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 뒷짐을 지고 돌 조형물 앞에 서 있다. 노인을 쳐다보고 노인이 보는 돌 조형물을 쳐다본다. 조형물은 시를 새긴 비석이다. 시비다. 서면 지하철역 13번 출구 국민은행 앞 화단.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은 바쁘게 지나가면서 시비를 쳐다보고 바쁠 것이 없는 사람은 시라도 외울 듯이 시비를 쳐다본다. 시비의 제목은 `봄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동시에 획득한 정호승 시인 시다. 정호승은 한국전쟁이 나던 해에 대구에서 태어난 현역시인이다. 생존시인 시비는 엔간하면 세우지 않는 게 문단의 관례. 그만큼 시가 좋다는 의미다. 서면과는 별 연고도 없는 시인이기에 시 선정에 그만큼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다. 시는 짧다. 짧고 순하다. 백발노인이 섰던 자리에 서서 시비를 쳐다본다. 시를 한 줄 한 줄 따라간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는 몇 줄 더 이어지다가 `스스로 사람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로 끝난다. 사람이 길이 될 때까지 사람을 걸어가게 하면서 끝난다. 서면에 시비가 있는 곳은 또 있다. 롯데백화점 후문 만남의 광장이다. 시비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고 선정된 시인도 예사롭지 않다. 시비에 빨려들고 시에 빨려든다. 시의 제목은 `윤리.` 딱딱한 제목이지만 내용은 전혀 딱딱하지 않다. `가을호수 같이 맑게 살련다`는 시다. 일제 강점기를 치열하게 살면서 윤리가 통하는 세상을 추구했던 권환 시인의 시다. 부당한 압제와 간섭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 권환의 시다. 권환 시비는 그 자체로서 귀하다. 권환이라서 귀하고 반갑다. 권환은 마산 사람이다. 마산 진전사람이다. 진전은 진동에서 통영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촌마을. 진전에 권환 생가가 있고 해마다 권환을 기리는 문학제도 열리지만 일반에게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당대를 치열하게 뜨겁게 산 시인이지만 잊혀져가던 시인이다. 권환은 누구인가.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를 했으나 일제로부터 불온하다며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시인이다. 3백석지기 먹고살 만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죽을 때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오두막집에서 일생을 마친 시인이다. 카프에 가담한 작가라는 이유로 문학계에서는 금기시되던 시인이다. 마산 산호동 시의 거리에 있는 시비가 알기로는 권환의 유일한 시비. 그래서 만남의 광장 권환 시비는 더욱 귀하고 더욱 반갑다. 서면 일대에 두 기의 시비가 들어선 것은 작년 4월과 5월. 동네마다 시비를 세우겠다는 민선 구청장 공약사업의 결과다. 공약사업의 특징이랄지 한계는 관청 내지는 공무원 주도. 자칫하면 행정편의가 끼어들 여지가 크고 지역연고를 내세울 우려가 크다. 서면에 세워진 시비들이 견고해 보이는 것은 그러한 여지와 우려를 지웠다는 것. 공약사업이긴 해도 주민자치위원회가 나서서 주민들 자발적으로 시를 찾고 주민들 자발적으로 시비를 세운다. 그래서 서면의 시비가 있어 보이고 서면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시월과 십일월의 경계. 경계에 선 가로수 이파리들의 고민이 깊어진다. 남아 있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경계에 선 이파리 같은 사람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이 깊어지는 사람들. 스스로 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시비 앞에 서 있다. 가을호수에 스스로를 비추고 싶은 사람들이 서면의 시비 앞에 서 있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