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산으로 찾아가세요”
노르웨이의 ‘라면왕 미스터리’ 이철호씨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왕 미스터리’를 모르면 간첩이다. 올해 일흔 살의 이철호씨는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이면서 우리나라의 라면을 알린 주인공. 유럽요리사협회 선정 ‘최고의 요리사’, 이민자 최초의 노르웨이 국민훈장 수상,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을 수상했고,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성공한 이민자로 소개돼 있다.
한국 전쟁 중 부상을 입은 그가 열일곱의 나이에 노르웨이로 치료차 가게 된 것이 1954년. 온갖 고생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적이고 부지런한 성품과 노력으로 오늘을 이룬 그의 이야기를 접하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과 부산에 동북아 노르웨이 수산물 교역기지를 만들기 위해 5월,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보았다.
“똑똑하지 않았던 게 성취를 이룬 비결” ‘성공한 한국인’으로 알려진 그는 종종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성공할 수 있었냐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냐고 말이다.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건 너무 똑똑해서 그럴 거예요. 저는 좀 둔한 편이에요. 충청도 태생이라 그런지 느리고요. 오늘 못해도 내일 하고, 너무 빨리 결정할 필요 없이 시간이 해결해주는 거잖아요. 한번 시작하면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 끝까지 하고요.
그래서인지 아쉬움이 없어요.” 매순간 그가 넘어온 고비들을 듣노라면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아마 드라마라면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파도를 거부해 본 적이 없었다. 1937년 2월 23일, 그는 충북 천안에서 오형제 중 셋째로 출생했다. 6.25가 터졌을 때 그는 중학교 1학년, 14세였다. 전쟁이 나자마자 아버지는 은행에서 돈을 몽땅 찾아서 식구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전쟁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혹시 서로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 돈으로 버티다가 다시 만나자고 하셨고 그는 구두 닦는 통을 메고 친구 네 명과 집을 나섰다. 전쟁통에 맨 처음 벌인 사업은 ‘밀짚모자 장사’. 손해만 보고 그만둔 뒤엔 ‘냉차 장사’를 했다. 총총한 별을 보고 포성을 들으며 한뎃잠 자기가 예사였다.
임진강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 그를 구해준 것은 미군병사. 그 인연으로 그는 미군부대에서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는 ‘하우스보이’가 된다. 부지런하고 늘 웃는 명랑소년인 그의 별명은 그가 좋아하는 만화의 주인공 ‘아치 볼’. 부대에서 그는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부대를 따라 강원도 속초까지 갔을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옆구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수술을 하던 중 의학적 사망 진단을 받은 그는 다음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운은 좋았지만, 거듭된 수술에도 불구하고 치료는 신통치 않았다. 그를 치료하던 파우스 박사가 노르웨이 귀국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그는 노르웨이로 가게 된다. 중간 기착지에서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전원 사망했고, 화를 모면한 그는 72시간만에 노르웨이에 도착한다. 당시 그의 최고의 꿈은 ‘구두닦이’. 하지만 이곳에서는 구두닦이가 되기 위해서는 면허증이 필요했다. 호텔의 벨보이, 서류 심부름, 동물병원 잡역부, 연극의 단역 배우, 화장실 청소부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한번도 비참하다거나 슬프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일하러 다닐 때도 항상 즐겁게 웃고 다녔죠. 왜냐하면 나는 궁극적으로 화장실 청소일만 하려고 이 세상에 온 사람이 아니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고 확신했어요.”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거북이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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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다음 그는 바로 야간 중학교에 입학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얻어와 물에 불려 겨우 하루 한끼를 먹던 어려운 생활에도 그는 꿈을 키웠다. 구두닦이 면허증을 받으려고 상업학교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뒤 다시 요리전문대학을 선택했다. |
장인 중의 장인을 기르는 곳으로 교육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홀믄 콜른 파크 호텔’ 학교를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하고, 그 장학금으로 스위스 요리학교를 졸업한다. 유럽 최고의 요리사 훈장을 받기까지 그는 어디에 있든 늘 남보다 더 일하고 더 공부하는 성의를 보였다. “남이 그릇을 스무 개쯤 닦으면 나는 오십 개를 닦으려고 부지런을 떨었어요. 감자를 하나 깎는 일에도 정성을 다했죠.
아침마다 그 날의 ‘메뉴’를 체크해 음식에 맞게 감자를 잘라서 요리하기에 가장 편한 상태로 준비해 두는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일에 대한 나의 신념은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잘 보이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기회를 잡길 원한다면, 그 이전에 실력을 갖춘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가 라면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89년 경, 평생을 두고 이루어 갈 ‘내 일’을 찾아야겠다 싶을 때 라면이 생각났다.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을지로 뒷골목 허름한 분식집에서 먹어본 라면의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라면 세 박스를 들여왔지만 난생처음 라면을 본 노르웨이 사람들은 “생긴 게 걸레 같다”며 맛도 보려 들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푸대접을 하거나 싫은 기색을 하는 가게 주인도 있었다. 이때도 그는 문득 어렸을 적 들었던 아버님 말씀을 떠올렸다. “한 번 찍어서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정말 욕심이 나면 넘어 갈 때까지 찍어라.” 조용히 와서는 두말없이 새 것으로 바꿔 놓고는 “장사 잘 되니? 또 올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오기를 3년, 마침내 정식으로 첫 주문을 받았다. 농심측의 승인을 받은 후 그가 직접 디자인한 로고와 얼굴로 포장된 ‘미스터 리’ 라면을 시장에 내놓자,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어디든 달려가 판매와 홍보에 앞장섰다. 새로 매장을 오픈 할 때는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라면을 끓여 시식회를 열기도 한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요리사복을 입고, 요리사 협회로부터 받은 ‘최고의 요리사(cook master)’ 훈장까지 목에 걸고, 정성을 다해 라면을 끓였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북부 나르빅에서 시식회를 여는 그를 보기 위해 초등학교 한 반 아이의 절반가량이 학교를 결석하는 바람에 신문에 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노르웨이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유명 인사 몇 명을 대상으로 호감도 조사를 했는데, 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부분에서 그의 점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 한다. “제가 순하고 정직해 보인대요. 제 생각엔 충청도에서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늘 고향의 부모님 말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꼭 인상이 좋아서만은 아닐 게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강연 때마다 그가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은 일제의 침략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던 민족 정신이나 그가 경험했던 일들, 그리고 우리의 전통 풍습 같은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야 그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이 전부예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 어른을 공경해라, 어른이 수저 들기 전에는 밥숟가락에 손대면 안 된다 같은 어른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이야기들을 해주면 아이들이나 학부모나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는 집을 떠나온 이후 지금까지 언제나 부모님의 말씀을 마음의 등대처럼 믿고 의지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버님,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어머니는 항상 “산이 너한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산으로 가라”며,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꽃은 웃어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도 하셨다.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절제하라는 가르침이었다. 평소 한없이 너그러우셨던 그의 부친도 단 한 가지만은 엄격하셨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어릴 때 밭이랑이라도 맬라치면, 반드시 약속한 곳까지 일을 마쳐야 그 다음 내 하고픈 일을 하게 하셨어요. 중간에 힘들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는 건 통하지가 않았지요. 그런 가르침 덕에 끝을 봤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를 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 사업 거래를 할 때, 부모님이 주셨던 말씀들을 떠올리고 되도록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일상에서나 사업에서나 인간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도 “항상 살면서 바라지 말고 상대편을 생각하고 일을 하라” 하셨던 아버님의 가르침 덕이라 한다. “내가 당신에게 이만큼 주었으니 당신도 내게 그 정도는 주어야 한다거나 뭔가 보답을 바라는 인간관계만큼 치사하고 부담스러운 관계는 없어요. 그때부터 무거운 짐이 얹혀지는 거예요.”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결이 또 하나 있다. ‘거북이의 경주법’. 더디더라도 느긋하게 성실하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 젊은 시절 몸이 불편하고 언어에 뒤떨어지니 남보다 늘 조금 더 일하고, 더 많이 공부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노력했던 점들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고 그는 믿는다.
‘노르웨이에 입양된 한국 양자’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그가 생활이 안정된 이후로 정성을 기울이는 일이 있다. 자신을 살려준 노르웨이에 보답하기 위해 1971년 ‘한국전쟁 참전용사 모임’을 만들었다. 또 ‘한국 협회’를 만들어 입양아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그들에게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두 개의 조국, 한국과 노르웨이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는 것,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다. “노르웨이가 작은 나라고 멀리 떨어져서인지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근데 참 인정이 많은 나랍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발전한 걸 보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가는 데마다 한국 1등이라고 엄청나게 자랑을 해요.”
이철호씨는 노르웨이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관심이 깊은지 기회 닿을 때마다 알려주려 한다. 그의 모든 활동은 한국과 노르웨이 모두에 이로운 일, 두 나라가 사이 좋게 지내는 일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다리를 놓고 좀더 길을 닦아놓는 일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재산을 남기려 하지 말고 그 재산을 머릿속에 남기라’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재산은 잃을 수도 있지만 배움과 근면한 정신은 누가 훔쳐갈 수 없는 거니까요. 인생은 명예를 남겨놓는 거라고요. 저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후손들을 위해 명예를 남겨놓는 거 말입니다.” |
첫댓글 라면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이분 라면 담백하고 맛난다고 생각해용~*
라면 먹고싶다 ㅋㅋㅋ
준비. 마음에 와닿네요.
이 분 라면 어데서 먹냥 ㅠㅠ
대형 마트에 팔아용,,,, 킴스클럽? 이마트? 홈플라스 등등...근데 없을때도 있는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