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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베트남여행기
최 근 옥
1. 소수민족이 사는 '사파'에 가다.
무더운 6월 하순, 부부 동반하여 5박 6일간의 베트남 여행을 했다.
주로 북베트남 지역의 '사파' '하룡베이' '잠콕'지역.
배낭여행이 아니면 좀처럼 가기 힘든 곳을 갔다.
먼저 소수민족이 사는 '사파'를 갔다.
하노이역에서 밤 9시30분 기차를 탔다. 6인 1실 침대 칸이다.
다행히 에어컨 시설이 있었다.
잠을 자면서 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기차의 요동이 심해서 잠을 붙일 수가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100년 전에 중국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만든
협궤철로라 속도도 느렸다. 기차의 요동과 굉음이 심했다.
사람을 좌우로 흔들어놓고 상하로 뒤채놓는다.
마디 끊어 가는 굉음, 쇠 깎이는 소리, 피스톤 풀리는 소리. 들썩들썩,
그래도 기차는 용하게 어둠을 뚫고 달렸다. 기차 여행이라 낭만이 있었다.
다음날 새벽 6시30분에 '라오까이역'에 도착했다.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중국 운남에서 발원한 '홍하'강이 흐른다. 다리 건너가 바로 중국이다.
다리 입구에 국경표지인 '베트남 102' 라고 명기한 표지비가 꽂혀있다.
하노이에서 중국 곤명까지 290km 철길도 이곳을 지난다.
한반도 남북한 철길이 뚫리면 평양과 북경을 지나
하노이까지 기차여행도 할 수 있는 그 날을 그려봤다.
이곳에서 사파까지는 봉고 차로 산길을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한다.
아슬아슬한 곡예길이나 다행히 포장된 도로였다.
군데군데 도로확장 공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망치로 일일이 돌을 깨서 깔고 있었다.
버스가 가파른 능선을 감아가노라면 산비탈로 다단계 논들이 펼친다.
경사가 상당한데 논들을 일궈 농사를 짓고 있다.
단발머리처럼 정교하게 가다듬은 논두렁,
폭이 좁은 논들이 층층이 계단을 만든다.
흡사 '보성차밭'을 연상시킨다.
오래 전부터 전수되어오는 소수민족의 생활터전이라 했다.
사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거리에 삼삼오오 그들 특유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흡사 여고생처럼 제복을 입은 것 같다.
그 옷차림이 격식을 갖춘 단정함도 있다.
옷 색이 옅은 검은색으로 스커트에 긴 조끼를 바쳐 입은 복장이다.
잘 살펴보면 옷마다 그들 손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레이스에, 팔 중간 부분에, 목 깃 부분에 수를 정교하게 놓았다.
슬리퍼 같은 신발을 신고 다리에는 각반을 둘러 끈으로 묶었다.
머리에는 터번 같은 모자를 썼다.
그 모자색깔로 어떤 소수민족인가를 식별했다.
빨간 두건을 두른 족은 '하몽족' 검은색 두건을 두른 족은 '자이족'
이렇게 구별했다. 대체로 체구들이 왜소했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 요란한 귀걸이를 달았고 팔목에는 은팔찌를 찼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처럼 덜렁덜렁 큰 귀걸이를 한 모습을 보고
지구촌 원주민들의 공통점이고 치장의 원초가 아닌가 했다..
어려서부터 귀걸이를 한 탓인지 귀들이 모두 축 늘어졌다.
어떤 아이는 새를 정교하게 새긴 커다란 귀걸이를 달았다.
그들은 해녀가 물박을 맨 것처럼 대바구니를 배낭처럼 메고 다닌다.
사파 시장은 소수민족, 현지인, 외국 관광객으로 분비였다.
소수민족들은 시장 거리 곳곳에 서성이면서 은팔찌나 수예품,
귀걸이 몇 개씩을 들고는 관광객들에게 사달라고 호소한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토요일로 시장이 서는 날이었다.
요란한 귀걸이를 하고 서 있는 소수민족이 있어
사진 한 커트를 했더니 반기면서 은팔지 2개를 내밀면서
1불이라고 손가락을 펴 보였다.
사진을 찍었으니 대가를 치르라는 적극적인 요구이다.
1불을 얼른 주고 샀다. 같이 기념사진 한 장을 더 찍자고 하니까
잠깐 멈추라는 손짓을 하면서 내 머리에 모자를 씌우려 한다.
모자를 쓰면 그 모자도 꼼짝없이 사 주어야 한다.
난 웃으면서 모자 안 쓴다고 손사래를 쳤다.
우리 부부는 이 옷차림이 요란한 소수민족 여인과
나란히 서서 근사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기도 했다.
이들은 15세-20세 정도에서 결혼을 한다.
그래서 장이 서는 날은 '러브 마께이팅' 이 서기도 한다.
총각 처녀가 시장 주변을 서성이면서 서로가 좋아하는 짝을 탐색한다.
길을 오고 가면서 눈맞춤도 하고 말도 걸어보고 하면서
맘에 맞는 짝을 찾으면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을 틔워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나라에 소수민족이 53개나 된다는 데 놀랐다.
중국과 맞먹은 소수민족 숫자이다..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보고싶어 그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다.
사파 숙소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소요되는 곳이었다.
이곳 입장료가 5000동(0.3불)이었다. 얼마간 걸어가니
돼지 한 마리가 풀숲에서 꿀꿀거리며 뛰쳐나와 길을 훼방 놓는다.
안내자 말이 주인이 없는 돼지라고 했다.
젖이 늘어지고 덜렁이는 것으로 보아 어미돼지로 보였다.
우리나라 돼지처럼 크지 않고 멧돼지처럼 주둥이가 길다.
이곳에서는 쇠고기는 질겨 인기가 없고 닭고기 돼지고기를 최고로 친다.
외딴집이 있었다. 마침 여인이 옷감에 물을 드리고 있다.
천을 두 손으로 염색물통에 담갔다 꺼냈다 반복했다.
아가는 평상에서 다리 하나를 떨구고 악을 쓰며 울고 있다.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에 물들이는 일에만 열중한다.
집 주변이 염색 찌꺼기 흘러간 자국으로 지저분했다.
천연염료를 쓰기 때문에 환경오염에는 개의치 않고 있다.
옷감에서 물이 빠져 아이들 손등들이 거무칙칙하다.
집이라고 해야 벽은 대나무자리를 들쳐대고 지붕은 야자나무 잎을 얹혔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끈으로 엮고 돌멩이를 매달아 놓기도 했다.
잠자는 방인지 돼지우리인지 닭장인지 잘 구별이 안 되었다.
촌락이란 것이 소수민족이 옹기종기 한곳에 모여 살지를 않고
가옥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산재해 있다.
물줄기가 쾅쾅거리며 내리는 깊은 계곡을 건너야 했다.
꽈이강의 다리처럼 나무다리가 걸쳐있다. 다리 난간을 건너면 넌출넌출했다.
나무판에 굵은 철사로 엮어서 지탱하고 있었다.
집 주변에 옥수수도 자라고 오이 채소도 가꾸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서 길을 닦았는지 마을로 올라가는 길이 돌길이다.
대리석 돌 조각으로 바둑판처럼 깔아놓았다.
길 나비가 한 60cm 쯤 될까. 극히 좁았다.
길에서 한 소수민족 남자를 만났다.
키나 생김새가 얼마 전에 죽은 아프리카 부시멘 같은 인상이다.
그는 웃으면서 우리 일행에게 길을 빗겨주었다.
그 남자는 칼 한 자루를 가죽칼집에 꽂아 활처럼 등에 메고 다녔다.
나는 그 보고 칼을 한 번 빼 보라는 모션을 썼다.
그는 기꺼이 칼을 빼 보여준다. 무쇠로 벼른 도끼 날처럼 세워 만든
장도칼이다. 대나무도 자르고 야자도 따고 닭도 잡고 돼지도 잡고
사냥할 때도 쓰이기 때문에 필수로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날씨가 무더워 마을을 돌아오는데 힘이 빠지고 지쳤다.
유럽 여행객들이 가족단위로 단촐하게 관광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 오토바이 투어 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불을 주고 오토바이 뒤에 탔다. 탕탕거리며 언덕을 내려 왔다.
사파의 뒤쪽 '함롱산'에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숙소에서 걸어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식물원도 있고 소수민족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가옥, 베틀,
의상, 그림, 자수, 그림엽서 등이 전시되어있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비단구렁이 사육장도 있었다.
구렁이가 낳아놓은 알인지 아니면 먹이로 넣어준 오리알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 '알' 하나가 구렁이 똬리 옆에 놓여있다.
그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뱀알이라고 하는 사람,
오리알이라고 하는 사람, 아리송했다.
제일 높은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휘돌아 보았다.
'아!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발 아래로 가든의 황토색 지붕들과 시내전경이 한 눈에 잡혔다.
저 멀리 분지를 넘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
바로 인도차이나에서 최고봉인 판시판봉(3143m)이었다.
가뜩이나 흐리던 날씨에 무슨 조화인지 햇볕이 번쩍 났다.
자연의 채도가 한결 투명했고 모든 사물이 가깝게 보였다.
깎아지른 산봉우리 위용이 구름 사이로 맑게 솟아올랐다.
산허리로 구름 떼들이 부드럽게 번지고 감아 돈다.
그래서 이곳을 '베트남의 알프스'라고 했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프랑스인의 별장도 많은 곳이다.
2. 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케치
다음날 하노이로 되돌아 갈 때도 올 때와는 역으로 밤차를 탔다.
올 때는 잠을 못 잤지만 갈 때는 피곤했던지 설친 잠이지만 잤다.
하노이역에 내리니 새벽녘이었다. 아침을 퍼(쌀국수)로 했다.
다음 여행 코스가 통킹만에 위치한 하룡베이다.
하룡베이까지 버스로 3시간 동안 가야한다.
달리는 버스에서 창 밖 풍경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긴 뿔 달린 물소들이 대여섯 마리씩 들판에서 풀을 뜯는다.
농부 둘이 마주서서 물박끈을 맞잡고 물을 퍼 논에 담는다.
내 어린시절에 모판에 물대기 할 때 원시적으로 했었는데.
이 나라는 2모작 3모작에 쌀 생산량이 세계 제2위이다.
질펀한 논 가운데 묘지들도 군데군데 있다.
도로변 나무 그늘에 주막들이 곳곳에 있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앉아 퍼(쌀국수)와 맥주로 식사를 한다.
집들의 구조가 모두 도로를 향해 가로는 좁고 세로는 길다.
건축법에 가로 4m 세로 14m가 기본이라 했다.
그 기본크기에 또 붙여서 집을 짓는다.
누가 그 옆에 집을 지을지 모르니 페인트칠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도로 면을 향해 가로의 폭을 길게 집을 지으려는 경향성과는
배치되는 이상한 건축법이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분리대 차선도 없고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뒤엉켜 달린다. 길가 차단 울타리도 없다.
다만 포장이 되어있고 통행료를 받는다는데 구분이 있을 뿐이다.
톨게이트도 돈 받는 곳 따로, 표 받는 곳 따로,
동떨어져 있어서 납득이 잘 안 갔다.
베트남 여인을 상장하는 '아오자이' 옷은 북베트남에서는 잘 안 입는다.
다만 행사 때나 결혼식 때만 입는다.
그 옷은 남베트남 여인들이 즐겨 입는다.
100년 전에 사이공 쪽에서 중국복장을 개량해서 입은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북베트남 여인들은 바지를 즐겨 입고 있었다.
남자들은 '묵콩'이란 베이지 색 함박모양의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야자 잎으로 만든 '녹나'란 삿갓 같은 모자를 쓴다.
여자들은 눈만 내 놓고 복면강도처럼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사스 때문인가 했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강렬한 자외선 햇볕에서 보호받고 황사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도 없고 먼지도 없는 날씨인데도 여자들이 얼굴에
볼품 없이 복면을 하고 다녔다. 하나의 습성인 듯 싶었다.
오고가는 관광버스 거의가 현대차 마크다. 중장비 차는 대우마크다.
영업용 택시도 우리나라 프라이드차가 많다. 또한 '어학연수원' '어린이집'
이런 한글을 표기한 차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글 글씨를 거꾸로 달고 달리는 차도 있어 웃었다.
그 차들은 우리나라에서 중고차로 수입된 차종들이라고 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차에 한글 표지가 붙어있어야
찻값을 제대로 받는다고 한다.
한글 표지가 지워지면 찻값이 10%는 다운된다고 했다.
이 나라 고속도로 대부분이 우리나라 건설업체들 손에 의해
닦여진 길이라고 했다.
하노이 시에 우뚝 솟은 가장 큰 호텔이 '대우호텔'이다.
외국 국빈들이 대게는 이 호텔에서 머문다고 한다.
시내 대형 백화점에서 '채시라' 같은 인기 탤런트 광고사진도
쉽게 만날 수 있다. TV연속극으로 우리나라 인기 드라마가 방영된다.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친숙하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3000개의 섬이 떠 있는 하룡베이
지도에서 통킹만에 있는 '하룡베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동양의 3대 경관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혹자는 그 경관의 불가사이가 중국의 계림보다 솟는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 비경이 199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멀리 섬들이 겹겹이 병풍처럼 떠있다.
그 섬의 수가 자그마치 3000개나 된다고 한다.
섬을 이루는 산들이 겹겹으로 이어있다.
바다는 파도도 일지 않고 유리알처럼 만경창파다.
항구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점점이 떠 있다.
해안선이 부드럽고 완만하다.
유람선을 타는 부두는 사람과 배들로 아수라장이다.
치자빛깔의 검붉은 배들, 매연냄새, 기관소리, 뚜뚜 기적소리,
선박 발동소리, 관광객들이 운집하여 부두는 시끌벅적했다.
유람선 요금이 30000동(2불)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가 참 싸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표를 앞뒤로 뒤집어도 보았다.
그것도 5시간 동안을 타고 유람하게 된다.
배와 배를 징검다리로 하여 세척이나 건너뛰어 지정된 배에 올랐다.
뱃머리에 용트림치는 용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용들이 빚어 만들었다고 해서 지명이 '하룡베이' 이다.
용에 대한 전설도 많고 가옥들마다 용에 대한 문장을 새겨 넣을 만큼
용을 수호신처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풍습이 내린다.
배가 고동을 울리며 떴다.
우리 부부는 전망이 좋은 맨 위 간판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주어 시원했다. 속도가 경쾌하기 보다 느리다.
황토 빛 바탕에 노랑별 하나 '베트남 국기' 깃발이 나부낀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들이 넓게 흩어져서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흡사 배들이 선단을 이루고 서서히 적진으로 진격하는
바다의 행렬처럼 보였다. 장관이기도 했다.
깎아지른 돌산으로 이루어진 섬들!
섬마다 해안선이 가파르고 물이 나지 않기에 무인도들이다.
숲으로 덮여있다. 독수리나 매 같은 새들이 서식한다.
하늘로 선을 긋고있는 능선들이 기기묘묘했다.
밋밋한 곡선, 세모 곡선을 그려가다 화가 치밀었는지
칼로 도려낸 듯 날카롭게 그리기도 했고
또 절망감의 절벽으로 끊어 놓기도 했다.
성벽을 쌓듯 돌을 포개놓기도 했고 칼로 바위를 엇그어 놓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하얀 맨살을 내민 듯 뭉실한 바위도 있어 조화를 이룬다.
맨 처음 내린 곳이 '띵궁 동굴' 이란 곳이다.
종유석 동굴로 입구와 출구가 각기 달랐다.
입구는 좁으나 안으로 진입하면 점입가경이다.
오르고 내리고 맴돌면서 큰 돔형의 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저 밀려가면서 구경했다.
어두운 곳곳에 휘황한 조명이 비춘다.
산델리라 같은 종유석, 고대 조각상들, 불상, 예수상, 왕관,
여인의 유방, 가지가지 사물을 태초에 조물주의 의도로 주형해 놓았다.
우리나라 동굴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떨어지나
화려하고 웅장한 점은 승한다.
물이 흐르는 광장도 있고 인도차이나의 지도 형상도 있다.
그 지도형상은 미래에 베트남이 인도차이나의 주역이 된다는
꿈을 말해준단다. 부모들은 그곳에 어린 자녀들을 세워놓고
사진을 많이 찍어 주고 있다.
웅지를 품고 나라의 동량이 되라는 메시지인 것 같다.
월남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구멍이 펑 뚫린 곳도 있다.
그 우물 같은 동공으로 빛다발이 눈부시게 쏟아 내린다.
이것으로 동굴의 지층이 그리 두텁지 않을 것으로 추측들을 하고 있다.
이곳을 빠져나와 우린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섬 하나를 벗어나면 또 섬을 만난다.
섬, 섬, 섬, 바다에 산을 모심듯 심어 놓았다.
그곳에 바다의 오묘한 미로가 있다.
바다에서 생활하는 '수상마을'을 찾았다.
집들이 스치로폼 부력을 이용해서 그 위에 집을 짓고 붙박아 살고있다.
지붕은 대나무로 엮은 자리를 덮었고 처마에 물받이도 만들었다.
빨래 줄도 매어있고 칙칙한 옷들이 한 줄로 널려있다. 개도 기르고 있다.
이들은 낚시도 하고 물고기 양식도 하고
관광객들에게 횟집운영도 해서 생활하고 있다.
아무리 큰 태풍이 불어도 이곳 바다는 끄덕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이 있듯이 이 나라에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쩡다옥 장군이 있다. 몽골군이 세 차례나 침범했지 만 이 바다에서
단단한 흑단나무로 나무작살을 만들어 바다 속에 은폐시켰다가
적의 배들을 몰살시킨 자랑스런 일화를 갖고 있다.
이 수상마을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생선회을 사 먹기도 했다.
'바근바리'란 생선회를 1Kg에 15불씩을 받고 있었다.
귀걸이를 하고 민자바지를 입은 어머니는 아기를 품에 안고
그물을 끊어 만든 요람을 타고 있다.
그만그만한 터울의 꼬마들이 줄줄이 6명이나 딸렸다.
흥부 자식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침상에는 대형 라디오도 있고 방안에는 TV도 있고 농도 있다.
그리고 사진틀에 사진들이 조밀하게 꽂혀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먹었던 바근바리 생선회를 이곳에서도 시식해 본다.
생선 맛이 부드럽고 혀끝에서 사르르 녹는다.
하룡베이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가 있는 '티토프 섬'에도 올랐다.
1962년 소련 우주비행사 티토프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호치민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육지에서 모래를 날라다 인공으로 만든 유일한 해수욕장이 이곳에 있다.
사람들이 선박에서 탈의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미끈한 인어처럼
해수욕들을 한다. 수영복도 준비해 갔지만 갈 길이 바쁜 일정이라
욕망을 접고 전망대만 오르기로 했다.
돌계단이 몇 개나 되나, 숨차가면서 수를 세면서 올랐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계단이 꼭 427개나 되었다.
가깝고 먼 하롱베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화 '인도차이나'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프랑스 식민시대 황녀 '까미유'가 프랑스 해군장교와
사랑에 빠져 그를 찾아가는 고난의 아픔이 극렬하게 그려있다.
그녀가 가족도 물리치는 골수의 공산주의 신봉자가 되는 갈등도 그려있고
노예로 팔려가기 직전에 탈출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조각배를 타고
물살에 표류한다. 밀려 닿은 곳이 바로 이 하룡베이로 그려있다.
나는 그 현장에 서서 멀리 조용한 바다를 조망하면서
프랑스에서 제작된 그 영화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떠올려 보기도 했다.
우린 돌아오면서 선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꽃게와 대와, 돔, 오징어 생선요리가 올랐고
양배추, 토마토 요리도 나왔다.
데쳐서 뜨끈뜨끈한 나물도 있고. 파인애풀, 망고 같은 과일도 나왔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 게발을 뜯었다.
만두가 한사람 당 2개꼴로 나왔다.
만두의 원조가 베트남이란 것도 이곳에 와서 알았다.
제갈공명이 시신들의 원성으로 강을 건너지 못해 만두를 빚어
시신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는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후식으로 과일을 배불리 먹고 맥주도 마셨다.
맥주 1캔에 1불, 맥주 값이나 물 값이 같았다.
배의 흔들림을 깔고
먹는 즐거움이 보는 즐거움 못지 않았다.
그래서 미지의 여행은 역시 즐거운 것인가 보다.
4. 나룻배를 타고 2시간 수로를 헤맨다.
육지의 하룡베이라고 불리는 '닌빈 호아루'도 빼놓을 수 없다.
하노이에서 서남쪽으로 93km 떨어져 있다.
고대 베트남 수도였기 때문에 유적도 많은 곳이다.
우린. 땀곡 선착장에서 사공 2명이 노를 젓는 나룻배 '삼판'을 탔다.
버들잎처럼 조그마한 배였다. 양철을 구부려 지은 배이다.
우리 부부는 뱃머리에 나란히 앉았다. 둘이 앉으니 꽉 찼다.
사공은 삿대로 강을 밀고 사공의 아내는 노를 자박자박 젓는다.
물길 볼거리 소요시간이 2시간이나 된다.
배를 타고 강줄기를 거슬러 오르면서
순박한 자연을 맘속에 담아본다. 자연을 배우는 것이다.
나룻배들이 수 없이 수로를 오르고 내린다.
강물에 오리 떼들이 구구구 물살을 휘젓고
삿갓 쓴 뱃사공이 삿대로 강물을 밀고 아낙네는 노을 젓는다.
그 넉넉한 풍경이 꼼짝없이 살아있는 한 폭의 동양화이다.
참 희한한 곳 지형이었다.
강폭이라고 해야 고속도로 8차선 나비라고 할까.
양쪽에는 논으로 물 속에 잠긴 벼들이 자라고 있다.
산들은 논에서 저만치 물러서서 양쪽으로 병풍처럼
물길을 따라 절경의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다.
강폭을 오로다 보면 동굴도 3개나 지나야 된다.
동굴의 길이가 어떤 것은 150m가 넘을 것 같았다.
그 동굴에도 종유석이 자라고 있다.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간간이 외딴 오막집들도 만난다.
귀를 기울이면 숲 속에서 매미소리도 들리고 풀벌레소리도 쏟아진다.
강바람에 빠나나 넓은 잎이 너울너울 휘젓는다.
사루비아 꽃이 제철을 만난 듯 빨갛게 무더기로 피어 군락을 이룬다.
엷은 그물 망이 논 경계선으로 쳐 있고 또 수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도 있다.
배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배 밑창으로 깔린다.
오리들을 가두기 위해서 쳐 놓은 그물 울타리 같았다.
수염이 허연 촌노가 쇠스랑을 싣고 노를 저어 상류로 올라간다.
어덴가로 밭을 일구러 가는성 싶다.
저만치 서 녹나모자를 비스듬하게 쓴 여인이,
혼자 누워서 발로 노를 능숙하게 저으며 우리를 따라온다.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방물장수처럼 물건을 파는 배다.
마지막 동굴을 지나 막다른 지역에 다다르니 배들이 언제 따라 왔는지
그물에 건져 올라온 고기떼들처럼 왁짜기고 부산하다.
뱃머리를 바짝 붙이고 물건을 사란다. 필사적으로 애원들을 한다.
우리는 열심히 발로 노를 저어온 그 여인에게서
2불에 연밥 2송이와 파인애플 1송이를 샀다.
파인애플은 롱익어 맛이 상큼 했으나
연밥은 아직 설익은 것을 성급하게 따 팔고 있었다.
연밥 알맹이 껍질이 홀랑 벗겨지지 않았다.
뱃머리를 돌려 돌아오면서
노젓 던 여인이 수예품을 꺼내놓고 사달라 조른다.
책상보를 비롯한 수예품들이다. 선뜻 사지 않고 망설이니까
나를 힐끈보며 아내의 하얀 피부를 꼬집는다.
자기 까만 피부에 비해 부럽다고 '비티풀' '비티풀' 애교를 떤다.
식탁보 1개에 25불 달라는 것을 깎아서 15불에 샀다.
2시간 물길을 돌아온 배 삯이 2불이었다.
뭍에 내리리 파파라치처럼 따라 붙어 사진을 찍던 사진사가 반긴다.
언제 찍고 언제 현상했는지 발빠르게 우리 모습의 사진이다.
10장을 내놓는다. 4불을 달란다.
작은 배에서 내 모습을 내가 촬영하기 극기 어려운데,
난 사진사을 보고 이런 방식의 살아가는 방식도 있구나 했다.
예약 받고 찍어 준 사진은 아니지만 실감나고 멋있다.
요구대로 얼른 돈을 계산해 주었다.
5. 젊음 낭만이 튀는 호안키엠 호수 주변
하노이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호안키엠 호수' 주변을
또 하나의 명소로 꼽는다.
프랑스 풍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주변에 들어있고
호수 주변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큰 숲을 만들고 있다.
보드라운 잔디밭이 깔리고 곳곳에 벤치가 놓여있고 산책로가 있어
시민들의 쉼터이고 연인들의 밀어 장소이기도 하다.
마침 우리 일행은 이 호수를 낀 '화룡관'이란 한국식당에서
석식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김치를 먹으니 입안이 개운했다.
그 호수를 일방통행으로 감아 도는 오토바이 행렬,
그 뜨겁고 박진감 있는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일품이었다.
하노이 젊은이들은 정열적이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인들이 쌍쌍이 휘황한 불빛으로 밤거리를 질주한다.
그것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폭포수 같은 강렬한 리듬이다.
젊음의 열기가 용광로처럼 끓고 부나비처럼 날고 있었다.
하노이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젊음을
만끽하고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된다
이들을 위해서 하노이는 오후 4시부터 6시30분까지
시내에 버스나(시내버스제외) 대형차 진입을 일체 막는다.
이 도시는 오토바이 위주로 교통체제가 짜여있다.
이 나라에서 오토바이는 부의 상징이고
젊은이들은 오토바이가 있어야 예쁜 애인도 만든다.
암스텔담이 자전거의 천국이면 하노이는 오토바이의 천국이다.
이 호수 가까이에 세계에서 유일한 '수상 인형극장'이 있다.
입장료가 20000동(1.3불)이었다.
밤 9시에 막이 오르는 프로를 관람했다.
대부분 외국 관광객이었다.
무대 뒷 편에는 전통가옥이 있고
무대 앞에는 연못이 있어 물이 찰랑찰랑 넘쳤다.
이 물위에서 인형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재주로 묘기를 부린다.
무대 앞 왼쪽 난간에서 전통악기를 갖고 연주하는 악사들이 있다.
그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면 이에 맞춰 물고기가 뛰고. 사자가 춤추고,
뱀이 휘휘 물살을 가르고. 개구리가 나무위로 뛰어 오른다.
춤 추고, 몰고, 도망치고, 싸움질하고 못하는 것이 없다.
용이 입으로 불꽃도 품어낸다.
어떻게 조종되는지 참으로 묘했다.
이렇게 갖가지 묘기들이 노래와 조명과 함께 연출된다.
땅위에서 연기보다 더 다양하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 인형극에는 베트남의 혼이 들어있다.
설화가 깃들어있고 민족의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수상인형극이다.
베트남은 이렇게 자기 전통문화를 정예화하고
세련미 있게 가꾸고 세계화하고 있다.
하노이의 바단 광장에 가면 베트남 독립의 영웅 '호치민'의 묘소가 있다.
대리석으로 된 웅장한 사각형의 건물로,
시신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으로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보진 못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를 성공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꼽는다.
그를 가리키어 국민들은 그저 '호 아저씨'라 부른다.
베트남은 국민소득이 불과 400불에 지나지 않는 나라이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존심이 대단한 나라이다.
문자 표기는 영어로 하나 읽기는 중국 억양이다.
자본과 기술이 약하지만 노동력과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약동하는 나라이고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이다.
우리와 정서가 같아서 그런지
유럽 여행보다 베트남 여행이 훨씬 즐거웠다.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다.
☆ 소수민족이 사는 사파마을, 섬이 3천 개나 떠있는 하룡베이,
나룻배 타고 물길 2시간 볼거리, 하노이 오토바이 물결.
5박6일간의 스케치를 5회에 나누어 올렸습니다.
자기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라는데
그 동안 저의 졸고를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ribu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