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장소 : 남한산성 - 삼전도비 이달의 주제 : 삼국시대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항쟁의 역사와 함께한 남한산성의 지리적, 역사적 중요성 인식하기
★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한강과 서울을 수호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세력을 겨루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백제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이 남한산성 아래 평지에 자리 잡음으로 인하여 남한산성은 자연스럽게 평지성에 대응한 산성기능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으로서의 기록은 신라 문무왕 때 처음 나타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치른 8년 과정에서 672년 경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1231년과 1232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남한산성에서 격퇴하였습니다. 특히 2차 침입 때는 몽고군의 예봉을 꺾어놓고 그들이 용인 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살례탑 장군이 살해된 것을 계기로 마침내 화의하고 철군하게 만들었습니다. 남한산성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 시대 인조 때의 일입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듬해 이괄의 난을 겪어야 했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하면서 후금(뒤의 청)과 긴장관계에 놓이게 됨으로 해서 급기야 1624년에서 1626년 사이에 대대적인 남한산성을 수축하였습니다. 동시에 남한산성 방어를 위한 군영인 수어청을 신설하고 광주를 유수부로 승격하였습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을 맞이한 조선 정부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지만, 원병이 오지 않고 식량부족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적군의 포격을 받아 법화골에서 300명의 희생을 내고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곽은 청의 압력으로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삼배구고두의 치욕과 심양 땅에 볼모로 갔던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였고, 숙종과 영조, 정조의 국방정책의 심화로 외성이 축조되고, 광주부의 치소가 산성 안으로 옮겨 옴으로써 산성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산성 내 많은 사찰과 시설물들이 폭파되고 소실되었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1896년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남한산성은 경기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들은 서울 진공작전을 꾀하였습니다. 비록 작전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나약해진 정부를 대신하여 백성들로 이루어진 팔도 의병들이 총집결하여 외세를 축출하여 서울을 회복하고 임금을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환궁시키려한 거사는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산성내의 무기와 화약을 폭파하여 산성 내 주요 시설물을 불태웠지만, 산성 내에서는 3.1운동은 물론 지속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렇듯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사의 정통성,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 삼전도 굴욕
1636년 12월 2일 청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종묘의 신주를 강화도로 옮기고 세자빈과 왕자들도 강화도로 보냈습니다. 나중에 인조도 강화도로 피신하려하였으나 이미 청군이 강화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군에 의해 완전 포위된 남한산성의 항전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군사 1만 5천여명과 관원 3백여명 그리고 50일쯤 버틸수 있는 식량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김상헌, 정온 그리고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는 결사항전을 고집했고 김류, 최명길 등의 주화파는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정월. 강화도가 함락되고 강화도에 피난 중이던 2명의 대군과 빈궁 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히자 인조는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삼전도로 나가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 굴욕’입니다. 항복을 받아낸 청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대동하고 척화파의 김상헌과 3학사 등을 잡아서 귀국했습니다.
★ 삼전도비
병자호란이후에 청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진 ‘대청황제 공덕비’ 몽고문, 만주문, 한문의 3개국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특이한 비석 높이 395cm, 너비 140cm.무게 32t
준비물:교재,필기도구,유니폼,물. 약간의 간식,색싸인펜,쓰레기봉투
만나는 장소:수원 영통 입구 토마토 부동산 앞 8시 서울 송파 중학교 건너편 맥도날드앞 8시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