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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시편
경자년이 밝았다.
문단에 나온지 34년째다
올해는 다음 몇 가지를 목표로 세운다
<비무장지대>를 장시로 쓸 것이다.
새시집을 낼 것이다.
시의 어법을 바꿀 것이다.
4. 독서의 시간과 량을 늘려갈 것이다. (매주 시집 1권, 일반도서 1권)
5 매일 운동을 할 것이다.
6. 매일 시를 쓸 것이다.
7. 시적인 산문을 쓸 것이다. (텃치 카페)
마음을 비우는 일로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자.
겸손하고 낮은 자세를 잊지 말자.
사람들에게 관대하자.
시집 한권을 선물하고 떠난 사람이 있다.
그녀 말처럼 무서운 여자가 아니었다.
서영이가 새로운 시를 쓰게 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오고 있다.
중국의 제자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화사한 마음들은 어디론지 떠난다
길이 안개 속으로 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마음이 철길에 물든다
떠나는 날의 슬픔보다 돌아오는 날의 통곡이 낡은 역사를 흐려놓을 걸 알아
아주 먼 여행 중인 영혼들, 몸에서 몸으로 하는 여행을 꿈꾼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작되는 여행은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이었고
몸은 지옥이었던 생의 의미를 놓고 숙려를 연장하지 않는다
사흘, 숙려기간은 지났다 숙려 장소는 냉동실이었다
십 년 째 숙려 중인 젊은이는 사흘의 숙려가 부럽다
사흘 동안에도 꽃이 피고 철새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노동자가 벨트에 끼어 죽고 고공시위가 계속되고 사막은
어느 곳에서나, 냉동실에서도 시작된다
함께 가기로 한 고비였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 초원을 달려나가는 여인, 양의 뜨거운 피를 마시는 짚시들, 낙타의 머리뼈를 타고 넘는 사막뱀은 파탄의 징후였거나 사후의 세계였거나
이것들을 그려넣을 목관의 공간은 비어 있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바람도 떠나지 않는다
근원으로 사라지는 것들
근원으로 사라지는 것들
새들 꽃들 나무들 눈동자들 말소리들은
근원으로 사라진다 근원은 죽음 아니어서, 소멸 아니어서
새로운 탄생이거나 생성이거나 신생의 영지여서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에서 울고 있는 여인이여
강물소리 들었는가 못들어서 돌계단이라면
근원으로 가는 돌계단은 더 멀리 있다
묵묵한 시간이 흐른다 여인은 머리를 풀어 헤친다
해는 낮은 구름에 걸려 솟아오르지 못한다
도시의 골목들이 사라지고
봉황휘장의 링컨 컨티넨탈이 사라진 골목에서 나타난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오열 속에서 마지막까지 웃고 있다
대지에 무수히 착지했어도 마지막으로 착지해야 하는
근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웃음이다
이서녕李書寧
너는 산시성의 대지를 거느린 아름다운 처녀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낯선 나라의 봄 여름 가을을 헤아리다 잠이 드는 이슬이다
하루 또 하루를 부르는 서녕, 달콤한 목소리로 바람을 부르면 바람이 달려오고 나무를 부르면 나무가 달려온다 다퉁의 성벽도 달려오고 깊은 우물도 달려온다
너는 아름다운 한 생을 꿈꾸는 처녀
너는 헤어진 연인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네가 부르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을 부르지 않으면 유년이 사라지고 별을 부르지 않으면 별이 사라진다 호명은 너의 숨결이다 살아 있게 하는 눈빛이고 생명이다
네가 불러주어 밤이 있고 낮은 목소리가 있다 너의 새싹 같은 귓불을 알고 바알게지는 목덜미를 안다 너의 쇄골에 머무는 달빛을 알고 가슴에 숨겨둔 무지개를 안다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다
소나무들이 너의 뜰로 옮겨 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울 거고
네가 사랑하는 이유 하나를 더
화계花溪의 현주소
너는 여기에 속한 일이 없다고 썼다
네가 속한 곳은 구름과 물과 비였다 구름의 육체를 덮었거나 물의 마음을 열었거나 비의 슬픔을 나누었거나 결국
너는 구름과 불과 비의 영혼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천상의 일이어서 지상의 슬픈 그림자를 노래했을 너, 한 번 더 환생 하겠다*는 네 말은 나를 전율케 한다 환생 이후라면 몇 겁의 시간을 쌓아야 하는지 안다 그 시간을 건너 내게 오겠다는 너를 어린 마음으로 기다릴 나다 기다림이 상처라면 그것까지도 내 몫이라는 거 안다
너는 불안한 일상으로 붉은 해를 버릴 것이지만 버려지는 것이 어찌 붉은 해 뿐이겠니
눈빛에 매료되어 신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는 고통을 알았으니 고통조차 환희인 지상의 어두운 착각이어서
너의 화계는 천상의 붉은 꽃들이 가져올 것이지만 나의 화계는 지상의 흰 꽃들이 가져올 것이다
너의 화계는 우연이지만 나의 화계는 필연이어서 운명이다
운명, 그 닿을 수 없는
* 이서영
아직
아직 등불을 끌 때가 아니다
달빛은 바다 위에 쓰러져 잠들고
대지는 온기를 버리지 않았는데
다만 입맞춤이 길어져
여기저기 흩어진 속눈썹을 수습할 수 있을지
오래 누워 있는 자의 푸른 살 위로
별들이 나무그림자를 문신하고 있다
오래 누워 있는 자가 나무가 되기까지
아직 등불을 끌 때가 아니다
돌아서라는 전언을 수없이 전해오던 밤의 기억은
악몽 아니다, 언젠가 돌아설 것을 예감했으므로
예감은 나의 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말, 그 말이
마지막 말인 걸 알아 나무그림자가 깊어진다
세상 모든 말은
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 사랑이다*
찬란한 시절은 그렇게
*이서영
영혼은 파멸 위에 있다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까
널 연민하려 하지 말라*는 문장은 고백이 아니라 경고였다
문장마다 네가 속하지 않은 세상의 어둔 창밖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초연한 눈빛이 어둔 곳, 실의에 찬 미래에 오래 머문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이라고, 죽음은 그렇게 단 한 번의 슬픔이라고
영원불멸의 빛이라고 말했던 것을 후회 한다
파멸이 오더라도 영혼은 파멸 위에 있을 것을 믿어
이해하려, 길들이려, 유혹하려 할 것이고
연민 때문에 강을 건널 것이다
그게 불멸로 가는 길이니까
너의 문장 한 행 한 행은 독약처럼 황홀하다
너의 문장으로 긴 잠에 든다 하더라도 서러울 일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널 사랑했으므로
*이서영
창세신화를 위하여
그가 쓰고 있는 창세신화에는 비탄의 노래들이 떼창을 이룬다 누구도 신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굴거리는 뱀의 긴 혀를 건너 푸른 입술을 찾지 않는다
신화 속 수많은 눈물들은 언제 다시 환생의 악몽을 실현할지 모른다
그가 쓰고 있는 창세신화에는 불타는 도시를 노래하던 요염한 허리가 끝내 돌로 굳어져 오랜 세월 잊혀질 거라고 쓰여 있다
모든 노래들이 돌로 굳어져 지하에 묻혀도 시인들은 노래 할 것이다
편서풍이 타이가숲을 흔든다 작은 씨앗들 속에 잠자고 있던 울창한 숲을 깨운 편서풍이었다 편서풍은 숲의 정령들을 웃게 하고 계곡의 물줄기를 부풀린다 강물 깨어나는 아침이 온다
창세신화에는 없는 풍경이다
최초의 신화는 돌무덤이었다 돌무덤은 창세 전에 누군가를 매장했었다는 증거다 부활 없는 죽음이어서 하루 종일 독수리의 선회를 보아야 했다
조장의 풍습은 창세 이후의 일이어서 정강이뼈를 유물로 남겼다
-그 사람이 너를 위해 창세기를 쓰고 있었다*
*이서영
용기
울부짖는 파도와 삐꺽거리는 나무문이 비밀을 교환하고 있다*
파도는 자신의 몸에 올라타 보석이 되는 달빛을 살해하고 싶었다
나무문은 문 뒤의 어둠 속에 든 마지막 발자국을 살해하고 싶었다
살의에 대한 공유는 빠르게 끝났다 비밀은 순간의 묵계였다
달빛의 흐려진 피가 대지의 모든 꽃들과 잎새들과 부러진 가지 위에
흘러넘쳐 꽃을 잠재우고 잎새들을 말리우고 부러진 가지를 뉘인다
마지막 입술 위에 오로라의 죽음처럼 황홀한 빛이 내린다
뜨거운 밀약이 무너지고 창백하게 굳어진 입술이 파도에 묻힌다
달빛의 살해는 없었다
발자국의 살해는 있었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살해되어 대지를 어둠에 들게 했다
나무문은 살해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무문은 한 남자의 문이었다
울부짖는 파도에게 삐꺽거리는 나무문은 새로운 비밀을 제안했다
지순할 수 없는 사랑의 슬픔에 대해
그건 용기였다
*이서영
보이지 않는 꽃, 남극개미자리
너는 개미자리와 바람의 불륜으로 태어난 연민의 꽃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남극, 그 극한의 얼음왕국에 숨어 피는 꽃이니
사랑- 사라진 뒤에야 믿을 수 있는 환상*이 분명하다
바람은 너를 찾아 지구를 몇 바퀴나 순회하며
때로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네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때로는 미친 듯한 광풍으로 네 이름을 외쳤을 것인데
너는 바람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
남극, 그 극한의 동토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으로 숨으려 했던 것
숨어, 세상에 없는 꽃으로 살아가려 했던 것
누가 너더러 극점의 사랑을 물으면 답하라
보이지 않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몸의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 할뿐
보이지 않는 입술이 보이지 않는 눈빛을 더듬어
찰나의 뜨거움이 남국에서 있었던
그 백야를 기억하는 건 환상일 뿐
끝내, 보이지 않는
*이서영
청춘
숲 속의 야생화는 아직 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네가 조급해서 어두워지는 대지에 숲을 그리고
야생화를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숲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숨결이다
네가 숨겨놓은 자작나무숲은 며칠 째 불타는 서사였다
너는 마지막 장을 위해서 불타는 숲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은 네가 잿더미로 쓴 시인의 죽음이었다*
숲에는 지금도 시인의 노래가 야생화 사이를 떠돈다
너는 청춘이어서
시인의 노래보다 시인의 이름으로 불타버린 자작나무숲을 부른다
잿더미 위에 별들 지나간 흔적 남아 있다
청춘이 그렇게 지나간 것이라고 너는 쓴다
야생화보다 많은 숨결이 준령을 이룬다
누구도 넘지 못한 준령이다
수많은 청춘들이 준령에 영혼을 헌정할 것이다
준령은 야생화의 꽃그늘이거나 숲을 건너온 부드러운 바람이거나
목놓아 부르는 이름이었다
너는
끝내
*이서영
가난한 사랑
그것이 얼마나 깊은 시름인지 모르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절망인지 모르다면
너는 가난한 사랑이다
출국 안부가 쓰라린 상처인지 몰랐어도
눈동자의 흔들림이 예리한 칼날인지 몰랐어도
너는 가난한 사랑이다, 무지는 영혼의 가난이었으니
무지는 몇 년이고 침묵할 수 있을 것이고 겨울에 남긴 목소리가
여름에 들리지 않는 음역의 소멸은 언젠가는 탄식으로 솟을 것을 알았다면
가문비나무숲은 피했을 것이다
밀회의 숲에서 밤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서로의 몸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연련이었다, 그 후 흐느낌이었으니
해는 숲에 오래 머물다 서둘러 오르고
낮달이 해를 따라 머물렀다
숲은 더 선명해지고 바람은 부드럽게 숲을 통과 해 산맥을 넘었다
천 개의 등을 구해 숲으로 간 날이었다
천 개의 등을 네 몸 곳곳에 달고 난 새벽이었다
희고 눈부신 복부가 비밀스럽게
눈 깜짝 할 사이에 해와 달을 삼켰다*
*이서영
관종
*
관종,
이 신조어를 유아인 인터뷰 기사에서 읽었다
그가 관종으로 살아온 15년, 스타덤에 올랐고 팬덤을 소유했고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발언했고 느낌의 타당성으로 글의 논리를 세워왔고 언제나 흥분된 삶을 살아왔고 죄에 민감한 청년이었고 늘, 나는 진실한가? 양심적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지금의 삶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청춘
유아인에게 참 많은 시가 숨어 있다는 걸 생각했다
관종이라는 신조어 하나로 시가 될 수 있겠다, 비속한 전율이다 생각했다
*
세상에 관종 아닌 시인이 있을까
그의 관종 33년, 시의 정점에 오르지 못했고 열혈 독자를 가지지 못했고 진영논리를 비판하지 않았고 느낌의 타당성으로 시를 쓰지 않았고 언제나 흥분하지 않았고 죄에 민감하지 못했고 내 시가 진실한가? 양심적인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고 시인의 길이 운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생은
묘지 12 개를 짓는 것으로 허덕이는 말년이다
아직도 몇 개의 묘지를 지을 돌산이 그에게 있다
그는 바로 그의 그림자였구나*
*이서영
너의 귓속말을 가져왔다
순수 영혼을 위해
몸은 얼마나 성결했는지, 너는 알 수 있을 거다 여기의 시간에 머물기를 거부했으니
피 묻은 손으로 성서의 페이지를 넘기고 붉은 눈으로 사후의 가장 먼 곳을 본 후
너는 떠날 것을 예고했고 간절한 눈빛을 거부했다
네가 가는 그곳은 편견이 살의가 되는 땅이다
너는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이름 위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으로 숨은 목소리의 고뇌를 짐작케 했다
서사는 그 지점에서 나락의 전기를 맞는다
너는 몸의 소리를 기다렸으니, 순수 영혼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잠들기 전에 검은 장막이 펼쳐질 것이고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바람 부는 밤은 가혹해서
너의 혼몽을 흩을 것이다
어떤 몸으로도 다시 피지 않을 몸이지만
바람 부는 밤은 너의 귓속말을 가져왔다*
*이서영
가문비나무숲에 들다
그녀의 가문비나무숲에 들었다
숲은 그녀의 젊은 날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가문비나무숲 맑은 그늘을 가슴으로 다 품는 듯 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숲의 숨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숲이었다
대관령은 언제나 몇 달 빠르게 계절이 찾아왔다
그녀가 앞당겨 살고 있는 계절의 비밀을 가문비나무숲에 들어 알게 되었다
비밀 속에 흐려진 사랑의 퇴적이나 별리의 지층이 숨어 있다 하더라도
가문비나무숲은 용서했을 것이다
수많은 용서로 가문비나무는 연록의 그림자가 짙어질 것이다
바람은 비밀들을 더 멀리 대관령으로 옮겨 놓았다
이 숲에서 저 숲으로 구름 그림자 옮겨 간다
떼 새들이 숲 속에 방울소리를 뿌린다
숲을 떠나면, 언제 다시 그녀의 숲에서 나는 방울소리를 듣게 될지
염문이 사계를 바꾸며 계곡을 흘렀어도 가문비나무숲은 마지막까지 조용했다
그녀가 더 깊이 숲으로 든다, 그녀의 발소리가 숲속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나른한 나뭇가지 위에서 갇히게 되었다*
*이서영
아 동백이, 아 모란이
그게 당신이었다
그처럼 처절하고 서러운 목소리로 가슴을 파고 든
그날의 연주, 먹먹하여 숨죽이던 청중들은
당신의 기사회생에 눈물 흘렸다
매번 절망의 낭떠러지로 내몰리던 경연은
당신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그건 차라리 수치였다
경연 무대에서는 굴욕의 나이 마흔 넷,
가수로서의 반생을 건 도전이어서 더 두려웠을 당신
당신의 눈물을 보며 나 목덜미가 붉어진다
당신을 살린 청중들에게 깊이 꺾은 허리를 한참이나 펴지 못하던
그 무대, 열광하는 청중들은 속으로 외친다
내가 너의 눈꺼풀을 따뜻하게 입맞출 때까지 기다려 봐*
나는 차마
*이서영
점묘법에 매달리다
너는 화폭에 수십 만 번의 점을 찍는다
화실 창으로 모란이 오고 모란보다 먼저 자목련이 창에 머물다 갔다
넌 몇 번의 모란과 자목련을 불렀다
그러는 동안 화폭의 점들은 더 깊어지고 점 위에 점이 찍혀
처음의 점이 형체를 잃게 되었지만
점찍는 작업은 계속 되었다, 세상이 점이었던 거다
나는 그 점들을 헤아리다 혼절하기 일쑤였다 헤아리다 보면 점들은 색을 버리고 모양을 버리고 모두 보랏빛 눈동자로 변했다 죽은 자들의 눈동자였다 죽은 자들의 눈동자가 살아나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을 마시며 그렇게 감동적이냐고, 아직 미완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코 리오스 근처에서 열렸던 광란의 축제, 레게 썬스플래쉬를 떠올린다 레게리듬과 럼주와 마리화나의 몽환을 잊을 수 없다 그 밤 네가 내 가슴에 찍은 점은 그대로다
네 화폭의 수많은 점들은 광란의 축제에서 마주쳤던 영혼 떠난 눈동자였다
너의 점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허공이다*
너는 언젠가 멀리서 네가 수십 만 번 찍은 점들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살아온
*이서영
붉고 커다란
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가슴 속에 이처럼 큰 불덩이를 담고 살지는 않았을 거다
불의 자식이었으니
아침에는 불타는 바다를 살고 저녁에는 불타는 산맥을 사는 거다
밤은 또 어떤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로
불의 신전에 오르는 계단을 밝힌다
신전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은 운명 아니다
불씨가 어떻게 자궁에 숨어 살았었는지 숨은 불씨를 확 그어 불달을 품게 하고도
사내는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은 여자의 몫이었지만 여자는 번지는 불꽃을 가득 품었다
자연사박물관은 오래 된 여자의 뼈를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유리상자 안에 안치했다
갈비뼈가 주저앉으며 불은 꺼져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큰 불달을 담고 그 시대를 건넜을 것이다
가슴 속의 불달로 뼈들이 검게 그을렸을 뿐
사막에 묻혀 있던 수 천 년은 속눈썹과 벽옥반지로 밝힌 불달의 생이었을
유물은 독수리에게 물려간 그녀의 손가락이었다*
붉고 커다란 마지막 유물이 쿵하고 사내 가슴으로 진다
*이서영 변주
조금 외로워도 괜찮아
그 도시의 시민들은 꽃망울 보는 일이 즐겁지 않다
그 도시의 시민들은 사람이 얼마나 두려울지, 밤이 얼마나 길고 어두울지
그 도시의 시민들은 묵묵히 견디고 있다
눈물겨운 사투가 언제나 끝날지
재앙이 끝날 때쯤 분노의 기다림이 끝날 것이지만
그 도시의 시민들은 품위를 잃지 않고 재앙 앞에 의연했다
시련의 시간은 그 도시의 시민들
가슴에 영원히 빛 날 그 무엇을 새기고 있는 중이다
조금 외로워도 괜찮아*
*이서영
창밖 회색 어둠
*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1분에 90미터인 것을 몰랐다
너는 가슴에 어깨를 기대고 엘리베이터가 지하1층에서 지상1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네 이마는 차갑고 부드러웠다 입술은 붉었다 엘리베이터가 멎는 순간 여러 개의 눈동자가 너의 어깨와 이마를 훔쳐보고 있었다
너는 허둥댔고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의 떨림이 엘리베이터 때문은 아니었다
한 이름 위에서 떨림이 시작 되었다
목소리 속에 숨겨 논 음어가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슬픔이 새벽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의구심은 우연한 기회에 악마의 웃음으로 온다
떨리는 목소리 이후 많은 것들을 잃었다
*
어두워지면 숲이 사라지고 몇 개의 불빛이 살아난다
이 시간이 희미해진 지난 날을 길어 올리는 유일한 시간이다
존재하는 모든 내면은 다른 내면으로 침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다른 영혼에게 헌정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연연의 즐거움이 번개 위에 놓인다
너의 즐거움은 번개로부터 숲으로 내려갔다*
창밖 회색 어둠이 검보라색으로 바뀌고 숲이 어두워진다
*이서영
광장과 그림자
*
너는 두려움이다, 순진무구의 눈빛이 두려움이고 잘 견디는 것이 두려움이다
너는 모호한 눈빛으로 두려움이다 검은 대륙의 모호한 새벽으로 두려움이다
부활하지 못하는 낡은 말들을 수목장으로 떠나보낸다
나뭇잎들이 우우우 울어준다, 말들이 어깨를 좁혀 따라 운다
울음이 두려움이다
나무 뒤에서 주술을 외우는 사내가 두려움이다
네가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다 뒤돌아섰다
역 광장은 가을 햇볕 가득했다
수많은 인파가 그림자를 이끌고 어디론지 바쁘게 사라지고 있다
저처럼,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두려움이다
*
세상은 순진하지도, 무구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흔들리는 눈빛을 숨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네가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간 후의 일이다
이제 두려움은 없다, 바늘끝 모련이 있을 뿐
광장의 햇볕은 더 찬란하고 짧아진 그림자들은 더 분주하다
빈자리기 커진다
빛이 없는 너, 소리 없이 파멸하고 있지*
*이서영
그건 기만이고 슬픔이다
하루 종일 뉴스를 읽는다 뉴스 속으로 지루한 시간이 흐른다 펼쳐놓은 횔덜린은 아직 반도 더 남았다 가끔 어느 행에 걸려 넋을 놓을 때가 있기는 하다 횔덜린은 밀고나가기 벅차다
창밖으로 비안개가 짙다 겹겹의 능선이 흐려져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저 능선들이 보이게 될지, 비안개는 무심이다 산자락의 상수리나무들이 비안개의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떼 새들은 어느 숲에 들어 이슬비를 피하는지 사위가 조용하다
골목은 하루 종일 비어 있고 아이들 웃음소리는 담장 뒤로 숨었다 농구코트에서 공을 드리볼 하는 거친 숨소리도 사라졌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은 며칠 째 주인을 기다린다 마음 속 요일과 날짜가 느리게 넘겨진다 아직은 깎지 않아도 될 연필을 다시 깎는다
기상캐스터의 의상은 가벼워졌는데 표정이 무겁다 남자 아나운서의 한결 같은 억양이 지루해졌다 우울하고 지루해도 트롯은 들린다 트롯은 많은 우울과 어둠을 건너왔거나 건너고 있다 분노를 외면한 남자가 무사히 건너면 세계적인 나라가 된다고 말 한다
조상은 모래와 자갈이 있는 무덤에 봉해져 있었다*
역병은 기만이고 슬픔이다
미친
*이서영
호피폴라의 첼로
*
누구나 무엇엔가 미쳐서 산다
미쳐야 산다, 미치지 않고 살아가라는 것은 형벌이다
나는 홍진호의 첼로에 미쳤다
첼로는 나의 고뇌고 흠모고 연민이다
첼로의 선율이 시작되면 혼곤해진다
그는 대중음악의 모세다 그의 손끝에서 나는 깊고 그윽한 선율이 청중의 바다를 가른다
김영소의 기타 리듬도 아일의 건반과 하현상의 보컬도 첼로를 넘지 못한다
그의 첼로는 마음을 녹인다 아니다 뼈를 녹인다
뼈가 녹으니 나무도 녹고 우상도 녹는다
그의 첼로는 부드러운 반역이다
그는 부드러운 카스트로다 혁명투사다
아니다 체 게바라다 미완의 혁명투사다
그의 연주에서 붉은 장미향이 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미완의 음역에 머물 첼로의 예감으로 며칠을 불면이다
필경은 미답의 길이거나 소멸의 길이거나
불타고 있는 나무의 숨결이거나 무늬가 없는 매미의 날개이거나*
이 불길한
*이서영 변주
코백은 꿈꾼다
*
코백 이후 무엇에도 미쳐지지 않는다
코백을 몇 번이나 다시 깔았다
시간마다 코백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는 매일 조금씩 코백에 미쳐갔다
코백은 희망인가
코백은 절망인가
코백은 무엇인가
코백은 눈물 나고 두렵고 의구심 투성이다
코백을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다스리는 자다
코백 속에서 세계가 불안을 향해서 움직인다
코백은 모든 항로를 폐쇄하고 고립무원의 공포를 이식 한다
코백은 세계 정복을 꿈꾼다
드디어 팬더믹이 선포되었다
*
허황한 석양이 또박또박 걸어가며 피눈물 흘리고 흐느끼는 말*
너희들 아직 숨 쉬고 있다
서서히 미쳐가며
*이서영
말레콘
말레콘을 다시 찾는다
말레콘은 충동 아니다
말레콘 앞바다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되었다
말레콘 앞바다는 무슨 말로 표현해도 부족한 색깔이다
심지어 커피의 맛에 따라 바다는 다른 색깔을 입는다
바다의 색깔은 무한 이어서 한 번도 같은 색깔을 보여준 일이 없다
방파제에 와서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은 눈부신 흰색이다
포말의 뒤로 거대한 파도의 성채다
파도의 성채는 무수한 영혼의 거처다
그곳에 내 거처가 있다는 걸 아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도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 후 고열에 시달렸다
파도의 울음은 주술이었다
밤마다 방파제로 영혼을 불러냈다
파도는 무수한 발자국을 씻어 냈지만 자신의 죄증을 없앨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서영
마리아넬라의 혁명
*
그녀가 아투로를 만나 건 운명 아니다
실패한 혁명이 운명이다
그녀는 아투로를 극단의 대치로 끌고 갔다
그럴수록 아투로는 그녀의 혁명을 증오했다
처음부터 아투로가 그녀를 탈출의 출구로 삼으려 했던 건 아니다
그녀를 야구장으로 불러내 ‘판타지 이스케이프’를 트럼펫으로 연주한 건 음모였다
당신을 위한 즉흥곡이지, 곡목은 마리아넬라야라고 말한 것은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판타지 이스케이프’는 아투로의 탈출 음모가 숨겨진 반혁명 판타지다
아투로에게 쿠바는 슬픈 조국이었다
*
그는 혁명에 반기를 들었으므로 고백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녀는 혁명에 실패 했으므로 고백을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혁명의 시작은 눈빛이고 혁명의 완성은 배반이다
하바나에서는 누구나 트럼펫 연주곡 ‘판타지 이스케이프’를 감상할 수 있다
그것으로 반혁명분자가 되는 건 아니다
등을 돌렸을 때 째즈는 범죄다
두려울 수는 있어도 절망 할 수는 없다
모든 문장의 거짓을 들춰내고 석관에 봉인된 지혜를 해방 하는 일*
그녀에게는 그게 전부다
*이서영 변주
내 영혼이 두려워진다
붉은 땅을 걷는다, 몽유의 덫이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사막뱀이 빠르게 달아난다
하늘을 맴도는 흰머리독수리는 숫자가 늘어났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독수리의 거대한 날개가 내 그림자를 덮치기도 한다
나는 놀라 돌무더기 위에 엎드린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간 자들이 있다
그들은 저쪽에 닿았을 거다
저쪽은 신탁의 땅이거나 불의 바다일지 모른다
그렇게 사라지는 거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들은
선채로 시계추처럼 몸을 흔들거나 주문을 외운다
말의 흰 정강이뼈 사이에 사막여우 한 마리가 몸을 낮춘다
잠간 사이 사막여우는 세 마리가 되고 다섯 마리가 된다
내 영혼이 두려워진다
영혼은 멀리 나갔다 잠든 사이에 지쳐 돌아온다
돌아온 영혼에서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종루에 오르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이 세상이 오래 된 색깔과 오래 된 냄새라고 생각 한다
황무한 길은 일몰의 붉은 가슴으로 휘어진다
나는 붉은 대지에 엎드린 영혼으로 통곡하고 싶다*
*이서영 변주
고문
*
흩어진 머리칼이 고문이고 슬픔에 찬 눈이 고문이다
조용한 발소리가 고문이고 희미한 미소가 고문이다
희고 긴 손가락이 고문이고 붉은 수술 자국이 고문이다
침묵이 고문이고 그레고리오 성가가 고문이다
뜨거운 몸이 고문이고 복부의 십자가 문신이 고문이다
*
좌파에게는 검회색 성전이 고문이고 우파에게는 협곡으로 난 통로가 고문이다
시인에게는 깊어지는 계절이 고문이고 철학자에게는 성당 바닥의 돌무덤이 고문이다
사야트 노바에게는 아흐파트 수도원이 고문이고 사제에게는 흔들리는 영혼이 고문이다
사원에서 암살당한 음유시인은 그의 본명, 아루틴 사야다가 고문이다
본명으로 살지 못한 일생이 고문이고 수많은 몰락의 문장이 고문이다
쓰는 일이 고문이라면 문장은 고문으로 만들어진 감옥이다
*
홍수의 품에서 잠든 나무처럼 닿을 기슭을 기다리*는 일은 고문 아니다
*이서영
시나힌 수도원
시나힌 수도원으로 가겠네 가서 사제가 되겠네
침묵으로 십년쯤 보내며 세상의 말을 버리겠네
말소리가 조용해지고 기척이 적어지는 건 세사를 버리겠는 의미다 미궁의 나날들이 무겁게 흘러간다 석류나무 그늘이 하루의 모서리를 건너며 길어지는 걸 보는 날은 가창오리떼가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 마음이 들끓는다 계절을 보내는 일이 왕대나무를 꺾는 고통이다
미궁 이후 모란 꽃망울 보는 일로 붉어지는 호수를 건넌다 호수가 검게 변한 후에 돌아오는 서재는 어둠의 밀실이다 불을 밝히지 않고 밤을 지샌다 달이 빠르게 숲을 버리고 서산에 머문다 마음이 달빛에 그을린다 가슴에 손을 얹는다 심장은 멎은지 오래다 유령으로 살아온 날들이 아프다
미혹의 날들이 많아지며 궁극은 나 자신이었다 문장을 의심하고 신념을 의심하고 우정을 의심하고 마침내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시나힌 수도원은 구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수도원의 검은 벽과 구멍 뚫린 지붕과 중앙돔을 지탱하고 있는 돌기둥의 경건을 내 문장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미혹을 끝낼 수 있을지
영원히 피가 나는 곳은 아물고 싶지 않은 상처*이고 싶네
상처가 시나힌 수도원이었네
*이서영
너 안의 나
네가 왜 흰 회벽으로 된 방에 유폐되어 있는지
너는 천천히 하얀 회벽을 둘러보거나
낡은 서간집의 표지를 들여다보거나
부장품, 레벡의 네 현을 튕겨보거나
Time to say good bye를 낮은 음으로 노래하거나
여러 개의 촛불을 창틀에 올려놓는다
너의 실루엣이 하얀 회벽에 유령처럼 일렁인다
젖은 눈을 감았다 뜨면 낮이고 다시 감았다 뜨면 밤이다
밤과 낮이 눈동자 안에 있다
창틀의 촛불이 영혼을 보내고 꺼지기 시작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너 안의 나
황홀한 착란의 시절은 스치듯 지나갔다
유폐는 너의 선택이었다, 밤은 며칠 씩 계속되었으니
너 안에서 잠시 행복했고, 늘 얼어 있는 입술로 불행했다
내가 두 손으로 너의 언 입술을 녹여야 할까 아니면 얼려야 할까*
다음 생까지는 멀고
*이서영
비탄
*
남자의 회칠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죽음이 없는 땅이다
그는 얼굴에 회칠을 했으므로 이미 그곳에 가 있을 것이다
여자는 비탄에 잠긴다
여자가 가 닿을 수 없는 곳
*
여자는 먼 대륙의 낯선 냄새와 생명력 넘치는 리듬을 택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며 자신을 모두 지울 것이다
새로운 대지에서 두려움 없는 아침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으나 절망을 건너는 달빛을 외면했다
남자는 비탄을 몰랐고 여자는 알아 심장을 긋는 칼날을 숨겨 왔다
여자는 청년 왕의 비밀한 커튼을 찢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왕은 황금 데드마스크를 남겼다
청년 왕이 사랑했던 아내, 친누이는 그가 살해된 후 외할아버지의 아내가 되었다
여자는 비탄이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비탄의 힘으로 생이 완성되는 대륙은 누군가의 조국이 될 것이다
남자가 잃은 무게는 밀림이 되어 여자의 가슴에 매달릴* 거고
*이서영 변주
밀랍의 성채
불길이었던 날, 밀랍의 성채는 녹아내렸다
성채는 몸이었으니
밀랍은 말이었으니
말로 세운 몸이었다 언약은 달콤하고 무거웠다
밀랍의 성채에서 일생을 마칠 수도 있을 거라며 나비를 불러 모았다
날개의 현란한 문양은 어둠이 바탕이었다
단 한 번의 불길로 녹아내린 밀랍의 성채
그 허약한 말의 몸들
긴 혀를 가지도고, 깊은 눈빛을 가지고도 막을 수 없었던 불길이었다
정념은 시퍼런 속불꽃
불꽃의 혀는 사악했다
새벽을 안았던 뼈들이 돌아갈 길에서 혼돈을 겪었다
미선나무 흰 꽃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순결만으로 울음을 멈출 수 있는
몸은,
여전히 밤낮을 뒤바꾸고 있다*
뒤바뀌지 않는
*이서영
시작하는 빛
네가 트랩에 오르던 날의 하루는 무겁고 두려웠다
줄곧 생각했던 말이 소유였다 증오라는 말이 먼저였던 것 같다
너를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으로 만들고 싶다
백년이 지나도 작은 씨앗 속에 웅크리고 있는 너를 생각 했다
그것으로 소유가 끝난 것은 아니다
너를 남극개미자리꽃으로 숨어 피게 하고 싶다
누구도 볼 수 없는 작은 꽃으로 남극의 바람소리를 듣게 하고 싶다
너를 완벽하게 소유하는 길은 또 있다
너를 내 안에 묻는 일이다
내 안에 지하궁전을 짖고 그곳에 영주하게 하는 것이다
완벽한 소유는 완벽한 복수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너는 떠났고 나는 이 봄을 건너고 있다
빛이 시작되고 있다
좀 더 늦게 나의 터무니없음을 비웃*기를
*이서영
검은 불꽃
*
검은 불꽃이어서 검은 웃음이어서 검은 마음이어서
세상은 검게 물들고
검은 목련이 피고 검은 안개가 흐르고
검은 독수리의 계절은 끝이 안 보인다
모든 문은 검은 세계로 열려 있다
검어서 친근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다
검은 불꽃은 아무 것도 불사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불사른 후 붉은 재가 남는다
독선의 죽음들이 검은 사람을 복제 한다
붉은 재는 복제 인간의 감정이 타버린 흔적이다
검은 불꽃이 사방으로 번지며
잠간 사이에 봄꽃들이 검게 핀다
검어서 매혹적인 꽃들, 위에 검은 햇빛이 내린다
꽃잎을 열어 햇빛과 입 맞추는 검은 꽃들
검은 관이 가지런하게 놓인 성당의 성모상
검은 미소를 띈다
*
대지는 아직 침묵하지 않았다*
*이서영
위로
*
역병으로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급한다는 지역화폐,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래시장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치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길들여진다, 누추해진다
제발 멈췄으면 좋겠다, 요즘 100 이내의 숫자가 하루하루 눈물겹다
*
여러 색깔들은 색깔로 말 한다
당신의 살도 나의 살, 당신의 뼈도 나의 뼈
여러 색깔들은 색깔로 말 한다
나의 살은 나의 살, 나의 뼈는 나의 뼈
*
매일 보는 그들이 씻지 않는 발로 포도송이를 밟아 즙을 낸다
포도즙은 그들이 말한 거룩함이다*
*이서영 변주
꽃 핀 봄날의 모욕
*
피를 나누지 않았으면 영혼을 나눠야 한다고
몰래 핀 미선나무 흰 꽃이 가여웠다
봄 아니라고 꽃망울 웅크리고 막무가내
이봄을 건너가 줄 수 없었는지,
산그늘 슬쩍 걸치고 이팝나무 아래
달빛 모르게 몰래 핀 미선나무 흰 꽃이여
너 가여웠다
피를 나누지 않았으면 영혼을 나눠야 한다고
남몰래 바람 훔치고 햇살 훔치고 저처럼
환하게 봄을 부르지는 않았을,
수심으로 하얗게 번지는
너를 달빛 모르게 건너는 밤이여
너여서 더 가여웠다
너는 피를 나눈 사이 아니라서
바람 많은 날 미선나무 아래 네 영혼을 묻는다
*
피와 영혼 나누지 않은 채 나, 살아 있어
꽃 핀 봄날은 내게
질문
젊음은 어둠을 찢고 불꽃으로 솟아오른다
소복의 노모가 분향하려는 손을 잡고 묻는다
희생은 언제나 순결한가요?
분향하려던 손은 잠시 멈춘다
희생은 언제나 순결한가요?
분향하려던 손은 하늘을 가리킨다
노모는 하늘을 쳐다본다
빈 하늘이다
깊은 주름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분향하려던 손이 분향을 마치고 돌아선다
멀리서 조포가 울린다
일상은 언제나 냉혹해서 희생은 파도 멀리 사라지곤 한다
슬픔 더 깊어지는 갑판에는 바람이 잠시 머물다 떠날 뿐
묘비명을 읽어주는 유족의 눈망울은 떠 있다
노모는 꿈 속에서도 가슴을 친다
희생은 언제나
꽃들의 경련
*
네가 보았다면 진실이다
산수유가 노랗게 치정의 말들을 버리고
진달래가 욕정을 못 이겨 질펀하게 누웠다
너는 꽃들의 경련을 본 것이다
꽃들은 치정과 욕정 사이에
길게는 열흘 간의 생애를 던진다
꽃잎 한 장에 바람을 담고 꽃잎 한 장에 햇빛을 담고
꽃잎 한 장에 달그림자를 그리고 꽃잎 한 장에 비탄을 그리고
뛰어내리는 그곳이
대지거나 강물이거나
낙화의 순간은 숨 막히는 적막이어서
네가 보았다면 진실에 가깝다
*
그곳은 어둠의 숲이거나 소신의 꽃불이다
대리석 관뚜껑에 새겨진 명문은 숨겨졌던 연서였다
가슴에 새겨져야 거미줄 위로 파경을 옮길 수 있다
네가 나를 뛰어내리는 그곳은
협곡
갈망은 협곡이다 협곡에는 얼마나 많은 낭패가 쌓이게 될는지, 갈망의 끝은 번뇌다 갈망은 공원묘지가 보이는 언덕의 저물녘 풍경이다 갈망은 새들의 붉은 발가락을 부르기도 하고 눈물의 깊이를 부르기도 하고 저주하는 입술을 부르기도 했다 그것들은 실의를 남기고 생애에서 사라졌다 생애는 문장보다 짧았으며 문장은 겨울 해보다 짧았다
갈망은 먼 눈빛으로 산동백을 꽃 피우게 했다 그 감동으로 몇 년을 견딜 수 있었다 미친 듯 바람 뒤집히던 날 갈망은 낯선 체취로 무너지는 불빛이었다 문밖에서는 강물이 흐느끼며 흘러갔다 불빛이 강물에 얹혀 나머지 생을 흘러가고 있었다
갈망은 달빛 사원을 세웠다 달빛 사원에는 죽은 자들의 거울이 파경의 모습으로 살아 있어 피투성이의 몽유를 비춰주었다 파경은 찢어진 세상이었다 달빛 사원 흐려지고 암전의 날들이 빠르게 갔다 눈빛이 흐려지면 의식은 선명해진다 몰락의 징후가 보이는 것이다
갈망이 건널 수 없는 협곡의 시절은 계속 된다
너는 불이다
*
숲은 타오르는 불이다
핏줄과 발가락과 정강이뼈와 입술은 숲이 만든 불이다
숲은 뼈고 근육이고 심장이고 눈빛이다
숲은 영혼이다
숲의 어둠은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어둠 깊은 이유를 다 말 할 수 없다
뻐근해지는 가슴이어서
*
불타고 난 재다
훼멸되는 마지막 문장이다
핏줄에 친 거미줄, 살이 녹아내린 발가락, 희게 빛나는 정강이뼈, 사라진 입술은 잿빛 선명이다
뼈가 불탔고 근육이 불탔고 심장이 불탔고 눈빛이 마지막까지 불 속에 있었다
그것들로 완성에 이르지 못 한다
눈빛은 마지막까지 불 속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영웅
그의 진료실에는 낡은 청진기가 놓여 있다
작은 개인병원의 청진기는 영웅의 애장품은 아니다
영웅의 애장품은 낡은 폐와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었다
손끝으로 질병의 징후를 읽어냈다
자상하고 꼼꼼한 진찰이 치료의 절반이었다
청도의 인술은 역병의 대구에서 사투를 벌렸다
그가 죽음의 왕관을 썼다
영웅의 장례식에 유족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자가 격리 중이었다
그가 왜 진정한 영웅인가를 생각 한다
크레타섬에서 울다
그 섬에 가면 영웅을 낳은 어머니의 무덤을 볼 수 있다
그 섬의 영웅은 섬을 지켜내려다 전사한 민병들이었다
공동묘지에는 전사자들의 어머니가 불편하게 누워 있다
영혼들은 밤이면 분노하고 소리치고 흐느낀다
수퍼문이 떠오르는 밤이면 모든 어머니들이 무덤에서 나와 춤춘다
딱 하룻밤이다 그 밤은 영웅을 낳은 여인들 같지 않다
수퍼문이 분홍빛으로 물들면 영혼들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섬에는 분노와 정의가 서로를 놓아주지 않아 바람이 세차다
그 섬의 어머니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 절규를 그가 들었을 것이다
수퍼문을 보며 크레타 섬에서 울다
바닷가의 이별
*
두 사내의 이별 형식은 시르타키 춤으로 끝났다
어깨에 맨 산투르를 추스르며 떠나는 사내가 말 한다*
- 내가 어떻게 당신과 헤어질까, 당신 없는 이별을 어떻게 견딜까
의자에 앉아 고뇌하던 사내가 말 한다
- 차라리 내가 불운하여, 당신을 만난 적 없다고 맹세 하리
떠나는 사내가 눈물 글썽이며 대답 한다
- 나 역시 당신 본 적 없다고 말 하리
사내가 떠나자 산투르의 현란한 음률이 에게해를 끌어당겨 춤추게 한다
고뇌하는 사내의 가슴 속 촛불이 꺼진다
*
너를 만난 적 없다고 담담하게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통 없이 서로의 눈빛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슴 속 파란 불꽃은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그림자도 대숲에 남아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언약을 단번에 삭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니셜이 찍힌 가죽 명함집은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일몰의 바닷가에는 서지 않겠다
씁쓸한
*영화 카잔차키스
파탄은 온다
파탄은 온다
너는 빛을 암울한 노래로 응답했다
너는 기쁨을 침묵의 노래로 응답했다
뼈를 뼈로 응답하지 못하고 살을 살로 응답하지 못하는 질문은 기록할 꽃잎이 없다
쑥부쟁이 어린 싹들이 이주의 미로로 응답했다
쑥부쟁이의 응답은 해다마 다르다
꽃잎을 꽃잎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쑥부쟁이의 슬픔은 쑥부쟁이에 머물지 않는다
봄을 봄으로, 가을을 가을로 응답하지 못하면 사랑을 노래할 수 없다
사랑의 응답은 몸 아니다
어째서 몸 아닌 것들이 몸으로 와 있는지 너는 알고 있다
배반과 음모를 쌓아 몸이었다
몸은 거짓투성이의 서약으로 밤마다 사라지는 침대다
못 견디는 것은 응답하는 몸이다
너의 마지막 꽃그늘로
욕망은 불운을 부르는 몰락의 함정이다
*
산비둘기가 유리창에 부딪쳐 심장이 멎었다
다섯 번째 새의 죽음이다
유리창은 새들의 묘지가 되고 있다
불운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새들의 불운은 유리창에서 구름이 사라질 때가지 계속 될 것이다
*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 왔다
소유의 노예가 된지 오래 되었다
가장 무거운 것이 욕망의 용량이다
욕망의 저장소는 세상을 불태울 야망으로 가득하다
꽃이 피고 증오가 커지고 밀어들이 현란하고 저주가 일상인 기억은 무겁다
욕망은 불운을 부르는 몰락의 함정이다
불운은 생애를 끝까지 소요하고 나서 명운을 받아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그 곳에는
봄 흙 같은 가슴을 줄 수 있겠니?
봄 흙 같은 눈빛을 줄 수 있겠니?
봄 흙 속에 누워 한나절을 보내며 얻은 문장이다
그 곳에는 뿌리들의 웃음이 터지고
그 곳에는 아직 꽃망울이 되지 않은 구름이 흐르고
그 곳에는 뉴욕이 서고 모스크바가 서고, 서울이, 평양이 세워진다
그 곳에는 지상의 모든 역사가 지층으로 쌓이고
그 곳에는 모든 살상무기들이 숨어 있다
그 곳에는 크롬6가 생명수와 함께 흐르기도 한다
그 곳에는 인문학의 원형이, 의학의 진료들이, 과학의 원소들이 질서정연이다
그 곳에는 증오와 사랑이, 눈물과 연민이 광맥으로 박혀 있다
그 곳은 지상의 탄생에 맞춰 지하의 거처를 예비 한다
봄 흙 속의 거처는 따스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사랑스럽고 두려운 봄의 대지
몽유
마음 속 소용돌이가 무섭다
분노이기도하고 저주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하고 파멸이기도한
마음 속 소용돌이가 치면
나는 잠에 빠진다 잠은 며칠 씩 계속 된다
그 후는 몽유다
검은 공간에서, 서가의 책을 하루 종일 펼쳐본다
책의 오래된 냄새가 마음 속 소용돌이를 진정시키지 못한다
내게 온 이메일을 소급해서 읽는다
숫자로 가득한 메일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거리는 온통 데드 마스크다
죽은 자들의 신발을 다 꺼내놓는다
산 자의 신발이 사라졌다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 손을 씻는다
손이 사라진 손, 발이 사라진 발, 얼굴이 사라진 얼굴은 망연이다
무엇을 만질 때마다 손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
경계를 걸을 때마다 발은 주금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
신 앞에 나설 때마다 얼굴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
조금씩 사리지고 있는 영혼은 몽유다
지금 몇 시인가
섬광
섬광은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
요양병원에서 함께 겨울을 났던 언니 동생들이라고
구룡포의 권선희 시인이 페북에 올렸다
일주일 간격으로 세 여자들이 별이 되었다
57년이건 44년이건 38년이건
머물고 있는 영혼의 시간은 섬광이다
누구나 섬광을 살다 영원한 별이 되는 것이다
섬의 심연
국화도의 여름 한낮은 끓는 납이었다
선착장에는 무거운 침묵의 눈이 장고항을 건너다보고 있을 뿐
침묵은 무심해서 누가 떠나거나 돌아와도 침묵이다
침묵은 섬의 심연이다
승선표를 받는 노인은 섬의 심연을 침묵 위에 세우고 검은 얼굴이다
간이 커피점은 언덕 위에서 폭염을 먹고 있다
폭염은 섬의 심연을 해저에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필리핀 이주 여성은 커피점의 안주인이다
흘러흘러 장고항이었던 그녀에게 섬 남자는 커피점을 차려주었다
그녀는 섬의 심연이었다
섬 남자는 그녀의 심연이었다
국화도의 심연은 작은 광장에 서 있는 벼락 맞은 해송 거목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뱃길에서 섬의 심연이 여름 한낮의 상사였던 걸 깨닫는다
삶은 누구를 버리는 일이다
*
삶은 누구를 만나 설레는 일이다
삶은 누구를 만나 실망하는 일이다
삶은 누구를 만나 분노하는 일이다
삶은 누구를 만나 돌아서는 일이다
삶은 누구를 버리는 일이다
*
절창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문장을 만나면 피가 끓는다
평생 두 감옥 속에 살았다
作詩면 어떻고 詩作이면 무엇이 다른가
시인을 만나 따뜻해서 어깨를 안았다
시인을 만나 황홀해서 눈물이 났다
시란 어둠 속에 세상을 버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