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촉촉이 내리는 날입니다.
이런 날, 여유를 가지고 컴,앞에 앉았습니다.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블리주는 계란의 노른자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귀족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편화 되었습니다.
역사적 실례(實例)를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 로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의 건국 과정을 볼라치면 두어가지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정복자에 의한 무력이나 어느 한 정치가의 수완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고 정치체제를 공화정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지금의 이탈리아반도에서 탄생한 나라였습니다.
초기 로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습니다.
주변 발전된 도시국가들로부터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공화정체제를 발전시키고
시민들의 단결과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국의 위상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대제국을 이루어냅니다.
이러한 로마가 오랜 역사와 막강한 힘을
지닐 수 있었든 요인가운데 하나가 앞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철저하게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가진 만큼 사회에 내 놓았습니다
개인이 낸 기부금으로 공공시설을 짓거나
크게 보수하게 되면 기부자의 이름을
붙임으로 이러한 풍토를 진작 시켰습니다.
금전적으로 그랬고 몸으로도 전시에는
솔선하여 참전하고 전투에서 선두에 나섰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의 2차 포에니전은 16년이 이어졌고
이 기간 중에 로마의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집정관은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최고위직으로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자리였습니다.
평시에는 권력에 따르는 암투가 처절하게 이어졌지만
전시나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이들 지도자들이 앞장서 막았습니다.
역사에 나타나는 군대 가운데 로마군과 몽골의 징기스칸 군이 가장 강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에서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점령지 면적에 있어서는 로마가 몽골과 비교가 되지 않으나
역사에 있어서는 열배가 훨씬 넘는다는 것입니다.
몽골(원나라) 90년, 로마 1200년,
왤까?
몽골은 점령지의 주민들을 노획물로 보는 시각이 있었고
한족(중국의 본토인)을 지나치게 하대했습니다.
결국 얼마 못가서 도도히 흐르는 중화의 역사에 유입되어 버립니다.
반면 로마는 역사의 주역이 되어 모든 길은 로마로란 말처럼
판도 내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국력을 키웠습니다.
로마시민이라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성서에도 나타나지만 판도 내에서는 그 누구도 로마시민한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뒤에 동서로 분단되고 서 로마가 앞서 붕괴되지만(AD476)
이 정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건국시대로부터 면면히 흐르며 장구한 역사와 함께 이어 내린 것입니다.
세계사를 보았다면
이젠 우리나라 역사를 가지고 보겠습니다.
좀 멀리, 통일 직전의 신라로 눈을 돌려 화랑도를 보겠습니다.
화랑도는 6세기경 진흥왕에 이르러 공인됩니다.
제일 위에 한명의 국선이 있고 아래로 몇 명의 화랑, 조직원은 낭도라 하여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이에 뭉쳤습니다.
나이 15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들로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명산대천을 찾아 심신을 연마하고 호연지기를 길렀습니다.
화랑도 기본정신은 원광국사의 세속오계에 두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계율이 들어있어
당시 화랑들은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것을 무한 영광으로 여겼다 합니다.
황산벌 전투로 눈을 돌려 볼까요.
결전에 따른 신라의 승리는 관창과 반굴의 죽음에 있었습니다.
둘 모두 화랑으로 홍안 소년들이었고 관창은 장군 품일의 아들,
반굴은 김유신의 동생 흠순의 아들이었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오천 결사대는 초기 전투에 네 번 승리하여
사기가 승천해 있는 반면
패배한 신라군은 말이 아니게 사기가 추락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관창이 앞서 나가 독전(獨戰)으로 전사하고
다음날 반굴이 이어 목숨을 바치자
신라군들 사이에서 어린 둘의 목숨을 헛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분기탱천한 신라군은
터진 봇물처럼 밀고 나아가
백제군을 쓸어버렸습니다.
관창이 전사한 날 저녁 흠순은 형 유신을 찾아
내일은 자신의 아들 반굴을
출전시키겠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에 유신은 허락하고 당사자 반굴도 기꺼이 출전합니다.
당시 한반도 삼국 가운데 변두리 작은 신라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근간이 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화랑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김춘추의 대당외교(對唐外交)의 성과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예를 드는 데는 제가 볼 때 이부분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아 여기 올려보았습니다.
끝으로
우리 사는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봅시다.
한심합니다.
뇌물, 탈세, 부동산투기에 따른 부정축재등
부정적 수식어가 이들 이름 앞뒤에 붙어다닙니다.
어느 한사람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병역기피도 한자리 차지하고요.
국가의 최고 책임자 대통령들조차 말입니다.
사는 날에 돈과 권력 거기에 명예까지 다 얻는 다면
더 없이 좋겠지요.
욕심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의 돈 권력 명예 이 세가지가운데
한가지도 얻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백에 팔 구십이 될 것입니다.
그저 한가지,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에 만족하고 나이들면
사회와 후진들에게 다 내놓고 노년을 청정한 사생활로 돌아간다면
명예는 저절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과 파면에 이어 법정에 서게 되는 한국사 초유의
사태를 맞아 온통 나라가 시끄러운 요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 고 유일한님을 그려봅니다.
어린시절 들은 얘기입니다.
와이셔츠 하나에 넥타이 두개로 사셨다고 합니다.
그 분의 전기를 읽지는 못했으나 기업인의 사표로 모시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존경할 만한 정치인에 관하여는 아는 게 없어 어떻다는 말을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