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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23
제2권 군웅쟁패의 시대
( 평설 인물삼국지 )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후들이란?]
삼국지를 보면 많은 제후들이 등장한다. 원소, 조조, 원술, 공손찬, 유표, 손권 등 메이저 급 이외에도 유대, 왕충, 교모, 포신, 한복, 도겸 등 마이너 급과 유장, 공손강, 한수, 마등과 같은 변방의 반독립적 세력들도 다 제후라 지칭된다. 제후란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이들이 제후일까?
제후라는 것은 봉건제도 하에서 일정한 영지와 관할권을 가진 세습 영주들을 말한다. 왕 또는 황제라는 절대군주의 영토와 주권 이내에서 충성과 군역, 조공 등의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봉토를 수여받고 그 봉토 내에서는 사실상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소군주와 같은 존재로서, 반역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봉토와 그 속민에 대한 지배권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종법제를 근간으로 하므로 중세 유럽의 군주와 제후간의 쌍무적 계약관계인 봉건제도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나, 이는 봉건제 발생의 근본적인 본질을 모르고 외견적인 차이만을 피상적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봉건제도는 절대군주가 출현하기 전 광역적인 규모로 안정적인 정치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조직원리로서 여러 정치군사적 세력 간의 세력연합의 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별개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권력집단 간에 통합과 안정을 위해 조직된 경우도 있고, 하나의 정치군사집단으로 시작했으나 관할 구역과 속민의 규모가 단일집단에 의한 관할 범위를 초과하는 범위로 확대되었을 때 지역적 분할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발생한 경우도 있지만, 어느 경우나 다 중앙집권제적 통치기술이나 이를 뒷받침할 실력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역 내의 정치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그리고 일단 봉건제가 성립되면 동서양을 초월해서 어떤 경우든 왕과 같은 군주는 봉신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과 명시적, 묵시적 계약 하에서 권력을 분점하게 되며, 사실상 군주는 봉건제후들로 조직되는 정치질서의 한 구성원으로서 봉건제후들의 대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진시황의 통일로 사실상 끝이 난다. 봉건제도는 주나라의 종법제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하․은․주 등 중국 고대의 전형적인 정치질서였다. 주나라의 경우에도 동성제후와 이성제후의 비율이 반반 정도여서 종법제도만에 의해서 봉건제를 규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종식된 후 진시황이 전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강력한 중앙관료제와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에 의한 통치방식인 군현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면서 중국에서 봉건제도는 정치통합을 위한 정치원리로서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상실했다. 물론 한나라의 경우 진시황의 과격한 개혁에 대한 반발과 후유증을 의식하여 봉건제와 군현제의 혼합형인 군국제를 채택하여 일부 지역에 한해 동성제후를 봉건 영주로 임명하기는 하였지만, 오초칠국의 난 이후에는 봉건영주 아래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국상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하여 사실상 군현제나 다름없이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서진이 황족들을 지방에 왕으로 봉하여 봉건제의 부활을 꾀했으나, 사실상 이로 인해 멸망의 길을 조기에 재촉하게 된 이후로는 중국에서 더 이상 봉건제적 정치질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가 동아시아에서 오래 지속되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정치질서로서의 봉적제도와 봉건제적 가치관, 문화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후한 말 군웅할거는 서기 189년 십상시의 난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이 정립된 것을 220년 전후로 본다면 군웅할거의 혼란기는 불과 30년 정도이다. 십상시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어리석은 대장군 하진이 원소의 말을 듣고 환관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장안으로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때 불러들인 무장들은 봉건제후들이 아니었다.
후한 말 군웅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지방관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후한시대에 일부 황족들에게 군 단위의 봉지를 주고 왕에 봉하기는 했지만, 그 밑에 승상격인 국상을 중앙정부에서 임명했고 이들의 권한은 사실상 군 태수와 다름이 없었다. 군과 국은 동급의 행정기관이었다. 원래 군이라는 지방행정조기의 기원은 진시황의 천하통일까지 올라간다. 진시황은 전국시대 열국의 난립을 하나의 정치질서로 통합한 후, 전에 국가가 있던 곳을 군으로 편성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구축했다. 전한시대에는 전국을 군과 국으로 나누고 군국 밑에 하부행정기관으로 현을 두었다. 후한시대에 들어와 자사를 파견하여 군(태수)또는 국(국상)들을 감시, 감독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사가 군 상위의 행정기관이 아니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개의 군을 묶어 주를 설치하면서 주가 군의 상급 지방행정조직으로, 자사가 태수의 상급행정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가 설치되면서 자사의 치소를 정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그 주 내에서 가장 큰 도시를 치소로 하였다. 자사의 치소를 관장하는 행정관을 목이라고 칭하였는데, 군의 태수와 마찬가지로 주목은 그 관할 지역 내의 군 지휘권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사가 주목을 겸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후한 말기로 오면서 군사권을 지닌 주목이 자사보다 더 비중 있는 자리로 취급되었다. 주목 또는 자사는 군사지휘권을 포함하여 태수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사의 군 지휘권은 중앙정부의 장군들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진이 불러들이려 한 주의 자사나 군 태수들은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이지 봉토를 지닌 제후가 아니다. 실제로 이들은 매우 자주 교체되었다. 십상시의 난 때 가장 먼저 출동하여 중앙정부를 장악한 동탁은 당시 병주자사였는데, 그에 의해 살해된 정원이 바로 그의 전임자였다. 삼국지연의에 동탁이 량주자사로 서량병을 이끌고 입경하고 그에게 대항한 정원은 형주자사로 나오는데 모두 잘못된 내용이다.
동탁은 량주 출신으로 정원의 뒤를 이어 병주자사가 되었고, 정원은 병주 출신으로 병주자사를 지낸 후 기도위로 임명되어 하내에 주둔하다가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자 장안에 입경하여 집급오가 된 자이다.
집급오란 지금으로 치면 경호실장 쯤 되는 자리이다.
정원의 측근이었다가 그를 배신하고 동탁의 최측근이 된 여포는 원래 병주 출신으로 젊어서 무용이 뛰어나 병주에서 명성이 자자했으므로 정원이 발탁하여 주부로 삼았고, 여포에 의한 동탁의 살해 후 난을 일으킨 이각, 곽사, 가후 등은 다 서량 출신으로 동탁이 집권 후 자파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안으로 불러들인 자들이다. 동탁이나 이각, 곽사 이외에 마등이나 한수같은 자들도 다 서량 사람들로서 본디 당시에 소년 또는 악소년으로 불리던 호협 출신으로서 한나라의 서북변경이던 서량을 무대로 무장으로 입신출세한 군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동탁이 장안성에 입성해 정권을 장악하자, 원소, 조조, 포신 등이 반발하여 관동으로 달아났다. 이 때 동탁은 이부상서 주비와 성문교위 오경 등을 신임했는데, 이들은 이를 이용하여 한복(기주자사), 유대(연주자사), 공주(예주자사), 장자(남양태수), 장막(진류태수) 등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지방관들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두 관할지역으로 부임하자마자 원소, 조조 등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격노한 동탁이 주비와 오경을 살해한 것은 물론이다. 이 당시 주비의 밑에서 상서랑으로 실무를 담당한 사람이 후에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나라의 승상이 되는 허정이다. 원소가 동탁의 폐립을 반대하여 기주로 도망쳤을 때, 발해태수로 제수하도록 동탁을 설득한 것도 이들이다.
원소를 중심으로 관동에서 18로의 제후들이 기의한 것은 190년이다. 손견에게 패한 동탁이 낙양을 불사르고 자신의 본거지인 서량에 가까운 장안으로 천도하자, 내분으로 추동력을 잃은 연합군은 해산하게 된다. 그 다음 해인 191년부터는 원소가 한복으로부터 기주를 빼았고, 공손찬이 유주자사 유우를 살해하고, 원술의 사주를 받은 유표가 손견을 죽이는 등 군웅들 간의 쟁패가 일어난다. 정통성 없는 중앙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지방관들이 군벌화하여 각기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과 같은 일개 자사에 불과했던 동탁이 무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는데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반란군이 되자 지방관료로서의 합리적 권위는 사라지게 되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세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이들이 서로 세력다툼을 벌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록 불법적으로 취득한 정권이지만 황제를 끼고 외견상 정통성을 보이고 있던 동탁정권은 반란을 일으킨 지방관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다른 중앙관료들을 파견하게 되고, 반란을 일으킨 지방관들은 동탁이 파견한 관리들을 실력으로 쫓아내고 자신의 근거지와 세력을 유지한다. 심지어 서로 빼앗고 뺐기기도 하며, 일부 세력가들은 마음대로 지방관을 임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동탁이 임명한 태수와 원술이 임명한 태수가 서로 실력대결을 벌여 이긴 놈이 태수가 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자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방관들도 군대를 모집해 각자 주와 군을 지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볼 때, 삼국지의 군웅들은 결코 봉건제후가 아니다. 그들의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군벌집단들이다. 이 군벌집단의 수뇌부를 차지한 자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이 역시 다양하기 그지없다. 한복, 유대처럼 자사나 태수로서 동탁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자들도 있고, 원소나 조조처럼 의병을 일으켜 반란에 가담한 자들도 있고, 유요나 유우처럼 지방관(자사)으로 있다가 주군을 지키기 위해 군벌화한 자도 있고, 유표나 유언처럼 동탁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였으나 독립한 경우도 있고, 장노, 작융과 같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에 장연, 장패 등과 같은 녹림 출신 등 다종다양한 부류들이 있었다. 이들은 출신 성분과 배경, 군벌화의 원인 등이 다양하지만 이들 중 어느 유형의 세력가들도 제후는 아니다. 아무런 정통성 없이 혼란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구축한 군벌들이지 전통적 권위에 입각한 봉건제후들은 아닌 것이다.
군벌체제의 성립
천하대란 이후 난세에 돌입하자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소위 제후라고 불리는 자들이 각자 지역별로 할거하면서 대립 항쟁을 벌였다. 소위 제후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주목이나 군태수들로서 동탁이 장악한 중앙정부에 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소위 18로의 제후군이 바로 이들인데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제후가 아니라 조정에 반기를 든 지방관들 내지는 반군의 수령들이었다. 원래 제후라 함은 하, 은, 주 시대와 춘추전국시대의 군주계급을 말하는 것으로서 공, 후, 백이라고 불리는 봉건영주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삼국지의 군웅들은 결코 봉건제후가 아니다. 그들의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군벌집단들이다. 삼국지 제후들은 본질적으로 군벌(Warlord)들이며 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설명한 바 있는 바로 지역강도단(local bandit)들이다. 삼국지 시대는 국가가 완전히 해체되고 국내질서와 안보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개인들은 강도짓을 위해서 또는 강도짓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집단을 결성했다. 소위 주와 군, 현들이 각자 무장해 스스로를 지켰다는 내용이 바로 이 현상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군벌들은 소위 제후로 불리는 주, 군 단위에서만 결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군벌집단들은 향촌사회나 씨족집단처럼 사회의 가장 하위단위부터 결성되었다. 국가로부터의 보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주로 씨족집단이나 향촌조직 등을 기반으로 그 지역의 대성받이이거나 유력인사들 중심으로 무장집단을 결성했다. 이들이 바로 종적(宗敵) 또는 향당(鄕黨)들로서 이들의 우두머리를 종수(宗帥), 호족(豪族), 호강(豪强)이라 했다.
이러한 씨족, 향촌 단위의 소규모 군벌들의 지도자들이나 구성원들은 소년이나 악소년 출신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허저와 초정강, 진란과 뇌박, 조랑, 엄백호 등이 다 이러한 무리였다. 씨족과 향촌 단위의 소규모 군벌들은 스스로 독자 생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성읍이 있는 현을 중심으로 현장 또는 현의 유력자를 그들의 공통적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연합했는데 이것이 현단위 군벌이었다. 또 현단위 군벌들이 연합해서 군단위 군벌을 이루었으며 군단위 군벌이 연합해 주단위 군벌을 이루었다.
이 시대의 제후들은 주단위이든 군단위이든 그 지역 내의 여러 세력을 확실하게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보다는 그 하위의 여러 군소군벌집단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따라서 상위의 군벌이 충분히 실력이 있을 때에는 하위의 군벌들이 상위의 군벌에 복종하고 협력했지만 상위의 군벌이 다른 더 실력 있는 군벌에게 패했다던가 하위의 군벌들에게 보호망을 제공해 줄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을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등을 돌리고 더 실력 있는 군벌에게 호응하고 귀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였다. 소위 망풍(望風)이라는 표현처럼 바람이 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도 알아서 귀순하고 협력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원소가 북방 4개주의 정병을 총동원해 남하해오자 조조의 영역이었던 연주와 예주의 여러 군, 현들이 알아서 원소에게 호응했다던가, 그 서슬 퍼랬던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배하자 하북의 여러 군과 현단위의 군벌들이 자발적으로 조조에게 호응하고 귀부해 왔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였다. 또 조조가 적벽에서 패전하자 북방이 크게 요동쳤으며 한중에서 철군하고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자 허도 인근까지 여러 군현에서 호응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뒷골목 건달들의 세상에서 강자끼리 대결해서 승자가 결정되면 나머지는 알아서 기는 형국과 마찬가지였다. 삼국지 군벌은 이처럼 향촌단위에서 현, 군, 주 단위로 여러 군소군벌의 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국가가 해체되자 대, 중, 소 단위의 군벌들이 무장해서 서로 할거하고 연합하고 항쟁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지 군벌은 기존의 제국 질서가 해체된 상태에서 지역강도단이 성립된 것으로서 이들이 상호 투쟁을 통해 국가강도단으로 성립된 것이 위, 오, 촉 3국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은 바로 국가의 붕괴 이후 전국적으로 향촌단위로 결성된 무장집단(robbing bandit)들이 상호항쟁과 연합을 통해 한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 단일하고 유일한 국가강도단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강도단인 군벌들이 국가강도단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요건은 무엇일까. 첫째 국가강도단으로 발전할 정도의 실력을 쌓으려면 다양한 세력 간의 정치적 연합(coalition)이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군벌집단들을 하나하나씩 다 정벌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을 뿐더러 너무 소모적이어서 그 자신이 싸우다가 피폐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최대한의 세력을 구축하는 방법은 여러 대소 군벌들 간의 수직적, 수평적 연합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 일단 주나 여러 주단위에 걸친 대군벌로 성장한 이후에는 구역 내의 인민들의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민심을 얻고, 사족, 호족 집단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정치적 연합을 성립시켜야 했다. 민중과 사족, 호족집단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나의 단일한 정치권력체를 구축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술의 경우에는 하남의 원술이란 말로 표현되듯이 황하 이남의 전역을 지배하는 군벌연합체를 구성하는데 성공했으나 인민들의 생활보장과 질서유지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군벌연합체가 해체되어 패망에 이르게 되었다.
삼국지 군벌들의 대립항쟁과정에서 결국 최종승자는 먼저 견고한 핵심적 지지기반을 구축한 후, 이를 토대로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을 구축하고, 명분과 비전을 내세워 널리 민심을 얻은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