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여름은 아름답다
올해 농사는 5,400여 평. 이 중, 밭은 4,000여 평이다. 2,500평은 고랑에 나있는 풀을 손으로 맨다. 이른 봄에는 딸깍이라는 농기구로 슬슬 매지만 6월 이후로는 장마비 한 번에 풀은 이내 한 뼘만큼 자란다. 새끼손가락만큼만 올라와도 풀에 대해 관대하다보니 우리 집 텃밭은 늘 풀밭이다. 보다 못한 마을 어른들이 우리 밭에 몰래 제초제를 쳐야겠다고 종종 농담도 하신다.
농사짓는 작물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 쌀, 고추 등 평소에 주로 먹는 농산물 십 여종과 장류, 효소, 쨈 등 가공품까지 합치면 이십 여 가지나 된다. 우리 가족과 아는 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밥상위에 올릴 수 있도록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직거래로 판매하다보니 그동안 자주 연락하지 못한 지인들과도 자연스레 연락이 되고, 가족과도 더 가까워졌다. 쉽게 선택하지 못하지만 모두 다 귀농을 꿈꾸고 부러워한다.
도시에서 6년 동안 텃밭을 일구다보니 자연과 공존하는 삶이 그리웠다. 팍팍하고 재미없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집을 구하다보니 텃밭이 필요했고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우선, 마당의 콘크리트를 벗겨내고 옆의 빈터를 개간하여 80평 남짓한 텃밭에 온갖 씨앗과 모종을 심었다. 코앞에서 고추 몇 개와 상추, 깻잎 몇 장 뜯어와 보글보글 끓인 쌈장으로 즉석 상차림을 내오는 일, 싱싱한 오이와 탱글탱글한 방울토마토로 금세 허기를 달래주는 일은 주말농장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자농사에 골병들다
봄에 심는 작물 중 제일 먼저 수확하는 것이 감자다. 감자를 수확하고 이모작을 하기 위해서 하지가 지나면 조용했던 밭이 시끌시끌하다. 새벽4에 일어나 잠도 깨지 않은 눈을 비비며 아침밥과 새참을 준비하고 농기구를 챙겨 어스름한 밭에 도착. 한참 일을 하다보면 오전 9시가 돼서 더위 녀석이 찾아온다.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놀라서 뛰쳐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서서히 데우면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개구리가 죽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면 찬공기부터 익숙해져 더위를 느껴도 잘 참아진다. 그러다가 바로 더위 먹는다.
이런 날은 하루가 어찌나 긴지 모른다. 7월의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땀에 절인 옷에서 풍기는 시큼털털한 향기, 허리 등골 다리관절 아프지 않은 곳 없는 몸뚱이, 감자가 워낙 무거워 나르는 일도 힘들다. 무엇보다 양이 많으니 지루해 죽겠다. 심을 때도 고생했는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이 고생을 하나, 흙에 엉덩이 깔고 주저앉아 하소연을 한다. 감자 많이 팔아서 겨울에 해외여행 가자고 그나마 위안을 삼았는데 감자의 흉작으로 그 꿈마저 사라져 버렸다. 감자농사? 내년에는 반으로 줄인다. 근데 내 흰 피부에 내려앉은 기미와 주근깨는 어떡하냐고!
나에게도 밥상안식년을!
대개 보면 여성들이 귀농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일이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귀농해서 제일 힘들었던 노동은 가사노동이었다. 남편과 같이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와 또 집안에서 밥상을 차리는 일. 그 사이에 남편은 바깥의 일을 마무리한다. 농기구를 대충 정리하고, 쉴 참에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한다.(혹, 밥상을 차리기 싫어서 늦게 들어오는 아닐까?) 물론 체력적인 한계가 다르기 때문에 남편의 노동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는데 왜 꼭 밥은 내가 차려야 하나. 특히 일하고 들어와 가사노동으로 연장되는 그 고충을 남자들은 잘 모른다.
TV에 나오는 농촌의 소박한 밥상?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같은 것을 먹을 수도 없고. 그 채소로 가공을 해야 하는데 그게 고민이다. 찌개와 국을 끓이는 일은 초보농부보다 더 어려운 초짜주부의 슬픔이다. 게다가 한 끼도 아닌 삼시세끼라니, 또 끼니 사이에 새참은 필수다. 헉!
어느 날인가, 그냥 맹물에 찬밥을 말아 아무 반찬 없이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먹던 나만의 밥상이 얼마나 꿀맛이던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화려한 상차림이 아닌 남이 차려준 밥상이라고 한다. 밥상안식년을 제안 받은 무주 귀농자 장영란 선생님은 지금 행복하실까?
농촌이 건강해야 우리의 밥상이 건강해진다
얼마 전에, 60대 초반인 마을 아주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농사 중에 가장 힘들다는 담배농사를 주로 하는 집이다. 젊었을 때는 대구에서 다른 일을 하셨고 고향으로 귀농한 지 10년. 담배와 고추농사를 큰 규모로 하셨던 분인데, 담배 순을 따시다가 갑자기 머리가 쿵, 하고 내려앉더란다. 담배의 독한 향기 때문에 간혹 걸리는 담배병인 줄 알고 며칠 집에서 쉬셨는데 낫지 않아 큰 병원에 갔더니 뇌출혈이란다. 다행히 수술은 하셨지만 앞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는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들이 상당수고 아직도 농사를 한창 할 나이라 그 소식을 듣고 다들 우울해 하셨다. 내년 농사를 대폭 줄이겠다는 얘기들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건강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법. 건강 잃고서 돈이며 농사며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농사를 내려놓는 일은 농사꾼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건강도 좋지 않은데 몇 천 평씩 농사짓는 어르신들이 참 많다. 농번기만 되면 얼굴에 갖은 피곤함이 다 묻어있다. 젊은 우리도 힘든데 오죽하겠나. 2월부터 고추농사가 시작되면 11월까지 바짝 일하고 겨울에는 병 치료를 하러 다니느라 다들 바쁘다. 무릎과 허리관절, 당뇨, 농기계 사고로 인해 몸이 아프신 분들이 참 많다. 게다가 알콜은 늘 따라다니는 음료수(?)다.
너무나 소중한 농업의 가치를 모르는 사회
귀농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간 돌아가신 어른들이 벌써 몇 분 계시고 외지로 나갔다가 상여타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분도 많았다. 농촌은 점차 고령화되고 옛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돈이 판치는 세상에서 시장경쟁에 내맡겨진 농업은 이미 오래 전에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오롯이 그 땅에 몸담고, 농업을 지키며 사시는 우리네 어른들이 노후에는 정말 건강하고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그건 결코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하는 모든 국민, 더 나아가 나라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농업의 가치, 그 소중함을 너무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첫댓글 진강형에게 일주일에 한번 밥 차리는 당번을 해달라고 제안해 보면.. ㅋㅋ
농한기 겨울에 무조건 밥상안식월을 선언하고 거부하면 무조건 서울로 뜰거야!
그래 형이 거부하면^^ 우리집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