 이순신과 함께 했던 선무3등 공신 이운룡.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초입의 양무공 신도비 표지석
어쨌든 집에서 대기상태로 보직을 기다리는데 문제의 그 임란이 발발한다. 부산이 무너지고 일본군은 북으로 북으로 북상하는데---.
전쟁초기 조선군은 완전히 공포와 충격으로 급격하게 무너지게 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2백년간의 평화시대를 거치면서 무딜대로 무뎌진 전쟁감각, 게임이 안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하겠다. 그것도 상대는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극대화의 전투력으로 단련된 전쟁전문가들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전투원 중 20%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의 조총부대!
후손들이 고종 연간에 간행한 공의 문집, <양무공실기>. 육군사관학교소장.
이런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 전투는 내가 판단할 때, 단연 용인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이 함락되자 피해가 없던 호남. 충청지역의 지방 무관들이 의기투합하여 자발적으로‘근왕병’의 명분으로 군사를 모았는데 대략 5만 정도의 대군이 편성되었다. 물론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율도 예하부대로 참전한 전투---. 이 5만의 대군이 용인부근에서 일본군과 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고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무참하게 대패하게 된다. 더욱 창피한 것은 그 패배의 내용.
이 시대 일본군의 젊은 기대주, 와키자카 야스하루! 무서운 숫자로 몰려드는 조선군을 보자, 영웅심리가 발동한 것. 그가 갑자기 상관들의 제지를 무시하고 2,500의 기마대로 5만의 조선군을 향해 돌진했는데 그 기세에 스무 배가 넘는 5만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궤멸된 것이다. 귀신 형상의 탈을 쓰고 일시에 조총으로 공포탄을 쏘면서 돌진하자 난생 처음 듣는 화약 폭발음에 순둥이 조선군은 그냥 공황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 전쟁실화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로 하여금 전쟁신화의 주인공으로 뜨게 해 지금도 일본인들의 역사책에 패기와 용기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그 후 고전하는 일본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수군에 투입되지만 이순신에게 연전연패, 처참한 수치심을 안고 귀국하는 신세가 된다)
일본측의 맹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중 한 사람인 와키자카 요시모토. 양국의 기념행사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나 어이없고 쪽팔리게 당한 전투---하지만 당시의 양군의 전투력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이제 조선도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고---.이후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는 바로 이 달라지게 적응한 조선의 전투력을 한편, 말해 주는데---.
어쨌든 집에서 쉬고 있던 청년장교, 양무공은 나름대로 고민을 하며 드디어 집을 나선다. 이미 행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누군가가 미 점령지역을 다니며 자발적으로 전투력을 모아야 할 판, 마냥 임직을 기다릴 수는 없다. 우선 소수의 인원으로 밀양부사 박진의 후퇴를 돕고는 대구 인근에서 의병을 모은다. 주변 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팔공산에서 결의를 다지는데 금새 3,000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공이 팔공산 창의 때 지은 팔공산회맹시. 모정 강정앞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일단 결의의 의식을 행하고는 기본적으로 부대를 개편, 울산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항구, 울산! 울산을 탈환하면 적은, 특히 제 2군 가토 키요마사는 연결선이 끊겨 버린다.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울산지역의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붙인다. 일단 그 동안의 승리가 조정에 보고되자 울산군수로 정식으로 관직을 받게 되고 전투력은 더욱 강해진다. 이미 이런 과정을 통해 리더십과 인품이 인정받게 되고 더욱 자자한 민심과 명성을 얻는 김태허! 전쟁 중 경상좌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울산주변의 전투에서 어떤 때는 한 달동안에 여덟번 싸워 여덟번 이겼고 경험이 있는 참모들과 더불어 간헐적으로 상륙해 오는 일본 수군들과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적의 목을 50여급이나 베는 전공을 세운다.(1급이 20명이니 1,000명의 대단한 성과다)
그후 경상도 일대를 옮겨 다니며 곽재우의 화왕산성 전투에도 함께 참전하고 상주일대의 또 다른 영웅, 정기룡 장군과도 연합군을 편성한다.
이 시기의 주요 전투로는 울산탈환전투, 아며포 독등방전투, 이견대 봉길리 전투, 거창관 우지령 전투, 팔공산, 화왕산성전투,
등이다.
행주대첩비. 권율의 승리는 전쟁에 완전히 적응한 조선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행주대첩에 사용된 신기전이라 불리우는 다연발로켓화살인 '화차'라는 특수병기는 행주대첩 초기에 이미 승리를 결정지어 주었다.
이후로는 계속, 일본군과 울산을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각종의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일단의 전투가 끝나자 강화회담으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하지만 다시 대대적인 공격의 정유재란, 결국 이미 전쟁에 적응한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공격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삼남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한 상황, 결국 리턴하여 남해안 일대로 후퇴하는 일본군, 역시 또 울산이 문제다. 일본군 주요 주력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울산, 대대적인 양공 작전이 감행된다. 권율이 군대를 몰아 들어오고 곽재우의 의병도 오고, 왜군의 마지막 의지를 좌절시킬 결정적인 전투인 만큼 명군이 대군으로 참여한다. 이 전투에 는 양무공도 주변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물론 참전한다. 울산, 지금의 학성공원이 들어서 있는 도산성, 이미 일본군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철옹성 같은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그 성에서 농성중인 침략군의 주요 원흉, 가등청정, 가토 키요마사---성안에는 1만명의 왜군이 있었다.
이 때의 공과 관련된 상황을 <울산읍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해(1598년) 12월 명나라 장수 경리 양호가 제독 마귀와 함께 도산성을 토벌하였는데, 군수(양무공)가 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적 외진을(다단계 입체구조로 되어 있는 일본식 성곽의 일차성문안인듯) 한 번에 섬멸하고 내성을 거의 함락시키게 되었다. 이 때 적장이 거짓으로 항복하니 경리 양호가 퇴군하여 마침내 뜻대로 하지 못했다"
새카맣게 몰려드는 조명연합군에 질려 버린 일본군, 성문을 굳게 닫고는 죽을 각오로 장기전에 돌입한다. 공략이 어려운 철옹성, 조명연합군도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다만 고사작전으로 양식과 물을 말릴 판---. 이 전투에서 가토 키요마사는 극도의 기아에 소변을 마시고, 말의 고기와 피로 연명했다고 한다. 몇 달을 지나도록 포위를 풀지 못하지만 조명연합군도 피해는 자꾸 불어만 간다. 급습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자 지휘권을 갖고 있던 명나라의 장수, 양호는 일본군이 스스로 설정한 마지막 버티기 작전을 하루 남겨 둔 시점에서 후퇴를 명령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는데---.
110일간이나 포위, 봉쇄했건만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을 보고는 어떤 성내의 특별한 대비책을 확보한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결국 카토는 극적으로 살아남아 서생포 본진으로 달아나 귀국에 성공, 토요토미, 도쿠가와로부터 큐슈의 구마모토성을 보장받는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가 봉토로 받은 구마모토에서 쌓은 구마모토성 그리고 그의 자손들---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에 자료로 전시되어 있는 것을 나는 2년전 일본여행때 관람했다.
이 전투에서 양무공 실기에 나오는 실화 한 토막, 전투의 초기, 성벽의 마루위에서 철갑으로 무장한 일본군 장수 한사람이 버티어 서서는 사격명령을 내리는데 특히 명군이 속속 쓰러진다. 속수무책으로 일본군의 호기에 당하고 있는 판인데 총대장 양호는 발을 구른다.
"누가 저 놈을 쓰러뜨릴꼬?"
이에 곁에 있던 양무공이 활을 겨누어 쏘자 그 일본군 장수는 일격에 쓰러지고 만다. 총대장 양호, 양무공의 어깨를 두드리며 왈, “조선에 사람이 있었네!”사대적인 냄새가 좀 나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로 박연정 주련에도 적혀 있다.
조명 연합군에 포위당한 울산왜성의 가토군, 전란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의 하나. 일본측 그림이다.
결국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을 끝이 나고 그 후, 양무공은 밀양부사, 성주목사, 경상우, 좌병사를 역임하며 승승장구한다. 원래, 공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그!, 이미 그 즈음에 처가(지금의 상동면 고정리 모정)가 있던 향리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강가 언덕위에 정자를 짓고 은거를 기획해 두고 있다. 충청병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의 벼슬을 끝으로 사직한다. 무관으로서는 최고위직인 정1품의 호위대장(지금의 비서실장, 경호실장격)에 제수되지만 끝내 받지 않고 낙향해 버린다.
그리고 1603년, 선조대왕은 평소 문인적 기질도 있었던 양무공의 성향을 배려, <대학)1부를 하사하는데, 이는 좀 파격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평가해 우리 가문은 대단한 명예로 여기고 있다. 대개 전공을 세운 무신에게는 칼이나 활같은 병기를 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문신에게, 그것도 학문적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나 내리는 인문학 경전을 내린 것이 좀 의외였던 것이다.
한편, 실록에는 광해군 때, 이순신의 자리였던 삼도수군통제사(수군총사령관) 자리를 두고 당시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노론과 개혁자 광해군과의 갈등과 심리전이 기록되어 있는데 흥미롭다. 쉽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광해군/ 비어있는 국방의 중요한 자리인 삼도수군통제사에는 누가 적임이요?
노론/ 김태허가 가장 적임인줄 아뢰오! 그는 경상좌도 병사를 오랫동안 맡고있는 맹장으로
누구보다도 부산 일대의 바다를 꿰뚫고 있는 인물인줄 아뢰오!
광해군/ 경상우도 병사 정기룡은 어떻소? 그 또한 임란중에 연전연승한 맹장이 아니요?
노론/ (이미 김태허를 밀기로 작정한 듯 입을 모아) 정기룡은 수군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나이가 56세이니 적임자가 아닌 줄 아뢰오!
광해군/ (이미 정치색에서 자유로운 정기룡을 내정한 듯) 이순신도 54세에 그 직을 받았고
김태허도 나이로 따지면 정기룡과 동년배이니 나이가 무슨 문제란 말이요!
(출처: 정기룡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박상하 장편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 제2권.192,203,231,232,282쪽 참조.2009년 일송북간 실록에 근거하여 편집한 내용이다)
결국 정치적 계산을 깔고 노론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은 광해군의 뜻대로 해군사령관에는 정기룡 장군이 부임한다.(사실 수군 통제사는 육군에 비해 품계로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각도의 병사(병마절도사)와 품계는 같다. 하지만 임란중 그 중요도를 감안 삼도의 바다를 총괄하는 총지휘권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전쟁중에 신설된 직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라 힘의 견제와 균형문제까지 얹혀 그러한 신경전을 벌인 것이다.
어쨌든 양무공은 충청병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 정2품의 자헌대부의 명예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 은거한다. 원래 시와 문에도 관심이 있던 그! 자신의 호를 따 박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인 묵객들과 교유하며 만년을 보낸다. 사촌 앞 넓은 들판과 그 들을 둘러 싼 임야가 다 공이 하사받은 땅들이고---(사촌앞, 세월이 지나면서 강가의 들판은 다 사촌사람들에게 팔려 넘어갔지만 지금도 사촌의 산야는 전부 모정문중의 소유로 남아있다)
1620년, 3월 15일. 66세의 일기로 박연정에서 사망하자 조정은 전례를 따라 3일 동안 조회를 쉬었으며 부조를 하사한다.
그리고 사후, ‘양무공(讓武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모정에는 이미 마을이 있었지만 임란 중에 불타 없어졌는데 양무공이 은거함으로 이후 양무공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마을의 위치는 지금의 동네가 아니고 박연정 아래의 강변주위, 언제부터인가 마을이 산비탈을 따라 위로 형성,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의 산소는 고향의 하남읍 대사동에 있고 공의 부인, 부여백씨의 묘와 공의 아들, 김수겸(정3품 통정대부, 절충장군, 안동영장을 지냄)과 그 아래대의 열조들은 줄곧 모정 강정 옆의 선산에 묻혀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박연정 사진을 <누정록 상동면편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늘 지나가며 보았는데, 이러한 분인줄은 미처 몰라 얼굴을 붉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