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룡(子龍). 상산군(常山郡) 출신. 8척에 이르는 큰 키에 준수한 외모를 지닌 조운은 무예가 매우 출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창을 잘 썼다고 한다. 공손찬의 부하였던 조운은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한 유비를 보고 그의 부하가 된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의 공격으로 탈출할 때 홀로 적진을 뚫고 가서 어린 유선을 구출해 온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 후에 유비가 황제가 된 후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과 함께 오호 대장군이 된다. 관우가 손권과 위나라의 협공으로 사망하자 유비는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조운이 나서 위나라를 먼저 치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전해진다. 하지만 유비는 결국 조운의 말을 듣지 않았고 정벌을 강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장비마저 목숨을 잃고 만다. 유선이 황제가 된 후에 정남장군이 되었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제갈량과 함께 북벌에 나섰고 229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초반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真定縣) 출신이며, 신장은 8척(약 184cm)에 가깝고, 모습과 얼굴 생김새가 두드러져 근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조운(趙雲)이 유비(劉備)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그가 158~159년 쯤에 태어났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삼국지(三國志)와 관련된 후대 문학작품(삼국지평화, 삼국지연의 등) 또는 조운과 관련된 중국 각지의 민간설화에 등장하는 '조자룡(趙子龍)이 나이 칠순(七旬-일흔)에 오히려 기공(奇公-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는 부분을 참고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른 설로 168년설이 유력한데 이 역시 일본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제작사인 '코에이(Koei)에서 임의로 설정한 출생년도' 이므로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쪽이 조자룡을 너무 늙지도 젊지도 않게 묘사하였으므로 실제 출생년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조자룡의 나이가 아직 10대일 때 유비와 첫 대면하였다는 설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와 조운이 처음 대면하게 된 191년 계교 전투에서 조자룡이 '소년 장수' 로 불리며 화려하게 등장한 부분에서 나온 얘기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실제로 이들은 서주 전투 당시 도겸(陶謙)을 구원하러 가는 과정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다. 참고로 현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대읍현(大邑縣)에는 조운의 묘(趙雲之墓)가 있는데 그 묘비에는 조자룡(趙子龍)이 한(漢) 환제(桓帝) 영흥(永興) 원년(153년)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잦은 전란에 걸쳐 파괴된 조운의 묘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의 생몰년도가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해당 묘비에 기록된 조운의 출생년도는 '위작' 이라는 견해가 있고 또 현재 남아있는 조운의 묘비는 청대 이후에 복원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우의 연희 3년(160년) 출생설보다 훨씬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관우(關羽)의 160년 출생설은 중국 각종 지방지(地方志)나 민간전설 등에서 공통적으로 유비보다 1살 더 많은 것으로 전해지기에 좀 다른 경우이다) 그밖에 조운(趙雲)이 제갈량(諸葛亮)의 1차 북벌 당시 일흔의 노장(老將)이었다는 내용은 후대 사람들이 조자룡(趙子龍)의 노익장(老益壯)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 나이보다 10여년 정도 더 많도록 설정하여 227년(촉한(蜀漢) 건흥(建興) 7년), 제갈량이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전출사표(前出師表)를 내고 북벌(北伐)을 감행할 당시의 조운이 칠순에 가까운 또는 칠순의 노장이 된 것으로 조작한 것이다. 조운은 처음에 원소(袁紹)에게 졸백(卒伯-병졸의 우두머리)으로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여 공손찬(公孫瓚) 아래로 들어갔다. 소설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창술(槍術)의 명수로 등장하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文醜)를 상대하여 공손찬(公孫瓚)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劉備) 또한 공손찬(公孫瓚)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원소를 막기 위해 유비를 파견해 전해(田楷)를 지원하도록 했을 때 조운도 일시적으로 유비의 지휘하에 들어가 종군했다. 이 무렵 조운은 공손찬의 난폭한 성격에 기가 질려 있었고 같이 공손찬의 부하로 있던 유비를 눈여겨 보게 된다. 유비 역시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서로 깊은 유대를 맺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조운이 유비의 가신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하지만 유비는 공손찬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다.
그 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고향(상산군 진정현)으로 돌아가는데,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는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유비 또한 그것을 깨닫고 조용히 전송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曹操)에게 서주(徐州)를 잃은 유비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유비를 접견하고 부하로 들어갔다. 이때 삼국지정사에서는‘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라고 되어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關羽)나 장비(張飛)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당양 장판에서의 활약
201년 조운은 여남(汝南)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新野)로 가게 되었다. 207년 형주에서는 유표(劉表)가 죽어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에 편승해 조조가 침공을 시작했다. 유비가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할 때, 조운은 단기(單騎)로 적군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선(劉禪)과 감부인(甘婦人)을 구출하는 대활약을 펼쳐 아문장군(牙門将軍)으로 승진한다(장판 전투). 이 전투 중에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운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라고 하는 자가 미방(糜芳)으로 나오며, 조운이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靑舡劍)을 손에 넣은 후 유선을 가슴에 품고 적군 한가운데에서 분전, 그것을 본 조조가 조운을 어떻게든 생포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 정립
211년(건안 16년) 익주 자사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파견해 유비를 맞아들이고 한녕군의 태수 장로(張魯)를 공격했다. 그러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장과 대립하게 되어 가맹관에서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지만, 군사 방통(龐統)이 장임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 등과 함께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은 강양(江陽)을 거쳐 성도로 진군, 성도 포위의 일축을 담당했다. 유장의 항복 후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将軍)에 임명되었다.
219년 한중 전투에서 조운이 조조군의 선봉을 격파하자 조조군은 군세를 강화해 다시 조운의 진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조운은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운의 진영 앞에 도착한 조조군은 그 정적을 보고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조운이 북을 치고 쇠뇌를 쏘아 적군을 공격하자, 깜짝 놀란 조조군은 북새통이 되었고 많은 병사들은 달아나다가 한수(漢水)에 빠져 익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다음날 아침 유비는 몸소 조운의 진영을 방문하고 전날의 전장을 시찰하면서 “조운의 몸은 모두 간(肝)덩어리다”라고 칭찬하였고, 군졸들은 조운을 호위장군(虎威将軍)이라고 불렀다.
손권(孫權)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살해하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손권을 공격하려 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 (중략) 위나라를 방치하고 먼저 오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유비를 만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하고, 조운을 강주에 남겨 후방을 단속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서 영안까지 진군하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유비 사후
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중호군(中護軍)·정남장군(征南将軍)이 되고, 이후 영창정후(永昌亭侯)·진동장군(鎮東将軍)으로 위임(委任)되었다. 227년 조운은 75세의 나이로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228년 제갈량과 함께 위나라로 출병, 제갈량은 사곡도(斜谷道)를 통과한다고 크게 선전하고, 조운과 등지(鄧芝)에게 위나라의 조진(曹眞)을 상대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틈에 기산을 공격했다. 가정 전투 에서 마속의 촉군이 패배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퇴각 명령이 명이 전해지면서 퇴각때 추격해오는 곽회의 위군과 맞서 싸우며 선봉장 소옹(蘇顒)를 전사(戦死) 시키고 곽회의 부대와 부장 만정(萬政)을 기곡(箕谷) 에서 격퇴 시켰다. 제1차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전했던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이 강등되면서 조운은 진군장군(鎮軍将軍)으로 좌천되었다.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 스스로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남은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에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해,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분명히 했다. 제갈량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29년 제갈량의 2차 북벌 이후 병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운의 죽음을 1년 앞당겨 2차 북벌 이전인 228년 초가을에 죽도록 만들었다), 조운(趙雲)의 향년(享年)은 그의 출생년도가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 않은데다 지방지(地方志), 야사(野史), 민간전설(民間傳說) 등에서도 조운(趙雲)의 출생 시기에 관해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261년에는 대장군 순평후(大将軍 順平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운은 관우나 장비와는 달리 이치에 맞는 행동만 하고 누구에게든 예를 갖춰 대했기 때문에 유비에게도, 제갈량에게도 인정받았다.
연의에서는 하후무를 사로잡고 한덕의 네 아들을 모두 죽이는 등 공을 세웠고, 북벌 당시에, 제갈량이 말하길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장수 중 한 사람만 있더라면 이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운이다." 라고 할 정도로 촉나라에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촉한의 충신으로 유비의 핵심 심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의에서 조금 과장되었지만 유비가 그를 중용하여 쓴 것도 사실이고, 오호대장군 중에서 임관 햇수로 본다면 세번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유비에게 어느 정도 신임을 받고 중용되었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연의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로 멋지게 빛나는 장판파 전투에서 조자룡의 활약상을 크게 깍아 내리는 듯한 정사내용 중에는 조조의 대군을 5천의 기병대라고 하는 이가 있고, 아두를 품고 싸움은 커녕 달아나기에 바빴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장판파 전투에서 미부인을 잃고 아두를 구해낸 공은 적지 않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조자룡은 낮은 관작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단 조운은 정사의 기록이 상당히 미흡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운이 허접하다는 논리로 갈수는 없다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관우의 기록이 조운보다 많기는 하지만 그도 적은 것은 마찬가지지입니다. 더구나, 역사가들이 적벽대전을 굉장히 큰 전투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이라하여 적벽대전을 거의 취급도 안한것을 고려해보면, 그나마 촉의 인물들을 그 정도 조사해서 써준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심지어 불과 50년도 안된 한 사건이 언제는 간첩이 선동한 폭동이었다가, 지금은 기념까지 되는 혁명으로 배웁니다. 즉 역사라는것은 그당시 지배층에 따라 그 관점이 극을 달리는 것이고, 진수가 진의 관리로서 역사서를 씀에는 아무래도 권력에 큰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었기에, 진 정통론의 입장으로서 나관중의 촉한정통론보다 오히려 더 치우치기 쉽다는것을 꼭 인지하고 넘어갑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인물을 평하려면 역사서를 토대로 평할수 밖에 없습니다. 연의는 아무리 7실 3허네 뭐네 하더라도 소설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 짚고 넘어갈것은 때론 소설이 더 실제와 가까운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대하역사장편소설들 예를들어 토지,아리랑,태백산맥들의 내용이 비록 소설이기에 역사서만큼의 신빙성은 갖지 못할지라도, 후대에 역사서가 많이 불타버리고 참조할만한 책이 별로 없게 된다면 위의 소설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해 대단한 정보를 주는 책이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무려 1800여년전의 시대. 그래서 우리가 참고할만한 역사서도 별로 없는 이 시대에 대해서 연의가 주는 의의는 큽니다. 당시에 민담으로 전해지는 것들까지 참조해서 쓰여진만큼 정사등등의 역사서에는 언급이 없는 여러가지를 우리는 참고할 수 있습니다. 설문조사란에서 제가 조운의 외모가 턱이 넓은 호남형으로 묘사된다고 했더니, 그게 정사에 있는 내용이냐고 했던분이 있었습니다. 조운별전에야 신장 8척에 크고 당당한 풍채였다는 기록이 있을뿐이나, 자룡 헌창 쓰듯 하다라는 속담이 역사서에 없다고 그 속담이 의미하는바를 무시할 수 없듯이, 연의에서 말해지는것이라고 저렇게 무시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사에 기록이 없는것을 연의를 참조해서 미루어 생각해보는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는 제 주장입니다. 연의는 비록 나관중의 상상력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그 당시의 민중들의 입을 타고 전해 내려온 민담들을 상당히 참조하고 반영한 만큼, 비록 소문이 다 믿을것은 안되지만 참조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는것이죠.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조운에 대해서 써 보겠습니다.
1. 조운의 장군으로서의 자질, 즉 용맹(무력)과 통솔력(병법과 용병술)에 대하여.
일단 연의가 아닌 역사서에선 내놓으라 하는 일기토는 물론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죠. 실제로는 연의처럼 그렇게 장수대 장수로 붙기가 힘들고 더구나 장비와 마초처럼, 판을 벌여놓고 일기토를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기토로 그 사람의 무력을 알아보긴 힘들고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따져야 하죠.
첫째로, 가장 유명한 후주 유선을 가슴에 품고 100만 대군을 질주한 사건을 봅시다. 이게 100만 대군이 아닌 5000가량의 기병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으니 더 이상 언급은 안하겠습니다. 혹시 삼국지 드라마 보신분이 있습니까? 시나들이 드라마 스케일이 아무리커도 5000명 동원은 못하더군요. 5000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러한 병력들속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달려가 후주를 구해온게 어찌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용맹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문장군으로 승진한것을 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 공이 컸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번에는 기곡을 잃었던 조운의 유일한 패전을 살펴봅시다. 건흥 5년에 제갈량과 함께 조운은 한중으로 갔습니다. 건흥 6년에 제갈량은 전투를 개시했고, 알다시피 성과를 거뒀죠. 이에 조진이 대군을 이끌고 옵니다. 이 때 조운과 등지가 조진과 맞섰죠. 제갈량과 마속은 기산을 공격하다가 패했고, 조운도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처지가 되어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비록 패전이라 하나 조운의 장군으로서의 자신감과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할뿐 조운이 까일만한게 없습니다.
패전은 맞붙어서 밀릴때 당하는 손실보다, 퇴각시에 병력손실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허나 조운은 병력의 손실없이, 또한 혼란없이 퇴각했죠. 징키스칸의 몽고군이 퇴각할때도 혼란된 모습없이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고 하는데 조운의 군대가 그랬습니다. 가정전투에서 퇴각시에는 군세가 흩어져 버렸던것과는 또 대조적인 모습이구요. 이 이유를 제갈량이 묻자, 등지는 조운이 스스로 후방에 서서 물자와 장수들을 관리했기에 질서정연하게 기곡에서 물러났고, 군사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셋째, 황충이 하우연을 이기고난 후의 한중전투입니다. 조조가 수천포대의 군량미를 북산으로 가져왔는데 황충이 이걸 먹으러가서 감감무소식입니다. 이 때 역시 위험을 무릎쓰고 조운은 조조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죠. (이번전투는 조운까들이 후주를 구할때 말하는 조조의 호의조차 없는 말 그대로 난전입니다.) 조조의 대군속으로 파고들어가자 잠시 조조의 군세가 밀릴정도의 위력을 보였습니다. 조조의 군대에 포위된 조운은 장수 장저가 포위당해서 부상당하는것을 보고 다시 장저를 구해서 포위를 뚫고 나왔습니다.
마치 연의에서나 볼듯한 조운의 용맹입니다. 즉 연의가 과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조운의 용맹이 폄하될수는 없다는거죠. 이런 용맹을 보인 장수가 삼국지 장수중에 얼마나 될까요?
넷째, 조조가 면양에서 장익을 추격했을때의 조운을 봅시다. 장익이 조조에게 쫒겨서 성문을 걸어잠그고 저항하자 조운이 진영으로 와서는 오히려 성문을 열고, 기를 내려버렸습니다. 조조가 복병이 있을까 해서 물러가기 시작하자, 조운이 갑자기 북을 울리면서 조조에게 짓쳐들어갑니다. 이 때 조조군은 한수까지 밟혔고, 병력의 손실도 엄청났습니다.
이것은 조운의 장군으로서의 지략과 병법이 범상치 않았다는것을 보여주는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허접한 무장도 아닌 조조의 본군을 상대로 한 성과죠. 분명 선주가 조운의 몸이 담력 덩어리라고 할만큼 그의 대담함과 용맹 또한 증명해주는 전투라고 보기에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밖에도 직접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또는 유비 또는 제갈량의 인솔하에 전공들을 세웠습니다.
덧붙여서 전위는 어깨로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죽였다는데, 전 이게 연의보다 과장이 더 심한듯합니다. 어깨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또 조조에 대한 진수평을 보면, 좀 빠스러운감이 있죠. 확실히 정사는 위의 인물들의 대한 평가가 좋고, 반면에 촉의 인물들은 정직하게 평가해놓은듯 하지만, 한문장씩 슬쩍 까대는글을 끼워넣는감이 있습니다. 제갈량도 그런식으로 까이구요.
조운이 정사에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런것들을 감안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2. 그밖의 조운의 인품과 기타 문관으로서의 재능에 대하여..
먼저, 연의에서도 나오는 잘 알려진 내용부터 하죠.
조운이 강남을 평정하고 조범대신 계양태수를 하고 있을때, 번씨를 취하라는 권함을 받았지만 조운은 조범의 속마음을 알수가 없고, 천하에 여자는 많은데, 어찌 급히 취하느냐고 합니다. 조운이 의심한대로 조범은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조운의 인품도 인품이지만, 정세를 살피고,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는 인물로서 우리에게 어필되는 사례라고 봅니다.
둘째, 또 연의에서 언급된 내용중에 유비가 익주로 가면서 조운에게 손부인과 내부의 일을 부탁하고 간것을 살펴봅시다. 이때 손부인이 후주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려했지만, 조운이 후주를 데려왔죠. 작은일 같지만, 결코 그렇게 생각할수는 없는것 같습니다. 일단 손부인도 나름대로 방책을 세워 몰래 가려 했던것 같고, 조운이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담당하고 살피지 않았다면, 유선은 오나라손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르죠.
셋째, 조운이 박망파에서 사로잡은 하후란과의 일화를 봅시다. 하후란과 조운이 동향사람인것은 분명한데, 원래 아는 사이인지 몰랐던 사이인지는 약간의 논란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암튼 조운이 하후란을 법률에 밝고, 군을 바로잡을 인재라 하여 선주에게 천거했는데, 조운은 하후란을 오히려 멀리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가 조운이 정치감각이 있다고 보는것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식이라면 지연,학연이런거에 대한 오해를 철저히 경계한거죠.
넷째, 익주 입성후 성문밖의 뽕밭을 나눠주려 했을때 조운이 반대한 사건입니다. 이 때 조운은 흉노를 토벌하기 전까지는 저택에서 살지 않겠다면서 황제의 저택하사를 거절한 곽거병의 예화를 들면서, 지금은 전란의 시대인만큼 그시대보다 더욱 혼란한 시대이며, 또한 익주의 백성들은 병란속에서 고생스러우니 그들에게 밭과 집을 주자고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유비의 무장들의 안이함을 깨우치고, 유장의 무장들이 유비에게 흡수되는 과정에 윤활유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백성의 민심을 유비에게 모았죠. 조운의 부에 대한 욕심이 없음과, 백성들을 살필줄 아는 인품, 그리고 정치감각에 탁월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물론 조운은 문관이 아닌만큼, 내정능력이 어땠는지는 미지수이긴 합니다. 기록이 없으니 알수가 없지만, 위에 언급한 내용뿐만 아니라, 유비가 관우를 잃고 흥분해서 오를 정벌한다고 했을때 간했던 조운의 논리정연함, 그밖에 한중전이후 제갈량에게 간한 부하들의 포상의 적절함(결국 제갈량이 조운말대로 했죠) 등등을 봤을때 여러모로 문관으로서의 재능또한 있는 장수인것은 분명합니다.
제목부터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도대체 제갈량과 조운이 무슨 관계라는 것이지? 그래서 본인은 조조와 유비의 관계에서도 밝혔듯이 한쪽을 여자로 설정해놓으면 이해하기 편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유비가 여자, 제갈량과 조운은 남자로 설정을 해보겠습니다. 이전편에서도 유비가 여자였죠 ㅎㅎ;
일단 결론부터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비라는 여자(엘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제갈량과 조운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라이벌 관계라기보다는 제갈량은 나쁜남자 컨셉, 조운은 순정파 남자 컨셉이었다는거죠. 그러면 왜 유비와 제갈량, 조운은 서로 치정관계였다는 것일까요?
일단 조운은 유비와 같은 침상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같은 침상... 같은 침상이란다. - 누누히 말해도 모자르겠지만, 실제로 필자가 조운을 여자로 생각한다는건 아닙니다. 이해하기 쉽게 여자로 설정하자는 것이지... 그렇다고 유비와 조운이 BL관계였느냐, 설마...
아무튼, 조운은 관우와 장비에 이어 세번째로 유비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랭킹은 신야에 올 때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제갈량이라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자가 나타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유비... 그녀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우와 장비가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나선 것, 조운도 마찬가지였는데 갑자기 제갈량! 이라는 이상한 놈이 나타난 것이죠.
그 놈은 세치 혀를 굴려서 유비를 자신의 매력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웃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던가? 제갈량은 융중대라는 말빨을 통해 유비를 웃게 해주었고, 유비는 그런 제갈량을 자신의 그물망(...)에 넣은 것이었죠.
제갈량은 화려한 말빨로 유비를 자극합니다. 유비 너 지금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날 믿어라, 넌 나뿐이다...
그러니 관우와 장비는 당연히 반발을 할 수밖에 없겠죠. 자신은 유비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넘이 이제부터 내가 유비 애인임 깝 ㄴㄴ 이러고 있으니 화가 안날까요. 그러나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무려 수어지교 드립을 하면서 두 남자는 결국 눈물을 삼키고 제갈량이라는 또다른 남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ㅜㅜ
그러면 이때 조운은 어떤 반응을 했는가? 알 수가 없죠. 다만 저는 이때 조운은 불평하지 않고 자신이 꾸준히 유비에게 잘해주면 언젠가 유비는 자신을 다시 알아줄거라고 생각하는 순정파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려 조조가 헬기(...)까지 동원해가며 해외로 출국하려고 하는 유비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지난편 참고).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버리겠어! <- 이러니까 무슨 막장 드라마같긴 하지만 어쨌든.
이때 유비는 아직 출국을 못한 상태. 헬기는 공항까지 도착을 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아두가 행방불명됩니다.
이 아두는 누구일까요?
유비는 여자인데 결혼은 감부인이랑 이미 해놨지만, 공식적으로는 남자였습니다. 그러니 유비와 감부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야 하는건 당연지사. 그런데 유비도 여자이니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래서 감부인과 정을 통해서 아두를 낳게 한 남자는 조운이었습니다 - 여기서 나오는 씨내리조, 조운대원군설(...)
그렇습니다, 조운은 아두의 실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실부라는 말은 못하고 그저 아두만 바라보는 비운의 아버지였던거죠.
다행히도 유비는 아두의 아버지 행세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실부인 조운보다 더 끔찍이도 아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부성애가 아닌 모성애로 말이죠. 그런데 그런 아두가 행방불명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조운은 고민합니다. 이대로 유비와 함께 해외로 가느냐? 아니면 남아서 아두를 찾느냐? 유비의 퍼스트인 관우는 이미 해외로 떠났고, 세컨드인 장비는 혼자서 조조가 데리고 온 조폭들 막겠다고 뛰쳐나갔습니다.. 써드 -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퍼스트가 될 - 인 제갈량도 이미 해외로 떠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두를 누가 찾아야 할까요?
조운은 고민에 휩쌓입니다. 난 이미 포쓰로 밀린 것 같은데, 유비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번민에 휩쌓이는 조운. 이미 써드에서 포쓰로 되었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더 후순위로 밀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조운은 아두를 찾는 것을 택합니다. 역시 그는 희생적인 아버지였고, 희생적인 남자였던 것입니다.
조조가 데리고 온 조폭들 사이를 헤치고 조운은 결국 아두를 구해내고, 유비 앞에 아두를 데려옵니다. 기뻐하는 유비.
후일담인데, 누군가가 조운이 북쪽으로 갔다고 하자 유비는 성질을 내며 '조운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록 유비는 제갈량의 말빨에 넘어갔지만, 조운의 순정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던 것이죠.
그리고 이후 유비는 손권기업과 손을 잡고 조조기업에 대항, 시장점유율 1위였던 조조의 제품들을 차별화한 제품들로 상대하여 점유율을 떨어뜨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갈량의 조운 견제가 시작되고... 조운의 순정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일한 남자가 되기 위해 관우와 장비를 세컨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화용도 사건으로 말이죠(어차피 유비엘프설인데 연의까지 거론한다고 뭐 안될것도 없...).
유비까지 애원하면서 관우는 목숨을 부지하지만, 이 사건으로 유비의 세컨은 제갈량이 됩니다. 남은 사람은 조운뿐이었죠. 그런데 제갈량이 아무리 조운의 빌미를 잡으려고 해도 잡을게 없었습니다. 털어도 먼지 하나 안나올만큼 깨끗했던거죠. 그래서 제갈량은 조운을 본사 부장에서 계양지점장으로 파견시켜버립니다. 표면상으로는 승진이지만 좌천에 가까웠죠.
더욱이 제갈량은 조운에게 번씨라는 여자를 소개시켜줍니다. 번씨에게 빠져서 유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하지만 조운은 계양지점장만 되었을 뿐, 번씨라는 여자의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제갈량의 계략은 반은 성공을 거두고 반은 실패를 한 셈이죠.
어쨌든 제갈량은 드디어 유비의 세컨이 됩니다. 관우, 장비, 조운은 더 이상 유비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게 되죠.
하지만 갑자기 방통이라는 변수가 나타납니다. 유비는 못생겼지만 스마트한 방통을 좋아하게 되었고, 제갈량은 이에 분개합니다. 방통만큼은 제갈량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방씨가문은 형주 명문가였거든요. 하지만 다행인지 입촉 당시 방통은 술을 잔뜩 쳐먹고 운전하다가 충돌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고, 제갈량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은 없어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선주전>에는 제갈량을 고굉으로 삼고 어쩌구 저쩌구 나오지만 조운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제갈량은 조운을 견제했다는겁니다. 차라리 관우나 장비같은 타입은 자기가 어떻게 잘 구슬리면 넘어오는데, 조운같은 순정파와는 상극이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한중전. 조조는 이를 갈고 한중으로 쳐들어옵니다. 자신의 순정을 짓밟은 유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죠. 유비는 종족이 엘프라 50세였던 당시에도 젊음 그 자체였고, 그래서 조조는 유비를 붙잡아서 처절한 응징을 하려고 합니다.
이때 제갈량은 조운을 화살받이로 몰아세웁니다. 급기야는 병력도 없는데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오죠.
일생일대의 위기, 조운은 이때 공성지계로 조조의 대군을 그냥 물러나게 만듭니다. 다시한번 제갈량의 책략이 물먹게 되었고, 뒤늦게 조운의 위기를 알고 달려온 유비는 조운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하게 아픈 조운... 그렇습니다, 유비가 조운을 보는 눈빛에는 이제는 더 이상 끈적끈적함은 사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왕에 오른 후에도 조운은 계속 익군장군을 유지했던 것도, 다 제갈량이 조운을 철저하게 배제시켰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비의 세컨이었던 관우가 손권기업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죠.
화가난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병을 얻습니다.
제갈량은 부리나케 영안으로 달려오지만, 조운은 오지 못했습니다. 그저 강주에 주둔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유비가 죽을 때에도 제갈량은 그의 옆에 있었지만, 조운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미련스러울 정도의 순정파였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북벌.
하지만 마속의 실수로 패배하고, 1년 후 조운은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제갈량은 갑자기 마왕으로써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유선을 황궁에 유폐시키고, 유망주란 유망주는 죄다 과로사 시켜버린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