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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권,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8월 29일(병오)
전 대제학 정이오를 태실 증고사로 삼다
전 대제학(大提學) 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고, 모관(毛冠)과 목화[靴子]와 약(藥)을 하사하였다.
세종 1권,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5일(신축)
태실 증고사 정이오가 태실산도를 바치다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 정이오(鄭以吾)가 진양(晉陽)으로부터 와서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현 곤명(昆明)에 있는 것이었다
세종 3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3월 9일(계축) 4번째기사
정이오 등이 《장일통요》를 편집하여 전문과 함께 올리다
찬성(贊成)으로 치사(致事)한 정이오(鄭以吾)·병조 판서 조말생·호조 참판 김자지·내자시(內資寺) 윤(尹) 유순도(庾順道)·검교 사재감 정(檢校司宰監正) 이양달(李陽達)이 《장일통요(葬日通要)》를 편집하여 전문(箋文)과 함께 올렸다. 그 전문에,
“신(臣) 정이오 등은 선지(宣旨)를 받자온 바, ‘선왕(先王)의 제례(制禮)는 천자(天子)·대부(大夫)·사(士)를 막론하고 장사에 대한 기한이 각각 달수로 정해 있는데, 후세의 음양가(陰陽家)들이 많은 금기(禁忌)에 구애되어 시기가 넘어도 장사하지 아니하니, 나는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이를테면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르는 것은 장사(葬師)가 가장 꺼리는 것이나, 나는 일찍이 두 번이나 증험하였는데, 아무런 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종류는 알 수가 없으니, 마땅히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여, 정론(正論)은 취하고, 사설(邪說)은 버리며, 성현의 요지(要旨)를 바탕삼고 속무(俗巫)의 고질을 타파하여, 하나의 글을 집성하여 올리라.’ 하시었으니, 전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산 자를 봉양케 하는 방법이 구비됨에 따라, 죽은 자를 보낼 때의 모든 금기를 염려하여,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시니, 백성으로 하여금 유감이 없게 하자는 뜻이 지극히 깊고 또 절실하시옵니다.
신들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음양의 설이 비록 황제(黃帝)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양한(兩漢) 이래로 다투어 부적(符籍)이나 예언만을 존숭하며, 조화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고 각각 길흉의 설을 세워, 그 분류가 백가(百家)를 헤아리매, 세상을 의혹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일이 너무도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에는 여재(呂才)가 그릇된 점을 삭제하여 바로잡았고, 뒤에는 채성우(蔡成禹) 같은 무리들이 또한 《변망(辨妄: 망령됨을 밝히는 논)》을 저술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용사(庸師) 야부(野夫)들은 얻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에만 치우치고 현실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시속의 괴히 여김을 사고, 현실에만 치우치고 구식에 통하지 못하면, 또한 세상을 속일 뿐이니, 반드시 고금을 참작해야 양자의 폐단을 제거할 것입니다.
이 글은 첫 머리를 《예기(禮記)》·《춘추(春秋)》에 기재된 장기(葬期)의 설로 한 것은 왕제(王制)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힌 것이요, 다음으로 춘추 열국(春秋列國)·한(漢)·당(唐)의 모든 임금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옛적의 장사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여재(呂才)의 《장(葬)》 서(敍)와 사마군실(司馬君實)의 《장론(葬論)》을 든 것은 세속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청오자(靑烏子)의 논한 바와 왕수(王洙)의 인거(引擧)한 장기(葬記), 주희(朱熹)의 말한 택일(擇日), 호순신(胡舜申)의 취한 제가(諸家)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하나는 시속에 따른다는 뜻을 보인 것이요, 하나는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은 다 장통(葬通)으로 세속의 구기일(拘忌日)이 아니라는 점을 보인 것이며, 또 다음으로 《승흉장법(乘凶葬法)》·채성우(蔡成禹)의 《변망(辨妄)》·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尅擇通書)》를 든 것은 압본명(壓本命)이니, 횡간(橫看)이니, 망운(亡運)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사설(邪說)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혹시 신들의 관견(管見)을 첨부하여, 모두 합치어 《장일통요(葬日通要)》라 칭하고, 전문과 함께 올리오니, 전하께서 특히 한 번 보시고 국내에 반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십전대리일을 앞당기고 뒤지는 일이 없이, 각각 그 어버이를 장사하게 하면, 인심이 안정되고, 왕제(王制)가 다시 밝아질 것이니, 이도 또한 죽은 자를 보내는 도(道)에 있어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장사는 어느 해나 달을 가리지 아니하였다는 증거를 논합니다. 《예기》에, ‘천자는 7월, 제후는 5월, 대부는 3월, 선비[士]는 한 달을 넘겨서 장사한다.’ 하였고, 《춘추전》에, ‘천자는 7월만에 장사하는데, 모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이 다 모이고, 제후는 5월인데, 동맹국(同盟國)만이 모이고, 대부는 3월인데, 동위(同位)만이 모이고, 사(士)는 달을 넘는데, 외인(外姻)이 모인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按察)컨대 춘추 시절에 열국의 제후가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이 지나도 장사하지 않으면, 예(禮)에 태만하다 일렀습니다. 그렇다면 제후도 천자의 예를 참람되게 사용[僭用]할 수 없거든, 하물며 대부가 제후의 예를 참용하며, 사서인(士庶人)이 대부의 예를 참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는 본래 현저한 법령이 없어 위로 대부에서 아래로 사서인까지 상식(常式)을 모르고, 음양가의 금기(禁忌)에만 의혹하여, 기한이 자나도록 장사하지 못해도 심상히 여기며, 부끄럽게 알지 않는 자가 간혹 있으니, 지금부터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르게 하고, 어기는 자는 유사로 하여금 가차없이 징계하도록 하시옵길 바랍니다.
옛적에는 날 가리는 일이 없었음을 논합니다. 왕수(王洙)의 《신서(新書)》에, ‘혹자의 말이, 옛적에는 날을 점치는 일은 있었어도 날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에 정사일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장사를 못하고 무오일(戊午日)에 장사했고, 기사일(己巳日)에 제(齊)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사일(辛巳日)에 애공(哀公)을 장사했고, 정사일(丁巳日)에 노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성공(成公)을 장사했고, 계해일에 제강(齊姜)을 장사했고, 정해일에 제나라 환공(桓公)을 장사했고, 을해일에 송(宋)나라 문공(文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정사(定姒)를 장사했고, 계해일에 송나라 양공(襄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위(衛)나라 목공(穆公)을 장사했고, 기해일에 제규(齊嬀)를 장사했고, 정사일에 제나라 경공(景公)을 장사하였고, 기해일에 제나라 소공(昭公)을 장사하였다. 그런데 사일(巳日)이나 해일(亥日)은 지금에 와서는 크게 흉한 날이라 하고 있으니, 택일한다는 말은 유래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컨대, 동(東)·서한(西漢)에서 부적이나 예언을 으뜸으로 여기고, 사설(邪說)을 신봉하였으나, 서한 고조(高祖)는 병인일 장릉(長陵)에 장사했고, 혜제(惠帝)는 신축일 안릉(安陵)에 장사했고, 문제(文帝)는 을사일 패릉(覇陵)에 장사했고, 선제(宣帝)는 신축일 두릉(杜陵)에 장사했고, 원제(元帝)는 병술일 위릉(渭陵)에 장사했고, 성제(成帝)는 기묘일 연릉(延陵)에 장사했고, 동한 광무(光武)는 정묘일 원릉(原陵)에 장사했고, 명제(明帝)는 임술일 현릉(顯陵)에 장사했고, 장제(章帝)는 계묘일 경릉(敬陵)에 장사했고, 충제(沖帝)는 기미일 회릉(懷陵)에 장사했고, 질제(質帝)는 을묘일 정릉(靜陵)에 장사했고, 당(唐)나라에 와서도 여재(呂才)가 음양을 산정(刪正)하였는데, 태종(太宗)은 경인일 소릉(昭陵)에 장사했고, 고종(高宗)은 경인일 건릉(乾陵)에 장사했고, 예종(睿宗)은 경오일 교릉(橋陵)에 장사했고, 숙종(肅宗)은 경오일 건릉(建陵)에 장사했고, 송(宋)나라에 와서도 술수(術數)에 정통한 양유덕(揚惟德) 같은 사람들이 조서를 받들어 《만년구주(萬年具州)》·《통천(通天)》·《총성(摠聖)》·《집정(集正)》 등의 역서(曆書)를 만들어 반포하고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태조(太祖)는 을묘일 영창릉(永昌陵)에 장사하였으니, 이상의 장일은 다 장통(葬通)의 일(日)이 아닐진대, 택일의 법이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장서(葬書)의 망령됨을 논하옵니다. 《당서(唐書)》에 실려 있는 《신서(新書)》에, ‘태종은 음양에 관한 서적이 근대에 와서 차츰 와전되어 천착(穿鑿)이 너무 심하고, 금기(禁忌)도 너무 많음을 느껴, 드디어 태상 박사(太常博士) 여재(呂才)에게 해명하여, 학자 10여 명과 더불어 함께 정오를 가하여, 그 천박한 습속을 삭제하고, 쓸 수 있는 것만을 남기어 53권의 신서(新書)와 아울러 구서(舊書) 27권을 편성하여 정관(貞觀) 15년에 완성되자,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행세(行世)케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여재가 많이 전고(典故)를 들어 정리(正理)를 질정(質正)하였기 때문에, 비록 술자(術者)가 얕보는 경향이 있으나, 자못 경의(經義)에 합치되는 점이 많습니다. 그의 《장서(葬書)》 서(敍)에 이르기를, ‘《주역(周易)》에, 「옛날의 장사는 섶[薪]으로 덮고 봉분도 아니하며, 나무를 심어서 표하지도 않고 상기(喪期)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후세의 성인(聖人)이 관곽(棺槨)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과괘(大過卦)에서 얻은 것이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장사라는 말은 감춘다는 뜻으로 사람이 다시 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효경(孝經)》에, 「택조(宅兆)를 점쳐서 편안히 모신다.」 하였으니, 이는 복토(復土)하는 일이 끝나면, 길이 감모(感慕)하는 곳이 되며, 둔석(窀穸)의 예를 마치면, 영원한 혼신(魂神)의 집이 마련되는 것이나, 장차 조시(朝市)의 변천도 예측하기 어려우며, 물이 날지, 돌이 깔릴지, 땅속을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생각다 못해 점을 쳐서 거의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니, 신종(愼終)의 예를 갖춘 뿐이요, 길흉의 의(義)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음양의 장법(葬法)을 가하여, 혹은 연월의 편리를 가리고, 혹은 묘전(墓田)의 원근까지 참작하여, 한 가지만 맞지 않아도 화가 미친다, 화가 생긴다 하고, 무자(巫者)는 재화(財貨)를 탐내어 함부로 방해를 가하지 않는 자 없어, 드디어 하나의 장서(葬書)로 하여금 백가(百家)가 각각 길흉에 대한 설명이 있어 구애와 금기가 많았으며, 더구나 천지가 있는 이상, 건곤(乾坤)의 이치는 갖추어 있고, 강유(剛柔)가 있는 이상, 소식(消息)의 의(義)도 분명하며, 혹은 주야(晝夜)의 도(道)에 성숙되고 남녀의 화(化)에 감동되며, 삼광(三光)이 위에서 운행하고, 1기(氣)가 아래로 통하는, 이것이 음양의 대경(大經)이니, 잠깐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이치마저 상사의 길흉에 견강 부회하여, 요망된 말을 하는 것이다.
《춘추전》에, 「왕자는 7월만에 장사하고, 제후는 5월만에 장사하고,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한다.」 하였는데, 이는 귀천(貴賤)이 같지 않은 이상, 예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동맹(同盟) 동궤(同軌)로 하여금, 그 시기에 와서 조상케 하자는 것이니, 인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제정한 것이므로, 드디어 상식이 되었다. 법이 이미 일정하여, 어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을 늦추어 장사하면, 예에 태만하다 이른다 하였으니, 이로써 장사는 일정한 기한이 있고, 연월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1이요,
《춘추》에 또 「정사일에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못하고 다음날 무오일에 장사했다.」 하였는데, 공양(公羊)씨는 잘한 일이라 칭하였고, 《예기》에 장사날을 점칠 때, 하일(遐日)을 먼저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그 달이 다 가는 날을 택하여, 불회(不懷)를 피하자는 것이다. 지금 《장서(葬書)》를 보면, 기해일에 장사하는 것을 가장 흉하게 말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펴보면, 이 날에 장사한 것이 무릇 20여 건에 달하니, 이로써 장사에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2요,
《예기》에 또 「주(周)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하므로, 대사(大事)는 밝은 아침을 이용하고, 상(商)나라는 백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대낮을 이용하고, 하(夏)나라는 흑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저물녘을 이용한다.」 하였고, 그 주석에 「대사는 곧 초상 장사를 말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숭상하는 바를 직접 취한 것뿐이요, 시(時)의 조만(早晩)을 가린 것이 아니며, 《춘추》에 정(鄭)나라 자산(子産) 및 자태숙(子太叔)이 간공(簡公)을 장사하려는데, 때마침 묘소를 맡은 대부(大夫)의 집이 장사 나가는 길에 마주쳤다. 만약 그 집을 무너뜨린다면, 곧 이른 아침에 하관(下棺)할 수 있고, 그 집을 피하기로 한다면, 대낮에 하관하게 되는데, 자산이 그 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대낮을 이용하고자 하니, 자태숙은 말하기를, 「만약 대낮에 하관한다면, 장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인 제후·대부들에게 수고를 끼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산은 박물 군자(博物君子)로 알려졌는데, 자태숙은 제후를 위하여 피하자고 하였으니, 국가의 대사는 초상 장사보다 더한 것이 없겠거늘, 반드시 길흉의 의(義)가 있다면, 그들이 이용하지 아니할 이치가 없는데, 지금 시(時)의 득실에 관계하지 않고 인사(人事)의 가부(可否)만을 논했을 뿐이며, 증자문(曾子問)에, 「장사하다 일식(日食)을 만나면 길 왼쪽에 두었다가 밝아짐을 기다려서 행사하는 것은 비상을 대비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만약 《장서》에 의한다면, 흔히 건(乾)·간(艮)의 시를 이용하는데, 모두 한밤중이니, 이렇다면 글[文]과 예(禮)가 서로 위반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기》나 《춘추전》을 보면, 장사에 시를 가리지 않는 증거가 제3이요,
《장서》에 「부귀 관작이 다 안장(安葬)으로써 이루어지고, 보명연년(保命延年)이 분묘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효경》을 보면, 「몸을 바로 세우고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까지 들추어 부모를 현달케 한다.」고 하였고, 《주역》에 「성인(聖人)의 큰 보배는 곧 지위이다. 무엇으로 지위를 지키느냐. 바로 인(仁)이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나날이 근신하면, 혜택이 한량없이 미치고, 만약 덕이 모자라면, 도움이 있을 리 없다. 이는 장지의 길흉을 들어 복록의 연장을 논한 것이 아니다. 장손(臧孫)이 노(魯)나라에서 자손을 두게 되리라는 말은 길일의 장사와 상관이 없고, 숙오(叔敖)는 초나라에서 절사(絶祀)되리라는 것도 묘지를 잘못 정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장사에 관한 길흉은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제4요,
지금 초상 장사에 대한 길흉이 모두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5성(姓)과 결부하였는데, 옛날의 장지는 다 국도(國都)의 북쪽에 있었으니, 영역(塋域)이 이미 일정되어 있는 이상, 어떻게 성씨를 묘소에 관련시킬 것이며, 조(趙)씨의 장지가 모두 구원(九原)에 있고, 한(漢)나라의 산릉(山陵)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상리(上利)·하리(下利)는 거론할 여지 없는데, 대묘(大墓)·소묘(小墓)의 의(義)는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 자손들이 부귀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혹은 하(夏)·상(商)·주(周) 3대와 더불어 풍교(豐敎)를 같이 했고, 혹은 6국을 나누어 왕이 되었으니, 5성(五姓)의 의는 옛 기록에 전혀 볼 수 없는데, 길흉의 이치는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이 제5요,
또 인신(人臣)의 명망과 지위는 진퇴(進退)가 무상하여 처음에는 천했다가 뒤에는 귀한 수도 있고, 처음에는 통했다가 나중에는 막히는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자문(子文)이 세 번 영윤(令尹)을 지냈고, 전금(展禽)이 세 번 사사(士師)에서 쫓겨났다. 열 번을 장사해도 한 번 정한 날은 다시 변경한 일이 없고, 분묘가 완성되면 고치질 않았는데, 어찌하여 명위(名位)는 잠깐도 편안할 때가 없는가. 그러므로 관작(官爵)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요, 안장(安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6이요,
저속한 무식배들이 모두 장서를 믿고 있기 때문에, 무자(巫者)가 길흉을 사칭하면, 행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드디어 벽용(躄踊)의 즈음에 장지를 택하여 관작이나 바라며, 도독(荼毒)의 궁극에도 장시(葬時)를 가려 재록(財祿)을 꿈꾸고, 혹은 진일(辰日)에 울고 곡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여, 드디어 웃고서 손님의 조상을 받으며, 혹은 친속은 광중(壙中)에 가까이 못하는 살(殺)이 있었다 하여, 집안 장사에 참여하지 않고 평복을 입고 있으니, 성인의 교화가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장사가 세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제7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수(王洙)는 위에 말한 여재(呂才)의 논설이 가장 경의(經義)에 합치된다 하였으므로, 지금 몇 대문을 절취하여, 이에 부록하여 후인의 의혹을 제거하자는 바입니다.
금기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장론(葬論)》에, ‘사람의 부귀와 빈부, 수요(壽夭)는 하늘에 매이고, 어질고 어리석은 것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며, 절대로 장사와는 관계가 없다. 설사 장사(葬師)의 말과 같다 해도, 사람의 자식된 자가 바야흐로 애통이 극한 처지에 있어, 어찌 차마 그 어버이의 체백(體魄)을 이용하여 스스로 복리를 노리겠는가. 옛날 우리 조상의 장사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관곽도 갖추지 못했다가 태위공(太尉公) 이하로부터 비로소 관곽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금·은·주옥(珠玉)의 물품은 일찍이 한 푼도 관 속에 넣어 본 일이 없었다. 장차 태위공을 장사하려 하는데, 족인(族人)들이 다 말하기를, 「장사는 집안의 대사인데, 어찌하여 음양가에게 문의하지 않는가. 이는 절대로 불가하다.」고 하니, 나의 형 사마백강(司馬伯康)이 어찌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음양가에게 문의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디서 훌륭한 장사(葬師)를 만나 문의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족인들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생(張生)이란 사람은 훌륭한 지사로서, 여러 고을이 다 쓰고 있다.」고 하므로, 형은 곧 장생을 불러서 2만 금을 주겠다고 하니, 장생은 야부(野夫)로서, 대대로 장사가 되어 야인의 장사를 해 왔지만, 소득은 천금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말하기를, 「네가 내 말대로 한다면, 나는 너에게 장사를 맡기겠지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다면, 다른 지사를 구하겠다.」고 하니, 장생은 명령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형은 연·월·일·시 및 광중의 천심 광협(淺深廣狹)과 도로가 어디로 나야 한다는 것들을 자기 의사대로 정하되, 모두 편리를 주로 하여, 장생을 시켜 장서에 결부시켜 「크게 길하다.」고 하게 하여, 족인에게 보여 주니, 모두 다 기뻐하며, 달리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내 형은 나이 79세로 경(卿)의 반열에서 퇴직하였고, 나도 나이는 66세로 시종(侍從)의 자리에 붙어 있고, 족속으로 벼슬길에 오른 자가 23명이니, 장서를 신용하는 사람들의 집안도 별로 내 집보다 낫지 않다. 연전에 내 아내가 죽었을 때, 관이 만들어지자, 염(歛)하고,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행상하고, 광(壙)이 마련되자, 장사하고, 말 한 마디도 음양가에 묻지 아니하였으나, 지금까지 다른 사고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음양가가 간사한 말로써 대중을 의혹케 하여,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미워하였는데, 상가에 있어서는 더욱더 심하다. 그래서 지난번 간관(諫官)으로 있을 적에 천하의 장서를 엄금하도록 주청하였는데, 당시 집권자가 그런 뜻을 갖지 아니하였다. 지금 이 논을 저술하여, 뒷 자손으로 하여금, 장사는 반드시 제때에 행해야 하며, 장구(葬具)를 받드시 후히 하지 않음을 알려면, 내 선조를 보고, 장서가 족히 믿을 것 없음을 알려면, 내 집을 보라. 원풍(元豐) 7년 월 일에 사마광(司馬光)은 서술한다. ’고 하였습니다.
택일·택지에 대하여 논하옵니다. 《성의장력(醒疑葬曆)》에는, ‘청오자(靑烏子)의 좋은 해를 택하는 것이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거하였고, 왕수(王洙)는, ‘좋은 해가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시만 못하고, 좋은 시가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용하였고, 《만력회동(萬曆會同)》도 이와 같은 뜻이며,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도, ‘전기해서 장사할 만한 땅을 택하여 날을 가려 천광(穿壙)하고 토지의 신에게 제사한다.’ 하였고, 《황서절부록(黃瑞節附錄)》에도, ‘옛적에는 장지나 장일은 다 점쳐서 결정했는데, 지금 사람은 점하는 법을 모르니, 시속에 따라 택정하는 것도 가하다. ’고 하였고, 호순신(胡舜申)은 각가(各家)의 장일법(葬日法)을 논하되, 《광제력(廣濟曆)》을 보면, 안장할 수 있는 날이 임신·계유·임오·갑신·을유·병신·정유·임인·병오·기유·경신·신유 등 12일은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을 만들었는데, 《지리신서(地理新書)》도 취했고, 《천통(天通)》·《대명력(大明曆)》 등의 역서도 역시 많이 취했으니, 이 12일은 진실로 이용할 만한 날이다. 그러나 역일(曆日)의 주(注)에, 반드시 장사지내도 좋다는 문구가 붙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안찰(按察)하건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땅이 좋다는 것은 흙빛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것이 그 증거이다. 부조자손(父祖子孫)이 하나의 동기일진대, 저기가 편안하면 여기도 편안하고, 저기가 위태하면 여기도 위태한 것이 역시 이치이다. 그런데 금기에 구애하는 자들이 혹은 땅의 방위를 택하고, 혹은 날의 길흉을 결단하니, 역시 편견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정자의 논평이 가장 근리(近理)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 《광제(廣濟)》·《백기(百忌)》·《총성(摠聖)》 등 역서 및 《삼력회동(三曆會同)》·《금화회동(金華會同)》·《십력회동(十曆會同)》·《삼원정경(三元正經)》·《수금구결(袖金口訣)》·《만력회동(萬曆會同)》·《정의명진론(正義明眞論)》·《성의력(醒疑曆)》·《연길서(涓吉書)》·《지리신서(地理新書)》·《지리변망(地理辨妄)》·《극택전서(克擇全書)》·《극택통서(克擇通書)》·《원귀집(元龜集)》 등 서적을 보면, 다 앞에 말한 12일을 크게 길하다 하였으니, 장사에 있어 인(寅)·오(午)·신(申)·유(酉)일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개 인(寅)·오(午)는 화덕(火德)인 때문에, 금의 광채를 상징하여 금계(金鷄)가 우는 날이라 하고, 신(申)·유(酉)는 금덕(金德)인 때문에, 옥의 윤기를 상징하여, 옥견(玉犬)이 짖는 날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위로 부모도 부르지 못하고, 아래로 자손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음양이 서로 조응하고 흉신(凶神)이 다 잠복한다는 점을 말한 것인즉,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오니, 지금부터 《대명력(大明曆)》의 예에 의하여, 장통일(葬通日)은 반드시 당년의 책력 날짜에 주(註)를 달도록 하시옵기 바랍니다.
승흉장법(承凶葬法)을 논합니다. 호순신이 말하기를, ‘장사는 길흉이 있으니, 길장은 졸곡(卒哭)을 지낸 장사, 또는 해를 넘은 장사 이외에 연고가 있어 개장(改葬)하는 것을 이른 것이니, 이는 선택한 연·월·일·시가 반드시 다 좋아야 쓸 수 있고, 흉장은 졸곡 전 백일 이내를 이른 것이니, 연·월의 흉악은 묻지 않고, 다만 좋은 일·시 만을 가리며, 일체의 신살(神殺)도 심히 구애하지 아니하되, 만약 연·월·일·시가 다 길하면 더욱 좋다. ’고 하였습니다.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리게 되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채성우(蔡成禹)의 《지리변망(地理辨妄)》에, ‘세상에는 떠드는 자들이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조궁(釣宮)의 설을 만들어 태세 월건(月建)을 중궁(中宮)으로 들게 하여, 순수로 돌려 9궁(宮)으로 가서 상극되면 흉하고, 상생되면 길하다고 하며,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체궁(替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방편을 마련하여 만들어, 소득되는 천간(天干)·지지(地支)로써 순수로 돌리어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개궁(蓋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소득되는 천간·지지로써 9성(星)을 취하여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또 월건을 중궁으로 끌어들여, 순수로 9궁으로 가는 것을 운용해서 신살(神殺)을 띠게 하고, 또 신살의 궁위(宮位)를 더하여 태양(太陽)을 만들고, 태음(太陰)을 만들고, 복성(福星)·용덕(龍德)을 만들어 사리(四利)라 이르는 것이다. 무릇 월건이 신살을 띤다면, 세건(歲建)·일건(日建)·시건(時建)은 유독 신살을 띠지 못하란 말인가. 괘(卦)의 종묘효(宗廟爻)가 신살을 띨 수 있다면, 그 초·2·3·4·5효(爻)는 유독 신살을 띨 수 없단 말인가. 그 8괘에 종묘효만이 신살을 띨 수 있다면, 오황재중(五黃在中)은 또 어느 괘에 속하며, 또 어느 것이 종묘효란 말인가. 그들의 이른바 사리성(四利星)이 또 무엇을 의거한 것인가. 그러므로 9가 3원(元)이 된다는 설도 꿈과 같은 것이요, 조궁(釣宮)·체궁(替宮)·개궁(蓋宮)·사리(四利)라는 것은 또 꿈속에서 꿈을 되풀이하는 격이며, 그네들의 이른바 자(紫)·백(白)·벽(碧)·황(黃)·녹(綠)·흑(黑)이라는 것도 다 근거 없는 설이며, 그 암건적살(暗建的殺)도 다 이러한 종류요, 그 초신접기(超神接氣)라는 것도 둔갑술(遁甲術)과 근사하나, 역시 지붕 위에 지붕을 올린 격이다. 그러한데 세상 사람이 다만 그 운용하는 바가 종횡으로 15의 수(數)라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마치 《하도(河圖)》·《낙서(洛書)》에서 나온 듯이 의심하여, 그릇된 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겉만 보고 존숭 신앙하기 때문에, 말을 아니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하건대, 태세가 본명을 누른다는 설은 대개 장사할 날짜를 중궁에 넣어 순수로 돌려 9궁으로 가되, 본년 태세가 당도하는 궁에 가서 멈추고, 60갑자로 두루 헤아려서, 만약 그 집안에 본명(本命)이 태세의 궁과 같은 자가 있으면, 태세가 본명을 누르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은 마땅히 금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만약 사람이 이것에 범하기로 든다면, 1년 치고 없는 날이 없을 것이므로, 태세가 본명을 누르지 않는 날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옛사람은 장사의 기한이 많아도 7개월을 넘지 않았으며, 또 한나라와 당나라의 여러 임금도 1, 2년 내에 장사를 못한 자는 대개 없었으니, 이 법을 쓰지 아니한 것이 명확하옵니다. 이것이 이른바 조궁의 유법(遺法)이온데, 채성우가 자상히 변명하였습니다.
장사가 흉일을 범한다는 것과 횡간도(橫看圖) 및 망인(亡人)의 운수·6륜(輪) 등법의 허망됨을 논합니다. 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克擇通書)》에, ‘모든 역서를 살펴보니, 장사날이 천탄(天呑)·천건(天建)·천혁(天嚇)을 범하면, 택장(宅長)에게 좋지 않고, 월탄(月呑)을 범하면, 장자와 장손에게 좋지 않다.’ 했는데, 지금 참고해 보면, 정·4·7·10월은 천덕(天德)이 천탄과 날이 같고, 또 옥약길성(獄鑰吉星)이 천건(天建)과 날이 같고, 또 상일(相日)과 날이 같고, 상일은 천혁과 날이 같고, 월궁(月宮)은 월탄과 날이 같건마는, 모든 역서에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흉일로 만들었으며, 대장일(大葬日)은 선현이 말한 좋은 일진으로 누차 시험하여 탈이 없으므로, 통(通)한 사람은 구애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그에 의혹되겠는가. 증문전(曾文展)이 이르기를, ‘만약 다시 죽은 사람의 운수를 놓고 본다면, 분명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목숨이 이미 없어졌는데, 또 무슨 운수를 본단 말인가. 반드시 청룡(靑龍)·백호(白虎)·천강(天剛)·하괴(河魁)가 총묘(塚墓)에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할 것이니, 이는 다 세상을 속이고 인심을 의혹케 하는 설인즉, 이치에 통달한 군자는 마땅히 다시 밝힐 것이며, 또 옛 역서에 망인의 운을 말한 것이 18조문으로, 모두 길흉을 상세히 추산했으나, 서로 득실이 있어 전용하기는 어려우며, 지금 세상의 장사가, 혹은 오음(五音)이 망인의 운명에 전용된다고 말하는 모양이나, 사람이 죽은 이상, 어찌 운명이 있겠느냐.’ 하였고, 양균송(楊筠松)은 망인의 운명에 대하여, 여러 모로 합당치 않는 것이 있다고 했고, 소수명(蘇粹明)의 《지리지남(地理指南)》에 ‘행년(行年)에 있어서는 6륜(輪)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고, 주(註)에, ‘시속의 장사(葬師)들이 흔히 6륜법의 연월을 사용하는데, 흔히 보면, 대소화(大小火)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길하고, 대소수(大小水)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해를 당하는 예가 많다. 이로 미루어 보면, 6륜도 신빙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것만 고집할 수 있는가.’ 하였으며, 송노진의 《극택통서(克擇通書)》 안에 있는 6륜의 주(註)에, ‘기실은 사람의 생사도 때가 있고, 자손의 부귀도 분복이 있는데, 어찌 택일해서 죽었겠는가. 짐짓 이 설을 남겨 두어 용도에 갖추었을 따름이라. ’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살펴보면, 6륜법은 대화(大火)·소화(小火)·소금(小金)의 설과, 그리고 《용자경(龍子經)》의 혈광(血光)·화거(火車)·사패(死敗)·표천(漂遷) 등의 용세(龍勢)와 《갑지수경(甲地宿經)》의 지흉(地凶)·지패(地敗)·지귀(地鬼)·지화(地禍)·지상(地傷)·지겁(地刼) 등의 성수(星數) 및 여러 역서 내에 있는 혼입묘(魂入墓)·장년월혼입묘(葬年月魂入墓)·망인집인입묘(亡人執印入墓)·사대혼입묘(四大魂入墓)·저두망운(猪頭亡運)·귀곡자망운(鬼谷子亡運)·나흉운(羅凶運) 등의 법이온데, 택년·택월에 대하여는, 다 망인의 세수(歲數)·행년(行年)으로 미루어 보고 있으니,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다시 무슨 운명을 볼 것이며, 사망한 자도 택일을 잘못해서 죽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날을 달로 바꾼다는 말이 성행하였지만, 비록 천자의 귀(貴)로도 서한(西漢)의 고조(高祖)는 5월 병인일에 장사했으니, 5월 인일(寅日)은 횡간도의 역마탄(驛馬呑)·표기탄(驃騎呑)·토금(土禁) 등의 날이요, 혜제(惠帝)는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9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혼(天魂)·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이요,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6월 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바로 소화(小火)·지귀(地鬼)·천이(遷移)에 해당하고, 날은 천탄·지혼을 범했으며, 경제(景帝)는 나이 48세로 2월 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무제(武帝)는 나이 71세로 3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지흉(地凶)을 범했고, 소제(昭帝)는 나이 22세로 6월 임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6월 신일은 횡간도의 천혁·천건·지건 등의 날이요, 선제(宣帝)는 정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重賻)를 범했고, 정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혁·지건·지혁 등의 날이요, 원제(元帝)는 나이 43세로 7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46세로 4월 기묘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동한(東漢)의 광무(光武)는 3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지중(地中)·백호(白虎)·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명제(明帝)는 나이 48세로 8월 임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호를 범했으며, 장제(章帝)는 나이 33세로 3월 계묘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로·천금 등을 범했으며, 순제(順帝)는 나이 30세로 9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小金)·지겁(地刼)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위(魏) 무왕(武王)은 2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천황(天皇)·인황(人皇)·인건(人建)·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문제(文帝)는 나이 40세로 6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겁·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황(地皇)·토금(土禁)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5세로 2월 계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지혁·지혼을 범했으며, 진(晉)나라 명제(明帝)는 나이 27세로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화를 범했고, 날은 천혼·역마탄·표기탄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28세로 7월 병진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지화(地禍)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7월 병인일은 월탄에 해당되며, 목제(穆帝)는 나이 19세로 7월 무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상(地傷)·천이를 범하였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10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천건·팔좌(八座)·지중(地中)·백호·토금을 범했으며, 안제(安帝)는 나이 37세로 익년 정월 경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자(地中雌)·중부를 범했으며, 송(宋)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60세로 7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겁을 범했고, 날은 지탄·천금을 범했으며,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3월 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地皇)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7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4세로 5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역마탄·표기탄·토금을 범했으며, 제(齊)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56세로 4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중상(重喪)을 범했고, 날은 지탄·역마탄·표기탄·천금을 범했으며, 무제(武帝)는 나이 54세로 8월 병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패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건·천혼을 범했으며, 당(唐)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71세로 10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흉(地凶)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을 범했으며, 태종(太宗)은 나이 52세로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大火)·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건·지중자(地中雌)·천혼을 범했으며, 고종(高宗)은 나이 56세로 이듬해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귀·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하였고, 날은 천건·지중자·천혼을 범했으며, 중종(中宗)은 나이 55세로 11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날은 지황·지탄·천혼·8좌를 범했으며, 예종(睿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중자·월탄을 범했고, 현종(玄宗)은 나이 78세로 이듬해 3월 신유일에 장사하였으니, 지탄·지중자·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을 범했으며, 위의 중종·예종·현종은 모두 소화를 범했고, 숙종(肅宗)은 나이 52세로 이듬해 3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대종(代宗)은 나이 54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목종(穆宗)은 나이 30세로 11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상원(上元)·혈광(血光)을 범했고, 송(宋)나라의 진종(眞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신종(神宗)은 나이 38세로 10월 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천탄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년·택월·택일의 설은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도 명확하오며, 그 《6륜(六輪)》·《용자(龍子)》·《갑지수경(甲地宿經)》 등과 《횡간도》의 설도 모두 허망된 것이며, 산두백(山頭白)이 조궁(釣宮)이 된다는 것이나, 주당행년(周堂行年)의 정충(正衝)·순충(旬衝)·연월일·8좌의 법이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하명하였다. 처음에 시속이 풍수의 말만 믿고 자손이 많은 자는 금기가 더욱 심하여, 10년이 되도록 장사를 못한 자가 있으므로, 상왕은 심히 미워하여, 태조 대왕의 상사에 있어서는, 옛제도에 의하여 5월만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정이오들에게 명하여 장설(葬說)의 그릇된 점을 시정함과 동시에 사대부의 상사는 3개월로 단정하고, 장일은 장통일(葬通日)만을 이용하게 하며, 또 중외 유사(攸司)로 하여금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하지 않는 자를 사찰하게 하였다.
세종 7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윤1월 19일(무자)
변계량·조용 등에게 향악의 가사를 짓게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향을 베풀 때에 항상 향악(鄕樂)383) 을 쓰는데, 그 가사가 매우 비열하니, 변계량·조용·정이오 등으로 하여금 장수하기를 비는 뜻과 경계될 만한 말로 각기 가사 세 편씩을 짓게 하라.”
하였다.
세종 8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7월 28일(갑오)
영의정 유정현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을 올려 정사보기를 청하다
영의정부사 유정현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아뢰기를,
“상사에 옛 제도를 좇는 것이 비록 성스러운 아드님의 지극한 정이오나, 그 방도가 시의(時宜)에 맞아야 이에 인군(人君)의 통달한 절조라고 합니다. 감히 어리석은 회포를 펴서 총명(聰明)을 번독(煩瀆)하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는 학식이 깊고 넓으시며, 효심이 순전하고 지극하시어 큰 기업을 이어 받으시고, 아침과 밤으로 근심이 바야흐로 많으신데, 양궁을 공경하여 받들어 새벽과 저녁의 봉양을 더욱 도타이 하옵시다가, 어머님께옵서 세상을 버리옵시어, 문득 전하께 지극한 슬픔을 끼치셨사오나, 그러나 하루 사이의 정무가 만기(萬機)에 이르오니, 만일 재결을 받지 않으면 진실로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비통하고 애감하신 정성이 깊으시나, 어찌 부탁함이 소중함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송나라의 끼친 법례를 상고하시며, 본조(本朝)의 이루어 놓은 규모를 참작하시고 순변절애(順變節哀)하시와, 위로 부왕의 명을 좇으시고 권도를 쓰시어, 정사를 보시어 아래로 신자의 마음을 따르시면, 신 등은 삼가 마땅히 낮과 밤으로 근로를 배나 다하여, 우러러 크신 은택을 보답하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왕께서 나로 하여금 13일에 상복을 벗으라고 하심은, 나로 하여금 경사를 보게 하고자 하심이라, 내가 최질로써 정사보기를 청하여 부왕께서 허락하셨는데, 그 후에 경 등이 여러 번 정사보기를 청하였으나, 나는 차마 급히 좇지 않았더니, 부왕께서 병조 판서와 환관을 보내어서 재삼 돈독히 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봉행치 아니하리요. 그러나 경 등은 반드시 전문(箋文)을 올려 굳이 청하지 말라.”
하였다.
세종 28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5월 11일(경진)
사신 범령을 보내는 시권서와 여러 사람이 지은 시의 내용
일본국 범령을 보내는 시권서(詩卷序)에,
“일본은 부상(扶桑)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정치는 간단하고 백성은 순백한지라, 그 풍속이 오로지 불교를 숭상하여, 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매양 사명(使命)을 받들고, 인하여 열국(列國)을 유람하는 자가 앞뒤를 이어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당나라 송나라 이래로 조연(奝然)과 적조(寂照)·영독(榮督)의 무리가 그들이었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당초에 예 상인(倪上人)과 우문계(祐文溪)의 일행이 서로 잇따라 들어오니, 이들이 또한 모두 운치 있는 중이었다. 이제 영 상인(齡上人)이 역시 법을 구하려고 임인년부터 을사년에 이르기까지 4년 동안에 사명을 띠고 우리 나라에 온 것이 세 번째라, 전하께서 그 의기를 아름답게 보시고 유사에 명하시어, 교외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사관(使館)에서 등을 높여 대접하게 하시었다. 상인(上人)은 나이 젊고 학문이 깊으며, 형모(形貌)는 파리하나 정신은 영발하여 명랑하고 청수하니, 바라보면 산골에서 나온 얼음을 옥병에 담아 놓은 것 같았다. 하루는 그의 송천유처(松泉幽處)라는 편액(扁額)을 진신선생(縉紳先生)들에게 청하기를, ‘지난해 임인년에 특히 전자(篆字)로 써서 하사하심을 받아, 내가 진실로 진중하게 간직하거니와, 원컨대 한 말[一言]을 주시와 끝내 은혜가 되게 하소서.’ 하니, 이에 조정 안의 문사들이 모두 시(詩)를 짓고, 또 나를 시켜 서문(序文)을 쓰게 하니, 나는 생각하건대,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그 유(類)에 따라 다르다.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사랑함은 그 은일(隱逸)인 까닭이요, 내야(奈耶)가 버들을 사랑함은 다섯 가지 이익이 있는 까닭이요, 그 밖에 왕휘지(王徽之)의 대와 진나라 원공(遠公)의 연꽃은 모두 좋아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제 상인이 송천(松泉)으로 편액을 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취하였음일까. 만약 우리 유교의 말로 이를진댄, 소나무에는 날씨가 차도 뒤에 이운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고, 샘은 낮과 밤을 쉬지 않는다는 탄식이 있었으니, 알 수는 없으나 상인의 취한 바가 역시 이와 같은 뜻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불교는 청정한 도이니, 역시 유가 같음에 느낌이 있어 사랑함이었는가. 생각하건대, 천암만학(千巖萬壑)에 한 간의 절[蘭若]로 솔바람은 얼굴을 씻어 주고, 샘물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뜨거운 번뇌를 선뜻 식혀주니, 한조각 청량(淸涼)한 경개를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도다. 저 솔의 푸르고 푸른 곧은 줄기가 눈을 이기고 서리를 업신여기며, 사시(四時)를 통하고 천년을 겪어도 가지를 갈지 않고 잎을 바꾸지 아니함을 볼진댄, 상인의 견고한 힘과 금강(金剛)같이 깨어지지 않는 절개가 있는 듯하고, 좔좔 흐르는 활수(活水)는 물구덩이 돌뿌리에 쏟아 부어 한 줄기가 천리를 갈 때, 물체에 막히지 않고 자취에 걸리지 않음을 보면, 이는 곧 상인의 진리의 근원을 활짝 열고 호연(浩然)하게 이성(理性)의 바다로 들어가는 묘리가 있는 듯하니, 상인의 취한 점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도 싶도다. 내가 보건대, 상인이 사명을 받들고 우리 조정에 와서 언사[辭命]에 틀림이 없고 예절[聘享]에 법칙이 있어, 행동과 절차가 다 법도에 맞으니, 참으로 이름[名]은 묵(墨)이면서 행실은 유(儒)라고 할지로다.1009) 우리 나라의 예약과 문물의 융성한 것과 이웃을 사귀고 먼 데를 친하게 하는 도리를 가지고 자기 나라에 전달하여, 두 나라 사이가 화목하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하여, 천만 세대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게 할 것에 의심 없으니, 이에 이를 적노라. 홍희(洪熙) 원년 5월 모일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영가(永嘉) 권채(權採)는 쓰노라.”
하였다. 또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인인데, 그 중에 형재(亨齋) 이직(李稷)의 시에는,
“선사는 세상을 피하여, 서로 찾는 이가 끊어졌는데, 솔은 무성하고 샘은 달며, 땅이 더욱 깊숙하도다. 재(齋)를 마치니 조용히 샘물을 끓이고, 강경을 끝내고 쇄락하게 맑은 그늘을 바라보누나. 진리는 원래 증감(增減)이 없나니, 뚫어 앎이 어찌 고금(古今)이라 다르리오. 오문(五門)을 더욱 단련하여 높은 데 두면, 밝고 밝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전함이 있으리.”
하였고, 부용정(芙蓉亭) 권홍(權弘)의 시는,
“가장 좋을사 영 상인이 깊은 골에 집을 잡았도다. 푸른 은솔길 옆에 그늘을 던지고, 맑은 샘은 바위 모퉁이에서 흐른다. 벽을 향하여 무상(無常)을 깨닫고 시를 구하니 만축(萬軸)에 이르도다. 치졸한 시를 억지로 써서 알아보는 눈만 괴롭게 하네.”
하였고,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의 시는,
“대사가 본래 고요함을 사랑하여서 다시 이 좋은 지경을 점령했구나. 바위 위에 빽빽한 솔은 서로 포개어 있고, 돌 틈의 샘물은 달고도 차다. 검푸른 빛은 추위를 겪어도 씩씩하고, 쉬임 없이 좔좔 흐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네. 세상 사람들은 산중의 이 경치를 모르는 것을 응당 불쌍히 여기리라. 옥을 부수는 소리 공중에 나르는 듯 맑은 그림자 달빛에 흩어진다. 해마다 바다 건너 놀러오니 건너가는데 손가락 튀기는 사이로세. 하늘 가에 외로운 배 돌아오기를 바라노라. 원숭이와 학도 모두 고개를 늘이누나.”
하였다.
임금이 승문원사(承文院事) 권맹손(權孟孫)에게 명하여 시권(詩卷)을 가져다 주게 하고, 또 한강에서 전송하게 하니, 이는 맹손이 중태와 범령의 원접 선위사(遠接宣慰使)이었던 까닭이었다. 범령이 시를 받고 기뻐 감사하였다.
세종 66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10월 9일(임자)
죽은 판우군 도청제부사로 치사한 정이오에게 치제하다
죽은 판우군 도청제부사로 치사(致仕)한 정이오(鄭以吾)에게 치제(致祭)하였으니, 그 교서에 이르기를,
“늙은 옛 신하가 이미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하였으니, 애도(哀悼)와 영총(榮寵)의 은전(恩典)이 어찌 살고 죽음에 간격이 있으랴. 이것은 일정한 법규가 되어 있는 것이요, 나의 사사 은혜가 아니다. 오직 경(卿)은 자품이 질실(質實)하고 곧으며, 지조와 행실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도다. 학문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재주는 사화(詞華)2400) 에 풍부하였도다. 일찍 과거에 올라서 당세의 명유(名儒)가 되었도다. 소고(昭考)께 지우(知遇)를 받아 맑은 벼슬을 지냈도다. 발탁되어 한묵(翰墨)의 관사(官司)에 있어 오래 사륜(絲綸)2401) 의 명을 맡았도다. 성균관의 사장(師長)이 되어 강론(講論)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사관(史館)에서 편수(編修)를 맡아 필삭(筆削)이 적당함을 얻었도다. 실로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요, 국가의 곧은 선비였도다. 생각건대,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경이 노성(老成)한 덕망이 있음을 알았도다. 이에 계급을 높이고 치사(致仕)하게 하여, 화기(和氣)를 길러 연수(年壽)를 누리기를 기약하였더니, 어찌하여 불쌍히 여겨 남겨 두지 아니하여 갑자기 슬픔을 가져다 주는가. 관원을 보내어 전(奠)을 베풀어 곧은 영혼을 위로하노라. 아아, 연치(年齒)와 덕망이 함께 높았으니 영특하고 어진 이가 간 것을 슬퍼하고, 은혜와 분의가 이미 두터웠으니 조상하고 불쌍히 여김을 특별히 더함이 마땅하도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