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전 시골교회의 비밀결혼식과 다이애나와 카밀라의 비밀 코드(?)
인도와도 안 바꾼다는 영국의 트레이드마크, 셰익스피어
그가 나고 자란 마을, 그가 사랑하고 그의 삶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고장, 또한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동네, 그로 인해서 더욱 유명해진 마을, 게다가 덤으로 그로 인하여 먹고 사는(?) 동네, 스트렛포드 어픈 에이본(stratford upon avon).
셰익스피어의 고장(Shakespeare Country)로 가기 전에 먼저 둘러볼 곳이 있다. 그 곳은 다름아니라 셰익스피어 마을 가기 직전에 있는 시골마을 어느 교회이다. Wootten Wawen에 작고 아담한 성 베드로 교회가 바로 그 곳이다. 오늘날 영국 챨스 왕세자의 결혼을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가는데, 그와 또 같지는 않지만, 조금은 비슷한 역사가 있는 교회 옆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차 속에서 영국 안내인의 설명을 듣는 순간 얼른 찍은 그 교회의 모습 , 왼쪽 11시 방향
트렛포드 운하가 옆으로 흐르는 Wootten Wawen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젊은 날의 리젠트 왕자
리젠트 왕자(The Prince Regent)는 조지3세의 큰아들이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아버지와 달랐다. 정치적으로는 반대입장을 취하고, 여자는 무지 밝히고 등. 정치 면에서조지 3세는 토리당의 수상을 더 좋아했지만, 왕자는 휘그당에 더 우호적이었다. 여자문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왕자는 한때 결혼한 여배우(Perdita Robinson)와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카톨릭교도인 과부 Maria Fitzherbert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가 더 이상 그의 정부로 남아있기를 거부하자 결국 왕자는 그녀와 결혼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밀결혼식이 바로 이 교회, 스트렛포드 운하가 옆에 흐르는 Wootten Wawen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올려지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결혼법에 의하면 왕실가족이 로마카톨릭교도와 결혼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웨일즈 왕자는 도박을 좋아하고 여자를 무지 밝히는데다 술을 많이 마셨다. 또한 그는 멋쟁이로서 자칭 “유럽의 최초의 신사(‘the first gentleman of Europe’)였다. 그런데 그가 많은 빚을 지게 되자, 의회는 그의 수당을 논란 끝에 인상시켜 주게 된다. 그때 아버지는 잘못 가르친 젊은 놈의 정욕을 채워주기 위해 공공자금을 부끄럽게 낭비했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근데 그의 빚을 청산시키기 위해 의회를 설득시키는 노력의 하나로, 왕자는 그의 사촌인 Caroline of Brunswick와 결혼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첫 딸(Princess Charlotte)을 나은 후에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1811년 아버지는 정신이 이상해져 더 이상 왕의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리젠트왕자가 조지 4세(George IV)로 임명되었다가 아버지가 죽은 1820년에야 조지4세라는 왕이 된다. 왕자는 휘그당을 지지한다고 약속했지만, 왕이 되고나서는 리버풀경이 이끄는 토리당의 강력한 지지자가 된다. 캐롤라인은 왕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와 대관식에 나타났으나, 웨스트민스터 사원 정문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엄청난 동정을 유발하였고, 새로운 왕에 대해 많은 데모가 일어났다. 조지 4세는 리버풀경의 토리당 정부를 설득해서 캐롤라인의 왕비 직위를 박탈하고 그들의 결혼을 영원히 전적으로 무효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심지어 어느 작가(Jane Austen)는 신실하지 못한 왕을 비난하면서 캐롤라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불쌍한 여인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 여자이고 나는 당신이 혐오하는 그 남자를 증오하기 때문입니다”라고.
"Poor woman, I shall support her as long as I can, because she is a Woman, & because I hate her Husband... a Man whom she must detest..."
그의 남은 재임기간동안 조지4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건강이 더 나빠졌다. 1820년대에 그는 엄청난 뚱땡이가 되고 알콜과 아편중독자가 되었다.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정신이 이상해져, 실성하여 자신이 워털루전쟁 때 군인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윈저성에서 점점 고립되어 외롭게 살다가, 결국 1830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진 : 왕이 된 후 조지 4세의 커리커츄어
셰익스피어가 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스트랫포드 어픈 에이본 가기 직전에 있는 Wootten Wawen에 작고 아담한 교회가 있다. 리젠트 왕자를 챨스황태자에 비유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있지만, 교회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린 과부 Marie Fizuebert는 어쩌면 카밀라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더군다나 비록 사랑없이 결혼을 하고 딸하나 낳고 둘 사이는 멀어졌지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갔다가 정문에서 쫒겨나야만 했던 비운의 왕비Caroline of Bronswick. 그녀는 비명에 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처지가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찰스 왕세자(56)는 오는 2005년 4월 8일에 카밀라 파커 볼스(57)와 재혼한다. 그는 1997년 자동차 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이혼했고, 카밀라 역시 지금은 이혼한 상태이지만, 전 남편이 생존해 있다.
사진 : 다이애나 왕세자비 장례식 행렬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와의 재혼은 '합법'이라고 영국 최고위 법관(헌법부 장관)이 유권 해석을 내렸다지만, 말들이 많다. 영국 일간신문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5%가 왕세자와 카밀라의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40% 정도였는데.. 왕세자의 재혼식은 그가 왕위 계승 후 수장을 맡게 될 영국 국교 성공회측이 이혼부부의 배우자가 생존해 있는 경우 교회의 공식적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밝힘에 따라 세속 혼례(civil marriage) 절차를 따르게 됐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세자의 재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세속 예식에 이어 런던 교외 윈저궁의 예배당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전으로 열리는 축복 행사에는 자리를 함께 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1534년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로 교황청과 결별함으로써 출범했지만, 왕실의 이혼에는 줄곧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1936년에 에드워드 8세는 두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 미국 출신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려 했으나 교회가 반대하자 왕위를 버렸다. 반면 1955년 찰스의 고모인 마거릿 공주는 왕족의 지위와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사귀던 이혼남과 결별해야 했다. 이젠 세상이 바뀌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찰스와 카밀라의 결혼을 허락하고 축복했다지만, 찰스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이혼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는지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조선시대 우리네 폐위된 왕비들을 생각해본다. 조선시대 9대 임금 성종의 후실인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친모이면서, 갑자사화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어 연산군의 정실부인 폐비 신씨 도 그랬다. 다만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되었고,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와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는 사후에서야 복위되었다. 사극을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한 많은 비련의 주인공들의 처지가 마음에 내내 아련하게 남는다.
비운의 주인공 다이애나는 영국 국민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다이애나가 생전에 카밀라를 사냥감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로트바일러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지만, 카밀라에게 부여된 이미지는 마녀나 가정파괴범 같은 것이었다. 챨스는 다이애나에겐 몹쓸 사람이었지만, 35년을 기다려 젊고 예쁜 여성 대신 늙고 매력적이지 않은 커밀라를 선택했다. 35년간을 기다려온 부적절한 사랑(?). 누구 말대로 이것이 포스트모던 사랑인가 ? 뉴욕타임스는 “다이애나가 조건 없이 사랑 받기를 갈구하는 여성들을 대변했다면, 카밀라의 결혼은 운명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울한 이야기를 뒤로 하고, 사랑을 위해 왕위마저 버린 세기의 러브스토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의 고귀한 사랑을...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되었지만, 당시 왕실결혼법상 이혼한 여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심슨부인과 함께 할수 없다면 왕이 된들 의미가 없다는 연설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936년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되었다는 에드워드 왕의 연설문을 옮겨 적는다.
King Edward VIII's Farewell Speech (Dec.11,1936)
At long last I am able to say a few words of my own. I have never wanted to withhold anything, but until now it has not been constitutionally possible for me to speak.
A few hours ago I discharged my last duty as king and emperor, and now that I have been succeeded by my brother, the duke of York, my first words must be to declare my allegiance to him. This I do with all my heart.
You all know the reasons which have impelled me to renounce the throne. But I want you to understand that in making up my mind I did not forget the country or the empire, which, as prince of Wales and lately as king, I have for twenty-five years tried to serve.
But you must believe me when I tell you that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and to discharge my duties as king as I would wish to do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