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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 호젓한 오솔길
1-1 옥쇄(玉碎)
방죽골로 걸었다. 빠르게 기우는 2월 말경 석양은 우리를 재촉하는 듯 했다. 어머니, 어머니 등에 업힌 현순, 상재, 삼순, 계재가 좁다란 고샅을 한 줄로 서서 정든 집을 떠났다. 그렇게 1966년 2월 말경의 황혼을 초가집으로 가는 산골길에서 맞았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이렇게 호젓한 산길을 한꺼번에 걷기는 처음이었다. 무서움을 마음 한구석에 우겨 담은 우리들은 어머니를 뒤따랐다. 맨 뒤에는 내가 호위하듯 걸었다. 미리 초가집에 와서 저녁밥을 짓고 주변을 정리하던 할아버지와 형은 연기 자욱한 부엌에서 기침을 심하게 번갈아가며 연신 불을 지피고 있었다.
방죽골 초가집으로 이사한 다음날부터 어머니와 형은 허허 벌판에 엎드려 땅을 갈아엎고 흙을 고르고 씨를 뿌렸다. 당장 할일이 그것 밖에 없었다. 낮에는 밭에 다가 몸을 던지고, 밤에는 냉기 가득한 오두막에 몸을 던졌다. 먼동이 트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호롱불 앞에 모여들었다. 시각을 알리는 문명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을 알리는, 아니 때를 알리는 수탉 한 마리를 빼면 아무것도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동네에서 살던 생활의 모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발전된 변화가 아니라 갈 곳 몰라 헤매는 화전민 생활이었다.
인간의 문명과 단절된 오두막은 깊은 정적만이 켜켜이 쌓일 뿐이었다.
최후의 죽음을, 비장한 죽음을 택한 다른 모습, 다름 아닌 옥쇄였다. 가족 모두가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 나온 또 다른 처절한 모습이었다. 세상과 단절 된 공간으로 몸을 던져버린 것이었다. 하루 종일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우리 여섯 남매들은 시냇물에 힘없이 떠내려가는 종이배 신세였다. 아니 그보다도 세상의 찬바람 앞에 혼자서는 서있을 힘이 없었다.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 갈 힘이 없었다. 할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하나 노를 제대로 저을 사람이 없었다. 방향을 제대로 잡을 사람도 없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얼마가지 못하고 옥쇄 할 수밖에 별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길로 들어서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 길이 극한의 구렁텅이라 할지라도.......
우리 가족이 타고 있는 종이배는 물에 젖거나 돌무더기에 걸릴 것이 눈앞에 이미 통첩되어 있었다. 곤두박질치고 마침내 뒤집어질 사고가 뻔히 눈앞에, 너무도 코앞에 닥쳐있었다. 불 보듯 뻔히, 막힌 앞날에도 불구하고 외딴 초가집으로 들어 온 것은 살아보려는 심산이 아니었다. 비장한 결단이었다. 어머니는 인생의 모험, 아니면 탐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저 살아보려고 애쓰는 정도가 아닌 과거의 모든 허울을 벗어던져 버린 것이었다.
1966년 삼월의 오두막은 한적했다. 온통 자연의 소리, 자연의 풍광뿐이었다. 무섭도록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하루가 갔다.
아침에는 등교하기 바빠서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해거름에 산길을 걸어서 돌아오다 보면 자연은 계절 따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실감했다.
삼월 중순인데도 아침에는 살얼음 얼었다.
할아버지 어머니 형은 널따란 밭에 산도(밭벼: 메벼)를 파종하였고 고추를 파종하기도 하였다.
작은 씨를 먼저 파종하고 감자 같은 큰 씨앗은 나중에 심었다. 우물 앞 밭 자락에 감자를 심는 날은 마침 일요일이라서 나도 같이 심었다. 산골을 스쳐 지나온 바람은 몹시도 강하고 차가웠다. 퇴비가 바람에 날려 삼태기를 땅에 가까이 대고 뿌려야 했다. 감자를 심으면서 어머니의 손을 보니 갈라지고 매우 가늘게 여위었다.
어쩌다 하루 일하였는데도 파김치처럼 고단한데 매일 이러했으니…….
찬바람이 숨을 막는데 일어나면 연속되는 일과였으니 손이 아프고 갈라지는 것쯤이야! 어디 손뿐이었겠는가! 온 몸이 만신창이었다.
손!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 사람만이 손을 가졌다.
손! 인간의 몸을 대표한다. 몸의 온 신경이 죄다 모여 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지금의 건강을 알 수 있다. 손의 가치를 70%를 치면 발은 30%를 친다는 말이 있다.
그 손이 닿고 생채기가 가시기는커녕 점점 고난의 흔적을 키워만 갔다.
옥쇄였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기 위한 결단!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기를 결심한 옥쇄였다!
고단한 일과는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초월한 각오의 결행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죽음을 향한 하루하루였다.
일어나면 밭으로, 또 밭으로 걸어 나가 엎드렸다. 말이 없다.
고단함을 말하는 것조차 고단했다.
밭 위에 엎드려 일하는 모습은 사뭇 죽음을 향한 기도를 올리는 듯했다. 죽기로써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없이 나날을 이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두어 달을 생각해보니 토담집도 오래 살 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동안 학교 갔다 돌아오던 때를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토담집 동경(憧憬)
날리는 눈송이
한처럼 애처로운
솔바람 우짖는 산길
가늘고 기다란
내 그림자를 앞세우며
뿌옇고 가물가물한
조금은 아린 내음 안고
굴뚝 위에 흩어지는
야트막한 억새 울 넘는
어머니 밥 짓는 연기
추억(追憶) 동경(憧憬)
겨울 밤바람
장독대
어느새
달빛이 교교하다.
어머니 떠난 부엌
작은 쥐 실없이 노닌다.
1-2 나들이
1966년 4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고단한 일과를 접어두고 거야 전의이씨(全義 李氏)들의 화전(花煎)놀이에 따라나섰다.
화전놀이란 꽃잎을 따서 전을 부쳐 먹으며 춤추고 노는 부녀자의 봄놀이다. 어머니가 따라나선 화전놀이는 부녀자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한동네뿐만 아니라 전주에서 사는 전의이씨들까지 모여 음식을 장만하여 하루를 꽃구경 하고 흥겹게 즐기는 것이다.
매년 사월 초파일 경이면 금산사로 종중행사처럼 부녀자들은 물론 남녀•노소에 머슴들까지 화전놀이를 하였다.
거야 전의이씨는 증조할머니의 친정이다.
어머니에게는 시할머니의 친정이니 그리 멀지도 않았다.
우리 집이 임실에서 거야로 이사 온 것은 순전히 증조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주이씨 인 우리 집도 다른 사람들은 거야 전의이씨와 같은 집안으로 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온 집안이 모여 언제부터 꽃구경을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몇 년 전에도 금산사 미륵전 옆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에는 아버지도 보인다. 매년 행사는 이어졌고 우리 집도 빠짐없이 즐겼다.
어머니는 그간 이사하랴 밭에 파종하랴 만나기 어려웠던 동네 사람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 오두막집에서 갇혀 있다가 세상과 교류 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현순 이를 등에 업고 화전놀이에 가셨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도 집안은 여느 때처럼 조용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저녁을 하셨는데 밥이 많이 타버렸다. 누룽지 냄새가 진동하는 밥이라지만 누구하나 투덜대는 사람하나 없이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수정 아저씨!!”
“수정 아저씨!!”
어디선가 할아버지를 다급히 불렀다.
할아버지를 수정 아저씨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거야 전의 이 씨 종중사람들 뿐이었다. 어둑해진 산속은 이내 캄캄해져서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내 또래의 사내아이라는 것과 익숙한 음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방문을 열고 튀듯이 할아버지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손전등 불빛이 앞산 길목에서 우리 집을 향하여 뻗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사람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온영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나를 확인하고서도 할아버지를 두어 번 더 불렀다. 점점 더 다급하게…….
달려온 탓인지 할아버지를 불러놓고 그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는 온영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명재야! 고산 아주머니, 아니 명재 너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말을 끊는다. 내가
“우리 어머니가 온영이 네 집에서 어쨌는데......”다그쳐 물었다.
온영이는 그렇게 말을 제대로 못하면서도 방문을 열고 나오시는 할아버지에게로 바쁜 발걸음을 했다.
온영이 특유의 횡설수설하는 말투로
“고산형수님이 우리 집에서 쓰러지셔서 의원을 불렀어요!!”
하는 것이었다.
왜, 언제 쓰러졌는지? 이유도 물을 틈을 주지 않고 당황스런 말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음은 분명했다.
어두운 산길을 온영이와 뛰었다. 숨이 차거나 어두운 것쯤은 아무 장애가 되지못했다. 단숨에 오르막 내리막길을 지나 동네에 접어들었다.
심부름 간 온영이가 쉽게 오지 않자 동네 몇몇 아낙들이 우리가 올 것 같은 길목에서 서성이었다. 동네 뒤 길을 통해서 곧장 온영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에는 가득하게 화전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전의이씨 종중 어른들과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열린 문을 통하여 내가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의원양반은 어머니 곁에서 유리 주사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어머니는 위장이 뒤틀리는 통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절해버렸다. 의사는 서둘러 마약으로 진통을 했고 위경련을 멈추게 하였다. 여러 아낙들의 집중된 시선 속에 서서히 소생하고 있었다.
의원은 나를 보자마자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력도 없지마는 낮에 먹은 음식이 잘못 되어 토사곽란을 일으켰다.”
나는 토사곽란이란 말이 생소하기도 하였거니와 쓰러질 만큼 큰 병인가 의심이 되어 그 병이 무슨 병인가 물어보려다가 그만 뒀다.
대답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의원 양반은 행대미 할머니를 바라보더니 당부를 하였다.
“기력이 한 점도 없으니 꿀을 따뜻한 물에 타서 먹이시고, 한식경 지나 괜찮아지면 쌀죽을 먹이세요. 날 새고 나면 닭도 한 마리 잡아서 보를 해야 제대로 거동할 수 있을 거요. 없는 기력이 닭 한 마리 가지고는 다 회복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제일 빨리 회복하는 길이요. 한 끼에 다 먹이시지 마시고 서너 번 나누어서 먹이세요.”
그 말을 듣고 있던 행대미 할머니는 딸 순호에게 지시했다.
“나는 들어도 그냥 잊어버린 당께. 순호가 받아 적어두어라.”
옆에서 지켜보던 순호(온영의 누나)에게 꼼꼼히 메모를 하게하였다.
의원은 돌아갔고, 대부분의 전의이씨 종중 사람들도 다른 집으로 잠자러갔다. 남아있는 사람은 어머니 또래의 용반 할머니, 행경 할머니, 진안 아주머니였다. 그녀들은 밤새도록 어머니 곁에서 지난날들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수다를 떨었다. 작은 목소리로 소녀들처럼 말이다. 어머니를 위로하고 병세의 차도를 지켜보았다. 밤이 무르익고 익다가 가뭄에 시달린 태양의 햇살에 맞아 떨어질 때까지 얘기는 끝이 없었다.
나는 긴장이 내내 풀리지 않았다. 누워서 거의 꼼짝도 못하는 어머니는 눈만 떴다 감았다하였다. 잠시 동안 눈을 뜨는가 싶으면 이내 눈을 감고 오래토록 깊은 잠에 빠졌다. 숨소리조차 없는 듯 있는 듯 가늘게 호흡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그날 밤은 아무에게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끝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마음을 나에게서 몰아낼 수 없었다. 불안감은 몰아내려 하면 나를 더 옥죄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는 듯 처절한 슬픔이 방안 가득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참아냈다. 참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서러웠다.
이제 고아의 길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음을 느꼈다.
설령 일어나신다 하여도 활동을 하기엔 이미 왼 것 같았다. 자식을 여섯이나 부양해야하는 어머니로서 건강은 어제까지의 일인 듯 했다.
아버지보다 짧은 생을 살다갈 어머니를 생각하니 심장의 박동이 멎는듯했다. 아버지와 단란했던 그 때의 어머니를 애써 그려보기도 하며 밤을 헤맸다. 이 마지막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며 혼자서 살아갈 나를 상상했다.
처절한 이 밤의 어머니 모습을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않으려 마음 깊이깊이 새겼다.
밤하늘의 별이 스러지며 앞집의 울을 넘어 오는 아침을 보았다.
초저녁에서부터 꼬박 밤을 새우고 아침이 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아버지의 혼백이 서로 갈리던 날의 아침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저승사자(使者) 밥을 앞에 놓고 앉은 어머니의 모습이 문틈 사이로 지나가는 백마처럼 스쳤다.
그리고 기절했던 그 순간 그 모습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겨우 2년을 더 살다가 아니, 2년을 고생만하다가 가려고 그때 일어났단 말인가?!
운명이란 것이 정해진 것일까?
정녕 운명이란 것이 있기는 있다는 말인가?
원망 할 곳도 찾지 못했다.
원망해보아야 나아질 운명이 아니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생여 백마과극(人生如 白馬過隙)라 했던가!
‘인생은 백마가 문틈사이로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다’
는 말이 하루 밤을 온통 지새우게 했다.
이렇게 가시려나요.
가네 가네
꿈마저 가네.
이녁도 가고
저이도 간다네.
봄바람은 꽃향기 하늘로 사르고
봄기운에 종다리 희열(喜悅)에 겨워
찬가 높여 춤추며 노니네.
반려자(伴侶者) 도리질에
가련한 청춘마저
눈감고 돌아 누려다
남은 생 아~서러워
시든 청춘 부여잡네.
찢겨진 주단(綢緞)일손
손닿을 듯 서성이는 저승조차 두려워서
속절없는 이승
눈에 넣고 감아도
아서라, 아서
꿈마저 가네.
1-3.회생(回生).
행대미 할머니는 지난 저녁 의원양반이 시킨 대로 새벽부터 일꾼을 시켜 큼지막한 닭을 골라잡았다.
‘들으면 잊어버린다.’는 말은 기억조차 없다는 듯 말린 인삼을 손수 넣고 삼계탕을 만들었다. 작은 밥상에 올려 어머니 앞에 놓았다.
겨우 앉아서 하얀 쌀 알갱이와 국물을 몇 숟갈 뜨더니 또다시 누워버렸다. 그래도 이제 통증은 없는 듯 보였다.
누워버린 어머니를 본 행대미 할머니는
“억지로 먹지마소. 다시 솥에 넣고 고을 테니 우러나면 그때 먹소.”하였다. 붉은 황토 풍로 위에서 끓던 물을 사발에 반 정도 따라 붓더니 옆에 놓인 꿀을 물의 반만큼 따르고서 수저로 휘휘 젖는다.
젖던 수저를 어머니에게 내밀며
“이 거라도 몇 모금 마셔보소. 그래야 일어날 수 있어. 일어나야 하고말고. 냉큼 일어나야지. 수정 형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들이 무슨 죄란 말인가? 다 박복(薄福) 아닌가?” 끝내 눈물지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못내 미안 표정만 가득할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가 오셨다.
세 살배기 현순이를 업고서.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새 양철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치고 들어왔다. 가뭄에 달구어진 햇볕을 받아 번쩍거리는 양철대문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또렷이 내 눈에 밀어 넣었다.
일부러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시간을 늦추어 오신 것이었다. 할아버진들 어찌 걱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체통이라는 커다란 굴레가 할아버지를 방죽골 외딴집에 묶어 놓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집안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동네에서 제일 어른이었다. 동네에서 금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 어머니가 받는 대접도 할아버지의 숨은 공덕의 대가였다. 어머니에게 베푸는 행대미 할머니의 마음씀씀이는 대가를 바라거나 할아버지의 은혜를 갚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행대미 할머니는 마음 좋은 시골 부자 집 할머니의 대명사였다. 부자라고 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사량계교(思量計較)가 없는 자비행(慈悲行)이었다.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지고 베푸는 손길이 아니었다. 새벽 같은 아침에 일원상을 향하여 기도하는 원불교인 이었다. 매일 매일 기도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수행인이었고 공부인 이었다.
행대미 할머니집안은 이미 일원(一圓) 가족이었다.
“ 수정 성님 오신다!”
행대미 할머니 한마디에 온 집안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어머니도 일어나 앉아 할아버지를 맞았다. 현순이는 마루에 내려놓기가 바쁘게 어머니에게로 갔다.
할아버지는 어머니 옆으로 걸어가더니 멀찍이 서서 현순이를 안은 어머니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게 웬 날벼락이냐! 그만 하기 천행(天幸)이구나. 내가 다 박복한 탓 아니겠느냐? 어미가 무슨 죄란 말이냐?” 한숨을 쉬었다.
같이 서있던 종선 할아버지(온영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안방으로 모셨다.
“수정 성님도 이런 정도를 가지고 무슨 복을 따지고 죄를 따지세요. 어제 날이 때 이르게 더워서 음식이 상했나 봐요.”
끌려가시다시피 하면서 할아버지는 앉아있는 것도 힘겨워 하는 어머니를 뒤로하면서 혼잣말을 하듯
“다 멀쩡한데 어미만 곽란이니 변(變)이 아닌가. 원체 약골에다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해댔으니 일이야 날줄 알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날 줄이야 ......”매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는 점심때가 되어서 다시 온 의원 의 손길을 거친 후에야 일어나 아침에 입에 대기도 힘들었던 그 삼계탕을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정말 행대미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의 덕으로 쉽게 회복했다.
어머니는 하루 더 쉬었다가 그 이튿날 외딴집으로 왔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와보니 현순이를 업고 밭에 심을 콩이며 팥이며 녹두 씨앗을 고르고 있었다.
어머니를 보는 순간 만감(萬感)이 오갔다. 그 수없는 생각이 채 가시도 전에 어머니는 오래된 일기장을 읽듯이 말을 꺼냈다.
“내가 어려서 말이다.”이렇게 말을 시작한 어머니.
“우리 집에 자주 들렸던 단골어미가 한 말이 생각났었다. 엊그제 저녁부터 오늘까지 내내 말이다.”
무슨 깊은 의미로 얘기를 시작하려는 것일까? 나는 귀를 세우고 어머니의 말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먼 옛날을 어렵게 회상하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열 살 무렵이나 되었을까. 단골어미가‘종순이 너는 서른아홉에 큰일을 당하고 나서 크게 아플 것이다. 그 고비를 넘기면 팔십까지 장수할 것이다. 못 넘길 수도 있으니 마음에 새겨서 산신에 불공을 거르지 말고 살아야한다. 그 전에 아프거나 그 후에 아픈 것은 마음에 두지마라. 서른아홉에서 길게 잡아 마흔두 셋 사이에는 정말 조심하여야한다.’라며 우리 어머니랑(나에게는 외할머니) 있는데서 당부한 말이 서럽게 떠올랐다.”
아마도 이번에 몸져누운 것이 그때 들었던 액땜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보였다.
“사자(저승심부름꾼)가 보이더라. (처음에는)헛것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나중에는 죽을듯한 아픔도 없어지면서 따라가고 싶은 생각에 우리 오두막 밖에까지 따라나섰다가 너의 증조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면서 불호령을 하기에 뒤를 보니 너희들이 죄다 따라 오더라.”
나는 따라간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서로 눈길만 마주치며 말하고 듣기만 하였다.
“개똥밭에 굴러도(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데 왜 따라나섰는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점점 알아듣기 힘든 말을 이어갔다.
“죽음이라는 경지가 부처가 말하는 열반은 아닐 텐데.
한순간이었지만 매우 편했다. 아무것도 뒤돌아볼 것이 없었지.
볼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 볼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겠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그 길을 왜 증조할머니는 불호령으로 막고 나섰을까? 당신은 6년이나 먼저 갔으면서.”
짧고 따듯하던 봄 햇살은 기울어 종자 고르는 일을 어렵게 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듣기만하는 우리 모자(母子)사이에는 슬프고 처량하기 그지없는 처지를 서로 감싸 안고 있었다. 부처와 가섭존자의 염화미소를 닮은 이심전심으로.......
열다섯 살의 아들과 갓 마흔을 넘긴 홀어머니의 넋두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무엇도 없었다. 여인네의 일상적인 수다는 아니었다. 수다이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마음에 깊은 아픔이 있었다.
더구나 이런 처지가 조금도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길목에 이제 막 접어들었다는 절망감이었다. 어쩌면 생이 이러한 비운의 길을 헤매다가 쓰러질 것이 불 보 듯 뻔 하다는 것이었다.
따듯했던 해님은 봄볕을 서둘러 거두었다. 고르던 종자를 자루에 담았다. 어미가 될 종자를 방 한쪽에 쌓아 놓았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산소 옆에서 논을 치고 있는 형과 할아버지를 도우려 발길을 돌렸다.
발길을 돌려 걸으면서
‘절망 속에서도 해야 할 몫을 방관하거나 부양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어머니’를 내내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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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하나의 표현과 단어들이 가슴이 절여오네요?
저도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던 그런 내용입니다.
2부 중간까지 읽고 내일 봐야겠다 광주 버섯내러 가야할 시간 그때 현순이 나도 업고 다녔는데 ㅎㅎ
대단한 고산양반 ... 가슴이 먹먹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