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한 자루 구경 못한 패잔병이 되다
그런데 그날 밤 11쯤에 지프차 한 대가 갑자기 송광사에 들이닥쳤다. 짙은 곤색 바지에 붉은 줄이 굵게 처진 군복을 입은 별 하나를 붙인 장군이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내리더니 중대장을 만나 잠시 밀담을 나누고는 황망히 돌아갔다. 우리들은 속으로 마침내 기다리던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이라 여기며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기를 쥐어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싸움터 한 번 구경 못해 보고 한순간에 억울한 패잔병의 신세로 전락하여 버린 것이다.
명색이 전투지역의 군부대인데도 부대 안에는 무전기는 고사하고 전화 하나도 없었고 차량이나 자전거 한 대도 없었으니 천 년 전 삼국시대 군사들의 장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맨주먹으로 전쟁터에 내몰려 있었으니 모든 현대적 첨단의 군장비들을 다 갖춘 미군들과 무엇으로 맞서 싸워서 이길 것인가. 삼국시대에는 그래도 기마라도 있었다. 이때에 맥아더장군은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있고 낙동강의 전투는 더 싸울 전투력이 없어서 참패한 인민군들은 지리멸렬 패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별을 단 장군이 떠난 직후 중대장은 윤용학, 이종오와 나를 불러 패전하여 부득이 후퇴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우리 부대는 1주일쯤 후인 10월 1일까지 강원도 금화(金化)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리 되는대로 출발할 것이니 짐을 꾸리고 대기하라고 하였다. 그날이 음력 8월 13일 밤이었으니 9월 24일 밤일 것이고 아마도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미군과(UN군) 국군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 같고 중추가절 추석 명절이 코앞인 때였다. 강원도 금화가 어디일까? 어렴풋이 짐작되기는 금강산 근처가 아닐까 여겨졌으며 패잔병의 신세가 길도 모르고 아무런 보급도 없이 보행으로 1주일 후에 거기까지 도착하여야 한다니 너무나 아득하여 기가 질리고 맥이 풀렸다.
쌀과 밀가루 약간씩을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추석날 잘 먹으려고 잡아놓은 소고기를 발겨서 이사람 저 사람이 나누어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한밤중에 북쪽을 향하여 황망히 떠났는데 나는 남은 돈이 몇 십 만원이 있어서 거추장스러웠다. 다시 곰치재를 넘어 부귀면 어느 골짜기 길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하여 날이 밝아올 때까지 걸었다. 날이 밝아 어느 산골 마을에서 밥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산골길이고 비행기도 별로 뜨는 것 같지 않아서 이제는 낮에도 강행군을 하였는데 다리도 아프지만 잠이 쏟아져 걸으면서 졸고 졸면서 걷다가 넘어지고 하는 행군이었다. 그러나 대원들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앞과 뒤의 행렬의 길이가 너무 길게 늘어져서 한 번씩 쉬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여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단 한 사람도 도망하는 사람이 없었음이 신기하였고 길은 누가 이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산간 마을을 지나는데 그날이 추석이라 했으니 9월 26일이다. 산골 다랑이 논에도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으며 밭에는 조, 수수 이삭 등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니 비로소 고향생각이 간절하고 갑자기 부모님과 형제들은 이같은 난리에 모두 무사한지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발이 너무 아파서 살펴보니 발바닥에까지 여기저기 물집이 잡혔고 신발도 너덜너덜 헤어져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자초하여 겪는 고행길이어서 누구를 원망할 곳도 불평할 곳도 없었다.
3일짼가 어디쯤에 이르니 멀리에서 쿵쿵하고 간헐적으로 포를 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는데 누군가가 대전 근처일 것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옥천쪽에서 대전 쪽으로 포를 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우리가 가면 갈수록 그 포성은 점점 크게 들리고 마침내 대전 시내의 변두리인지 유성인지 분간이 안되는 곳을 밤새워 지나는데 간간이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불타는 건물이며 시체가 곳곳에 뒹구는 사이를 중대장이 이끄는 대로 우리 부대원들 전원이 무사히 용하게도 잘 벗어났는데 이는 실전의 경험이 있는
금강의 신탄진 철교
중대장이 요령껏 잘 인도한 덕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전장의 한복판을 뚫고 사지를 간신히 벗어난 것이라 아마도 간이 콩알만 하였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 그곳을 벗어나던 일을 생각하니 어떤 악몽의 꿈속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어느 시골마을의 동청에서 얼마쯤을 쉬었다가 또 행군하여 땅콩밭 옆 모래 길을 얼마쯤 가니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나오고 철교가 가로 놓인 곳이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금강이요 그 철교가 신탄진(新灘津) 철교라 한다. 간밤에 유성을 벗어난 것이다. 철교 조금 못미쳐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일대는 이미 진짜로 패전하여 도망하는 인민군들과 비무장 의용군들이 무질서하게 엉키어 난장판으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미군기 3~4 대가 나타나 기총사격을 마구 해대었다. 옷을 벗어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강을 건너던 100여 명의 패잔병들 중 여러 명이 총에 맞아 떠내려가고 강둑 모래밭에서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우리 대원들도 정신없이 마구 흩어졌으며 나는 강둑 밑 땅콩 밭 언덕 아래에 엎디어 위기를 간신히 넘기는 아수라장을 또 한 번을 겪었으니 지옥이 코앞이었다. 얼마 후에 집합하여 보니 대원들의 수가 반 수도 채 되지 않았다. 패잔병의 형편에 누가 죽었는지 누가 도망을 하였는지 챙겨볼 경황도 아니었다. 이에 윤용학씨가 중대장에게 건의하기를 우리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이동하기는 이제 어렵게 되었으니 여기서 부대는 해산하고 각자 요령껏 10월 1일까지 강원도 금화로 가서 거기서 만나자고 하였다. 이때 중대장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으며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여 해산을 하였다.
그리고 중대장과 윤용학, 이종오, 나와 김선배, 김성수 등 6명이 한 무리로 다시 모여 상의하기를 각자 흩어져 마을에서 민간인 옷을 얻어 입는 대로 한 시간 후 이곳 강가 모래톱에서 만나 같이 강을 건너 금화로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윤용학씨가 충북 음성 사람이어서 이 지역의 지리에 밝고 태백산맥을 타고 금화쪽으로 가는 방향을 대충은 알고 있다 하므로 그렇게 하자고 뜻을 모으고 근처 민가를 찾아 각자 헤어졌다. 이때 이 일대는 무풍지대였으며 곳곳에 인민군들이 버린 따발총 등의 총기류가 버려져 있었다. 대전 밑까지 국군과 UN군이 진격하여 오고 있는 중이고 인민군들은 완전히 패잔병이 되어 지휘관 하나 보이지 않고 삼삼오오 갈팡질팡 패퇴 중이었으며 거기에 전라도지방의 의용군들까지 섞이어 우왕좌왕이었는데 근처 마을에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근처 어느 마을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느새 동진면의 김선배가 따라붙었다. 그와 나는 어차피 금화까지 같이 가기로 하였으므로 잘 되었다 싶어 마을의 어느 집에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댕기머리 땋은 아가씨가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아무 옷이나 한 벌씩만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 처녀는 주섬주섬 남자 옷 두 벌을 찾아 내주어 김선배와 나는 인민군 군복을 벗어버리고 그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내가 간직하고 있던 그 붉은 돈도 모두 거기에 놓고 그 집을 나오려는데 김선배가 밥이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하여 밥을 얻어먹게 되었는데 두 세끼를 못 먹어서 배가 몹시 고파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니 그 김선배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들 중 시계를 가진 사람은 윤용학씨 뿐이었다. 허둥지둥 모이기로 한 강가의 모래톱에 가보니 약속한 우리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들을 찾아보았으나 그 분들은 나와 김선배가 이미 도망하여 버린 것으로 여기고 가버린 것 같았다. 그때 이후 이 분들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이때 이곳에서 의용군으로 무사히 월북을 하여 뒷날 간첩으로 남파되어 온 분들도 있었는데 백산면 구야리의 우동철도 그중의 한 분 이다. 나도 그때 그 분들과 어긋나지 않고 합류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운이 좋았다면 월북하여 뒷날 간첩으로 남파되었거나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빨치산이 되어 어느 이름모를 산골짜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얼마를 더 왔다 갔다 찾다가 혼자서라도 강물을 건너려 하니 김선배가 우리 둘이서 어떻게 가겠느냐며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여 이미 믿음도 의기도 한풀 꺾인 나는 이를 빌미삼아 마침내 발길을 남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것이 내 일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신탄진의 돌아선 발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은 공산정권에 대한 큰 믿음이 급격하게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댓글 흥미진진하게 읽습니다. 다음 연재가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