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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7강 - 1 (2009. 07. 01)
날씨가 조금씩 더워갑니다. 되게 덥거든 그 더위를 어떻게 피하면 좋겠습니까? 옛날에 어떤 스님이 큰선사에게 물었습니다.
“火蕩爐蕩(화탕노탕) 속을 향해 들어가라” 그랬습니다.
화탕노탕이라고 하는 것은 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구리물이 펄펄 끓는 바로 그 속을 향해서 들어가라. 그러면 지금 이 계절적인 더위는 시원해질 것이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以熱治熱(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보다 더 적극적인 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 날씨 좀 더운 것 이거야 뭐 크게 문제 되겠습니까? 바로 그 것입니다.
또 세상은 얼마나 이런 저런 상황으로 살기가 어렵습니까? 어려울수록 우리 불자들은 불교공부하고, 자기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정진하는 바로 그러한 자세로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임제록 읽고 쓰고, 읽고 쓰고 또 테이프 사가지고 가서 들었던 강의지만, 또 듣고, 또 듣고 하면서 미쳐 제가 개발해내지 못한 그런 깊고 아주 깊은 뜻은 또 여러 불자님들의 몫으로 남아 있으니까 제가 개발하지 못한 것은 여러분이 읽고 쓰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저 보다도, 아니 임제 스님보다도 더 고준한 그런 뜻을 생활 속에서 찾고, 임제록 속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14-8 그 마음 그대로 살아있는 祖師(조사)다.
大德(대덕)아 覓什麽物(멱십마물)고?
現今目前聽法無依道人(현금목전청법무의도인)이
歷歷地分明(역력지분명)하야 未曾欠少(미증흠소)하니,
儞若欲得與祖佛不別(이약욕득여조불불별)인댄
但如是見(단여시견)이요 不用疑誤(불용의오)니라.
儞心心不異(이심심불이)를 名之活祖(명지활조)니
心若有異(심약유이)하면 則性相別(즉성상별)이요,
心不異故(심불이고)로 卽性與相不別(즉성여상불별)이니라.
날씨가 덥거나 세상이 뭐가 잘 안 돌아가서 갑갑하거나 할 때, 청량제로서 가장 좋은 약은 임제록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大德(대덕)들이여, 覓什麽物(멱십마물)고? 도대체 무슨 좋은 물건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는가? 現今(현금), 바로 이 순간 지금 目前(목전)에서 聽法(청법)하고 있는, 그러면서 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 사람 無依道人(무의도인). 그 사람이 이렇게 분명합니다.
歷歷地分明(역력지분명)하야, 역력히 분명해서 未曾欠少(미증흠소)라.
일찍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임제 스님께서 자주 말씀하고 계시지만, 聽法道人. 또는 聽法人.
또 그 청법인은 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다 해서 無依道人.
의지함이 없는 도인. 이렇게 말합니다. 의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남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법을 듣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법문을 듣는 것도 아니고, 무슨 불교에 귀의 한지가 10년 됐다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귀의했다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 그 어떤 조건도 필요로 하지 않고 獨露(독로). 홀로 드러나 있는 그야말로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서의 개개인. 바로 그 당체입니다.
이것이 聽法人이요, 그 聽法人은 無依道人이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분명 하잖아요.
더운 것을 조금도 놓치지 아니하고 잘 감지합니다.
제가 말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역력하게 감지합니다. 그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됩니다.
임제 스님은 거기에서 未曾欠少(미증흠소)라. 일찍이 그 사실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다. 사실 이 한 구절이면 다입니다.
뭐 불조라고 하든ㆍ뭐 불조라고 하든ㆍ한 인생이라고 하든, 이 모든 것은 이 한 구절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이것 외에 달리, 다른 어떤 외적조건으로서는 사실은 어떤 열쇠도 없습니다. 어떤 조건으로 우리의 삶을 충족시킨다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應病與藥(응병여약)이라.
병에 따라서 약을 주는 그런 일이지, 결코 완전한 해결책. 확실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儞若欲得與祖佛不別(이약욕득여조불불별)인댄, 그대들이 만약에 佛祖.
부처나 조사로 더불어 다르지 않고자 할진댄, 그런 부처하고 똑 같아지려고 하고, 조사하고 똑 같다지려고, 석가 달마로더불어 똑같고자 한다면,
但如是見(단여시견)이요. 다만 이와 같이 볼 것이요.
이와 같이 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聽法無依道人(청법무의도인). 이와 같이 말하고 듣고 움직이고 할 줄 아는 이 사실이 이렇게도 역력하게 분명하고, 그것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일찍이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물론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바로 이 사실. 이 사실을 아는 그 사실이 아는 그것이 불조로 더불어 다르지 않고, 동등하다고 하는 그런 일입니다.
그에 대해서 不用疑誤(불용의오)니라. 의심하거나 조금도 잘못됨이 없을 지니라. 疑誤를 쓰지 말라 그 말입니다. 추호만큼도 의심하거나 그르치지 말라. 그런 말입니다. 儞心心不異(이심심불이)를 名之活祖(명지활조)라. 그대들의 마음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을 이름 하여 살아있는 조사라고 한다.
마음, 마음 하는 것은 뭡니까? 선심ㆍ악심ㆍ옳은 마음ㆍ그르다고 하는 마음ㆍ남자라고 하는 마음ㆍ여자라고 하는 입장에서의 마음ㆍ보수ㆍ진보ㆍ여당ㆍ야당. 온갖 상대적인 그런 상반된 조건들. 그것은 옷만 상반될 뿐입니다.
옷 안에 있는 사람은 똑 같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우리의 마음 작용은 상황 따라서, 경계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뿌리는
心心不異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음이에요. 남자 마음 따로 있고 여자 마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선한마음 따로 있고 악한 마음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실. 그 당체를 이름 해서 살아있는 조사다ㆍ살아있는 부처다. 굳이 좋은 명칭을 갖다 붙이자면 活佛活祖(활불활조)ㆍ生佛生祖(생불생조)라고 할 수 있다. 心若有異(심약유이)하면, 마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어떤 다른 지엽적인 입장으로 나오면 다르거든요. 지엽적으로는 분명히 다릅니다. 바로 그런 지엽적인 입장으로 나와서 다름이 있을 것 같으면, 則性相別(즉성상별)이다.
性과 相이 다르다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性과 相이 다르다.
心不異故(심불이고)로,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까닭으로 卽性與相不別(즉성여상불별)이니라. 性과 相으로 더불어서 다르지 아니하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不異. 다르지 아니한 입장과 다른 입장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다른 입장은 뭔가 하면, 예를 들어서 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었다.
보살상을 만들었다. 아니면 코끼리를 만들었다. 무슨 곰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인형을 만들 수도 있고, 금반지를 만들 수가 있고, 귀걸이를 만들 수가 있고, 금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 여러 수만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금 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입장은 우리 마음의 작용이 선도 지을 수가 있고 악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점이지요. 그러나 그 본성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 그르다고 주장하는 마음, 뭐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라고 하는 그런 지엽적인 입장은 달라요. 그것은 상입니다. 형상 像자요.
그렇지만 그 본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든지 간에 하나의 금이에요. 똑 같습니다. 불상을 만들었거나 코끼리상을 만들었거나 금값은 똑 같습니다.
무게 달아서 팔면, 똑 같습니다. 그 형상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금을 가지고 코끼리를 만들어도 역시 그 값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찰에서 부처님을 조성해놓고, 그 점안을 할 때 아주 최 상승 법문을 하는데요. 이런 말을 합니다.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전단나무를 가지고 중생의 모습을 만들고,
及與比丘菩薩形(급여비구보살형). 비구의 모습도 만들고, 보살의 모습도 만들고, 부처의 모습도 만들고, 아라한의 모습도 만들고, 여러 가지 신장의 모습도 만든다. 萬面千頭雖各異(만면천두수각이)나, 만 가지 얼굴과 천 가지 머리가 비록 각각 다르기는 다르지만,
若聞薰氣一般香(약문훈기일반향)이라. 만약에 그 전단나무의 향기를 맡아보면 중생의 모습을 만들어도 그 향기요ㆍ불상을 만들어도 그 향기요ㆍ보살상을 만들어도 그 향기요ㆍ코끼리를 조각해놔도 코끼리 냄새가 나지 않고 전단나무향기가 난다는 겁니다. 생선을 조각해놔도 생선냄새 안 나요. 전단향기가 나는 것이지요. 이런 법문을 합니다. 점안 할 때 염불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서두에 그런 아주 최 상승 법문이 그렇게 나오지요.
바로 그 이치입니다. 우리가 어떤 별별 경계에 따라서 자기 처지에 따라서, 이런 저런 마음을 쓰지만 그 쓰는 작용은 밖으로 드러난 형상으로서 다를 수가 있지만, 그 성질은 똑 같은 마음이에요. 남자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心心不異(심심불이)입니다. 이 마음 저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도리. 그것이 살아있는 조사라니까요. 바로 그 입장은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여자라는 조건으로 이 말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 듣는 그 사실 그 능력은 여자도 아니고ㆍ남자도 아니고ㆍ승도 아니고ㆍ속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사실ㆍ그 당체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온갖 이름을 다 붙여도 해당됩니다. 다 붙을 수 있는 것이 이 마음입니다. 참 묘한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心心不異(심심불이)라.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는 그 마음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14-9 有求皆苦(유구개고)라.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괴로운 것이다. 그렇습니다. 구하는 것.
뭐 좀 한 마디 주워들으려고 하다 보니까, 더운 날 여기까지 오는데 차는 막히고 참 괴롭지요. 역시 有求皆苦입니다. 구하는 것이 있어서 허허허 괴로운 것입니다.
問(문), 如何是心心不異處(여하시심심불이처)오?
師云(사운), 儞擬問早異了也(이의문조이요야)니
性相各分(성상각분)이로다.
道流(도류)야 莫錯(막착)하라.
世出世諸法(세출세제법)이 皆無自性(개무자성)하며,
亦無生性(역무생성)하고 但有空名(단유공명)하야
名字亦空(명자역공)이어늘
儞祇麽認他閑名爲實(이지마인타한명위실)하니
大錯了也(대착요야)로다.
設有皆是依變之境(설유개시의변지경)이라
有箇菩提依(유개보리의)와 涅槃依(열반의)와 解脫依(해탈의)와
三身依(삼신의)와 境智依(경지의)와 菩薩依(보살의)와
佛依(불의)니라.
儞向依變國土中(이향의변국토중)하야 覓什麽物(멱십마물)고?
乃至三乘十二分敎(내지삼승십이분교)는
皆是拭不淨故紙(개시식부정고지)며
佛是幻化身(불시환화신)이요 祖是老比丘(조시노비구)니,
儞還是娘生已否(이환시낭생이부)아?
儞若求佛(이약구불)하면 卽被佛魔攝(즉피불마섭)이요,
儞若求祖(이약구조)하면 卽被祖魔縛(즉피조마박)이니,
儞若有求皆苦(이약유구개고)라 不如無事(불여무사)로다.
問, 如何是心心不異處(여하시심심불이처)오?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도리인가? 師云, 儞擬問(이의문), 그대가 묻고자 하는 心心不異에 대한 도리를 이미 묻고자 한다면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다.
早異了也(조이요야)라,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 다르지 않은 것이냐 물었는데, 벌써 거기서 한 생각 일으켰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금 자체로 보질 않고,
‘아 이것이 금팔찐가? 금 귀걸인가? 목걸인가? 불상인가? 무슨 돼지 모양인가?’ 이 모양에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早異了也라, 벌써 달라져 버린 겁니다. 性相이 各分(성상각분)이로다. 그래서 性과 相이 각각 나눠졌다.
道流(도류)야 莫錯(막착)하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世와 出世諸法(세출세제법)이, 세상과 출세간의 모든 법이 皆無自性(개무자성)하며, 따지고 보면 어떤 고정된 자성도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없다.
亦無生性(역무생성)이야, 生住離滅(생주이멸) 生老病死(생노병사) 그런 모든 성품이 다 없는 것이다. 여기는 공의 도리ㆍ무아의 도리 이런 것들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皆無自性하며 亦無生性하고, 但有空名(단유공명)이야.
다만 공이라고 하는 이름뿐이다 이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입장이 또 있잖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고 말을 듣지만, 찾아보면 그 자리가 텅 빈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공한 자리입니다. 공한 자리에서 또 꾸역꾸역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또 이 도리입니다.
名字亦空(명자역공)이야. 거기다 이름을 뭐라고 붙일 수가 없으니까 이름도 또한 공한 것이거늘, 儞祇麽(이지마), 그대들은 그렇게 認(인). 오인하고 있다. 무엇을? 他閑名爲實(타한명위실)하니, 그 모든 부질없는 이름들을 오인해 가지고서 사실을 삼는다. 실다운 것으로 삼는다. 이름, 예를 들어서 부처다ㆍ조사다ㆍ열반이다ㆍ해탈이다ㆍ보리다하는 이런 것들이 전부 이름일 뿐입니다.
지어낸 이름일 뿐입니다. 실체는 없습니다. 실체는 없어요. 그것을 부질없는 이름, 閑名, 他閑名. 그 부질없는 이름들을 오인, 認. 불교에서 이 認자는 아주 좋지 아니한 인자입니다. 항상 오인했다. 잘못 알았다 할 때 이 認자를 씁니다. 부질없는 이름을 오인해서 실다운 것이라고 여긴다 이 말입니다.
大錯了也(대착요야)로다. 크게 착각한 것이다. 크게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設有(설유), 설사 그 이름. 적어진 그대로 사실이 있다 손치더라도, 설사 있다 하더라도, 皆是依變之境(개시의변지경)이라. 모두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다 이 말입니다.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다. 자아를 의지해서 형체도 없고, 뭐라고 꼬집을 수 없는 그 무엇에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다. 변화한 가상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별별 것이 다 나옵니다.
有箇菩提依(유개보리의). 보리로 변해서 의지하게 되는 그런 것이 있고,
菩提依. 그래서 依자를 붙여버렸어요. 보리로 변하고,
涅槃依(열반의). 열반으로 변하고, 涅槃해놓으면 벌써 열반이라는 말에 의지하잖아요. 그래서 의지할 依자를 붙인 것입니다.
解脫依(해탈의). 解脫. 하면 해탈이라는 말에 우리는 쫓아가가지고 거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해탈로 변하고,
三身依(삼신의). 법신ㆍ보신ㆍ화신하면 그 3신으로 또 변하고, 변해버리고 또 境智依(경지의). 이것은 지혜라는 뜻인데요. 경계에 대한 어떤 꿰뚫어보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지혜” 이렇게 합니다. 지혜로 변하고,
菩薩依(보살의). 菩薩. 하면 보살 쫓아가가지고 또 거기에 변하고,
佛依(불의). 부처님. 하면 또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쫓아가서 의지한다. 변해버린다. 변해놓고 의지하고 있는 것. 그래서 여기서 菩提依ㆍ涅槃依ㆍ解脫依ㆍ三身依ㆍ境智依ㆍ菩薩依ㆍ佛依. 이렇게 依자를 붙입니다.
이것이 “부처”하면 부처로 변해가가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는 것.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거기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依자의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意成天(의성천). 그런 말을 했지요?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 그것이 33천이니 하는 그런 불교의 무슨 도리천ㆍ도솔천 하는 그런 하늘들이요? 지금 뭐 천문학이 이렇게 발달 했는데, 도대체 거기가 어느 하늘이란 말입니까? 전부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입니다. 달리 다른 것 없어요.
저는 어려서 천문학에 조금 관심이 있어 가지고, 그런데에 대해서 좀 열심히 책도 읽고 살펴보는데, 무슨 어디가 33천일까? 어디가 도리천일까?
어디가 야마천일까?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겁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요. 그것이 전부 뭔가 하니 意成天입니다. 뜻 의ㆍ이룰 성ㆍ하늘 천.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입니다.
그래서 우리 禪을 이야기할 때, 으레 초선천ㆍ중선천ㆍ후선천ㆍ2선천ㆍ3선천ㆍ4선천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천상의 이름을 다 명명합니다.
그래놓고 천상이 어디 있느냐? 제가 물으면 아무도 대답 못해요. 아무도 대답 못해요. 분명히 천상이라고 해놓고, 천상에 올라가서 닦는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순전히 선정이 깊어지면, 그 깊어짐에 따라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경계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높고 높은 하늘 세계는 ‘이러한 어떤 상태일 것이다.’ ‘이러한 어떤 느낌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하늘 天자를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하늘 이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뭐 도리천ㆍ도솔천ㆍ야마천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 천상에 대한 이름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이 전부 意成天입니다.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 그래서 여기에 菩提ㆍ涅槃ㆍ解脫ㆍ三身ㆍ境智ㆍ菩薩ㆍ佛이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실지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실이 아니고, 의식이 만들어 낸 부처요, 보살입니다.
儞向依變國土中(이향의변국토중)하야, 그대들이 얻은 依變國土中을 향해서 依變. 의지해서 변화된 세계. 國土라고 하는 것은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의지해서 변화된 그 세계에서전부 의지해서 변화된 그 세계. 마치 홀로그램하고 비슷해요. 어떤 작용에 의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어떤 과학적인 기술에 의해서 있는 것처럼 그림자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거기에서 그렇게 환상으로 있고, 우리 의식으로써 잠깐 만들어낸 것인데, 거기에서 무슨 물건을 찾으려고 하는가? 覓什麽物(멱십마물)고?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
乃至三乘十二分敎(내지삼승십이분교)는 皆是拭不淨故紙(개시식부정고지)라. 아~ 이것은 임제 스님만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拭不淨. 부정한 것. 똥을 닦는 휴지다. 똥 닦는 휴지다. 三乘十二分敎가 뭔가?
8만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똥 닦는 휴지다.
佛是幻化身(불시환화신)이요, 부처라고 하는 것은 환영으로 변화된 몸이다이 말입니다. 祖是老比丘(조시노비구)야. 조사라고 하는 것은 늙은 비구지 별것인가? 이것 참 그 대장경이 “똥 닦는 휴지다.”라고 이런 말을 했는데요.
그 전에 우리 조선말에 불교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그러면서 또 일정을 맞고 그래가지고 그 당시 일본에서 들어온 장경이 있었는데요.
어떻게 해가지고 그 장경이 고춧가루를 싸서, 시장에 가면 한 장 한 장 담아 주거든요. 얼마원어치 달라면 담아주는 그 종이를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보니까 장경을 놔두고 그것을 한 장 쑥 찢어가지고 고춧가루를 딱 담아서 싸서 주더라는 겁니다. 정말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신수대장경을 가지고 고춧가루 장사가 고춧가루를 담아주는 그런 일 까지 있었어요.
이것은 여기 이야기하고, 拭不淨故紙는 다른 이야기인데, 그 보살이 임제 스님의 이런 차원쯤 됐는지, 어쨌든 부정한 것을 닦는 휴지로는 쓰지 않고 그저 고춧가루 담아주는 종이로, 그 당시는 신문지도 귀했으니까요.
그래서 깜짝 놀라가지고 어떤 스님이 돈을 있는 대로 다 주고는 그것을 사가지고 절로 들어온 그런 사실이 있었어요.
佛是幻化身이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환화의 몸이다. 환영의 몸이다 이 말입니다. 조사는 노비구고, 늙은 비구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나 말을 듣는 그대들이나 뭡니까? 儞還是娘生已否(이환시낭생이부)아? 어머니가 낳아준 멀쩡한. 그리고 너무나도 확실한 존재가 아니냐? 이겁니다. 경이니ㆍ론이니ㆍ어록이니ㆍ부처님이니ㆍ조사니 거기에 너무 그러지 말라이겁니다.
그것 그냥 문자이고 별것 아니야. 실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여러분 부모가 낳아준 확실한 이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儞還是娘生已否아? 어머니가 낳아준 그 확실한. 너무나도 분명한 그 존재. 그런데 뭘 그것을 놔두고. 진짜를 놔두고 엉뚱한 그런 문자에 끌려 가지고 부처니ㆍ보살이니ㆍ아라한이니 하는데에 속아 넘어 가느냐? 이 것이지요.
儞若求佛(이약구불)하면, 그대가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
卽被佛魔攝(즉피불마섭)이요, 부처라고 하는 마군에 포섭함을 입을 것이고, 儞若求祖(이약구조)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조사를 구한다고 할 것 같으면,
卽被祖魔縛(즉피조마박)이니, 곧 조사라고 하는 마군이의 속박을 입을 것이니, 儞若有求皆苦(이약유구개고)라. 그대들이 만약 구함이 있을 것 같으면 다 괴로울것이다. 不如無事(불여무사)로다. 무사한 것만 못하다.
참~ 아주 임제 스님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라고 하는 표현이 과연. 정말 과연입니다.
이런 법문은, 그런 이치는 어지간히 불교 공부한 사람은 다 알아요.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이렇게 표현을 해서 그야말로 긴가 민가 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확실한 신념을 심어주는 이런 법문은 임제 스님밖에 못합니다. 누구도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전통 조계종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과거 선배스님들이 모두 임제 스님의 후손이라고 자랑자랑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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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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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心不異를 名之活祖라...그대들의 마음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을 이름 하여 살아있는 조사라고 한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歷歷地分明하야 未曾欠少라... 역력히 분명해서 일찍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공부 잘 하고 갑니다.._()()()_
고맙습니다 _()()()_
마음 작용은 경계에 따라 다르나 그 마음의 뿌리는 心心不異(심심불이)이다. 대원성보살님! 덕분에 늘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_()()()_
...다르지 않다 _()()()_
대원성님 더운 날씨에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有求皆苦(유구개고)요, 皆是依變之境(개시의변지경)이라 . 감사합니다..._()()()_
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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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스님 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 이후에 임제 없다".....고맙습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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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成佛 意成祖師 意成菩薩 意成神---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거기에 의존하고 의지처로 삼고있다
無依道人은 어데서 찾을 것인가
有求皆苦(유구개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괴로운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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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是幻化身 祖是老比丘 ... _()_
儞若有求皆苦(이약유구개고)라 不如無事(불여무사)로다...그대들이 만약 구함이 있을 것 같으면 다 괴로울 것이라.무사한 것만 못하리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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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求皆苦 ... _()_
意成天
有求皆苦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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