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여정은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나온 삶들을 회상하고, 자신의 복음화로 진리를 따라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빛바랜 순례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진지한 성찰의 여정을 시작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미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에게는 회상을 통한 자신의 복음화에 도움이 되고, 다녀오시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 마산교구성지6. 순교복자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성지
* 위치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 46-6
* 관련 성당 : 문산성당(사봉공소)
♥ 순교복자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1822~1867년)
[요약]
* 목이 없어 무두묘인가?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부인 칠원 윤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자인 것이 드러나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했다. 거듭되는 문초에 매를 너무 맞아 1867년 1월 25일 진주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 상세 내용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鄭燦文, 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哲宗, 1849-1863년) 재위 기간 14년과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즉위 직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 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 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거제의 사도 복자 윤봉문 요셉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考覆 : 아래 신은근신부님 견해 참조)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머리 없이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는데,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다.
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1899-1964년) 신부는 굼실(隅谷, 사봉면 사곡리)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30일 무촌리에 살고 있던 ‘텃골 마누라’라는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새로 입관한 후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고 그 앞에 본당에서 준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10월 중순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건평 60여 평에 철골 1층 구조로 건립된 사봉 공소는 순례자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 순교자 정찬문의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것에 대한 견해
(신은근 신부)
정찬문이 잡혔을 때 고복했다는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있다. 고복(考覆)은 - 죽을죄에 해당하는 죄인(罪人)의 옥안(獄案)을 재심한다는 말이다. 정씨 문중(門中)에서 고복했을 것이다. 정찬문은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심판해 달라는 고복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문중에선 정찬문을 회유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는 완강히 거부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주 감영(監營)에선 골치 아팠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죽은 뒤에도 시신을 다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남겨 둔 듯하다.
[자료출처 : 천주교마산교구청]
♤ 순교복자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성지와 사봉공소
* 성지에 있는 사봉공소
* 순교복자 정찬문안토니오 성지
* 십자가의 길
* 묘소
* 2013년 10월 산청성당 본당의 날에 순교복자 정찬문안토니오 성지에서의 미사와 소록도 여정 사진 중에서.......
정찬문 순교자 묘소 앞에서 미사
* 사무장님 가족들......ㅎㅎ
* 앞줄에 단성반원........ㅎ
☞ 미사 후에 준비해 갔던 점심을 나누고 전남 소록도로 갔었다.
* 소록도의 반송들......역사를 말해 준다.
* 소록도 내 둘러보기
♧ 100년이 휠씬 넘은 진주 문산성당 사진들......
♤ 순교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성지 순례의 빛바랜 사진들......
* 2001년 10월 레지오단원들과 진주 반성면에서 고구마캐기 봉사 후에 인근의 순교자 정찬문 묘소에서.......
* 순례 흔적 책자 '하늘에서 땅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