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자식 상계군의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야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천죽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강화도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천주교 신앙이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적당한 해로를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그 후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에 체포된다. 그 뒤에도 이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는 강화도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수 천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는데, 이곳 강화도에서는 1868년에 진무영(현재 강화성당 부근)에서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71년에 이곳 갑곶에서 직접적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곶에서 순교하신 분은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세 분이다. 사연인 즉, 미국 군함이 물러간 이후, 같은 해 5월 29일(양력(7월 16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좌우 포도대장에게 내리게 되었고, 이때에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간 일이 있었다는 죄로 이 세 분이 효수(梟首)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위치를 연구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하였고,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으며, 사제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의 신심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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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골 ( 이승훈의 묘 )
홈페이지 | http://old.caincheon.or.kr | 연락처 | (032) 464-0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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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 교구 | 인천교구 |
지리좌표 | 이승훈 묘소 앞 북위 37°27′22″ 동경 126°44′42″ | ||
문의처 | 만수1동 성당 (032) 464-0888 | ||
찾아가는 길 | 제 2 경인 고속 국도 서창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빠져 나가면 42번 국도인 수인 산업 도로와 닿는다. 자연 주유소 길 건너편에 안내 푯말이 있다. 남동 정수 사업소 울타리를 끼고 20분 정도 걸으면 이승훈 묘에 다다른다. |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베드로)의 묘 앞에 서면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재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다.
[출처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