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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왜성을 다녀와서
2016.11.25일 태백시청 윤순석
2016.11.20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포왜성을 또 다시 찾았다.
지난해에는 서생포왜성에 집중하느라 못왔지만 안골포왜성은 올 여름에도 일차 답사를 했으나 짧은 연휴기간내에 인근 웅천왜성과 부산 자성대왜성, 기장 죽성리왜성에서 울산왜성까지 욕심을 내서 다 돌아보느라 찍은 사진도 얼마 없을 뿐더러, 숲이 우거져(뱀이 겁나서) 자유로운 답사를 못했고 왜성의 대략적 윤곽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찾았다.
먼저 임진왜란 제1선봉장 고니시유끼나까(小西行長, 1555~1600)의 居城이였던 웅천왜성부터 찾았지만 낙엽져서 가지만 보여야 할 산속이 여전히 울창했다. 여름에 왔을 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부산신항 공사장의 먼지를 뚫고 도둑고양이처럼 산에 올라 넝쿨과 나뭇가지에 긁히고 찔리던 생각을 하니 올라갈 엄두가 안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산신항 조감도 큰원이 웅천왜성, 작은원이 안골포왜성, 항구시설은 모두 매립된 것임>
웅천왜성을 포기하고... 그럼 제2 선봉장 가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거성이였던 서생포왜성을 갈까 아니면 안골포왜성으로 갈까 하다가 길에서 시간 다 버리기보다는 인근 안골포왜성을 선택하여 온것이다.
안골포왜성,,, 으음.
이번에는 왜성의 서북쪽 안골만 해안을 다 둘러보고나서 왜성정상에 올라야겠다.
안골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병참기지로 이미 활용되고 있었던 군사요충지로 읍성이 있었던 곳이였다고 한다. 이곳은 경상좌수영 관할구역이였는데
1592.04.14일(이하 모두 음력)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 동래부성을 차례로 유린하던 임란초기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초장에 도망가고 나서 왜군들이 접수한 곳이였다.
왜군은 5월에 도성 서울을, 6월에 평양까지 점령하였고, 조선군은 지리멸렬,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하여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風前燈火 累卵之危의 상태였지만,
그동안 實踐躬行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의 경상우도학파 제자들 즉,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각지에서 봉기하고, 서산대사 사명대사로 대표되는 의승병들까지 일어날 즈음,
1592.07.08일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 1626)의 왜병선단을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한 학익진 작전으로 아작을 내버린다.
2004년도인가 연속극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사극이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와키자카가 해군전략상 대단한 장수나 되는 듯 묘사되고 이순신의 라이벌로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와키자카는 해전보다는 육전인 1592년6월경 용인전투에서 재미를 본 애다. 오사카와 시코구섬 사이의 조그마한 섬 아와지淡路의 영주였다.
아와지淡路,,, 한문으로 淡路라 ~!
국사책 백제시대 부분을 보면 12담로가 어쩌고 하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라는 설을 늘어놓고 싶지만 옆길로 세는 이야기라 이만 각설하고,
이순신이 70여척을 침몰시킨 한산대첩에 이어, 몇일 뒤인 1592.07.10~11일 새벽까지 적장 구키(九鬼嘉隆)가 진을 치고 있는 이 곳 안골포를 공격하여 40여척의 적함을 침몰시켰는데
이곳 안골포 전승대첩지의 현재의 지형과, 옛 기록을 오버랩시켜 당시를 생생하게 체험하고자 왜성이 축성되기 전의 안골포를 상상하면서 포구쪽부터 보려고 하는 것이다.
안골만을 좌측으로 끼고 남서쪽 웅천쪽에서 동북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들어갔다.
왼쪽 해변에는 콘센트 막사?가 늘어서 있는데 막사 안에서는 손님인 듯한 사람들이 탁자주변에 앉아있고, 한쪽구석 맨 바닥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쪼그리고 앉아 생굴을 쪼아서 굴을 캐 담고 있었다.
그중 주인인 듯한 사람들은 막사 밖에 나와서 호객을 하며 굴을 판매한다.
정차하여 둘러보다 보니 동서남북 방위가 헷갈려서 굴 판매 아줌마에게(괜히 수작을 붙여봤겠지^^) “전봇대가 많아 이 나침판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니 방위를 알려달라”고 하니 灣入口쪽을 가리키며 저쪽이 남쪽이라고 한다.
(아줌마가 이쁘고 친절하다. 굴 한사라 사먹으며 쉬다갈 생각도 들지만 갈길이 바쁘다)
그런데 이때가 오후 2~3시 사이였고, 이쁜 아줌마가 알려준 방향으로는 해가 동쪽이라는 곳에 떠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시간상으로 볼 때 해는 南中한 상태를 지나 약간 서쪽으로 기운 상태가 정상이기 때문에 남쪽이라고 갈쳐준 곳은 실은 서쪽이 된다.
왜성은 어디냐고 하니 알려주는 곳을 보니 만입구 반대쪽이니 동쪽이다. 짐작해보니 내가 서있는 현재위치는 안골만 중간쯤이라는 판단이 서면서 여행전 圖上답사를 했던 구글지도가 머리에 그려진다.
전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굴양식장이였고, 굴양식장시설은 방파제이기도 했다한다.
<안골만 내해, 채석장처럼보이는 곳이 북쪽이다. 포구내 해변은 널린 게 굴껍질이다>
조금 더 가다가 동남쪽으로 난 오르막 도로를 타고 올라가니 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빠져나와 내리막 도로를 조금 더 가니 오른쪽으로 주차장이 있고, 안골왜성에 대한 안내판이 보인다. 올여름과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노인 한분이 산불조심 쪼끼를 입고 있다. 공무원은 아니더라도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이 아닌가? 여기서는 나도 국민인 갑의 입장이라 편한 마음으로 “위에 풀이 많이 자랐죠?” 라고 하니 제초작업을 다 해놨다고 한다.
<안골왜성도, ⑦번이 천수대의 본성이고 ①번은 지성. 안내판 설명은 뒤바뀌어 있었다. 남쪽매립지는 당시 바다였음>
<주차장에서 동⇒서향의 데크길로 올라와 이정표에서 북⇒남향으로 촬영, 1차답사 때 사진임>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과 안골포대첩...!,
이거야 말로 승승장구하며 북상하던 왜군 주력부대가 서해바다 水運을 통해 병참지원을 받으려던 전략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다 주었고,
게다가 1592.09.01일 왜군의 조선침략 교두보인 부산포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왜수군부대는 아예 戰意를 상실하고 바다가 두려운 수군으로 陸戰만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해상보급로가 끊긴 왜군은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다. 식량보급을 호소하는 전방부대에 보낼 식량도 없거니와 보내면 태반이상이 중간에서 의병들에게 빼았기고 ... 전사보다 아사자가 더 많아지는 형국이 되었다.
왜장들로선 기가 찰 노릇이다.
자기네는 대장만 죽이면 그 이하는 모두 자동적으로 항복하여 자기 편이되었는데, 조선이란 나라는 임금과 장수가 백성을 버리고 다 도망가고 도성과 서경을 탈취당했고, 곧 압록강까지 점령당해서 나라가 없어질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해봤자 저만 손해인데도
관직도 없는 서생들이, 명예도 전리품도 가질게 없는 서민들이,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중들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하고 그 때문에 일본병사들이 굶어죽고 전쟁이 꼬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놈들이 19세기에 다시 왔을 때 동학농민군의 씨를 말렸다)
이후 왜군은 1593년부터 평양이북은 명나라가, 이남은 일본이 차지하자는 조건으로 외교전을 펼치면서, 보급과 귀환을 대비하여 일본에 가까운 해안가 전략요충지를 중심으로 아예 성을 쌓고 朝明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점령지역을 영구통치하려는 야심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항포구를 중심으로 성을 쌓은 데에는 이순신 신드롬도 작용했다. 즉, 귀국시에 출발할 항포구에 공포의 조선수군이 해군기지까지 만들어 놓고 가로막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낭패가 없다. 먼저 이들 항포구를 장악해 놓아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안골왜성은 남해 앞바다를 폭 넓게 조망하면서, 조선수군의 공격로 길목이라 할 수 있는 -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부산으로 가는 - 가덕도 해로를 감시하고
병선을 띄워,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와 명지에서 강을 거슬러올라, 낙동강과 진주 남강을 거쳐 지리산 남북의 수운을 통해 운봉 남원, 전라도까지 연결할 수 있는 곳으로, 내가 봐도 전략요충지다.
이 물길로 연결될 수 있는 지리산 북서쪽 운봉읍은 고려말에도 왜구들이 침입하던 곳으로 이성계의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인데,
이런 낙동강 물길을 장악하기 위해 왜군은 구포, 양산, 호포, 죽도, 농소, 마사왜성등 김해 낙동강변 일대에 왜성을 엄청 쌓아 놓았었는데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이곳 안골포 주변만해도 웅천, 눌차도, 가덕도, 명동, 자마왜성, 거제영등포, 성진포, 장문포, 견내량왜성등 수많은 왜성이 집중해 있었다.
이렇게 다도해 해로상에 포진된 왜성이 가공할 힘을 발한 때가 원균의 부산포공격 때다.
근세 증기기관의 배가 나오기까지는 격군들의 인력으로 배를 저었다. 이때도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배를 저어갔다가 다시 후퇴하는 상황에서 어느 포구든 왜적들이 다 짱박혀 있어 배를 델 데가 없어 거제도 인근 칠천도에 상륙하다가 옴팡 당했다고 한다.
왜성 넷트웩이 조선 수군 이순신의 함대를 한순간에 궤멸시킨 것이다.
<새똥으로 안내판글씨가 판독불가상태였는데 아래와 같이 단장됐다. 앞은 당초 빈 바다였다가 매립, 항만으로 건설된 것임>
安骨倭城 有感
윤순석
녹음속 석축성곽 뼈대만 남았는데
웅천안골 표지각석 왜성이라 씌여있고
천수대 마루환자리 가덕도를 조망한다
낙동남강 거슬러서 함안진주 산청지나
운봉육로 남원거쳐 호남곡창 관문인데
여전한 침략근성을 가덕도로 가렸구나
축성전 안골포는 통제사가 대첩한 곳
왜성은 버려졌고 총독부는 헐렸지만
방방에 이완용이요 곡곡에 식민노예다
안골왜성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패하여 섬에 올라 미역줄거리로 연명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1593년경 우리백성 5만을 잡아다가 만든 성이라고 한다.
왜성의 특징은 우선 모서리 부분에서 구분된다. 우리나라 성은 사진의 웅천읍성과 같이 지면과 수직인데 비해 왜성은 보드선수들의 연습장소처럼 휘어 올라간다.
<조선성인 웅천읍성과 서생포왜성의 모서리 비교>
또 모서리가 위 사진과 그림처럼 벽돌을 엇 쌓듯이 쌓아올린 게 특징이다. (그림솜씨가 없어서 ^^:; ...)
생각해보니 수직성곽은, 전투시 가장자리에서 떨어질 우려 및 위축감이 있고, 적의 탄환공격 때문에, 등잔 밑이 어두운 상황이 될 수 있는데 반해, 곡선의 왜성은 그런 단점은 없을 것 같다.
일본성도 우리의 옹성과 같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기능을 가진, 「枡形虎口 일명 되빡형 호구」 또는「喰い違い虎口 어긋나게 물린 호구」라고 번역되는 공간이 있다.
설명하자면, 기역자형과 니은자형의 성벽(또는 하늘에서 보아 "ㅍ" 자형인 성벽에 좌우로 Z 자형으로 통행할 수 있게 틈을 만든 성벽) 사이에 성벽을 건너지르는 문루를 1차, 2차로 전후로 세우고, 그 문루와 문루, 니은과 기역의 성벽 사이의 네모난 되빡("ㅍ" 자의 네모난 속) 같은 공간을 함정삼아, 적이 성문을 뚫고 들어오면 되빡 같은 네모속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집중포화의 표적이 되어 몰살당하는 구조다.
왜성은 이런 성이 산정상까지 올라가면서 중첩구축되어있다는 것이다. 양파처럼 성안에 성이 있고 또 성이 있고 마지막에 천수각이 있는 구조라서 한마디로 難攻不落이다. 왜란 7년간 왜놈들이 쌓은 성을 싸워서 뺏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북문의 호구를 안내도의 ⑥번 자리에서 바라보니 서북쪽으로 안골포 內海가 보이고 방위각은 대충 310도쯤 된다. 이 방위각을 향해 직선으로 산을 내려가면 아까 콘센트 막사에서 굴 까던 해변이다.
본성을 북쪽성문터로 진입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중앙에 묘가 있다 ㅠㅠ 이 또한 위치 인식 지형지물이다 )
<위는 북⇒남쪽의 천수각터로 1차답사때 촬영, 아래는 동쪽 천수각터 ⇒서향으로 이번에 촬영.>
< 서⇒동향으로 촬영, 좌측이 북문, 우상귀의 3단 높은 곳은 천수각터>
사진은 앙상한 성벽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 다른 시설은 없었을까?
지금은 역시 뼈대만 남아있는 울산왜성의 「울산왜성공방도」라는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성벽위로 건축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벽위 담장안에서 총구만 밖으로 내밀고 쏘아대는 병사들과 목책과 막책을 통과하여 조총사거리내까지 들어갔던 아군들의 시체,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 모습이 보이고, 바닥난 식수를 대체하기 위해 그 피라도 마시려고 그림중앙의 성안에서 말을 잡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 울산성 사지에서 벗어난 가등청정이 전쟁이 끝나고 귀환한 후 구마모또 성을 쌓을 때 울산성에서의 경험을 거울삼아 성안에 수십군데 우물을 팠다 한다.
이곳 마산 거제 가덕도 일대는 고려시대에도 왜구가 극성을 부렸던 곳이고, 조선 중종때 삼포의 난이 일어났던 제포가 바로 옆 지금의 웅천이며, 임진왜란때도 이곳은 조선침략의 교두보 지역이다.
경복궁을 유린하여 국왕을 협박하고 동학농민 수십만을 살륙한 일본군이, 러일전쟁때 강제체결한 한일군사의정서로 백성들을 강제징발 수탈하던 일본군이, 저내들 조상의 사적지라고 중시하던 곳이 이곳이다.
옛날에는 힘에 눌려 침략당했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일본군대를 들어오게 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잖은가?
지성(곁다리성)에 대해서는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