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단순한 부락단위의 ‘원놀음'이 상연되던 옛날에는 과년(過年)한 처여들도 여러사람이 모여 ‘원놀음'을 행하였으나, 그것은 일반인이나 남자들에게 공개됨이 없고 저네들끼리의 희학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중심이 된 ‘원놀음'은 20대의 청년은 동년배끼리, 30대의 청년이나 40대의 장년은 역시 저들끼리, 마주 앉아 하루를 즐기고 주안상에 기백을 쏟았다. 그리하여 ‘원놀음을 한다'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방청하고 관람하였다.
등장인물은 조선조 하위 관아 소속원, 즉 원[수령, 군수, 현감] 이하 향리를 등장인물로 적당히 배역하되 참가인원에 따라 원과 육방 관속(官屬)만 배역하는 수도 있고, 인원이 소수일 때는 원과 이방, 형방, 나졸, 사령 정도로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대가 되는 집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범법자 내지 피의자로 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완전구성일 때는 군수 이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과 통인 2명, 수명의 사령관노, 관비, 일수, 수청기생[여장]에 이르기까지 문란하고 타락한 조선조 후기 관사를 그대로 모방?구성하기 위하여 단위부락 청장년이 총동원되었다. 그보다 더욱 대규모일때는 악공이 동원되고, 풍악을 울리며 나아가면 군수행차의 위도가 엄숙했으며 벽제소리가 온 부락에 들렸다고 한다.
서기1990년에 마지막으로 상연되었을 때는 일월면 주곡동 및 도계동의 30대, 40대의 청장년 60여명이 동원되었고 풍악을 위하여 악공을 하느라 무척 고심했다 한다. 풍악은 대체로 농악을 위주로 삼았고 날나리는 불 수 있었으나 라입(喇?)을 불 자가 없어 관속을 데려다 불게 했으며, 사령구실을 잘 할 자가 없어서 실물 사령을 1명을 고용하였다 한다.
당일 행차의 순은 다음과 같다.
사령 6명 - 악사 9명 - 통인 2명 - 기생 2명 - 원(가마를 탐) - 육방 관속 - 향소 요인
조선조의 관직은 고려의 관직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특히 각 고을의 원[사령]은 정직(正職)이었다. 그러나 아전이라 불리는 향리는 정직의 보조 또는 서역으로서 세습직이었다. 물론 국가로부터 아무런 녹도 받지 못했으므로 서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 농민에 대한 횡포는 농촌 청장년들에게는 일대공포였으며 그 으리으리한 관권(官權)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일종의 야외극적인 민중놀이들이 주로 천민이나 상민층이 주가 되어 연행하였고 양반계급은 관람조차 엄금하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 ‘원놀음'은 양반출신농민이 주최가 되었고 상당한 식자가 없으면 참여할 수 없었으니 배역의 지적수준은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월면 주곡동 한양조씨의 집단부락으로 우리나라 명문화족이 도사린 어려운 부락으로 지금도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락단위의 유오(遊娛)에 지나지 않던 시절에는 배역이 각기 착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의복으로 음성만 위엄을 내어 상연했으나 1899년과 1990년에 크게 연행되었을 때는 수령과 관속의 복장을 그대로 본떠 착용하고 부족분은 향리에게 빌려 착용하였다 한다. 여장한 기생은 화장을 하였고 가발을 만들어 썼으며 실제복장과 똑같았다고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