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조지 오웰(본명, Eric Blair)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그는 명문 사학인 이튼 칼리지 장학생이었다--영국식민지인 버마(Burma)에서 제국경찰로서 5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에게 버마시절은 제국의 최전선에 위치한 가해자로서 한없는 죄의식과 무력감 그리고 체제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시켰던 기간이다. 따라서 오웰이 제국경찰직을 돌연 사임했을 때, 그것은 지배(가해) 진영, 곧 “부끄러워해야 하는 무엇”으로서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했다. 버마시절은 오웰이 권력자로서 권력의 실상을 체험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것은 오웰의 삶과 글쓰기를 위한 원체험이었고, 작가로서 오웰의 차후의 삶이란 그 때 형성된 죄의식의 속죄를 위한 하나의 긴 여정으로 불릴만한 것이었다.
그가 버마시절의 ‘성공’과 가해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죄의식을 보상받는 길은 무엇인가. 죄책감이 클수록 처방은 급진적이어야 했다. 오웰의 속죄는 2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피해자의 위치로 ‘내려가는(descending)’ 것, 즉 버마시절과는 반대로, 삶의 가장 누추하고 긴박한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피해자의 실상을 낱낱이 체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자유롭게’ 피해 진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청년 오웰의 눈에 비친 영국사회는 억압과 착취가 식민지국가만의 현상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그 곳 역시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 대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노동계급은 백인원주민(white natives)에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버마 현지인들의 고단한 삶을 지배자 혹은 외부자로서 ‘관찰’했던 오웰은 이제 피지배자 혹은 내부자로서 적나라한 궁핍과 소외의 현장과 적나라한 대면을 시작하거니와, 그는 파리 뒷골목과 런던의 걸인, 부랑자, 노숙인들 속에서,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촌에서, 스페인의 아라곤 전투와 바르셀로나의 시가지에서, 탈인간화의 권력적 실태, 특히 제국주의, 자본주의, 전체주의(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어두운 실상과 ‘자발적이고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조우한다. 특히, 버마시절과 그에게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안겨준 ꡔ동물농장ꡕ의 출판 이후 마지막 몇 년(1945-50)을 제외하면, 가난과 궁핍은 한 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는 생의 반려였다.
둘째는 오웰은 창작행위 자체를 속죄의, 혹은 책임윤리의 이행과정으로 간주했다. “나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죄의식에 관한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처럼, 그의 작품들은 가난 혹은 전쟁의 직접적 체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들 아니면 에세이와 서평 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와의 군더더기 없는 직접적 교감을 추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들, 예컨대 「교수형(A Hanging, 1931)」과 ꡔ버마 나날들(Burmese Days, 1934)ꡕ 그리고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 1936)」에서 제국주의를, ꡔ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1933)ꡕ, ꡔ목사의 딸(A Clergyman's Daughter, 1935)ꡕ, ꡔ엽란을 날려라(Keep the Aspidistra Flying, 1936)ꡕ, ꡔ위건 피어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1937)ꡕ을 통해 가난의 혹독함과 자본주의적 계급체제를, 스페인 내전 참전기록인 ꡔ카탈로니아에 경의를(Homage to Catalonia, 1938)ꡕ, ꡔ동물농장ꡕ 그리고 ꡔ1984년ꡕ을 통해서는 배반당한 혁명과 전체주의의 실상을, 때론 길고 때론 짧게 그리고 다양한 형상화 수준에서, 절절하고도 낱낱이 고발한다.
무엇보다 오웰은 좌파지식인들의 추상을 통한 삶의 도식화를 거부하며, 인간조건에 대한 물질주의적 관점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단 한차례도 인간의 동기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는 맑스주의 입장이나 전적으로 생물학적이라는 프로이드의 견해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오웰의 사회주의는 “극단적 이상주의”와 “극단적 상식”을 오가는, 맑스 보다는 프루동 류의 사회주의에 훨씬 더 가까 왔다. 그의 사회주의적 신조는 위엄(decency), 자존에의 권리, 정직, 공정성, 형제애 같은 도덕적 개념들, 영국의 급진주의 전통이 오래 간직해 온 행동의 일반원칙들 혹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것이 이론적인 정치함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가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정교한 미래사회의 구상을 제시하는 데 기질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들의 오류와 위험을 지적하는 데 오히려 더 열정을 쏟았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엄, 명예, 질서 있는 삶에의 동경이야말로 오웰 급진주의의 또 다른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