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 댓글을 달다가... 이 위대한 선수의 소개글 정도가 하나 정도는 카페에 있으면 좋을 듯 싶어서 짧게나마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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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 Fernandez .... 1953년 필리핀 세부에서 태어난 라몬 페르난데스는 50년대부터 시작해 90년대까지 수많은 농구 레전드들을 배출해낸 농구의 나라, 필리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신장 196 센티의 테크니션으로서 빅맨 포지션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죠.
선수층이 두텁고 MVP 점수 시스템이 유난히 까다로와서 2번 이상은 MVP가 힘들다는 필리핀 프로리그 PBA에서 무려 네 번이나 MVP 수상(82, 84, 86, 88년)을 했으며, 그 네 번의 MVP 수상을 네 개의 다른 팀에서 해냈습니다.
게다가 19회 리그 우승이라는 경이적인 우승신화을 이끈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필리핀 리그는 1년에 3번의 우승기회가 있는 독특한 시스템이어서, 19회 우승은 NBA나 KBL로 치면 6~7회 우승으로 봐도 좋습니다). All-NBA 팀과 비슷한 PBA Mythical 팀에 무려 16회나 선정이 됐고요.
1972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세계무대에 등장을 한 라몬 페르난데스는 그 대회 MVP가 되며 필리핀을 우승시켰고, 그 이듬해인 1973년 아시아 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필리핀에 우승컵을 안겨다 준 수퍼스타였습니다.
20년이라는 긴 프로생활을 하며 큰 부상없이 그리고 항상 꾸준하게 활약한 올라운더였고, 1994년에 은퇴를 하며 필리핀 프로농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PBA 득점 역대 1위 (18,996점)
PBA 리바운드 역대 1위 (8,652개)
PBA 어시스트 역대 2위 (5,220개)
PBA 출장시간 역대 1위 (36,624분)
PBA 블락샷 역대 1위 (1,853개)
PBA 스틸 역대 2위 (1,302개)
그의 최전성기였던 1984년 시즌 때는 평균 27.8점, 11.2리바운드, 9.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평균이 트리플 더블이나 다름없는 놀라운 시즌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필리핀 리그의 어시스트 산정방식이 좀 짠 편이었는데도 이 정도 어시스트를 빅맨이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경이롭죠. 어시스트를 3개만 더했어도 평균이 두자릿수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라몬 페르난데스는 뛰어난 실력 뿐 아니라 훌륭한 인성을 갖춘 선수였으며, 그래서 인격적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는 필리핀 농구계의 거장입니다. 신장에 비해 몸이 깡마른 편이었던 그가 어떻게 자신보다 크고 강한 국내외의 빅맨들을 상대로 활약했는지... 몇 개의 GIF 영상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필살기 - The Elegant Shot
커림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에 비견될 정도로, 페르난데스 특유의 이 런닝 플로터는 그 시도횟수나 효율성 면에서 공포스러울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페이스업 공격 시나 포스트업 공격 시, 그리고 속공을 할 때 조차도 페르난데스는 약간의 변칙 스텝을 섞어가며 오른손을 위로 주욱 올려 살짝만 스냅을 준 이 슛을 즐겨 사용했고, 중계를 맡았던 캐스터들이 이 슛의 우아함에 취해 'The Elegant Shot' 이라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한국과의 경기에선 주로 조명수, 이장수, 조동우, 김유택 등이 이 선수를 수비했었는데, 풋워크나 몸의 기민함이 스윙맨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무척이나 애를 먹었고, 특히 저 시도 때도 없이 수비수의 블락 타이밍을 피해 던지는 '엘레강트 샷'에 속수무책이었죠.
2. 자유자재 포스트업 무브
케빈 맥헤일이나 하킴 올라주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훌륭한 포스트업 무브는 탄탄한 풋워크에 그 기반을 두죠. 페르난데스는 이 풋워크가 정말 뛰어났던 선수입니다.
게다가 페르난데스는 왼손도 잘 사용했고, 훅 슛이나, 페이더웨이 점프슛, Fake에 이은 돌파, 그리고 바스켓을 등지고도 던져 올리는 고공 핑거롤의 대가였습니다. 특히 페르난데스의 핑거롤은 '연구대상' 이란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그 각도나 궤적, 그리고 슛의 난이도 자체가 높았죠.
이런 핑거롤 슛으로 특히 유명했던 '아이스맨' 조지 거빈, 그리고 줄리어스 어빙과 동시대 사람이었죠... 페르난데스 측근들의 말을 빌리면, 이런 핑거롤은 페르난데스 자신이 창의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원조(?)인지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미국에도, 필리핀에도, 6-6 정도의 신장을 가진 마른 체형의 선수들이 하늘높이 고공 핑거롤 슛들을 동시에 쏘아 올렸다는 사실에 있어선 이견을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3. 포인트 센터
동시대를 살았던 선수들 중에... 미국엔 빌 월튼과 알반 아담스가, 그리고 한국엔 신선우가, 이와 같이 하이 포스트에 나와 포인트 가드 뺨치는 플레이메이킹을 해줬었죠. 필리핀엔 라몬 페르난데스가 있었습니다.
수비수들의 대형과 동선을 머리 속에서 계산하며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허를 찌르듯 타이밍을 빼앗아 찔러주는 킬 패스! 커리어 내내 센터와 파워 포워드 포지션을 오가며 뛰었지만, 경기가 끝나면 최다 어시스트는 주로 페르난데스의 몫이었습니다.
이 게시물엔 용량초과로 인해 페르난데스의 전매특허였던 수비 리바운드 후 코스트-투-코스트 드리블로 직접 몰고 나와 속공을 이끌며 오픈된 선수에게 패스를 넣어주던 플레이가 빠져 있습니다. 또 수비 리바운드 후 (래리 버드처럼) 상대팀 바스켓 바로 아래까지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주는 모습들도 빠져버렸네요. 두 플레이 모두 페르난데스가 즐겨 쓰던 패싱 플레이입니다. 이 선수가 수비 리바운드를 게임당 7~8개씩 잡아주던 선수였기 때문에, 이 선수가 수비 리바운드를 잡으면 상대팀으로선 2점 헌납하기가 다반사였죠.
본인의 슛 컨디션이 난조를 보이는 날도 이런 플레이 만큼은 살아있었고, 이런 패스와 리바운드, 수비 플레이로 항상 자기 몫은 해줬던 선수...
4. 김유택 플러스 허재 ?
체형이나 포스트 근처에서의 움직임이 김유택을 많이 닮아 있었죠. 하지만, 볼 핸들링 스킬은 허재와도 닮아 있고요. 2미터에 가까운 선수가 참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잔 기술까지 다 장착하고 있었어요.
재미있게도, 이 라몬 페르난데스의 별명이 'El Presidente' 입니다. 한 마디로 '농구 대통령' 이란 얘기죠. 우리나라에도 있는 별명이네요.
한국의 많은 농구팬들이 '제 2의 허재'가 나오길 그토록 기다리듯이, 필리핀 농구팬들은 '제 2의 페르난데스'가 등장하길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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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위대한 선수에 걸맞지 않는 허접한 소개글 하나를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 그냥 NBA 진출했어도 통했을법한 스타일이네요. 약간 마누지노빌리같은 선수가 되었을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다른 게시글에 댓글로 달기도 했지만, 야오밍, 신동파, 허재와 더불어 아시아 역대 최고 중 하나인 선수였습니다.
필리핀에 사는데도 모르고 있었네요~필리그 중계는 가끔 티비로 보는데 이런정보는 참 좋네요 ㅎㅎ
우와 진짜 대단한 선수네요.. 저는 아벨리노선수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세상에나
아벨리노 림은 Doctor J 같은 존재죠... 인기가 많고 플레이 스타일도 화려한 최고 수퍼스타... 라몬 페르난데스는 커림 압둘자바나 마이클 조던 같은 존재입니다. 그냥 역대 최고죠.
앗, 박사님께서 직접 댓글을..영광입니다..아벨리노 선수도 박사님 게시글 보고 알게 된 선수라.. 진짜 농구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 이마를 딱 치고 갑니다
농구 팬이라면 필리핀 농구역사도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5-60년대엔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 정상급의 농구를 했던 나라였으니까요. 54년 세계선수권에선 동메달도 땄었죠. 56년 올림픽에서도 8강까지 승승장구하고 올라갔다가 7위도 했었고요. 그 56년 올림픽 때 빌 러셀이 이끈 미국에게 패배했었죠. 6~70년대에 이미 NBA 팀들을 불러서 정기전을 하고 친선경기도 자주 갖던 나라입니다.
아벨리노 림이나 페르난데스 말고도 제가 카페에 소개하고 싶은 전설들이 최소한 5~6명은 더 있는 농구국가입니다.
저도 같이 이마를 딱 치다가...아이쿠!! 이마얌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요즘 리그는 크게 관심이 안 가서 안 봅니다.
기술들 난이도가 진짜 상상초월이네요.
워... 엘레강트 샷은 어떤 카테고리에 넣기가 까다롭네요. 잘봤습니다.
맞습니다. 엘레강트 샷은 사실 플로터도 아니에요. 분명히 손목에 스냅을 주면서 쏘거든요. 아주 특이한 슈팅입니다. 손도 상당히 커야 가능한 슛이죠.
NBA 에서도 비견할만한 선수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선수네요... 핑거롤 타이밍이 ㅎㄷㄷ..
핑거롤 방식이 오히려 윌트 체임벌린의 레이다운 핑거롤이 연상되네요. 다만 그 정도의 타점이 아닐 뿐 몸을 비틀어서 슛하는 방식이 상당히 비슷한 것 같아요.
과거 선수라는 것을 고려해도, 빅맨으로서 절대 좋은 피지컬은 아닌것 같아보이는데도, 보드장악력이 저리 좋았던건가요??
대개의 플레이메이킹이 좋은 빅맨들은 플레이스타일때문에라도 리바운드 수치가 떨어지게 되는데....저 선수는 참 기형적이네요.;;
김유택도 체형은 좀 그랬지만 보드장악력이 뛰어났었죠. 이 선수는 한술 더 떠서 리바운드 타이밍이나 공이 튀고 떨어질 자리까지 기가 막히게 계산해서 큰 힘을 안 들이고도 리바운드를 쓸어 담았습니다. 물론 긴 팔도 도움이 됐겠죠.
빌러셀 설명하시는 기분이네요 ㅋ
필리핀에 이런 불세출의 슈퍼스타가 있었군요. 덕분에 오늘도 배워갑니다 ^^
정말 대단한 선수네요. 농구 진짜 우아하게 하네요 박사님 게시물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사님의 지식은 리그를 가리지 않으시네요. ㅎㄷㄷ 잘 봤습니다^^
역시나 좋은 글 ^^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해요 ^^
전 드리블하는 모습이나 덥수룩한 머리나 키로 봤을때 피트 마라비치가 떠오르네요.
이 선수가 80년대 NBA에 있었다면 어느정도 활약을 보여줬을까요?
뭐 아무 의미없는 가정이겠지만... 80년대 덴버 너겟츠에 있었던 올라운드 포워드, 빌 핸즐릭 정도가 맥시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빌 핸즐릭은 블루칼라워커 스타일의 백인 포워드였는데, 페르난데스가 몸싸움이나 수비는 당연히 핸즐릭보다 딸렸겠지만, 대신 포스트업 공격에서 훌륭한 패서와 짭짤한 득점원으로서 팀의 공격에 일조했을 겁니다.
7년 전에 썼던 게시물입니다. 제 개인 게시판이 생겼으니, 이런 위대한 선수 글은 옮겨놓아야 할 것 같아서 운영진께 부탁을 했습니다.
와 .. 진짜 김유택 + 허재 느낌 다 있네요
좋은 선수 소개 감사드립니다
예전 회사 때 필리핀 직원들 다시 한국에 재취업해서 연락왔던데.. 조만간 맛있는것 좀 사주면서 박사님 덕분에 제가 라몬 페르난데스 아는 척 하면서 농구 얘기 좀 해줘야 겠네요 :) 감사드립니다
시대를 앞서간 진짜 농구천재 선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