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별
명칭유래
●관현리(官峴里)
* 홍현, 홍고개, 홍구개,
홍구동(紅九洞)
1530년후 민 혜가 마을을
개척하였다하며 이로부터 약 150년 후부터 권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많이 나와 홍비를 받은 사람이 아홉사람이므로
홍구개, 또는 홍구동이라고 했다고 하며 또 마을 뒷산이 평사낙안형국이므로 홍현이라도 한다는것이다.
* 나래쟁이, 나루쟁이
약 130년전에 처음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하는데 산세가 마치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홍고개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10여가구가 살고
이다.
* 구루미, 두루미, 구루뫼, 운산(雲山)
이 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500여년전 김 모라는 선비가 정착허여 세거하고 있는 마을로 홍고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세가 두루미처럼 생겼다하여 두루미라 하였다고도하고
또 구름처럼 아름다운 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이라하여 구름뫼라 불렀다고도 한다.
* 화곡(花谷), 꽃실, 고실, 고곡(高谷)
1670년경 전주이씨가 처음으로
입향해서 살았다고 하는데 부용봉(688M) 남쪽에 위치하여 지형이 꽃봉오리와 같이 생겼다고도하고 또 온갖 꽃들이 많이 피던 골짜기로 서방이
막혀있어 임진왜란때는 피난지라고도 전하고 있다. 이 마을 북쪽에는 진장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동쪽에는 꼭대기에 바위가 많은 돌고지란 외딴
산이 있다.
* 점마, 옹기골, 옹기점, 점촌(店村)
고실 동쪽에 있는 마을 약
50여년전까지 약 100년간 이곳에서 옹기를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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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리(泉香里)
* 벼트리, 베트리, 학교마을(校村)
1750년경 예천임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하며 "귀"와 같이 생겼다고하여 이문이라 하였는데 1932년경에 김휘국, 이승우등이 마을을 다시 정리하여 햇빛이 잘 비치는
양지바른 마을이라하여 벼트리로 불리었다한다. 현재 삼천초등학교가 있는데 예천, 감천, 천향동, 천이 세번 있으므로 삼천이라
한다.
* 샘밭, 천전(踐田)
1755년경 온양정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어귀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으며 추워도 얼지 않는 샘이 있다고하여 마을이름을 샘밭이라고
한다.
* 진밭, 이전(泥田), 진전(眞田)
샘밭 남쪽에 400여년전에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때 땅이 질다하여 생긴 이름이지만 지금은 마을앞의 하상이 낮아져 질지 않다.
* 석평(石坪), 석전(石田)
오향남에 조선 영조
8년(1732)에 진성이씨, 의성김씨, 안동권씨 삼성이 마을을 개척할때 수석이 아름답고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으므로 석평, 석전이라고
불렀다한다.
* 갓재미, 관산(冠山), 입암(笠岩)
오향북쪽 갓재 밑에 있고 옛날부터
이곳에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다고하여 갓재미 또는 관산이라고 하였다고한다. 또 이 마을뒤 산정에는 갓처럼 생긴바위가 있어 이산을 관산이라
부른다고한다.
* 놋재미, 놋점, 유점(鍮店)
오향마을 서쪽 높은 산기슭에 있는
골짜기 마을인데 옛날 지하에서 녹물이 흘러나와 그녹물로 놋그릇을 만들었다고하여 놋재미, 놋점이라불린다고한다. 이 마을뒤에 유점사란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불탔다고 한다.
* 오향(梧香),
오의향촌(烏衣鄕村)
오동나무가 밀직되어 오동꽃의 향기가
향긋하게 풍겼다하여 생긴 동명이라고하며 오동나무 몇그루가 지금도 남아 있고 수석이 매우 아름답다. 1619년에 이복기의 아들이 유점산을 개척하여
오향이라 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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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리(眞坪里)
* 넘바우, 너분바우, 광암(廣岩)
300여년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하여 마을입구에 넓고 큰바위가 깔려있어 마을 이름을 너분바우 또는 광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 서뭇들, 섬두들, 도평(島坪)
임진왜란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하며 마을앞의 석곳천이 들을안고 감도는 모양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하여 서뭇들 또는 섬두들 이라한다. 1590년 안동인 김유근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고한다.
* 아트샘, 아리샘, 아룻샘(蛾山, 牙山)
400여년전에 피난터를 찾아 이곳에
온이가 마을 앞산이 마치 어금니와 같은 지형이며 서방이 산으로 둘러 싸였으므로 길지라하여 정착한후 마을 이름을
아산이라했다한다.
* 자붕이, 자붕, 자봉(雌鳳)
높이 253m의 자봉산(芙蓉峯)밑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자붕 또는 자봉이라 부른다고하며 300여년전에 권중기라는이가 처음으로 입햐안 마을이라한다. 마을 복판에 봉의 알처럼 생긴 작은
산봉우리가 3개가 있어 이곳을 자봉포란형의 명당마을이라고 했는데 일제 말엽에 이것을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한다.
* 질무리, 진돌, 장수(長水)
고려때부터 있던 마을로 진작
서북쪽에있는 부용산의 깊은골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생긴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옛날 한길이 있어 풍기와 예천을 잇는 중간 지점이므로 관원들이
쉬어가던 곳이라한다.
* 금성골, 금성(錦城)
이마을은 자봉의 한 모퉁이인
산기슭에 있으며 산수가 비단같이 아름답게 둘러있고 금성폭포가 있어 그 경치가 아름답다하여 금성골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 삼거리, 주막거리
주막이 있었고 여기서 예천, 풍기,
감천으로가는 갈림길이 있어 오고가던 나그네가 쉬어가던 마을이라 하여 삼거리 또는 주막거리라 알려지고 있다.
* 용잿마, 영잿골, 용조(龍조)
산과 골의 지형이 용을 낚는
형국이라하여 불려진 마을 이름이라 하기도하고 또 호재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그절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던것이 변음도어 영잿마라 불렀다고
한다.
* 진재기, 진작(眞勺)
1750년경 정광은이란 이가
개척하여 용정이라 하였으나 1860년경 정심이가 진작으로 개칭하였다. 용정사 절터 옆에 위치한 마을로 현 진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지형이
마치 작자 형국이라하여 진작이라 한것이 변음되어 진재기라고도 불린다한다. 현감 권심언이 살았으며 용문면에서 안동권씨가 옮겨와서 그 후손들이
진양, 진작, 진밭등 삼진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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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방리(閥方里)
* 용새이, 용상(龍上), 용산(龍山)
용의 형상을 한 부용봉 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 중턱에 마을이 잡고 있어 용상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외벌의 맞은 편에 있고 4가구가 살고
있다.
* 사급(泗級), 사급촌(士汲村)
벌방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냇물
줄기가 서방을 둘러 흐른다고하여 1620년경 풍산 김씨가 살면서 동명을 지형에 맞추어 지었다고하는 곳이고 뒷산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 벌봉, 벌방(閥芳)
안 마을과 바깥 마을에서 각가
40여가구씩 주거하고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전에 예천임씨, 감천문씨, 순흥안씨들이 같은 무렵 터를잡고 뒤이어 강능 유씨가 들어왔다하며 이 마을뒤에
있는 주마산(508m)줄기가 마을 앞까지 닿아 문벌이 번성하리라는 뜻으로 벌방이라 했다한다. 또 마을복판에 꽃봉오리처럼 생긴 외딴산을
벌봉이라한다. 북쪽 안마을은 내방이라하며 남쪽 바깥 마을은 앞마 또는 외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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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리(水閑里)
* 한티, 한터, 대치(大峙), 한기(漢基)
한티고개 밑에 있는 영주시 봉현면
하촌리와 예천군 하리면 동사리와의 접경을 이루는 곳으로 부용봉(699m)바람이 시원하고 차(寒)서 한터라고 했다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300여년전에 박한수라는 이가 살던 곳으로 "한(漢)이사는터"라하여 한기라고도 했다고 한다.
* 무래이, 물한, 물안(物安), 수다촌(水多村)
고려말 목 정승이란이가 이곳에
살면서 서방이 높은 사느로 둘러싸여 있고 아늑하여 만물이 평안하다고 물안이라고 하고 파자해서 물안이라 했다고하나 물아래라는 뜻 곧 산은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생긴 평범한 마을 이름을 한자로 취음해서 뜻을 준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을 뒤 골짜기인 못골에는 지금도 목 정승이 살던 옛
집터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약 500여년전에 홍 덕이란 이가
개척했다고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