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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 : 이강택, 작가 : 황정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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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말 달리고 3초 (흘리고)
- 국문 하는 모습 10초 선조 22년 시월, 황해감사가 올린 비밀
장계 한 장이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 감옥 7초 역성혁명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갔다.
- 실록표지 3초 조선조 최대의 옥사였다.
- CG 17초 '천하는 왕의 사유물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불순한 사상이 역모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여립 영정 14초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여립. 하지만 그는 돌연, 의문의 자살을
하고 사건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테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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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역모인가, 조작인가 - 정여립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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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1 > 오프닝
- MC : (추국청을 배경으로)
여기는 의금부에 있던 추국청입니다. 우리에게 흔히 '정여립의 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국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안은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죄수들은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형법제도는 보통 3심제였지만 역모는 예외적으로 단심제 였습니다. 따라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초월하는 갖은 고문이 행해졌습니다.
(신장 집어들며)
이것이 흔히 자백을 받아낼 때 사용되던 '신장'이란 것입니다.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참나무, 박달나무 같이 매우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몇 대만 맞아도 살과 피가 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에 30대 이상은 치지 못하게 돼 있었지만,
역모사건의 경우에는 이런 제한규정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중곤, 대곤 집어들며)
역모사건에는 이렇게 생긴 '곤'이란 것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이쪽에 있는 대곤을 보면, 길이가 168센티미터에 넓이가 13센티미터, 두께가 1.8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이쪽의 중곤, 무거울 중(重)자 중곤은 대곤과 비교하면 조금 길고 두껍습니다.
(중곤 들고 형틀 앞으로 걸어가며)
손에 들기에도 버거운 정돈데, 이렇게 형틀에 팔과 다리를 묶어놓고 자백을 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쳤습니다. 그래서 매를 맞다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압슬형 그림으로 걸어 가서)
매질로도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렇게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형이 가해졌습니다.
널판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린 뒤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올라가 밟기도 했는데 6명까지 올라가 밟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낙형 도구 들고)
또, '낙형'이란 것도 행해졌습니다.
화로에 벌겋게 달군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것입니다.
이런 고문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이렇게 고문을 받다가 죽고, 또 사형을 받아 죽은 사람이 모두 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선비들은 물론 평민과 노비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이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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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1 >
# 이발
- 아파트 외경 5초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
- 꺼내는 손부터 12초 4백여년 전의 사연이 이곳에 간직돼 있다.
광산 이씨 가문의 후손 이재수씨.
그는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고문서 한 장을
내놓았다.
- 펼쳐 보이고 26초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한지 20여년 뒤인 1610년
작성된 유서였다.
(조금 보다가)
여기에는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멸문지화를
입고 겨우 살아남은 후손이 밀양이씨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야 했던 가문의 내력이 적혀 있었다.
- 얘기하는 2s부터 16초 이 유서의 작성자는 '사건 당시 9살의 어린
나이로 화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도망갔으며 그
와중에 어머니는 굶어서 돌아가시고 혼자 거지 행세를 하며 살아남은 이원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 '여립난'부터 23초 그후 이원경은 나주로 피신해서 상민과 결혼,
밀양 이씨 이정신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하지만 서른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몸져눕는다. 이 유서는 죽기 한달 전 이원경이 구술한 것을 처가쪽 인척이 받아 적은 것이다. 세살박이 어린 아들에게만은 조상을 바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 유서 전문 17초 이 유서가 발견된 것은 1860년대. 전염병이 한창
나돌던 때였다. 집안에서 오래된 물건을 찾아
태우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버려둔 장롱 한귀퉁이에 붙어있는 이 유서를 발견한 것이다.
- 내용 자막 11초 (내 자손들이 자라거든 이 말과 이 글을 전해서
출신 가문과 선조를 잊지 않도록...)
- 이재수씨 인터뷰 (귀신이 붙은 거니까 불태워버려라. 근데 용케
내용이나 보고 태워버리자 그래가지고 그걸 뜯어보니까 유서가 붙어있더라. 농 안에. 그래서 알게 됐다. 240년동안 밀양 이가로 행세하고 거기서 결혼을 하고 산거다. 어디를 가지도 못하고.)
- 얘기하는 2s 5초 이원경이 도망을 간 이유는 아버지
이급의 동생, 이발 때문이었다.
- 이발의 유필 18초 이발은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빌미는 정여립과 시국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 형틀 10초 이발은 귀양을 가다가 잡혀와 고문 끝에 죽었고,
나머지 형제들도 역모를 부인하다가 죽었다.
- 의자 4초 여든이 넘은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을,
- 곤장 8초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아이들도
매를 맞다가 죽었다.
- 족쇠 5초 역모에 대한 수사는 상식을 초월했다.
- 제동마을 10초 사건의 여파는 이곳 함평의 조용한 제동
마을에까지 불어닥쳤다.
- 윤암경사 8초 당시 이곳에서는 호남의 대유학자 정개청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 문열고 목판본 꺼내고 24초 50대 후반의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는 정개청의 '우득록'. 임금이 읽어
보고 칭찬하자 홍문관에서 귀하다는 먹감나무를 전국에 수소문해 목판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 목판들 10초 그런데 인근에 살던 정여립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돼 화를 입는다.
- 리현석 영산강 문화연구소장 인터뷰 (정여립의 집터를 보아줬다. 이 양반이 역학을
했기 때문에 타당한 말. 그 다음에 이분이 쓴 편지 두통이 나왔는데 거기에 도를 아는 건 당신이다 이 말이 크게 얘기를 했다.)
- 유허비 11초 정개청은 예의상 한 말일뿐 정여립과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유배당하고 두달만에 죽었다.
- 동네 가리키는 6초 화는 마을 전체에까지 미쳤다.
- 제자거리 10초 정개청을 따르던 제자 50명이 죽고 20명이
유배당했다. 남아있던 4백여명도 과거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 리현석 인터뷰 (선생이 그렇게 되니까 다들 떠났다. 마을도 비고
그분들 벼슬길도 막히고 수난을 겪게 된다.)
- 연려실기술 3초 어이없게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 자막 11초 안질 때문에 오해를 받아 죽었는가 하면,
관기와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이 화근이 돼
역모에 몰리기도 했다.
- 이이화 인터뷰 (정여립이 글도 잘하고 하니까 백유양이란 사람이
자기 아들을 그리로 보내면서 당신 아들처럼 대해달라 이렇게 얘기했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이걸 역적으로 몰아가다 보니까 어떻게 역적한테 내 아들을 네 아들처럼 여겨달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런데 옛날에 자기 자식을 보낼 때 그렇게 했다. 그래가지고 몰아서 다 죽인다든지.)
- 거열(한프레임 묻혀 있음)8초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가운데
능지처사됐다.
- 교수 6초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
- 도동서원 12초 조선 전체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날조된 유언비어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 위패로 8초 도동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최영경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 위패 ts 13초 그가 옥에 갇히자 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여들었을
정도로 최영경은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정여립의 부하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썼다.
- 신병주 박사 인터뷰 (길삼봉에 대한 진술도 용모에 있어서 수염도
허옇고 아주 수척하다는 표현이 있는가하면 아주 살이 쪘다는 진술도 있었고 나이도 30세다 50세다 60세다, 사는 곳도 전주나, 나주다, 진주다이런 여러 정황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0세에 수염이 허옇고 수척한 노인이다는 진술만 증거로 채택. 이것은 실존인물 최영경과 닮은 진술만 채택함으로써 최영경을 옥사에 연루시키려했던 그 당시에 짜맞추기식 수사에 최영경은 희생됐다고 볼 수 있다.)
- 선조 사과비 16초 최영경은 국문을 받던 중 옥사했다.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희생자들 중 가장 먼저 명예가 회복됐다.
- 벼락 치고 13초 (보다가)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이렇게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선사회에 광풍을
몰고 왔다.
- 희생자 이름 스크롤 10초 그리고 그 회오리는 이름높은 학자에서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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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이렇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역모 가담 여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옥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여립이란 인물이 그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을까요?
(정여립 영정 나타나고)
바로 이 사람이 정여립,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입니다. 전주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22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습니다.
정사인 실록에 의하면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게 되고 그 사건 이후 벼슬길이 막혀버립니다.
여기에 앙심을 품고 천민과 승려 등 사회불만 세력을 규합해서 역모를 했다는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중 정여립에 대한 기록, 자막 CG로 들어온다)
또 정여립의 어린 시절 일화가 전해지는데,
'여립이 7,8세 무렵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토막내었다. 아버지 희증이 노하여 누구의 짓이냐고 물었다. 한 여종이 그 연유를 일러바치자 희증은 여립을 크게 나무랐다. 그날 밤 여종의 부모가 출타하고 여종 혼자 자고 있을 때, 여립은 그녀의 배를 칼로 찔러 죽였다.' '성격이 흉악해서 형제 대여섯명 간에 사이가 좋지 못했고 친척 중에 원수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역모자에게는 흔히 이런 식의 일화가 따라다니긴 하지만 대단한 악평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호의적인 평가도 많습니다.
(대동야승 들고)
예를 들어 조선 초부터 인조때까지의 야사가 수록된
<대동야승>을 보면,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고, 논의가 격렬해서 거센 바람이 이는 듯했다'고 합니다.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반역자', '박람강기한 대학자'
이 중 어떤 것이 진짜 정여립의 모습일까요?
정여립의 흔적을 찾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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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범상치 않은 인물, 정여립
- 동곡마을로 9초 관복을 벗고 낙향한 정여립이 터를 잡은 곳.
- 마을 스케치 25초 이 일대는 지금까지 다양한 민간신앙이 성행할
정도로 예로부터 명당으로 손꼽혀왔다.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건물이 자리잡고 있는가하면,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 터 얘기도
전해진다.
- 제비산 7초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도 이름난
명당, 제비산 자락에 집을 짓는다.
- 집터 5초 4백년 전 정여립의 집이 있었다는 곳.
- 축대 15초 (보다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정여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최순식씨는 이곳을
정여립의 집터라고 확신하고 있다.
- 기와 (여기 기와도 있네요. 정여립의 집터에서 나온
거다. 그럼 여기가 다 집터였다? 정여립의 집터가
여기에서 저기까지...)
- 집터 일대 7초 일제시대까지만해도 이곳은 흉가터로 알려져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 최순식 인터뷰 (밭임자가 이것을 밭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건
정여립의 집터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이건 보존을 해야 한다. 이건 수막새인데 안에 별이 일곱 개가 있더라 )
- 수막새 12초 일곱 개의 별까지 새겨진 범상치 않은 기와.
명문가인데다 재력도 상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연려실기술 11초 관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수령들도 앞다투어 그를
방문했다.
- 동네에서 줌아웃 9초 사람들이 오면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과 풍수
지리학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 풍경, 산신각에서 바위로 12초 이렇게 정여립의 행동은 보통 사대부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지금도 효험있는 기도처로 유명한 제비산 중턱의 치마바위.
- 촛대 18초 그는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 강 8초 이런 언행은 당시의 흐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 신병주 박사 인터뷰 (풍수나 천문지리에 해박했다거나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등 당시의 국시였던 정통 주자성리학의 흐름과는 아주 배치되는 사상의 소유자. 더구나 나아가서 천하에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만큼 일탈된 사상의 소유자. 이런 정여립의 급진적 진보적인 사상의 배경에는 현실에 대해서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의식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 트래킹 8초(김제에서 진안) 정여립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 죽도 16초 옛날에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산속의 섬으로
불린 죽도. 이곳에 그는 서당을 짓고 양반, 상민, 천민, 승려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 천반산으로 14초 그래서 죽도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던 정여립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예를 가르치는데 힘썼다.
죽도 뒤편으로 덕유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천반산.
- 오르는 4초 가파른 능선을 한시간 정도 올라가면,
- 산성의 돌 10초 정여립이 활쏘기와 무술을 가르쳤다는 곳이
나타난다. 이 일대에서 화살촉과 커다란 솥이
발견되기도 했다.
- 군데군데 커다란 돌들 5초 무려 6백여명이 '대동계'라는 이름으로 한달에
한번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 신정식 인터뷰 (이곳이 천반산인데 평평한 곳이 한 5천여평.
지금은 나무가 가득차 있지만 이곳에서 정여립이 대동계원들과 같이 군사훈련을 했다. 활쏘기나 진법훈련이 끝나면 정여립이 가산을 털어 여러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 실록 14초 대동계의 위력은 대단했다. 1587년 정해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하루도 안 돼 군사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 이이화 선생 인터뷰 (선비 위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신분계층이
다양했다. 중, 술사, 천민들이 들어있다는 것이 범상치 않은 것. 그 당시로서는 불손한 것.)
- 신병주 박사 인터뷰 (정여립처럼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갖춘 지식인이
당시 지식인의 행동반경이 좁은 사회에서는 금방 포착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여립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이 정적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여진다.)
- 달밤의 역모 25초 (조금 보다가)
체제에 대한 불만, 강한 리더쉽, 그리고
관군을 능가하는 군사력. 이렇게 역모 주모자로서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정여립.
실록에 의하면 그는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운다.
- 괴문서 붙이는 12초 (조금 보다가)
그리고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해 역성혁명은
필연이라는 도참설을 세간에 유포시킨다.
- cg 12초 실제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목자망 존읍흥', 즉 이씨 왕조가 곧 망하고 정씨가 새로 일어난다 이야기가 떠돌았다.
- 전주와 안악에서 한성으로 8초 기록에 의하면 '선조 23년 정월,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켜
- 광흥창 서강창 거쳐 홍제원으로 9초 한강까지 올라가 서강창을 습격, 군량미를 확보한
뒤 홍제원에 진을 친다. 팔도물산이 올라오는 수로를 차단하고
- 도성 진입 14초 성안에 자객을 들여보내 병조판서와 금부도사를
죽인다. 그리고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성안으로 진입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 도망10초 그런데 계획이 사전에 탄로가 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 송판서굴로 18초 뒤늦게 이 소식을 안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
가다가 천반산 중턱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이
작은 굴에서 최후를 마친다. 당시 그를 뒤쫓았던 민인백은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토역일기 (여립이 옆사람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칼을
번득일 때마다 한사람씩 쓰러졌다. 마침내 여립이 칼을 땅에 꽂고 스스로 목을 찔러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 자막 사라지고 10초 이렇게 자결한 정여립의 시신은 한양으로 압송
됐고 역모의 주모자로 능지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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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역모를 꾀한 정여립이 자살을 했다'...
유교경전 뿐 아니라 풍수와 천문 등 다양한 학문에 두루 능통해서 학계와 벼슬아치들에게까지 두루 영향력이 미쳤던 인물 정여립.
게다가 그는 하층민과 무사들을 대규모로 조직할 정도로 강한 리더쉽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모를 했다면 왜 싸워보지도 않고
자살을 했을까요?
실록에는 조정 중신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정여립의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돼 있습니다. 정여립이 서울로 올라와서 결백을 밝히면 다 해결될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여립은 도망을 가다가 자결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결한 것이 역모를 시인한 증거로 해석돼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 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소만록 CG)
17세기에 쓰여진 당쟁에 관한 책, <동소만록>을 보면,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는 것입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었는데 선전관과 현감 민인백이 군사를 데리고 포위하여 그를 때려 죽였다.'
즉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정여립 역모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다!
학계에는 이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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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정여립 역모는 조작됐다?
- 전북대 이희권 명예교수 19초 학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여립 역모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희권교수. 처음 이교수가 정여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할수록 조작의 의혹이 짙어졌다고 한다.
- 괘일록 6초 특히 이교수는 정여립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 자막 <의혹1: 정여립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 이희권 교수 인터뷰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찾아봤어도 역모를 증명
하는 한편의 문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한점의 병기도 찾을 수 없었다. 정여립이 모반을 위해서 대동계라는 무사집단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집단은 어디 갔으며 왜 놔둔 채 도망을 갔느냐 하는
점이다.)
- 이덕일 한가람 역사연구소장 인터뷰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면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지방관이 알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 도서실 김용덕 교수 책 보는 24초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명예회복 됐기 때문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 대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모순에 부딪힌다. 작고한 원로 사학자 김용덕 교수는 또다른 각도에서 조작설을 제기한바 있다. 정여립의 도주 행적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자막 <의혹2: 왜 서신들을 그대로 방치했을까?>
- 서신 12초 많은 사람들에게 역모 가담의 증거가 됐던 서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면 도망가면서
서신을 불태웠을 것이라는 점.
- 자막 <의혹3: 왜 하필 죽도로 도망갔을까? >
- 죽도 21초 또 정여립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간 곳은 그의
본거지로 이미 알려져 있었던 죽도였다고 게다가 자신의 행방까지 알렸다는 점 등이 역모 주모자로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 자막 <의혹4: 정적들은 사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식영정(전남 담양군)11초 흔히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쟁의 한복판에 서있던 송강 정철.
- 내부 14초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그는 정여립의 역모
고변이 있던 날 밤 아들의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송강은 입궐을 서두른다.
- 자막 또한 아무도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던 상황
에서 벌써 정여립이 도망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김장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송강은
입궐해서 선조를 독대했다.
- 부용당 23초 곧이어 수사 총책임자가 역모를 믿지 않았던
정언신에서 정철로 교체됐다. 정철은 옥사의
확대에 서인의 영수로서 전면에 나섰고 그 배후에는 당시 제갈공명에 비유되던 송익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cg 14초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동인들은 송익필이
사건을 사전에 기획하고 정철에 의해 실행됐다고
믿었다고 한다.
- 이덕일 인터뷰 (익필의 동생 송한필이 자기 부하들을 정여립이
왕이 된다는 말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이 말들이 나중에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다는 점에서 송씨 형제가 배후에서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동인들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 CG 15초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하지만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 권인호 교수 인터뷰 (5년 전부터 동인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데
동인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는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인사들이 동인인데 그 역모에 가담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무옥이고 왜곡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 선조릉 33초 선조는 이 사실을 알면서 방관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 대원군의 셋째아들로,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에 의해 추대된 임금이다. 따라서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선조는 당시 동서 붕당대립 구도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옥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선조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사실로도 짐작된다.
- cg 13초 훗날 선조는 정철이 서인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제멋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연루시켰다며 정철을
강계로 유배 보냈다.
- 이덕일 인터뷰 (선왕의 유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선조와 신하 사이는 예전과 다른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다.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임금과 신하사이의 관계를 분명히하는 계기로 이용하는 측면이 있고 십여년 동안 집권하면서 세력이 강대해진 동인세력을 약화시키고 붕괴시킨 그런 측면이 있다.)
- 동래정씨 족보 19초 따라서 이런 몇가지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 의 주장이다. 조선조 내내 반역자로 지목돼 족보에서도 지워진 정여립. 그는 정치적 음모에 걸린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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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보신대로 정여립 역모사건이 조작 됐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모의 진위를 명백히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사건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유실됐고, 정여립의 저술은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입니다.
또 후대의 기록들 역시 동인 입장에서 쓴 것과 서인 입장에서 쓴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하느냐에 따라 역모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여립이 했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CG 등장)
정여립이 자주 했다는 말입니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 그리고 우임금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서로 물려줬는데 그들은 성현이 아닌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 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왕위 세습을 부정하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로서는 지극히 반체제적인 발언이었을텐데...
(모니터에 신복룡 교수 등장)
MC 신복룡 교수님, 정치사학을 전공하신 분으로서 당시 이런 말을 한 정여립의 사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신복룡 (폭군을 어떻게 갈아치우느냐는 정치사상사적으로 오랜 화두였다. 하지만 서구에서도 올리버 크롬웰에 가서야 가능했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여립은 서구보다 6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주장한 선각자였다고 본다.)
MC 정치사상사적으로 볼 때 정여립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는 말씀이군요.
(정면 보면서)
시대를 앞서갔다.....
그렇다면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했든 하지 않았든
그가 품은 사상 자체가 당시 체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얘긴데 그 때문에 정여립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신분상으로 기득권 층이고 또,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고향에서 나름대로 편안히 살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왜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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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 금산사 미륵전 19초 정여립의 집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대표적 미륵도량인 이곳에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이 서려있다. 건국 초기 백성을 위한다던 명분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 미륵불 기도 촛불 31초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
당시 백성들은 이 미륵신앙에서 구원을 찾을 정도로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중앙의 훈척세력은 국가의 재산을 빼돌려 사유재산을 늘리고 바닥난 국고는 백성의 세금으로 채워졌다. 지방관리들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면서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 실록 6초 세금을 피하려고 노비를 자청하거나
유랑생활을 하는 양민들이 부지기수였다.
- 내용 15초 붕괴 직전에 이른 조선의 현실. 그 심각성은
'고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는 당시 서인들의 상소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 이덕일 인터뷰 (방납업자들로부터 농민들이 사가지고 납부하는
것만 국가에서 받아줬다. 이 경우 방납업자들이 파는 것이 정상가의 30배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민들이 공납의 폐단과 방납업자의 중간 농간에 의해 겪는 고통은 아주 심각했다.)
- 배동수 박사 인터뷰 (여진족들이 여러차례 침략을 해와. 기록에 보면
마치 나라가 망하는 듯한 사황, 또 임진왜란은 10년 전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얘기할 때부터 예견된 것. 율곡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을 예측. 그러니까 국내, 국외적으로 대단히 위기상황이었다.)
- 트래킹 6초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 산천재 22초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지리산 자락.
가산을 모두 아우에게 물려주고 이곳에 들어온 남명 조식이 그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던 최영경, 정인홍 등 150여명의 제자를 키워냈다.
- 조식 영정 12초 그는 일부 보수적 사림파들이 훈척과 결탁하면서
가문과 파벌의 이익을 챙기는 등 변질돼가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 서까래 그림 20초 말로는 맹자 공자를 논하면서 실제로는 유교적
통치이념의 근간인 민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남명은 백성들의 현실과 체제의 모순을 직시할 것을 요구했다.
- 정우락 영산대 교수 인터뷰 (당대에 기대승과 이황이 벌이던 이기논쟁을 이론을 위한 이론, 학문을 위한 학문은 무용하다. 물뿌려 쓸고 응하여 대답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입으로만 천리를 얘기한다 하면서 그 사람들을 기세도명,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한다고 비난. 강하게 실천을 강조했던 것.)
- 냇물 17초 남명은 나아가 '물이 있어야 배가 떠다닐 수
있듯이 권력은 민중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제자명부 8초 이러한 민중 중심적인 개혁사상과 실천 태도는
그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 의병장 분포 지도21초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이
었던 남명은 일찍이 외침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당시 무력한 관군을 대신해 의병을 일으킨 제자들이 50여명에 이른다.
- 정우락 영산대 교수 인터뷰 (학문의 개방성. 주자성리학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이라고 하는 노장사상을 받아들인다. 정여립도 율곡을 추종하는 서인이었지만 동인 쪽으로 넘어오면서 그런 성향을 보이게 되는데 실천적 성향, 박학풍, 주자학을 고답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탈피...남명사상과 일정하게 연결이 되지 않았을까...)
- 예성강 4초 지리적 여건 상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 개성 고지도 4초 더욱 개방적이었던 개성 일대의 화담학파 역시
- 화담 영정 5초 당시 개혁을 주장하던 지식인들이었다.
- 이지함의 묘 11초 여기에는 토정 이지함을 비롯해 정여립 역모에
연루돼 죽은 이발과 정개청 등이 속해 있었다.
- 신병주 인터뷰 (화담학파의 경우에는 신분적 개방성이 돋보인다. 공사천이나 서얼들의 자식들도 직접 가르치고 신분에 대한 개방성을 보인 모습이나 이지함은 명문가의 후손이면서 거지에게조차 혜택을 베푸는 아주 민중지향적인 흐름들이 조선중기 사상계에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예기 8초 당시의 진보적 개혁 세력들은 유교의 근본으로
돌아가 개혁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 대동으로(예운편) 13초 그 핵심 사상이, 사서 중 하나인 '예기'에 언급된
'대동'이었다. 정여립이 사용한 '대동계'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 천하위공 선현여능 8초 정여립이 즐겨했다는 '천하는 공물'
이라는 말도 발견된다.
- 권인호 교수 인터뷰 대진대 철학과 (역대 제왕들이 마치 나라를 자기 사적 소유물인
것처럼 했기 때문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했다. 그래서 정여립의 대동이라는 것은 이상상태가 아니라 유교의 상고주의에 입각, 과거를 본받아서 현실을 보다 나은 세계 대동의 세계로.)
- 배동수 박사 인터뷰 (현명한 자를 뽑아서 지도자로 하고 천하가
하나의 공공의 것이다. 노약자나 병자 과부도
복지, 사회보장도 있고 전체적으로 볼 때 대단히
평등 지향적이고 정치적으로 공화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도 약간 있고...)
- 산천재 14초 16세기 후반 조선사회에는 이렇게 정여립과 같이
화합과 평등이 실현되는 대동세상을 위해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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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산천재에 걸터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당시 조선은 안으로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밖으로는 왜와 여진의 침략이 예고돼 있는 등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세력과 기존의 질서를 더욱 강화시키려고 했던 보수세력이 첨예하게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기축옥사, 즉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고
개혁, 진보세력들이 일거에 거세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여립 사건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혁세력의 거세로 조선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3년 뒤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적인 국가위기를 겪게됩니다.
그후로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돼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여립 사건은 명분과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리학의 흐름이 경직화돼 가는 시점에서 이에 맞서고자 했던 신진사림들의 고민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 그리고 현실적 패배를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정여립 역모사건의 끝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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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 야밤의 치과 10초 늦은밤 개인 병원의 한편. 4백년 전의
정여립 역모사건은 아직도 이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 정회수씨 16초 45세의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 역사학을 전공
하고 있는 정회수씨. 그는 정여립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
- 정회수 인터뷰 (언젠가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서 지난 4백년 이상
불명예스럽게 있던 분들이 명예를 되찾고 그 진상을 통해서 후손들이 어떤 교훈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바램이다.)
- 기린봉 10초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 정씨 일가는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정연겸의 묘 16초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당시 흔적은 확연히 남아 있다.
공덕을 기리는 비석은 동강난 채 쓰러져 있다.
- 계단식 무덤 9초 평평했던 조상묘지는 봉분을 파헤치면서 흙이
없어져 계단식 지형이 돼 있다.
- 석상 8초 당시 목이 잘려나간 석상은 시멘트로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 정길수(정인겸의 후손) 인터뷰 (머리부분이 없어서 머리부분을 시멘트로 만들어
붙여놨다. 비문 훼손된 것은 봉분 앞에 상돌 식으로 그냥 놔둔 거다. 계단식으로 된 것은 왜? 흙이 모자라서 인력으로 흙을 보강해 채울 수가 없어서. 인원은 없고 멀리서 후손들이 와서 산소를 돌보다 보니까 ...예전엔 평평했다.)
- 이항복의 시 23초 (보다가)
당시 역모사건 수사에 직접 참여했던 이항복이
남긴 이 시는 어느 누구도 억울함을 대변해줄 수 없었던 공포 분위기를 말하고 있다.
- 제사 지내는 후손들 21초 연루자들 대부분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정여립 가문만은 예외였다.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정여립이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년 동안 족보에서 누락됐다.
- 파쏘 일대 6초(전북완주군 월암리) 정여립이 태어났다는 완주군 월암리.
- 관찰사 선도비9초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방관리들의 송덕비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당시 교통의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걷는 두사람 뒷모습 (여기가 도로가 돼 있지만 정여립의 집터다.)
- 정여립의 생가터 14초 정여립이 능지처사된 후 조정에서는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 물 고인 논 16초 풀 한포기도 자라게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징벌이었다. 연못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지명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 신정식 인터뷰 (여기가 파쏘, 봉우리는 파쏘봉, 이 들판은
파쏘들, 여기 모랭이 돌아가는 데는 파쏘 모랭이, 밑에는 파쏘보라고 5백년 전 사건이 일어난 다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 파가지고 소를 만들었다. 그래서 아예 역적모의를 했던 사람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 용암마을 8초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 남겨진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 말무덤 13초 논 한가운데 솟아있는 말무덤은 정여립이 실수로
죽인 자신의 용마를 애석해하며 여기에 묻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도 보존돼 있고,
- 쌍용사 5초 조상들의 사당터에는 절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김옥진 주지 인터뷰 (그 양반이 세대를 잘못 만나 일을 못하고 돌아
가셨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 그래서 업장 생각을
하고 일을 하고 그런다.)
- 최순식 인터뷰 (어려서 동네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다가
시비가 생기면 이거 정여립 데려다 시비를 가려야 겠구만 이런 얘기를 했다.)
- 실록 5초 당시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 내용 20초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정여립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것은 또 다른 정여립에 대한 민중들의
염원이었다.
- 다산 초당 21초 정여립의 개혁사상은 훗날 실학자들에게
이어진다. 16세기 후반의 진보적 사림들이 그랬듯
이들은 다양한 문물을 수용했다. 정약용의 경우 천주학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주자성리학적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 거중기 24초 그리고 거중기가 말해주듯 그 핵심에는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 모색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정약용은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도 그것이 백성의 뜻이라면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 탕론 내용 12초 (보다가)
더 나아가 그는 지금의 간접 선거방식과 비슷한
형태를 정치의 본질이라고 역설했다.
- 권인호 교수 인터뷰 (우리가 민의에 도움을 주는 리더를 처음에
뽑았다. 처음부터 임금이 있고 황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군수도 뽑고 대통령을 뽑는 그런 얘기를 탕론에서 하고 있다. 이것은 천하위공적인 대동의 얘기. 이것은 정여립이
얘기하고 정약용이 얘기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 것.)
- 인정전 21초 임금은 하늘이 낸 것이고 백성은 임금의
것이었던 당시 조선 사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속에 안주했지만 동시에 민본주의적 개혁을 주장한 선구자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 정여립 13초 정여립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제 정여립은 실패한 반란의 우두머리가
아닌 민본주의적 개혁을 선구적 지식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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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클로징
(정여립 영정에서 빠지면 MC)
이렇게 시대를 앞서갔던 정여립의 혁신적 사상과 실천은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정여립을
'4백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으로 <민약론>을 저작한 루소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했습니다.
(정여립 초상화 보면서)
사실 이 초상화는 실제 정여립의 얼굴은 아닙니다.
그 후손들이 정여립의 기상을 미루어 짐작해 상상으로 복원한 얼굴입니다.
지식인으로 일신의 영달을 좇지 않고 사회의 모순을 고민했던 정여립. 자기가 선 자리에서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했던 정여립.
그의 정신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이 초상화처럼 복원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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