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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면서 수도인 셴양[咸陽]의 인구가 많아지고 궁전도 협소해지자, 웨이수이 강[渭水]의 남쪽에 있는 상림원(上林苑)에다 새로운 궁성의 건설을 계획했다. 아방궁은 이 궁성의 전전(前殿)으로서 BC 212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규모는 동서 500보(680m), 남북 50장(113m)으로, 궁전 위층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5장(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이 궁전 건설에 70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으나, 시황제의 재위중에 완성하지 못해 2세 황제 때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BC 206년 진을 정복한 항우(項羽)에 의해 전소되었는데, 3개월에 걸쳐 불탔다고 한다.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 서쪽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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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부(阿房宮賦)-두목(杜牧)
六王畢(육왕필)하니 : 전국의 육국이 망하니
四海一(사해일)하고 :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고
蜀山兀(촉산올)하니 : 촉산의 나무 잘려 우뚝해지며
阿房出(아방출)이라 : 아방궁이 출현하는구나
覆壓三百餘里(복압삼백여리)하여 : 삼백리 땅을 뒤덮었고
隔離天日(격리천일)하니 : 하늘의 해를 격리시켰으니
驪山北構而西折(여산북구이서절)하여 : 여산의 북쪽에 축조되어 서쪽으로 꺾여
直走咸陽(직주함양)하고 : 곧장 함양에 이르렀고
二川溶溶(이천용용)하여 : 두 강물 줄기가 유유히
流入官墻(류입관장)이라 : 궁 담안으로 흘러들었다
五步一樓(오보일루)요 : 오보마다 한개의 누각이요
十步一閣(십보일각)이라 : 십보마다 한개의 고각이 있으다
廊腰縵廻(낭요만회)하고 : 복도는 빙돌아 이어져 있고
簷牙高啄(첨아고탁)하며 : 처마 끝은 새가 높은 곳을 쫓는 모양이며
各抱地勢(각포지세)하여 : 건물은 각기 지세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鉤心鬪角(구심투각)하니 : 지붕은 갈고리가 엇이어지고 뿔이 서로 다투듯 이어졌네
盤盤焉(반반언)하며 : 건물들이 구불구불하고
囷囷焉(균균언)하여 : 이리저리 둘러져 있어서
蜂房水渦(봉방수와)이 : 벌집과도 같고 소용돌이와도 같으며
矗不知其幾千萬落(촉불지기기천만락)이로다 : 우뚝 솟은 추녀에서 떨어지는 물 줄기는 몇 천만 가닥인지 모르겠도다
長橋臥波(장교와파)하니 : 긴 다리가 물결 위에 놓여 있으니
未雲厦龍(미운하룡)이며 : 구름도 없는데 웬 용인가 싶으며
複道行空(복도행공)하니 : 이층 복도가 허공을 가로지르니
不霽何虹(불제하홍)가 : 비 갠 것도 아닌데 웬 무지개인가
高低冥迷(고저명미)하여 : 높고 낮은 누각들로 어enq고 희미하여
不知西東(불지서동)이라 : 동서이 분간을 못하겠도다
歌臺暖響(가대난향)은 : 가대에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
春光融融(춘광융융)하고 : 봄볕같이 화락하고
舞殿冷袖(무전냉수)는 : 춤추는 전각에서는 찬 옷소매
風雨凄凄(풍우처처)하여 : 비바람같이 써늘하니
一日之內(일일지내)와 : 하룻 사이
一宮之間(일궁지간)애 : 한 궁전 안에서도
而氣候不齊(이기후불제)로다 : 기후가 고르지 않은 듯하네
妃嬪媵嬙(비빈잉장)과 : 여러 비빈과 궁녀들
王子皇孫(왕자황손)이 : 왕자와 황손들이
辭樓下殿(사루하전)하여 : 자기 누각을 떠나
輦來于秦(련래우진)하여 : 수레타고 진으로 모여 와서는
朝歌夜絃(조가야현)하여 : 아침 저녁으로 주악과 노래 즐기며
爲秦宮人(위진궁인)이로다 : 진나라의 궁인이 되었도다
明星熒熒(명성형형)은 : 별이 반짝이는 빛은
開粧鏡也(개장경야)요 : 이들이 경대의 거울을 여는 것이었고
綠雲擾擾(녹운요요)는 : 검푸른 구름이 뭉실뭉실 인는 것은
梳曉鬟也(소효환야)요 : 새벽에 머리를 빗는 것이었고
渭流漲膩(위류창니)는 : 위수에 기름기 흘러넘침은
棄脂水也(기지수야)요 : 이들이 연지 물을 버린 때문이요
煙斜霧橫(연사무횡)은 : 연기 오르고 안개 자욱한 것은
焚椒蘭也(분초란야)요 : 이들이 초란 향을 태우는 때문이다
雷霆乍驚(뇌정사경)은 : 우렛 소리에 깜짝 놀라니
宮車過也(궁차과야)인데 : 궁전의 수레 지나가는 소리인데
轆轆遠聽(록록원청)에 : 덜커덕 덜커덕 멀리까지 들림에
杳不知其所之也(묘불지기소지야)로다 : 아득하여 그 가는 곳을 모르겠도다
一肌一容(일기일용)이 : 살결과 얼굴빛 하나하나가
盡態極姸(진태극연)하여 : 교태를 다하여
縵立遠視而望幸焉(만립원시이망행언)이로되 : 궁녀들이 마냥 서서 멀리 바라보며 황제의 행차 기다렸지만
有不得見者(유불득견자)가 : 황제를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이
三十六年(삼십육년)이라 : 삼십육년간이나 되었도다
燕趙之收藏(연조지수장)과 : 연나라와 조나라에서 소중히 간직하던 보물과
韓魏之經營(한위지경영)과 : 한아라와 위나라에서 애써 모은 보화와
齊楚之精英(제초지정영)은 : 제나라와 초나라의 귀중품들은
幾世幾年(기세기년)에 : 몇 세데, 몇 년을
摽掠其人(표약기인)하여 : 그들에게서 빼앗아 모은 것인지
倚疊如山(의첩여산)이라 : 산과 같이 쌓였는데
一旦不能有(일단불능유)하고 : 하루 아침에 이것들을 갖을 수 없어
輸來其間(수래기간)하여 : 모두 진나라로 실어 왔서
鼎鏜玉石(정당옥석)고 : 보물인 정이 가마솥같고 옥이 돌같고
金塊珠礫(금괴주력)을 : 금이 흙덩이 같고 진주눈 조약돌 같이
棋擲邐迆(기척리이)하되 : 길에 가득 내버려져 있었는데
秦人視之(진인시지)엔 : 진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亦不甚惜(역불심석)이라 : 그리 아까워하지 않았도다
嗟乎(차호)라 : 아아
一人之心(일인지심)은 : 황제 한 사람의 마음이
千萬人之心也(천만인지심야)라 : 온 백성의 마음인지라
秦愛紛奢(진애분사)어든 : 황제 한 사람이 호사함을 좋아하니
人亦念其家(인역염기가)어늘 : 사람들도 자기 집의 부귀만을 생각하거늘
奈何取之(내하취지)를 : 어찌하여 이를 취하기를
盡錙銖(진치수)하고 : 아주 작은 것까지도 다하는가
用之如泥沙(용지여니사)오 : 그것을 쓰기를 진흙이나 모래쓰듯 하는가
使負棟之柱(사부동지주)가 : 대들보 받친 기둥이
多於南畝農夫(다어남무농부)며 : 남쪽 밭의 농부 수보다 많으며
架梁之椽(가양지연)이 : 대들보에 걸린 서까래는
於機上之工女(어기상지공여)며 : 베짜는 여인보다 많으며
釘頭磷磷(정두린린)이 : 못대가리 번적이는 것이
多於在庾之粟粒(다어재유지속립)이며 : 곳간의 곡식 낟알보다 많으며
瓦縫參差(와봉참차)가 : 기와의 이음매 들쑥날쑥한 것이
多於周身之帛縷(다어주신지백누)며 : 몸에 두른 비단실보다 많으며
直欄橫檻(직란횡함)이 : 가로세로 놓여진 난간은
多於九土之城郭(다어구토지성곽)이며 : 전국에 있는 성곽보다 많았으며
管絃嘔啞(다관현구아)가 : 관현악기의 요란한 소리가
多於市人之言語(어시인지언어)라 : 길거리 사람들 말소리보다 많았는지라
使天下之人(사천하지인)으로 :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不敢言而敢怒(불감언이감노)하니 : 감히 말도 못하고 화만 나게 했으니
獨夫之心(독부지심)이 : 외로운 폭군의 마음이
日益驕固(일익교고)러라 : 날로 더욱 교만하고 완고해졌다
戍卒叫(수졸규)에 :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소리치며 일어남에
函谷擧(함곡거)하고 : 함곡관이 함락되었고
楚人一炬(초인일거)에 : 초나라 사람의 한 자루 횃불에
可憐焦土(가련초토)로다 : 가련하게도 아방궁은 초토가 되었도다
嗚呼(오호)라 : 아아
滅六國者(멸육국자)는 : 육국을 멸한 것은
六國也(육국야)요 : 육국이요
非秦也(비진야)며 : 진나라가 아니며
族秦者(족진자)는 : 진나라를 족멸한 것은
秦也(진야)요 : 진나라이지
非天下也(비천하야)라 : 천하가 아니었도다
嗟夫(차부)라 : 아아
使六國(사육국)으로 : 육국이
各愛其人(각애기인)이면 : 각기 그 나라 사람을 사랑했다면
則足以拒秦(각애기인칙족이거진)이오 : 충분히 진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요
秦復愛六國之人(진복애육국지인)이면 : 진나라가 다시 여섯 나라의 사람을 사랑했었다면
則遞二世(칙체이세)하며 : 이 세를 계승하여
可至萬世而爲君(가지만세이위군)이니 : 만세에 이르기까지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誰得而族滅也(수득이족멸야)리오 : 누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었을까
秦人不暇自哀而後人哀之(진인불가자애이후인애지)요 : 진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슬러할 겨를도 없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하고 있도다
後人哀之而不鑑之(후인애지이불감지)면 : 후세 사람들이 슬퍼하는데도 거울삼지 않는다면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역사후인이복애후인야)리라 : 또한 후세 사람들이 있어 다시 그 후세 사람들을 슬퍼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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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중국어 간체: 阿房宫, 병음: Ēpánggōng)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세운 궁전이다. 함양과 위수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적은 섬서성 서안 시 서쪽 13km의 아방촌(阿房村)에 남아 있다. 시황제의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 되었지만, 진나라의 멸망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명칭이 없었던 것을 세인이 지명을 따서 아방궁으로 지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아방궁 유적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궁전 건축물의 규모는 동서로 5백보(3000척), 남북으로 50장(500척)라고 한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약 600~800m, 남북으로 113-150m에 이른다.
그 궁전 위에는 10,000명이 앉을 수 있으며, 전하에는 높이 5장의 기를 세울 수 있었다. 전 외에는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이곳으로 남산에 이를 수 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전에 연결되었다.
그 건축에 동원된 인력의 수는 70여 만에 달했다. 더욱 더 여러 궁을 만들어 관중에 300, 관외에 400여개, 함양 부근 100리 내에 세운 궁전은 270 여개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민가 30,000호를 여읍(驪邑)에, 50,000호를 운양(雲陽)에 각각 이주 하게 했다. 각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배치하였고, 진나라 궁전을 만들어 진나라의 미인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거기서, 조나라(趙)의 비(肥), 연나라의 수(痩), 오나라의 희(姫), 월나라의 여(女) 등 각각의 미를 겨루어 조가야현(朝歌夜絃), ‘삼십육궁혼의 봄’이라는 광경을 이곳에서 출현하게 했다. 두목의 ‘아방궁부’(阿房宮賦)에 노래한 것이 반드시 과장은 아니다.
《사기》에 기술된 진나라 멸망 부분에 기록된 “아방궁은 초나라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다”(3개월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 현대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항우에 의해서 불탄 것은 함양궁이며, 아방궁은 불타지 않았다”라는 설이 2003년에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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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방궁 유적지 ]
서안과 중국, 중국역사를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진시황(秦始皇)의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규모를 알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위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곳은 1961년에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