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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나시면 일독해보시고, 가감없이 비평해주시길 기대합니다.- 김길수 拜>
<단편소설>
영지(領地)를 잃다!
무슨 일이지? 정오가 가까워오는 시각인데, 웬 놈의 차들이 이리도 많을까? 교외로 나가는 길목이자, 병원으로 오르는 마지막 로터리. 신호등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차들은 완전 굼벵이 걸음이다.
‘이렇게 밀릴 줄 누가 알았나? 조금만 더 일찍 나올 걸…!’
나는 예상외로 심한 교통체증에 마음이 심란했다. 모처럼 아내가 주문한 일도 지키지 못하게 된 거나 다름없고, 그로인해 아내로부터 쏟아질 지청구도 마음에 켕겼다.
‘까짓 거, 할 수 없지 뭐!’
짐짓, 느긋한 하품을 토했다. 동시에 시야를 온통 가리고 있는 앞차의 뒤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봤다. 탑차 형태의 캠핑카다. 뒷면에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하는 노래 가사와 커다랗게 그려진 악보가 곡선으로 일렁이는 모습이 조잡하다.
‘봄날에 캠핑이라…! 저런 것도 한 번 못 가보고….’
나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카세트 스위치를 눌렀다.
‘…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남자가수의 여자 같은 미성이다. ‘가는 길을 잃은 사람!’ 언제부턴가 마음에 와 닿는 말이다.
앞차가 움직였다. 나도 뒤따라 출발했다. 거의 꽁무니 순번으로 간신히 로터리를 통과하자, 이내 병원으로 오르는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병원이면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해야지? 이리 불편한 고지대에다…? 이유야 물론 돈, 그놈의 돈 때문이겠지만! 하여튼 돈에 대해서야 빠꿈이 아닌 놈이 세상에 있을라고?’
나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경사진 일방통행도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 상‧하행 길이 따로따로다. 꽤나 유명한 D한방병원.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都心)산인 황령산 곁가지능선의 산동네가 끝나는 끄트머리다. 부산의 도시지형이 원체 산비탈동네가 많은 거야 소문난 일이고, 그런 산동네 중에서도 경사도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만만찮은 곳이다.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엄청 언밸런스해 보이리라. 오래전부터 형성된 달동네다. 산위로 오를수록 낡고 허름한 서민주택들이 다닥다닥 이어지다가, 동네가 끝나는 지점에, 공룡 같은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마치 TV에 자주 비치는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들의 가냘픈 몸통과 팔다리에 왕수박통만한 머리가 얹힌 가분수 괴물 같은 꼴이다. 다시 말해, 전체 산의 콧잔등쯤에 커다란 혹 덩어리 한 개가 나붙은 격이라고나 할까.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으며 천천히 비탈길을 올랐다. 병원 마당과 주차공간은 금방 올라온 좁다란 길과는 대조적으로 널찍했다. 처음 가 본 사람은 그 넓이에 우선 이런 산비탈에? 하며 놀랄 정도다. 주차를 하고도 잠시 시동을 켠 채,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 천년을 살~리~요? 몇 백 년을 살다 가리요…!‘
메들리로 이어진 여가수의 노래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점심 배식이 이미 시작됐을 시간이다. 당장은 병실에 들러도 할 일이 없다. 노래가 끝나자, 차문을 닫고는 어슬렁어슬렁 병원정문 밖 낙원관으로 향했다. 자장면이 맛있어 가끔 들렀던,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탁자가 여섯 개에 불과한, 달동네 중국음식집이었다.
‘태평(太平)이가 낙원을 찾아온 셈이네!’
나는 피식 웃으며 빈자리를 찾아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얼른 챙겨 병원에 안 가고 뭐하세요?”
오늘, 날이 샌 다음, 아내가 내게 던진, 오늘의 첫 대화이자, 첫 잔소리였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눈꼬리가 치켜졌지만, 이내 가까스로 참아 넘겼다. 웬 일인지 이름값을 못하는 요즈음이다. 퇴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매사에 너무 태평하다고 외려 핀잔 들을 때가 더 많았었는데…!
‘말을 해도 꼭 저 따위로 한다니까’
아내에겐, 안 해도 될 말, 그것도 상대방 기분 따윈 아랑곳없이 내뱉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전에 그런 습관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내가 퇴직한 이후 부쩍 심해진 것 같다.
‘오늘 병원에 갈 걸 누가 모르나?’
그것도 좋은 말로 권유하거나 부탁하는 게 아니라, 꼭 신뢰가 가지 않아 불안하고 믿지 못하겠다는 뉘앙스다. 이럴 때, 떫디떫은 풋감 씹는 기분이지만, 대개는 참아 넘긴다. 참아 넘기기가, 말이야 쉽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속에서 천불이 나고,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화를 못 참아 말꼬리를 잡은 일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큰 소리만 났지, 결과는 별무소득이었음을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상태다.
그런데 아내의 이런 잔소리는 희한하게도 나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우울할 때, 튀어나왔다. 예를 들면, 대개 누구나 그렇듯이 친구나 옛 동료가, 뭔가 새로 시작한 일이 잘 풀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마치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문득 그럼 나는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나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문제는 꼭 이럴 때 아내의 잔소리가 타이밍도 정확하게 터져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무슨 큰일도 별 것도 아닌, 시시한 일상을 들먹여가며, 시비 아닌 시비를 걸어올 때는,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다. 이를테면 방안 청소를 제대로 안 한다. 책상정리가 그게 뭐냐? 따위에서부터 나중에는 속옷을 왜 제 때 갈아입지 않느냐?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몇 년씩 혼자 객지에서 자취생활도 해 왔는데…, 알아서 할 테니 제발 좀 가만 놔두라!’ 고 역정을 내도 아내는 막무가내다. 상대방 기분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닌 듯하다.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병원 현관 앞 매점에 들렀다. 과자, 음료수는 물론, 햇반, 라면 등 먹거리와, 일상생활용품들이 진열돼있었다. 과일주스 한 박스를 샀다. 장모님께도 드려야겠지만, 솔직히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13층에서 승강기를 내렸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도심의 모습이 커다란 모자이크 그림판처럼 보인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 사이사이로, 크고 높다란 건물들이 재개발이란 기치아래 덩치와 키 재기를 해가며 진군해오고, 거기에 대항하듯 서민주택들이 땅개처럼 낮은 포복자세를 취하며 안간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장모님의 입원실인 1333호실에 들어섰다. 병실 안은 그저께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 무슨 일이지? 그저께까지 장모님이 차지하고 있던 침대에 다른 사람이 누워있지 않은가!
‘할마씨가 그 새 또 침대를 옮겼나?’
내가 두리번거리자, 옆 침대환자의 간병인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가리켰다.
“할머니 저쪽 창가로 옮겼어요.”
칸막이용 커튼에 침대가 가려져 있었다. 장모님은 선잠이 든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웬 잠? 금방 식사를 하셨을 텐 데…!’
내가 장모님 침대 옆에 붙어서며 기척을 했다. 보나마나 지난밤에 또 잠은 안자고, 사부작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잠만 망쳐놓은 게 틀림없었다.
장모님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침대 가에 붙어 선 채, 내려다보는 나를 올려다봤다.
“어, 장 서방 왔는가?‘
“허 참, 장모님도. 무슨 이삿짐센터 차렸소? 그새 또 자리를 옮기셨네.”
“으응? 그거, 이쪽은 햇볕이 많아서 좋아. 여기 있던 사람 어제 퇴원했거든”
장모님은 사위인 내가 던지는 핀잔 겸 농담을 예사로 받아넘겼다. 듣고 있던 다른 침대의 환자와 간병인들도 나의 말투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었다.
나는 장모님의 언행이 도통 맘에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별쭝맞은 변덕쟁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마치 자기 식구나 되듯,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었다. 때문에 걸핏하면 같은 방 환자나 간병인들과 다퉜다.
‘밤중에 쓸데없이 돌아다닌다.’ ‘이빨을 간다.’ ‘시끄럽게 떠든다.’ ‘지저분하게 어지럽힌다,’ 등등. 어느새 소문난 잔소리꾼에다 내놓은 트러블메이커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두어 달 새, 방을 세 번이나 옮기고, 침대도 수없이 옮겼다. 모두 옆 사람들과의 언쟁 때문이었다. 싸운 후엔 곧장 방을 바꿔달라고 떼를 썼다. 담당 간호사들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저히 방을 옮겨 줄 형편이 안 되면 자리라도 바꿔줘야 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는 별 말이 없었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주의를 주거나,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음에도 그런 게 없었다. 아내와 사위가 어떻게 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구십을 바라보는 고령이라는 점 외에는, 장모님을 남다르게 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장모님이 꼭 입원을 계속할 것이라면, 주위사람들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1인실로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이건 또 아내와 장모님이 병원비를 이유로 극구 반대했다.
나는 장모님께로 향하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여겼다. 그래서 병원에 올 때마다 환자들이나 간병인, 그리고 담당간호사들께 미리 설레발을 쳤다. 장모님 때문에 성가신 일 많겠다며 미리미리 양해를 구했고, 기회가 날 적마다 음료수 한 병씩이라도 돌렸다. 말하자면 뇌물공세였다.
깨끗한 옷차림에다 이목구비도 괜찮은 편인 나를, 다른 사람들이 예사로 보거나 가볍게 대하진 않을 거라는 점도, 오랜 사회생활을 통한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다 보나마나 장모님 특유의 나대기 좋아하는 성격이, 이미 있는 거 없는 거 모두 들먹여가며, 제법 괜찮은 사위로 선전해놓았을 게 뻔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쓸데없는 언행으로. 스스로 망가지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시쳇말로 기본점수는 확보해놓은 사위인 셈이다.
“할매요. 얼른 일어 나이소, 데이트나 하러 갑시다. 나하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일부러 친구 대하듯 만만하게 말했다.
“그려, 알았어.”
장모님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채고는 부스스 일어났다. 나는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에게 사 온 과일주스를 나눠줬다. 6인 병실 안, 장모님을 제외한 나머지 환자들에게는 모두 전담 간병인들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 다소 한가해진 간병인들이 모여앉아, 나와 장모님간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간밤엔 잠도 안주무시고, 무슨 보물이 들었는지 밤새 트렁크정리를 하시던데요?”
장모님 옆 침대의 울산 할머니 담당 간병인이 웃으며 말하자, 모두들 따라 웃었다. 음료수를 받은 간병인들은 모두 내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환자들은 모두 잠자듯이 누워있었다. 장모님 이외에는 거의 뇌경색 환자들이라 부축 없인, 거동은커녕 식사조차 불편한 중환자도 있었다. 장모님만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환자였다.
“장 서방 어서 가자고?”
어느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장모님이 커튼을 걷으며 내게 재촉했다.
“네, 가입시다.”
장모님을 부축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장모님은 약간 불안한 걸음걸이를 제외하곤 입원환자가 맞나? 싶게 멀쩡했다. 나는 이런 장모님이 뇌경색환자들과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니? 암만 생각해봐도, 무슨 블랙코미디 같고, 누가 봐도 웃기는 일이다 싶었다.
이제 담당 간호사에게 외출신고를 해야 할 차례다.
“오늘은 일찍 가서 엄마께 점심 때 외식이나 시켜드리지?”
바둑 TV에 눈을 박고 있다가, 시간 맞춰 현관문을 나서는, 내게 아내가 던진 말이다. 웬일로 전에 없던 호의일까? 싶어 되물었다.
“알았어. 그런데 당신은 정말 한 번 안 가 봐도 돼?”
“가 봐야지. 하지만 이 양반아! 내가 거기 가기가 쉬워요? 그래서 당신이 대신 다니잖아? 조금 있다 또 작은 놈 데리러 가야지. 나도 이제 지쳐 죽겠다니까”
아내는 아예 장벽을 쳤다. 자기가 먼저 엄마 보러 가겠다고 설쳐야 정상일 텐데…? 하기야 나도, 그냥 인사치례로 해 본 말이지, 뭘 어쩌라는 거야 물론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아내는 장모님 입원이후, 말로는 매번 가 본다면서도, 병원에 들르질 않았다. 아내는 나의 반대에도 적극적으로, 장모님을 입원시키고자 했던 당사자가 아닌가!
작년 가을이었던가?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장모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능청스레 물었다
“야야, 너 언제 왔어? 미국에서 미리 연락도 안하고 불쑥 와?”
“……예?”
느닷없는 장모님의 말에 내가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곁에 있던 아내가 화들짝했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정신이 나갔나? 이 사람 장 서방이야”
“으음 그래. 그렇구나. 나는 너 오빤 줄 알았네.”
장모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표정했다. 나는 장모님이 농담하시는 줄 알았다가 아내의 펄쩍뛰는 모습에, 처음으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어 나온 장모님의 말에는 나도 화들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네. 그런데 장 서방은 와 회사에도 안 나가고 이리 뭉그적대고 있노…?”
장모님은 정색한 얼굴로 다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아이 참 엄마는? 장 서방이 언제는 회사에 나갔어요?”
아내는 장모의 말을 되받으면서 눈은 내게로 향했다. 마치 ‘거 보세요. 엄마도 당신이 놀고 있다고 핀잔을 주잖아?’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장모님의 말에 놀라기보다 아내의 말이 더 괘씸했다. 회사에 다니다 명예롭게 퇴직한 게 아니라, 아예 회사엔 가 본 일조차 없다는 말투였으니까.
나는 세칭 58년 개띠다. 1958년 한 해 동안 백만 명 이상이 태어났다는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다. 초등입학 때부터, 콩나물교실 경험을 시작으로 입시, 취업, 승진 때마다 박 터지는 경쟁에서 그런대로 평균은 유지해 왔다며 자부해왔다.
초년 장교시절을 거쳐 보험회사를 거쳤고, 정년 1년을 남기고, 세상 시류대로 ‘명퇴’라는 꼬리표를 달고, 더 이상 간섭과 경쟁이 없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곤 엉거주춤하는 사이 밤낮이 없는 집 지킴이가 돼버린 지 3년차다.
집 지킴이가 되면서 오랜 객지생활도 청산하고, 나름 보람과 여유가 있는 또 다른 삶이 가능하리라 믿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당초 기대했던 것 대신에, 보기 드문 대가족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어이없게도 아내의 지청구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만 같다.
손주 놈들 거두기에다, 장모님 한 사람의 잔소리도 지겨운 판이었는데, 나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공간에서 복작거리게 되자, 아내의 심기는 가히 폭발직전으로 변해갔다. 중학교 생물 선생을 하다 중도에 그만두고 다도(茶道)연구회원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원래 적요한 분위기와 절제된 생활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늘그막에 성격과는 너무 동떨어진 현실을 만남 셈이다.
아내는 차츰 나와 장모님이 한 자리에 머무는 것 자체가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았다. 내가 마치 이름값이라도 하듯, 매사에 별로 바쁠 것 없이 태평스레 빈둥거리게 되자, 급기야는 장모님과 한통속으로 싸잡아 지청구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아내가 보기엔, 나의 생활이 불규칙하다는 게 큰 불만이었다. 아무 때나 들락날락하는데다 아무 시간제약도 없이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 식이라고 불평했다. 내심으론 절도 있게 시간을 조절하고, 가끔씩 자신의 일도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지만, 내 생각과는 맞질 않았다. 평생 일하고 퇴직한 마당에 그런 것까지? 하는 반발심에다 일손이 꼭 부족하면 아이 돌볼 도우미라도 찾을 일이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의 생각을 이해해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아내는 장모님과 내가 한 공간에 있다가 자칫 장서간 갈등이라도 불거질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가급적 내게 외출을 권했고, 나도 정해진 구체적인 약속이 없더라도 의당 집을 나섰다.
이럴 땐 대부분 금정산에 올랐다. 나이 들면서 동네 뒷산처럼 익숙해진 산이라, 내게는 가벼운 산책길이나 다름없었다. 범어사 뒤쪽으로 고당봉까지 올랐다가 금샘(金井)을 거쳐 세심정(洗心亭) 물맛을 보고 범어사 앞쪽으로 내려오는 게 나만의 정해진 코스였다. 거의 언제나 땀 흘린 뒤의 물맛이라 그렇겠지만, 세심정 물 마시기는 시원함과 마음 씻기를 동시에 안겨주었으므로, 산행증명을 받기위한 일종의 의식처럼 빠짐없이 치러야했다.
몇 달 전, 고교동기회관의 고스톱 판에서 운수 사납게 거금 5만원을 잃고 귀가했던 그날 저녁, 아내가 느닷없이 제의했다.
“우리 엄마, D병원에 입원시킵시다.”
“입원? 왜 무슨 일로?”
“당신도 잘 알잖아? 무릎관절로 고생하는 거. 거기다 자주 헛소리까지? 치매초기가 분명해. 양 서방 친구가 지금 D한방병원 의사라는 데 한 번 모시고 와보래.”
나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내는 아무 표정변화도 없었다. 어쩜 이렇게 중요한 말을 저리도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엄마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다니?
아내가 매사 빈틈이야 없지만, 저토록 영악하기도 했던가? 가끔씩 장모님이 고령으로 깜박깜박하시는 걸 치매초기증상으로 몰아붙이다니?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아내가 저렇게 강퍅했을까? 따져보면 모두 장모님에게서 모전여전으로 물려받은 성격인지라 뭐라 변명할 수도 없지만.
아내가 장모님을 반강제로 입원시키려는 것이 일종의 고육지책이란 거야 누가 모를까? 치과의사로 함께 개업한 딸과 사위 대신, 아직 천방지축인 세 놈의 외손자를 건사하는 게 아내의 일이다. 다섯 살짜리 두 놈은 쌍둥이고, 막내 녀석은 이제 겨우 세 살짜리가 아닌가! 거기에 엄마까지 돌본다는 건 도저히 무리라는 점이야 얼마든지 수긍이 가는 일이다.
장모님은 나이 사십을 못 넘기고 사고사한 장인 대신 3남매를 키웠다. 장모님은 장인의 사망보험금 등으로 범어사 밑 청룡동입구에 작은 텃밭 딸린 집 한 채를 구입한 게 전 재산이었다. 재운이 따랐던지, 산업화시대를 맞아 도시가 확장되고,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집터와 텃밭이 도심 한복판으로 변했다. 거기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붙임성으로 온천재래시장에서 생선장사까지 해왔다. 더욱이 돋보이는 점은 그 당시 엄마치고는 남다른 교육열로 삼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고, 그 결과 큰 아들은 미국에서 교수로, 작은 아들은 캐나다에서 의사로 각각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작 장모님은 노후에 갈 데가 없었다. 막내딸 정미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그러자 우리 집은 보육원에다 양로원을 더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이 외손자 돌보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까 했던 아내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거기에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퇴직이란 명분아래 객지에서 집으로 귀환한 나까지도, 아내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 덩어리가 되고 만 셈이었다.
나의 내 멋대로 생활은 그렇다 치고, 장모님은 아내 말대로 뭐가 단단히 이상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종일 쉼 없이 별로 영양가도 없는 간섭과 잔소리를 해댔다. 딸과 사위인 내게야 당연한 일이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들을 닦달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겁먹고, 놀라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이번에는 치과의사인 아이엄마와 아빠가 질색 했다.
어쨌든 나는 장모의 입원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렇게 상황판단이 안 되느냐? 며 대들었다. 어머니가 저리 정신없는 소릴 해대니까 당신 보기에 미안해서라도 따로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 는 이상한 논리까지 내세웠다. 아내가 잔뜩 겁을 주는 바람에 장모님도 입원조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장모님의 가느다란 팔을 부축하며 긴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앉아서 이야기 할 때와 달리 걸을 때의 모습이 너무 허약해 보인다는 걸 새삼 느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태우고 온천장으로 차를 몰았다. 온천욕을 시켜드리기 위해서다. 온천욕이 관절에 좋다며 당신께서 극구 원하셨다. 이틀에 한 번씩 목욕탕에 모셔갔다가 다시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정호한테 내가 입원해 있는 거 알린 거 맞제?”
장모님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정호는 큰 처남이 아닌가!
“그럼요. 곧 한 번 나온답니다.”
엉겁결에 둘러댔다. 전에도 몇 번 그럼요 하고 대답했는데 또 묻다니…? 장모님은 이내 말이 없었다. 장모님의 옹송그린 자세가 룸미러로 측은하게 비쳤다.
허심청목욕탕 카운트에게 부탁했다. 요금에다 때밀이 값은 물론, 약간의 팁까지 얹어주고는 목욕탕을 나섰다. 지금부터 두세 시간은 완전한 자유시간이다. 어디로 갈까? 산에 가긴 어중간하고, 모처럼 콜라텍에나 가 봐? 아니 동기회관이 나을 것 같다. 오늘은.
아마 친구들이 벌써 꽤 모여 있을 것이다. 동기들이 한창 때 모은 기금으로 전세를 얻어 놓은 공간이다. 다녔던 학교가 꽤나 컸고, 동기생 숫자도 여느 기수보다 많았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제법 명사로 통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고 이들의 도움도 컸다.
계급장을 잃어버린 친구들은, 모이면 재취업을 위한 충전단계라며 스스로 자위했다. 재취업이라는 거사(擧事)를 앞둔 잠시의 휴식이라고!
‘며칠 전에 잃어버린 판돈을 오늘은 기어코 찾고 말리라’
운전대를 잡으며 다짐을 했다. 아니 그보다 바둑으로 경식이 녀석부터 꺾어야겠다. 글피였나? 두 판 내리 대마가 죽는 바람에 거금 2만원을 잃었다. 평소 승률이 월등해 호구로 생각했었는데…, 두 판을 불계패한 것이다. 불계일 때는 1만원이 걸린 내기였으니까.
‘그래, 오늘은 우선 경식이 녀석부터 꺾어놔야지. 콜라텍은 퇴근시간이후에 가기로 하고.’
퇴근시간? 들어본 지 어느새 어색한 말이다. 장모님을 다시 병원까지 데려다 드리고 나면 오늘 일이 끝나니까, 그때를 퇴근시간이라고 혼자 정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이걸 두고 또 삐죽했다. 귀가가 조금 늦었던 어느 날, 아내가 왜 그리 늦었냐? 기에, 무심코 퇴근하고 한 잔 했다고 했더니 아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퇴근 좋아하시네. 무슨 일하러 갔었소?”
“그럼, 일이지, 그건 일 아니고 뭔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간병인 역할! 정해진 보수도 없이, 그만큼 일하면 됐지, 뭘 어떻게? 모처럼 시원하게 되받았다고 생각했으나, 한편 우습고 서글픈 기분이었다.
몸은 동기회관으로 놀러가면서, 머릿속은 콜라텍을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얼마 전처럼 옛날 거래처 사람을 만날까봐 좀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좀 민망하기야 했지만, 피장파장이지. 뭐 어때?’
그 보다는 운동효과를 생각해야지 싶다. ‘두세 시간 동안 땀을 흘리는 게 고당봉 다녀오는 것보다 낫다.’고들 했으니까.
동기회관에는 어쩐 일인지 경식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반색을 했다. 입이 찢어지게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복수하러 왔냐?‘
“그래. 한 판 벌여보자”
나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경식은 소형 냉장고에서 콜라 한 잔을 꺼내왔다.
“어째, 오늘 녀석들 출근이 늦네.”
“야, 신경 쓰지 마. 오늘이 어버이날이잖아? 모두들 가족잔치라도 벌이지 않겠어?”
“뭐? 오늘이? 그으래?”
“참, 넌, 아이들한테 용돈이라도 좀 받았겠구나?”
순간 머릿속이 찌릿했다. 아내가 웬일로 외식 운운하더니, 그게 그 뜻이었나! 오전에 차가 밀렸던 이유도? 그리고 아이놈들은…, 오늘 아침, 아무런 기미조차 없었잖아?
“이 친구 갑자기 왜 이래?‘
경식이 재촉했다. 그제야 나는 바둑알을 한 움큼 판 위에 쏟았다. 돌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불끈 성질이 돋았다. 말 한마디 없다니? 바둑이 제대로 두어질 리 없었다.
오늘도 지고 말았다. 아내에게서 받은 용돈만 축낸 셈이다. 방금 경식이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하네. 내가 녀석한테 질 리가 없는데…? 그 놈의 어버이 날 생각 때문이었나?’
그건, 아니야. 내가 봐 준 거지. 녀석이 오늘 같은 날 오갈 데도 없이 동기회관을 지키고 있는 게 안쓰럽지 않은가! 일찍 이혼한 친구다. 딸 아이 하나가 경기도에 살고 있으나 생활이 어려워 자주 찾아오지도 못한다고 언젠가 푸념하던 생각이 났다.
‘녀석에 비하면 난 그래도 복이 많은 놈이지. 장모님도 그렇고…!’
장모님은 벌써 휴게실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나를 보시더니 대뜸 쇳소리를 냈다.
“와 이리 늦었노?”
“아, 친구 만나 이야기하다 좀 늦었어요. 기분은? 좋아요?”
미리 설레발을 쳤다. 경식이 녀석에게 또 첫 판을 지자, 오기로 한 판 더 두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버린 것이었다.
“어서 가자고? 저녁시간 다 돼 간다.”
“장모님! 식사라도 하고 들어가시겠어요?‘
“식사는 무슨? 병원에서 다 주는 데…”
나는 맘속으로 휴! 했다. 말이야 꺼냈지만, 내심 장모님과 식사하기엔 스케줄이 꼬였다. 체면상 해 본 소린데…! 다행히 거절해주시니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어버이날인데 어떡할 거냐?’고, 아내에게 동기회관에서 전화로 물어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 식사대접이라도 하라고 했잖아!’ 라며 대뜸 지청구부터 했겠지. 그런데 이제는 내가 먼저 저녁까지 권해 보았다면서, 아내에게 생색을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늦게 온 게 불만이신지, 장모님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차가 이제 막 꽃잎 대신 연두 빛 새잎으로 무성해가는 온천천 벚나무 길을 지날 때, 갑자기 처남들을 들먹였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는데 어찌 전화 한 통이 없네. 망할 놈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이 어버이 날인 줄 알고 계셨구나! 그렇지! 같은 병실 안 간병인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지. 그나저나 아내는? 전화라도 한 번 했을까? 아니야. 만약 전화를 받았더라면 장모님 성격에 벌써…?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모님은 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수진이 애미는 원체 바빠서 병원에 자주 못 오는가 봐요”
갑갑하고 민망한 나머지, 먼저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 바쁜 걸 어쩌겠는가?‘
장모님의 답은 짤막했다.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뜻일까? 딸 대신 사위인 내가, 딸 역할까지 한다고 애쓰지만, 장모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뭐라고 위로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고 카세트테이프를 다시 눌렀다. 오전에 들은 노래가 다시 나왔다.
‘미련 따윈 없는 거야, 후회도 없는 거야. 아~ 아, 세상살이 뭐 다 그런 거지 뭐…’
그래 맞아. 세상살이 다 그런 거야. 뒤에 앉은 장모님도 덩달아 한마디 했다.
“그래, 세상살이 다 그런 거지. 참 허무하기도 하고…!”
나는 장모님의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에 또 다시 움찔했다.
‘정신이 너무 맑아 오히려 고통이시겠구나! 의식조차 없이 누워있는 환자들에 비하면…’
룸미러에 비친 장모님의 시선은, 저녁햇살을 받으며 미풍에 흔들리는 벚나무 이파리들에 꽂힌 채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무엇을 저리 골똘하게 생각하실까?
‘저렇게 싱싱한 이파리도 여름 한 철 지나면 낙엽으로 변하겠지?’
나는 쓸쓸해 뵈는 장모님의 표정에다 내 나름의 생각을 대입해보았다. 순간, 딸년과 사위 녀석이 공모하여 자기를 병원에 가뒀다고, 아니 병원으로 내 몰았다 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나도 장모님처럼 내몰린 건가? 복잡하게 생각들이 엉켰다.
동시에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듯 찌릿해왔다. 그렇구나! 장모님이나 나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사이, 평생 일궈온 영지(領地)를 빼앗기듯 잃어버린 것이구나! 장모님은 벌써부터 영지를 잃고 변방을 떠도는 영주(領主)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나는 태평치고 있다가 이제야 상황파악을 하다니! 자책감이 들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그게 살아가는 과정에 시나브로 찾아오고, 맞아야하는 고비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룸미러로 장모님 표정을 살폈다. 장모님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뭐라고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병원정문 앞 노지에 임시 꽃가게가 열려있었다. 오전엔 보질 못했던, 색색의 카네이션 화분이며, 바구니들 앞에 몇몇의 행인들이 둘러서있었다.
나는 장모님을 병실에 모셔드리고, 병원복도를 걸었다. 손목시계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울적한 기분이라 그런지, 연방 허허 바람 빠진 헛웃음이 실실 터져 나왔다.
‘정말, 콜라텍에라도 가봐야겠다. 이대로는 도저히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겠는 걸!’
<끝>
첫댓글 이제야 읽었소. 세상 모든 문화가 젊은이들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데, 노인인구가 증가하는 현대에 주옥같은 글이요. 앞으로 이런 글이 주목받는 사회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를 바라고요. 왜냐? 우리가 우리인생 돌아 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까.
글 흐름이 미려하여 읽는 내내 이상의 '날개' 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요. 일상을 설명하다가 영지 문제로 도약하는 것이 신선한 착상이라 생각됩니다. 단지 앞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미리 던져서, 너무 비약적이지 않게 서술이 진행되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제목도 그냥 '영지' 로 하는 것이 영지를 잃다로 길게 쓰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노년 문학이라 할까. 이런 장르를 개척하여 봄이 어떨까요? 어린이 젊은 이는 자기 말년을 상상하며 많이 읽게 되는 노년기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노인들은 지내온 젊은 날을 되새김하며 읽고 싶은 유년기의 이야기를 좋아하듯. 황순원의 소나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은 우리가 참 재미있게 읽지요. 노년의 인생은 우중충하기만 해야 할까요? 우중충한게 현실이지만 더 밝고 맑은 글에도 도전해 봅시다. 현실 그대로를 표현하지 말고, 완전히 밝은 색으로만 덧칠한 글. 온천의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