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작가의 단편소설집 『혼모노』를 읽고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다.
성해나 작가의 단편소설집 『혼모노』를 읽었습니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쉽게 읽히지만, 이야기가 던지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조해진 작가의 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아마도 제가 살아오며 관심을 가져온 문제들과 성해나 작가가 바라보는 지점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문체나 구성이 제가 선호하는 형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사회복지시설 운영자인 나윤선 선생님의 강의에서 들었던 ‘인간의 존엄’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혼모노』를 읽으며 받은 감동 역시 결국 그곳으로 향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존중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집 혼모노]
성해나의 두 번째 소설집 『혼모노』에는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스무드」, 「혼모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우호적 감정」, 「잉태기」, 「메탈」 등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작품의 소재와 분위기는 서로 다르지만 인간의 선택과 감정, 존엄과 사랑, 시간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를 이어갑니다.
1.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 인간은 자신의 결정에 얼마나 매몰될 수 있는가
논란에 휩싸인 영화감독 김곤을 여전히 좋아하는 팬들의 이야기입니다. 촬영 과정에서 어린 배우를 가혹하게 대했다는 논란이 생기고 팬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생기지만, 화자는 그의 작품을 계속 좋아하며 ‘길티 클럽’에 남습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그것이 옳은가 하는 죄책감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한번 선택한 대상과 판단에 얼마나 깊이 매몰될 수 있는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그것을 신념이나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최근 정치판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지지와 맹목적인 편들기도 떠올리게 합니다.
2. 「스무드」 —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얄팍한가
한국계 미국인 듀이는 업무 때문에 한국을 찾았다가 우연히 태극기집회 속으로 들어갑니다.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그곳에서 자신에게 음식과 도움을 건네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경험합니다.
정치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친절을 경험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정치적 신념과 개인적인 친절 가운데 어느 것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일까요. 인간의 감정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쉽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람은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3. 「혼모노」 — 나의 존엄은 내가 지켜야 하는가
표제작 「혼모노」의 주인공 문수는 오랫동안 장수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지켜주던 신이 떠나고 그 신을 새롭게 모시는 젊은 무당이 등장하면서 평생 믿어온 자신의 능력과 존재의 근거가 흔들립니다.
‘혼모노’는 ‘진짜’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짜인가, 저 사람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한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해서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능력이나 사회적 인정이 사라져도 인간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인정이 사라진 순간에도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4.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 사람은 어떻게 각성되는가
고문시설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을 설계하는 스승 여재화와 제자 구보승이 등장합니다. 스승에게 건축은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는 기회이지만, 제자는 그 공간 안에 들어갈 인간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효율적인 건축이라도 그곳에서 사람이 고통받는다면 좋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개인의 성공과 전문성이 인간의 고통보다 앞설 수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람의 각성은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흔들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5. 「우호적 감정」 — 개인이 개인을 넘어서는 감정은 가능한가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화자는 새로운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년 직원 ‘진’을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그를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회사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배려’라고 믿었던 감정도 달라집니다.
공정, 수평적 관계, 신뢰, 공동체, 배려라는 말 뒤에도 이해관계와 계산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마음속에도 우월감이나 자기만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 온전히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개인이 개인을 넘어서는 감정이 가능한지를 묻게 합니다.
6. 「잉태기」 — 인간은 과연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가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의 욕망이 충돌합니다.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식에게 자신의 바람을 투영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랑과 통제의 경계는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앞세운다면 그것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타인의 존엄을 인정한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나와 다른 독립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7. 「메탈」 — 인생에서 세월은 그저 지나야 하는 기간인가
학창시절 메탈 밴드를 함께했던 세 친구가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함께했던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 가까웠던 사람과 한때 간절했던 꿈이 사라졌다고 그 시절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사람을 저절로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과거의 선택과 관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은 단순히 지나가야 하는 기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혼모노』를 읽고 남는 것]
성해나는 여성 작가이지만 여성의 입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작품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삶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성별을 넘어 인간 자체의 문제와 맞닥뜨립니다.
일곱 작품을 읽으며 질문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에 얼마나 매몰되는가.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진실한가. 나의 존엄은 누가 지켜야 하는가. 사람은 어떻게 각성하는가. 개인이 개인을 넘어서는 감정은 가능한가. 인간은 정말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세월은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소재는 영화감독의 팬덤, 정치집회, 무속, 건축, 직장과 공동체, 가족,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서로 다른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정치적 입장과 직업, 능력, 세대, 성공과 실패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성해나의 인물들은 어느 한쪽에 쉽게 들어맞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도 이기심이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친절에는 계산이 숨어 있을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됩니다. 존엄은 성공한 사람이나 옳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때로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쉽게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삶이 있습니다.
『혼모노』를 인간의 존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와 역사, 세대갈등, 팬덤의 윤리, 가족의 욕망, 조직의 권력, 자기기만과 사랑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문의 끝에는 결국 사람이 있습니다.
성해나의 문장은 쉽게 읽힙니다.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혼모노』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이야기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목차도 하나의 질문처럼 읽힌다. ]
『혼모노』의 작품 순서는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 「스무드」 → 「혼모노」 →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 「우호적 감정」 → 「잉태기」 → 「메탈」입니다. 표제작 「혼모노」가 첫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에 놓인 점이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목차의 배열 의도를 직접 밝히지 않았다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순서대로 읽어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첫 번째 「길티 클럽」에서 독자는 타인을 판단합니다. 두 번째 「스무드」에서는 그 판단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세 번째 「혼모노」에 이르러 비로소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모노」는 출발점이라기보다 소설집의 전환점으로 읽힙니다. 그 뒤의 작품들은 질문을 더욱 인간의 내부로 가져갑니다. 「구의 집」은 선택과 윤리, 「우호적 감정」은 감정과 선의, 「잉태기」는 사랑과 욕망을 묻습니다. 마지막 「메탈」에서는 이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목차의 흐름을 압축하면 판단 → 판단의 흔들림 → 진짜와 가짜 → 선택과 윤리 → 감정 → 사랑 →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만, 점차 ‘내가 저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가’, ‘내 감정은 진실한가’, ‘나는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가’로 질문이 자신을 향합니다.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지나온 시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에 이릅니다.
그래서 『혼모노』라는 제목도 마지막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누가 진짜인가. 무엇이 진짜인가. 내 감정과 사랑은 진짜인가. 그렇다면 내가 살아온 삶은 진짜였는가.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이야기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진짜’를 판별하는 명확한 답이 아니라, 흔들리고 모순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혼모노』가 말하는 가장 깊은 ‘진짜’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