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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종교가 기독교? 아니면 그리스도인? (feat. 3가지 꿀팁)
본문 : 사도행전 26장 29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장 29절, 개역개정>
예전에는 학교에서 새 학기가 되면 학생들의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조사를 했었습니다. 집은 자가인지, 차는 소유하고 있는지 등등 지금은 묻지 않아야 할될 질문들을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학생들 앞에서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종교에 대해서도 질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절, 성당, 교회, 무교 정도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했던 종교에 대한 질문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일반적일 것 같지만 의외로 ‘당신은 어떤 종교를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받으시면 기독교나 개신교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려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교를 믿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나의 현재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첫 질문에 대한 답과 동일하게 기독교나 개신교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어떤 분들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이 느껴지는 동시에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대답을 기초로 하여 사도행전 26장 강해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사도행전 26장 강해가 끝날 때에는 나의 현재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게 되실 것이고, 분명히 이 두 가지 대답의 차이를 알게 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을 위해 3가지 꿀팁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 그리고 버니게, 또한 많은 인파들 앞에 다시 바울이 서게 됩니다. 베스도는 자신이 찾지 못한 죄목을 아그립바에게 찾게 만들기 위해 다시 재판을 열게 된 것입니다.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에 바울의 죄목을 적어야 하는데 무죄였던 바울에게서는 도무지 죄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아그립바 왕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베스도입니다.
하지만 아그립바 왕은 사실 바울을 통해 ‘복음’에 대해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궁금한 일들을 직접 바울의 입을 통해서 듣기를 원했기에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발언권을 허락하게 됩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바울이 손을 뻗치고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6장 1절, 새번역>
그렇게 발언권을 얻은 바울은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변호를 시작하게 됩니다. 몇 번의 좋은 기회를 놓쳤었기에 이번만큼은 지난 수년간 자신이 경험했던 그 모든 일들 중 정말 중요한 핵심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음 선포의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신중하고 더욱 신중하게 이야기를 전했을 바울입니다. 가장 먼저 바울은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앞에서 모든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음에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그립바 임금님, 오늘 내가 전하 앞에서 유대 사람이 나를 걸어서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특히 임금님께서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모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내 말을 끝까지 참으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6장 2~3절, 새번역>
자, 우리 모두도 아무쪼록 끝까지 잘 참고 잘 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 사람들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삶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사울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인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망 때문에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음도 분명하게 밝히게 됩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바울이 고소를 당하여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소망에 대해서 깨달았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통과 장로들의 해석에 따른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계속해서 쟁점이 되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 <사도행전 26장 8절, 새번역>
그리고 부활의 핵심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울입니다. 사실 자신 역시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행동을 옮겨 이스라엘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따르는 자들을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그 일에 찬동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회당을 찾아다니며 여러 번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도 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는지 아마 함께 했던 유대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분노가 극에 다다랐으므로, 심지어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마스쿠스에서 있었던 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 가게 됩니다.
"한번은 내가 이런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2절, 새번역>
바울은 이제 자신이 왜 유대교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자신과 자신의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모두 땅에 엎어지게 되었을 때, 또렷하게 들려오는 히브리말을 바울은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이 음성은 바로 바울이 그토록 핍박했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방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신념을 뛰어 넘는 체험’입니다. ‘앎’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을 동반할 때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꿀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생각을 기초로 합니다. ‘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해’라는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종교를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독교를, 알라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슬람교를,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면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며 무교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의 모든 결정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사실 종교인에게는 자신의 종교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이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모두가 ‘무교’인 것입니다. 그저 ‘자기’라는 신(神)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 자신을 신봉했던 대표 주자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은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정의’를 부여하고, 스스로 ‘의’로 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출발지점부터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출발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되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그냥 그저 ‘하나님’이 아니라 체험으로 인하여 관계하게 되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새번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나의 신념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내가 믿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믿고자 해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믿음이 생기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새번역>
자신의 신념을 의지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던 바울을 지금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고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죽은 자의 부활이 사실임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지금껏 지녀왔던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도 자신은 말씀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된 ‘믿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는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영역이 바로 이 ‘체험’입니다. 그 체험이 없으니 자신의 신념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념을 우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을 만나주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뛰어 넘게 된 것입니다.
이 체험은 아주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 체험이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면 반드시 그 체험은 반드시 ‘감사와 인내, 그리고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제야 자신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해가 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스데반’집사가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감사와 인내, 그리고 사랑을 선택했던 그를 보면서 더욱 분노한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왜 그랬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마지막 역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이미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사도행전 7장 55절, 새번역>
오늘도 우리에게는 ‘신념을 뛰어 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종교를 기독교나 개신교로 가지고 있는 종교인으로 남지 마십시오. 최소한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제 그 신념을 뛰어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체험’의 시간이 다가 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만나주실 것입니다. 도무지 잊혀 지지 않을 강렬한 ‘체험’이 지금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두 번째 방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소명을 받게 되어 사명을 받는 것’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목적’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없이 자신의 신념에 옳은 대로 행동하던 바울에게 분명한 ‘사명’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꿀팁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5~18절, 새번역>
직접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신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만나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사명(Mission)을 부여받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을 살게 되는 시작점이 됩니다. 종교인들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은 분명한 하나님이 부여한 ‘목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차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바울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 이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셔서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차별했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차별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맛에 맞으면 선택하고,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은 바울의 때와 동일합니다.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허락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더 많은 이들을 사랑할 이를 찾고 계십니다. 혹시 그 사람이 당신은 아닐까요? 하다못해 생명이 없는 기계들도 만들어진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다마스쿠스에서 겨우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의 시간도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발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 번째 방법이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통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될 준비를 마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삶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순종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3번째 꿀팁입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 임금님, 나는 하늘로부터 받은 환상을 거역하지 않고, 먼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9~20절, 새번역>
바울은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이런 바울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지 상상이 갑니다. 갑자기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하던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그 예수를 믿으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바울을 그토록 열렬히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난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체험하고, 소명을 받고, 순종하는 바울은 이제는 죽음까지도 개의치 않고 멈추어 설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2~23절,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왠지 그리스도인들만 튀는 행동을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삶은 감사와 인내 그리고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개역개정>
순종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어떻게 처음부터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순종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순종을 통해 차별을 경험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하려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더욱 말씀대로 살고자 결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5~8절, 공동번역>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변호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러자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베스도가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변호하니, 베스도가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6장 24절, 새번역>
충분히 이해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미친 사람처럼 보일 뿐 미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쳤다면 하나님께 미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 새번역>
바울은 베스도에게 차분하게 자신은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는 아그립바 왕을 이제 주목합니다. 바울 역시 아그립바가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이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내가 임금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임금님께서는 그 어느 사실 하나라도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립바 임금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사도행전 26장 26~27절, 새번역>
바울은 지금 아그립바를 종교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챈 아그립바는 사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마음속에 없는 말로 이렇게 답변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사도행전 26장 28절, 새번역>
네. 맞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종교인으로 머물러 있는 아그립바를 향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3가지 방법을 일러준 후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 역시 그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아마 바울은 아그립바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그 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교가 기독교인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그 말, 그리고 아직은 종교조차 기독교가 아닌 모든 분들이 들어야 할 말을 바울이 하게 됩니다.
바울이 대답하였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 새번역>
이 말을 하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다 일어나서 퇴장함으로 재판이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입을 맞춘 듯 ‘바울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많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석방시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아쉬움을 느낀 쪽은 바울이고, 제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 복음 선포를 듣고 아그립바는 ‘순종’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초청을 느꼈음에도 불하고 아그립바 왕은 결국 자신이 걸어왔던 그 길을 여전히 고수하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 강해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처음 드렸던 질문을 드립니다.
‘혹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종교를 믿습니까?’
이 시간 바울의 고백처럼 간절히 원하고 소망하는 것은 ‘나의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나는 기독교를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분들이 오늘 그 신념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기 머물러 계시지 마십시오. 아그립바 왕에게 찾아온 기회처럼 오늘 사도행전 26장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오신 모든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 가지 방법, 세 가지 꿀팁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꼭 들으시길 소망합니다.
지금이 바로 신념을 뛰어 넘어 ‘체험’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분명한 목적, 소명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셔야 할 때입니다. 오늘 8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또 새로운 9월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노라 결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6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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