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행렬과의 비교
실제의 조선통신사는 에도(江戶)시대 를 통해 12번 일본을 방문, 그 중, 11번제인 1764년까지는 에도와의 사이를 100여명의 사절단이 수백명의 일본인 관계자들과 함께 왕복했습니다. 그 멤버를 당인춤행렬의 구성과 비교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삼사(三使)(正使,副使,종사관)
上上官(통역)3명
上判事(上通事)3명
학사(製述官,문장의 기초담당)1명
上官 의사,능필자,군인,子弟軍官(三使의 연고자),書記등
次官 馬上才(曲馬騎手),음악가, 馬담당, 船長등
中官 화물선선장 陪小童(三使, 上上官, 학사담당), 吹手(角笛吹) , 깃발담당등
下官 格軍(船夫)등
이렇게 조선통신사와 당인춤행렬을 비교해 보면, 三使중 正使에 대해서는 에도시대의 당인춤행렬에서는 8번제에 나오는 "上官唐人일인", 현대의 당인춤에서는 14번제에 나오는 대장에 각각 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제의 당인춤행렬중의 음악대가 쓰는 나팔,피리,징,대소북 등의 악기류는 "正德元辛卯年朝鮮國之信使登城行列圖"(1711년)에서 그려진 조선통신사행열의 악기류에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청도기(淸道旗)와 영기(令旗)는 그림속의 행열선두에 있습니다.
규모가 틀리니까 당연하지만,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외국식 행렬중에서 그 당시의 민중들이 재미있다고 느낀 부분을 모아, 당인행렬을 구성한 것 같습니다. 즉 정치적인 사절의 성격등은 별 신경도 쓰지않고 자기들의 당인행렬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같은 에도시대 중에 있어도 초기와 말기의 당인행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사실도, 그 기원을 한가지로 요약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 시대 그 시대의 당인다움을 발견하면서 좋은 것을 채용해 온 결과, 생긴 것으로 사려됩니다.
■八幡宮祭禮圖卷의 제발견
최초의 당인춤의 행렬구성이 에도시대 말기의 당인춤 그림과 비교해서 차이가 있어, 현제의 색채 많은 해렬과는 틀렸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뉴욕의 파브릭도서관에서 "勢州一志郡八幡宮祭禮"라는 제례그림이 발견되어, "츠시의 문화재"(1989.3)라는 책에서 칼라사진으로 소개됨으로서 애당초의 당인행열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알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인행렬이 조선통신사행렬에 그 기원이 있다는 학설에 대해서도 파문을 던졌습니다.
그 것에서의 "당인"은 검은 옷차림으로 중국인인지 서양인인지도 모르는, 적어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모방하고 있는 것 같이 않은 인물들이 였습니다. 최초의 츠하치만궁(津八幡宮)의 제례는 1635년이 였음으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에도 참가하고 있던 토우도우반(藤堂藩) 본거지인 츠의 당인행렬은 조선통신사와는 또 다른 것에도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