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선수들도 윔블던 대회에서 패배했다. 올해 윔블던 대회 정복에 나선 앤디 로딕과 쥐스틴 에넹이 한 번 더 ‘아름다운 패자들’의 운명을 거스를 것인가
작년 여름 앤디 로딕이 가는 곳 어디든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그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로딕이 7월 초 윔블던에서 로저 페더러를 상대로 치른 경기를 보고 그를 존경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경기의 세부사항들은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랜드슬램 결승전 역사상 로딕과 페더러보다 더 긴 다섯 번째 세트를 치르거나(페더러가 16-14로 승리), 더 많은 게임(총 77개)을 치른 선수들은 없었다. 결국 로딕은 페더러보다도 더 많은 39개의 게임을 따내 메이저대회 결승전에서 가장 많은 게임을 따낸 선수가 되었다. 그 후 몇 달간 화려했던 그 여름날 저녁 페더러가 런던 근교에서 로딕을 ‘무너뜨리지’ 못했더라도 들끓었던 패배 동정표(물론 의도는 좋았지만)가 그 일을 대신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 로딕이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런던에서 보낸 최악의 날은 가장 위대한 윔블던 결승전 중의 하나였던 그 경기를 치른 날이다. 최악의 날치고 제법 괜찮았던 날이 아닌가 싶다.” 로딕이 결승전에 쏟아 부은 대담함과 기백이 넘치는 노력에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로딕을 으스대기 좋아하고 건방진, 전형적인 미국 선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나 테니스를 잘 치기는 하지만 대단한 선수는 못 된다며 그저 오른팔 힘을 타고난 선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커피숍에서 누군가와 테니스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커피에 크림을 얹으러 갈 수도 없었다.” 로딕의 말이다. “경기에서 진 게 속상하긴 해도 사람들과 테니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그 이전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로딕이 작년에 윔블던에서 패한 뒤 또 하나의 흥미로운 부산물이 생겨났다. 윔블던에서 ‘아름다운 패배’를 경험한 선수들의 명단 상위권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명단에 오른 선수들은 훌륭한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거나 혹은 훌륭한 수준에는 실력이 조금 못 미치는 선수들, 아니면 대진운이 없거나 이들보다 대체로 실력이 낮지만 ‘요행’ 때문에 우승한 적이 전혀 없는 선수들이다. 이반 렌들도 우승하지 못한 윔블던 대회에서 팻 캐쉬는 우승한 경험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패자 명단 위대한 선수들도 특정 대회에서만큼은 실력 발휘를 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비외른 보리는 US오픈에서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피트 샘프라스, 스테판 에드베리, 보리스 베커는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한 이력이 없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이 윔블던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을 옭아매지 않는다. 윔블던 트로피가 없다는 것은 선수의 이력서에 형광색 포스트잇을 붙여 ‘윔블던 우승 경험 없음’이라고 적어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명단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 남자 선수들 중에는 켄 로즈월, 렌들, 팻 래프터, 로딕(우승컵에 이름을 새길 시간이 아직 남아 있지만)이 올라 있고, 여자 선수들 중에는 쥐스틴 에넹(역시 우승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모니카 셀레스,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가브리엘라 사바티니가 ‘아름다운 패자’로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선수들은 모두 그랜드슬램 타이틀 보유자다. 타이틀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도 있다. 로즈월과 렌들은 각각 여덟 차례, 셀레스는 아홉 차례나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윔블던에서 우승했으리라고 여기는 것이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이들이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놀랍다. 이들은 대체로 셀레스처럼 눈부신 기록을 보유했거나 로딕처럼 잔디코트에 아주 적합한 플레이 스타일을 지녔거나, 로즈월이나 에넹처럼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켄 로즈월 명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로즈월은 윔블던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이다. 그는 1934년에 태어나 ‘근육질’이라는 별명(아이러니하게도 키 170cm에 몸무게는 61kg이었다)을 얻어 체격이 더 좋은 적수들을 능가하고 30년 넘게 메이저대회 우승 후보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54년 윔블던 결승에서 야로슬라프 드로브니에게 처음 패했을 때 로즈월은 풋내기 청년이었고, 74년에 윔블던 결승에서 우쭐거리던 지미 코너스에게 마지막으로 패했을 때는 39살이었다. 로즈월은 결승에 두 번 더 진출했는데, 매번 같은 호주 출신의 선수들(56년에는 루 호드, 70년에는 존 뉴컴)에게 무릎을 꿇었다. 로즈월이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4개의 메이저대회 중 3개 대회가 잔디코트에서 열렸다. 그는 서브를 넣는 힘은 약했지만 잔디코트에서 수준 높은 플레이를 구사했고, 그의 한 손 백핸드는 여전히 모범이 될 만했다. 또한 타이밍을 잘 맞춘 발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실력을 갖춘 선수가 윔블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순전히 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반 렌들 이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라. 렌들은 윔블던 우승을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자신이 그것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윔블던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오픈에 불참했을 때, 렌들에게는 이미 프랑스오픈 5회 결승 진출 중 3회 우승한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의욕과 결의도 그에게 윔블던 트로피를 안겨주지는 못했다. 렌들은 윔블던에서 단 한 차례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적이 없어서 유명하지만, 1983년과 90년 사이에 한 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4강 진출 이상의 성적을 거뒀고 결승에도 두 차례나 올랐다. 그는 특히 서비스 리턴 시 볼을 크게 깎아 치는 것을 즐겼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발놀림이 다소 무거운 편이었고 발리를 충분히 자신 있게, 솜씨 좋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움직임이 좋지 않으면 볼을 쫓아갈 수가 없다.” 렌들의 생각이다. “볼을 쫓아가지 못하면 제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볼을 제대로 칠 수가 없다.” 렌들은 꿈으로 남은 윔블던 우승에 대해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상대선수와 악수를 나누고 ‘잘 쳤어요’라고 말하는 수밖에.”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사바티니는 전 세계의 응원을 등에 업고 윔블던에서 4강에 진출했으며 그 이상의 성적도 네 차례나 거뒀다. 그러나 사바티니는 볼이 낮게 바운드되던 시대에 선수 생활을 했고, 그녀의 큰 스윙 폭(탑스핀이 많이 걸린 그녀의 한 손 백핸드는 느린 코트에서 빛을 발했다)은 그녀가 우승컵을 거머쥐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1991년에 최고의 기회를 맞이하는 듯 했으나 역대 최고의 여자 선수 슈테피 그라프에게 결승전에서 3세트 스코어 6-8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산체스 비카리오는 사바티니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사바티니에게 없었던 체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빠르고 유연하며 곡예에 가까운 플레이를 했던 산체스 비카리오는 1995년에 윔블던에서 4회 연속 그랜드슬램 결승에 진출해, 3세트 스코어 5-7로 슈테피 그라프에게 패배했다. ‘바르셀로나 호박벌’은 그 이듬해 윔블던 결승에 한 차례 더 진출했지만, 그라프와 3세트까지도 격돌하지 못한 채 윔블던 우승의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모니카 셀레스 그녀가 테니스계를 6주 간 무단 이탈해 윔블던에서 우승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안 좋았을지 가히 짐작이 될 것이다. 당시 나돌던 소문들 중 어떤 소문을 믿느냐에 따라 독자 여러분의 판단이 갈리겠지만, 셀레스는 1991년 신비한 병명의 혈액 질환에 시달렸거나 아니면 그녀의 연습 파트너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 둘 중 하나의 상태였을 것이다. 윔블던이 끝나고 셀레스 본인이 밝힌 불참 사유는 당시 그녀가 정강이 외골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셀레스의 최고 전성기는 1991~1992년이었다. 1992년에는 볼을 치면서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다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당시 윔블던의 우상이었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셀레스가 악을 써대서 경기를 집중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셀레스가 윔블던 결승에서 2-6, 1-6으로 그라프에게 ‘조용히’ 패한 데에는 이러한 비난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셀레스는 전반적으로 빠른 코트보다 볼이 더 높이 바운드되는 느린 코트에서 실력을 더 뽐냈다. 유일하게 우승하지 못한 그랜드슬램인 윔블던 대회에 대해 그녀는 다음처럼 말한다. “코트 위에서 움직임이 좋은 것이 나의 강점은 아니다. 잔디코트야말로 움직임이 좋은 선수들이 보상을 톡톡히 받는 코트이다.”
패트릭 래프터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래프터는 1996년과 2001년 사이에 윔블던 대회에서 매번 4라운드 진출 이상의 성적을 냈다. 결승에는 두 차례 올랐으며 준결승에는 한 차례 올랐다. 그의 활력 넘치는 서브 앤 발리는 잔디코트에 적합했지만 샘프라스가 코트를 평정하던 시대에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이 불운이었다. 샘프라스는 1993년과 2000년 사이에 일곱 번 결승에 진출해 일곱 번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래프터가 윔블던에서 우승할 절호의 기회가 2001년에 찾아왔지만, 그 해는 하필 선수 생활 말미에 있던 고란 이바니세비치가 환상적이고도 무시무시한 플레이로 우승할 운명이었던 해였다.
앤디 로딕 로딕이 윔블던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이자 유일한 이유는 ‘로저 페더러’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두 선수는 윔블던에서 준결승과 결승에서 네 차례나 맞붙었고, 로딕은 결승에 오를 때마다 페더러에게 패했다(2004, 2005, 2009년). 로딕이 작년에 증명했듯이 그는 운명의 도움 없이도 윔블던에서 우승할 실력이 있다. 그러나 페더러가 한 번이라도 길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쥐스틴 에넹 18개월 간의 은퇴 생활을 접고 올해 테니스계에 복귀한 에넹은 7차례의 그랜드슬램 우승 이력에 윔블던을 추가하고 싶어서 복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이 복귀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그 후로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자제해 오고 있다. 그녀는 3월 인디언 웰스 대회에서 “대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싫다”라고 말했다. “물론 윔블던 우승이 꿈이다. 잔디코트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알게 될 것이다.” 훌륭한 클레이코트 선수로 인정받고 있는 그녀는 플레이 스타일이나 체격, 성격 모두 다(테니스에만 집중하는 타입) 윔블던에 안성맞춤인 선수이다. 7차례 도전하여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5차례 진출했지만, 긴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 경기를 제대로 못 뛰거나(2007년 마리옹 바르톨리를 상대로 한 경기) 상대선수의 ‘화력’에 압도당해(2001년 결승과 2002년 준결승에서 비너스 윌리엄스를 상대로 한 경기, 2003년 준결승에서 세레나 윌리엄스를 상대로 한 경기) 우승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에넹은 2006년 결승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플레이를 펼쳤던 아멜리 모레스모를 만나 최적의 우승 기회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백핸드에도 불구하고 3세트에서 4-6으로 패하고 말았다.
글 피터 보더/USA 테니스매거진 수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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