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명숙, 『여신을 찾아서』, 판미동, 2018
-여정 김시녕숙 : 페미미스트,여신연구가. 50대 초반에 국내 최초로 여신학 분야의 박사논문을 썼다. 현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여신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여성의 몸에서 탄생한다.
이 엄연한 사실에 여신의 뿌리가 있다.
여신은 모든 이분법적 구분을 뛰어넘어 전체를 감싸며, 뭇 생명과 존재들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드러낸다.
남성 또한 여신의 일부다.
아들도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그녀의 젖을 먹고 자란다.
그들의 심리를 형성하는 원초적 토대도 어머니다.
여신은 여성과 남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다양한 성들도 낳고 품는 통합적 모성이자 여성성이다.
-본문 중
중국의 미노타우로스, 신농씨
우리와 가까운 중국의 기록에도 잃어버린 낙원은 존재한다. 『장자』 「도척」 편에는 천하의 큰 도적이라는 도척이 자신을 찾아온 공자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또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신농씨(神農氏)의 세상이 되어서는 사람들은 누워 잠잘 때는 편안했고, 일어나 깨어 있을 때는 무심한 모양으로 한가로이 지내면서, 자기의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알지 못하며, 크고 작은 사슴 무리들과 함
께 살면서, 스스로 밭 갈아 농사지어 먹고 베틀에 베 짜서 옷을 입고서 서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지냈으니, 그때가 지덕(至德)이 잘 시행된 최융성기였다. 그런데 시대가 내려와 황제(皇帝)의 세상이 되어서는 지덕을 시행하지 못하여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사상자가 흘핀 피가 사방 백 리에 미쳤다. 요와 순이 임금되자 여러 신하의 지위를 만들어 상하차별을 확립했고, 은(殷)의 탕왕은 그 주군인 하(夏)의 걸왕을 추방했고, 주(周)의 무왕은 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으니 이 이후부터는 그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고, 다수자가 소수자를 난폭하게 대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덕이란 지극히 높은 덕을 말한다. 신농씨의 시대가 그만큼 이상적인 세상이었다는 뜻이다. 신농씨는 중국 고대 3황 중 하나로 염제(炎帝)라고도 하는 전설적 존재다. 그는 사람들에게 농기구 제작과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하니, 농업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약초에 통달해 의학의 기원을 세웠고, 거문고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쳤으며 점술을 고안한 문명의 창지자이기도 하다. 신농씨는 남성이라고 하지만 농업의 창시나 치유, 점술, 예술 등 여신문화적 성격을 드러낸다.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알지 못”한 모계사회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농씨의 성은 강(姜)씨다.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아 그로부터 성을 받은 것이다. 중국 최초의 성들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성(姓)’이라는 글자 자체가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신농씨는 우두머리임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고 그의 부인도 길쌈을 했다. 또 이들은 크고 작은 사슴 무리들과 함께 살았다. 바위에 사슴을 새긴 우리 조상들도 신농씨 시대처럼 살았던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신농씨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가 떠오른다. 신농씨가 추앙되던 시절, 중국에서도 황소 숭배가 강력햇던 것 같다. 미노타우로스는 괴물화된 모습이지만 신농씨는 그런 과정을 거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후세의 사가에서 외면당한 사실은 있다. 사마천의 『사기』의 첫머리인 「본기」를 황제로부터 시작하면서 이전 시기를 배제하고 황제를 중국의 시조로 떠받들었다.
도척이 “사상자가 들힌 피가 사방 백 리에 미쳤다.”고 한탄한 황제는 신농씨 세력도 몰아내고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중국 학자들이 아이슬러의 『성배와 칼』에 자극받아 1995년 출간한 『중국문화의 성배와 칼』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기원전 7000년에서 2000년까지 중국에도 비교적 성평등한 모계사회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539~541쪽)
미륵님의 세월을 빼앗은 석가님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기록이나 전승이 없을까?
다행히 있다. 수천 년 된 여신들이 숭배됐던 이 땅에 자취가 없을 리는 없다. 1923년에 채록된 「창세가」라는 무가는 그 소중한 자취를 분명히 보여 준다.(541~542쪽)
다시 여는 글
여신 서클;여신은 어디에나 있다
사려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이 만든 작은 그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결코 의심하지 말라. 사실은 오직 그것만이 그래 왔으니.
-마가렛 미드
“여신이 왜 중요한데?”
10여 년간 여신을 화두로 삼아 살다 보니 지인들이 가끔 묻기도 한다. 여신이 낯설고,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아가는 데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잘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여신이란 말의 함의가 갖는 한계 탓도 클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여신이라 대체로 남신의 보조적 존재거나 통속적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자연과 우주를 표상했던 위대한 여신, 모든 생명체들의 근원이자 귀의처인 여창조주(creatrix), 세상의 자식들을 다 품어 안는 통합적 모성, 저화롭고 아름다웠던 여신문화의 역사가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엄마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자연을 추방하고 서로 간에 벽을 친 도시에서 일하는 기계,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문제다. 물질적 풍요는 있으나 자연과 단절된 삶은 결코 뿌리 깊이 행복할 수 없다. 입춘인지 동지인지, 보름인지 그름인지 느끼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은 자연스럽지 않다.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의 신비,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경이를 잊고, 게다가 몸의 신명까지 억눌린 일상에는 혼이 없다.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고 일상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는 자연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롭고 공평한 세상을 위해 우리는 고대의 여신을 다시 살려낼 필요가 있다. 건강한 양성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의 토대이자 가장 위대한 인간의 잠재력이다. 진정한 사회 변혁의 기본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551~552쪽)
전국에 산재한 신성한 여근들
여신을 만난 후 나는 수돗물에서도 신성함을 느낀다. 그 물 때문에 나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말 그대로 생명수이다. (중략)
기적 또한 멀이 있지 않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거실의 화초가 물을 먹고 다시 생생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이다. 해월의 가르침대로 어느 것 하나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일상의 작은 일들 또한 하늘을 모시는 행위다. 가족을 떠난 수행처도 때로 필요하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도 성스러운 것이다.(553~554쪽)
성모 마리아, 관세음보살도 여성이다
인도에서 남성이었던 관음은 중국으로 건너간 후 여성으로 변했다. 이 흥미로운 성전환은 11세기에서 15세기에 걸처 완성돼 현재 중국에서는 관음을 엿니으로 규정한다. 한국에서는 관음의 성이 모호한 채로 암묵적으로 여성으로 여겨진다. 한꾸 불자들이 독송하는 「관음예문」에는 “광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유사』의 관련 설화들에서도 관음은 거의 다 여성의 모습으로 출현한다.
주목할 것은 관음신앙이 한국 불교의 중심 신앙이라고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아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리아 신앙이 오히려 중심이 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 가톨릭과 유사한 상황이다.(555쪽)
여신서클, 여신운동의 첫걸음
여신이 수호하는 마을
이 땅의 여신이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과업 중 하나는 마을 살리기다.
20세기 전반까지도 우리 조상들의 일상에는 마을의 수호신이 자리했다. 아이를 원할 때도, 새해를 맞아 안녕과 풍요를 바랄 때도, 병의 쾌유나 집안 대소사의 해결을 위해서도 사람들은 친근한 신을 찾았다. (중략)
한국사회가 이토록 힘들고 각박해진 데는 마을 공동체의 파괴도 한몫을 하고 있다. 각자의 아파트 공간에 격리된 우리는 몇 년이 지나도 이웃을 잘 모르는 황폐화된 관계 속에 산다.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환경과 역사에도 무지하다. 남은 것은 아파트 가격에 대한 계산과 이해관계의 다툼뿐이다. 그래서 최근 마을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현상이다. (558~559쪽)
치유와 변화의 길
현기증 나는 과학기술의 도약 속에서 인류에게 더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혜가 있어야 현명한 선택으로 아름다운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헤의 언어들은 균형과 조화라는 가치에서 피어났다. 음과 양,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자연과 문명, 몸과 영혼, 헌신과 성취, 공과 사……. 얼핏 상반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배제적 대립쌍이 아니라 함께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는 상보상생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여성성과 남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상은 지금까지 여성/음/자연/몸/어둠/헌신/사적 영역을 한편으로 묶고 남성/양/문명/영혼/빛/성취/공적 영역을 다른 편으로 묶어 대립쌍을 만든 후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고 착취해 왔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여성차별, 환경파괴, 가공할 군비경쟁, 취약하고 불안한 가정 등-은 그 불균형과 부조화의 결과일 것이다.
고통스런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남근이 가치의 유일한 상징인 세상에 신성한 여근을 재등장시켜야 한다. 그 ‘오래된 새로운 상징’의 거대하고 강력했던 힘을 기억하고 되살려 남근과의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 아버지나 석가모니뿐 아니라 마고할미나 관음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신성한 여근은 섹슈얼리티와 출산, 여성과 남성, 인간과 자연, 사회의 우선적 가치들에 대한 모든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인식, 가치관, 비전 그리고 용기와 힘을 제공한다.(561쪽)
-아프리카 케냐에 우모자라는 마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