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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에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 17-23절
예수님께서 산에서 열두제자를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내려와서 평지에 서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복음사역을 위해 열두제자를 택하신 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 평지에 서신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6:17-19)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시어 평지에 서시었습니다(17절). '그들'은 이미 택하신 열 두 사도들뿐 아니라 그 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까지 지칭합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산에만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택한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서 죄악에 빠진 영혼들을 구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셔야 했습니다.
여기 언급된 '평지'는 마 5:1의 '산 위'(mountainside)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평지'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 토푸 페디누'는 반드시 저지(低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었습니다.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5:1)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지에 멈추어서 가르치실 때 그 주위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 두 사도들, 그들보다 좀 많은 제자들의 무리, 그리고 일반 군중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허다하게 몰려든 목적은 예수님의 권능있는 말씀을 듣고 또 그의 치유능력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각 지방의 이름은 곧 팔레스틴 지역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각처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여기서 '유대 지방'이라함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동북쪽으로 베니게에 속한 항구 도시이며 이방 지역입니다. 따라서 팔레스틴 남.북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사방 각처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병고침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강조합니다. 한편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요단강 건너 지방까지 언급함으로써 팔레스틴 전 지역을 서술적 형태로 표현해 의미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18절). 누가는 귀신들린 자들과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자들을 구별합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더러운 귀신에게'가 '고난받는'과 연결될 수 있고 둘째는 '고침을 얻은지라'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고치다'(데라퓨오)는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서술적인 반복의 뜻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에데라퓨온토’)로 쓰였습니다. 본절과 19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기적적 권능(power)과 고침(healing)에 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기사는 평지 수훈 직전에 위치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권위를 한층 더해주고 있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썼습니다(19절).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알려지게 되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지기만이라도 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병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님에게 감히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을 고치는 기사는 8:43-46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예수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다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진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시사합니다.
2.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1) 가난한 자의 받는 복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6: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셨습니다(20절). 이같은 표현은 마 5:2의 '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됩니다.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예비동작의 표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있게 전달해 주며 동작의 주체자의 의지적이고 결단력 있는 모습이나 엄숙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해서,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마 5:3).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 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 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로서 압제를 당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때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묘사됩니다(단 4:27).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바실레이아)란 구약의 용어로는 '말쿠트'인데 이 말은 본래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습니다(마 6:10; 10:7; 12:28).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이 말은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되는 곳에 '바로 지금' 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것임이요’라는 말을,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주린 자와 우는 자의 복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6:21)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주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논테스'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할 때 주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입니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습니다(암 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고 말씀하십니다. '클라이오'('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합니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롬 14:17).
(3) 예수님을 인해 받을 복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2-23)
예수님은,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인자'(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칭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9:26; 11:30; 17:2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 '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입니다.
(1) 인자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의미합니다(19:10; 마 9:6). 예수님이 그의 메시야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17:24; 18:8),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므로 이 말을 당신께 적용하기를 삼가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자란 말과 연결됩니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인적인 성육신의 본성은 그의 사역 활동의 목적과 성격을 반영합니다.
(3) 인자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구원의 승리를 거두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입니다(요 3:14).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의 부활 및 승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속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승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완전히 승리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기 위해 예수님은 인자의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4)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Lordship)을 나타냅니다(막 14:62).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과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5) 인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 되심을 의미합니다(마 13:41,42; 19:28). 그리스도는 만민의 재판관으로 군림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동등하게 되었으면서 여전히 신성을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버릴 때에는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 있습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입니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발했습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멀리하다'(아포리조)는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버리다'(에크발로)는 연극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핍박받는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 '뛰놀라'로 되어서 더 적극적이고 격렬한 태도를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앞절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바로 그때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주님 때문에 받는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극적(dramatic)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신 것은 하늘에서 그들이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의 큰 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마 5:10).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큰 상’을 말씀하신 것은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 것을 격려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박해만큼이나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서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가 큰 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으려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소개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그의 것이라고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자손으로 항상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자신의 인생을 통치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 언약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16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고 그 결과에 대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너희가 만일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성령으로 살 때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