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호도 특별한 경험
제주표류인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4)
우리는 마공시의 천후궁(天候宮)으로 향했다. 천후궁은 마조묘(媽祖廟)라고도 하는데 해신인 마조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방익이 말한 <마궁>은 마조묘 내지 천후궁을 의미한 것 같다. 『표해록』에서 마궁 아문 ‘좌우에 수백의 채선이 정박해 있다’고 했으니 천후궁은 현재의 마궁시 남쪽 해안을 아우르는 큰 만의 일각일 것이다. 이곳은 네덜란드가 점령했던 17세기경 한 네덜란드인이 쓴 『동인도공사파견사중국기』에서 팽호도를 <마조도(媽祖島>라 칭했는데 그 책에 표기한 지도에 보이는 장소가 지금 우리가 찾은 이곳이며 청나라 때에도 이곳에 그대로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곳을 이방익이 찾은 마궁이라 비정한다.
눈앞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천후궁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지붕에는 몇 개의 조각들이 원뿔처럼 솟아있고 계단을 오르면 큰 향로가 놓여 있는데 향내가 진동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평평한 제전에 제물이 그득했으며 여러 개의 큰 촛대에는 촛불이 타고 있었다. 깊숙한 단 위에 천후 즉 마조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많은 남녀들이 향을 피우며 기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이 천후궁의 뜻과 내력을 알고자 관리인을 붙잡고 늘어졌으나 그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천후궁(마조묘)에서




전설에 의하면 송나라 때 복건성 포전(蒲田)에 인접한 섬 미주도(煝州島)에 임묵(林黙)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벙어리로 태어나 사람들은 이름을 묵(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임묵은 염력이 뛰어나 바다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해난사고를 예측하기도 하고 손수 바다에 뛰어들어 조난자를 구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16세 때에는 물에 빠진 두 오빠를 구한 적이 있다. 28세 되던 해에 그녀는 조난사고를 당한 두 사람을 구하기는 했으나 자신은 익사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임묵이 승천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으면서 그녀를 마조라고 부르고 사당을 세워 바다의 여신으로 경배하기 시작했다. 송(宋) 왕조 때(1123년), 조정에서는 마조에게 천후(天后)·천비(天妃)·천상성모(天上聖母) 등의 칭호를 하사했다. 마조신앙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한인(漢人)들을 따라 팽호도로 이어졌고 대만으로 뻗어나가 정착했으며 중국남부해안을 따라 퍼져나갔다. 특히 해양으로 향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온 팽호도의 천후궁이 오랫동안 마조교의 본산으로 여겨졌다.
명나라 영락제 때 대선단을 이끌고 남중국해와 인도양까지 횡행했던 정화(鄭和)는 풍랑을 만나 파선의 위기에서 마조신에게 빌어 살아났다고 하며 정성공은 팽호도를 지나면서 마조묘를 대만의 녹이문으로 확장 발전시켰다. 공교롭게도 정성공 일가를 멸망시키고 팽호도와 대만을 점령한 청나라도 이는 마조신의 덕분이라며 팽호도의 마조묘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마조 신앙은 천여 년 동안 면면히 이어왔고 관운장을 받드는 관제묘(關帝廟)와 더불어 도교의 양대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마조신을 믿는 신자들은 마조신에게 자녀의 잉태와 평화, 문제의 해결이나 일반적인 행복을 기원한다. 연안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과 그 후손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마조 신앙은 가족의 조화와 사회의 화합을 가져오며, 이 지역사회의 사회적 정체성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문화적 결속력이다. 마조신을 모시는 천후궁 신전은 대만에만 500여 기가 있다.
팽호도 사람들은 이방익 일행 8명이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자기네 지역까지 이른 것은 마조신의 섭리라고 굳게 믿은 듯싶다. 표류한지 오륙일 만에 비를 내려주어 갈증을 면하게 한 일, 뜻밖에도 큰 물고기를 선판에 뛰어오르게 하여 아사를 면하게 한 일, 팽호도 북단의 바위에 닿게 하여 그 표류인들이 해변에 던져진 일 등은 마조신이 베푼 은혜라고 그들은 생각한 듯하다.
8인이 다 이상이 없음을 보고 사자(使者)가 와서 글로써 이르기를 마궁대인(馬宮大人)이 너희들을 불러 문목(問目)하겠다 하니 나오라 하였다. 즉시 나가니 배에 태우고 5리쯤 가자 마궁 아문(衙門)이 보였다. 집 좌우에 수백의 채선(彩船)이 정박해 있고 채선 위의 누각에 단청이 영롱하여 물속에 비치니 눈이 현황(玄黃)하여 그림 속으로 가는 듯하였다.
사자(使者)를 따라 세 문을 지나니 세 번 높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한 사람이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몸에 홍포(紅袍)를 입고 앞에 홍일산(紅日傘)을 받치고 교위에 단정히 앉았는데 모양이 엄연(奄然)하고 위풍이 늠름하여 짐짓 특별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대인이 거하는 집을 살펴보니 층층한 화각이요 좌우 행각(行閣)은 몇 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대상(臺上)에서 그를 모시는 사람 80여 인이 오색(五色)무늬 비단 군복을 입고 흉배(胸背) 붙이고 환도를 차고 있었고 정하(庭下)의 수많은 군졸들은 홍의(紅衣)와 황의(黃衣)를 입고 대나무 곤장을 짚고 능장(稜杖)을 들었으며 머리에 쓴 것은 각서리승두 같았으며 홍전(紅氈)을 두르고 두석증자를 붙이고 백로 깃을 달고 있었다. 또 황룡기 두 쌍, 징 두 쌍을 마당 좌우에 벌려놓았으니 위의(威儀) 엄숙하고 풍채 동탕하였다.(표해록)
천후궁에서는 신의 은총을 받아 예까지 이른 이방익 일행을 위하여 환영행사를 마련하고 음식을 내어 대접한다. 마궁대인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섬돌 위에 앉아 있고 80여 군졸들이 그를 모시고 시위하며 수많은 군졸들이 정렬해 있고 양쪽에 황룡기가 나부끼고 두 쌍의 징을 울려대는 것은 일상적이기보다는 특별한 행사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방익은 세 문을 지났다고 했는데 옛 모형도에는 세 건물이 단계적으로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마조묘 모형도

환영행사가 끝난 후 마궁대인은 주찬을 차리고 이방익을 따로 불러 심문하는데 이방익이 제주사람임을 숨기며 전주사람이라고 둘러댔지만 결국 그의 따가운 눈초리와 놀라운 직감력에 주춤하여 자신이 제주사람이며 조선의 무관으로 정3품의 충장위장임을 털어놓는다.
이방익 등은 상급관청인 대만부로 떠날 절차를 밟기 위하여 행정관청인 팽호부로 향한다. 그들은 호송절차가 늦어지기도 하고 날씨도 불순하여 약 한 달이나 팽호도에 머문다.
우리는 천후궁을 나와 가까이 위치한 팽호노가(澎湖老家)를 찾는다. 이방익 일행이 한 달여 머무는 동안 다녔을 법한 팽호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서다. 서울의 피맛길 같은 좁은 거리에는 전통공예품과 농산가공품을 파는 가게와 여인숙이 즐비하다. 그 건축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17세기 네덜란드 건축양식 또는 일본풍의 2,3층 건물이 눈에 띈다.
팽호노가

팽호고가에서 촬영기사 고선생

이방익이 이 거리에서 보았음직한 성장한 젊은 여인의 모습은 아마도 팽호도의 풍속사 및 복식사에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일 것 같았다.
젊은 여인의 의복을 보니 붉은 치마에 분홍색의 당의(唐衣)를 입고 붉은 띠를 동였으며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구슬을 얽어서 오색 비단 꽃을 금비녀에 묶어 양쪽에 세 개씩 꽂았으며 앞섶에는 금거북을 만들어 온갖 노리개를 달아매었고 단추에는 줄향을 달아서 걸을 때마다 쨍그랑 소리를 내는데 그 아리따운 태도는 노새와 같았다. 또 우산도 받쳐 들고 교자에는 구슬발도 드리웠다. 두 아이를 곱게 꾸며 세웠는데 여인의 예모와 다름이 없었다.
『표해록』에 의하면 이방익 일행이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에 들렀을 때는 우선 미음과 닭기름을 권하면서 허기를 달래게 하는 한편 이어서 생전에 처음 보는 다양한 음식을 내왔으며 또 어디에선가는 빠른 회복을 위하여 향사군자탕(香砂君子湯)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그들이 대만으로 떠날 때는 ‘전송하는 행자 음식을 배에 가득하게 실어 주었고(『표해가』) 추위를 이기도록 ‘두루마기와 휘항(방한모)과 버선’을 마련해 주는 한편 돈도 두둑이 주었다. 이방익 등이 가는 곳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어떤 이들은 생강과 흑설탕으로 만든 특산품을 선물로 내놓기도 하고 귤, 유자 등 과일을 주기도 하였다. 이방익은 그들의 친절에 감복하여 ‘남방풍속의 순후인자함을 알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급히 서둘러 민속박물관을 찾았다. 시대별로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점에 놀랐다. 둘러보는 가운데 우리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벽에 목판이 걸려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1796 嘉慶元年
朝鮮李邦翼等8人遭風漂流澎湖‧次年返國後‧有<漂海歌>敍述‧此行特殊經驗
(1796 가경원년 조선 이방익등 8인이 바람을 만나 팽호로 표류하였고 다음 해 고국으로 돌아간 후 <표해가>를 지었다. 이러한 행보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로 볼 때 이방익의 표류사실은 팽호도 주민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들은 이 일이 마조신의 가호(加護)임을 굳게 믿었을 것이고 이는 대만으로 보내는 이문(移文)에 그리고 이방익이 거치는 관청마다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방익의 표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방익의 발자취를 탐문하며 다니는 우리 탐방단의 경험 또한 특별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심 교수가 박물관 직원을 면회하여 이 내용의 근거가 되는 서적을 구해보려고 했으나 그 날은 일요일이어서 학예사가 출근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직원은 학예사가 그 내용을 모른다는 연락을 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타이페이행 비행기를 타야 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일은 후학에게 미뤄야 하는가?
이방익 표류기록에 대하여 박물관 직원과 환담

제주도처럼 바람곶에 떠있는 섬에서 살아가는 팽호사람들, 그들의 해신 신앙, 석호(원담)를 이용한 어로, 밭담, 방사탑, 주상절리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살아왔던 경험 등은 우리 제주인들이 더불어 공유하고 비교 연구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