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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근심
성경:요14:1
<서론>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2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은 대단한 환영과 지지를 받는 입성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반대자들의 올무와 위험을 피하여 숨어서 다니셨는데,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그야말로 드디어 공공연한 마당으로 당당히 나타나셨던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확인한 제자들은 이제야말로 3년 동안의고생이 그 막을 내리고 영광의 빛을 보는가 보다 지레짐작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뿌렸던 씨를 거두고 영광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정치적인 억압으부터 구해 낼 것이라고 쉽게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더더욱 예루살렘 입성이전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큰기적의 여운을 몰고서 예루살렘 성을 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마음껏 그들의 소망을 부풀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3장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몇가지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13: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놀라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예수님께서는 팔려야 되는존재로 계신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팔릴 수 있다는 것은 훨신 수준이 낮을 때에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팔릴 수 있는 문제이지, 이제 그야말로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높이 드시면서 승리하게 될 시간들만 남겨두신 우리들의 선생을 과연 누가 팔아 넘길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이해가 안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나를찾지 못하리라"
헤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또, 38절에 가면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나를 부인하리라"고 그럽니다. 부인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랑스럽지 못하거나 상대방을 아는 것이 손해일 경우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제 예수님의 승리가 눈 앞에 이르렀고, 제자들은 그것을 3년이란 세월을하루같이 기다려 왔는데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본론>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가장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같이 기독교가 양적으로 팽창했을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만큼 십자가가 많이 서 있었던 때도 없었습니다. 동시에 놀라운 것은 지금만큼 신자가 신자로서의 힘을 잃었던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없습니다. 다시말해 우리 모두가 근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근심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근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하나님을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설명을 달아 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싸움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어떻게 존재하시며 어떤 계획과 능력을 갖고 계시는가?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연히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같이 설명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형태화된 것이 예수님의 생애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그 하시는 일에대하여 좀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분명히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이 한 번은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은 피곤하여 깊이 잠드셨고, 배는 점점 더 거센 폭풍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전문가였던 어부 출신 제자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 나셔서 폭풍우를 꾸짖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과 물질이 인생을 좌우하는 최종적인 힘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이세상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주장하시고 명령하시는 권세자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람이 이유없이 괜히 세게부는 것이 아니며, 비가 우연히 내리는 것이 아니며, 사람을 만나도 우연히 만나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이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또한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예수님께서는 살려 내셨습니다. '나사로야!나오너라!'고 명령하였을 때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다면 병들고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질병과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세계로 초대받은 자들임을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신자라는 것이 대단한 특권과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연 우리들은 그 힘과 특권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깊이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 세례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축복이요 특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승천 얼마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거리를 뛰쳐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행2:37-39절을 보시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약속을 너희와 너희 모든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여러분, 베드로의 설교에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되는가? 하는 개인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다른종교는 인간 자신을 치장할 수 있고 인간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자는 싸움이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를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사람과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과의 문제를 따집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보이느냐?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싸움입니다. 만일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는 죄인입니다이 화목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고그 안에서 갈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인 신앙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와 세례라는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란? 지금 가고있는 길로부터 180도 돌이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잘못했습니다 하면서 자책하며 동의 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요구입니다.세례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등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러면서 회개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세례는 내가 회개해야 되는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이 길과 이 상태로서는 하나님의 진노로 죽을수 밖에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고백으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원래 세례는 침례교 식으로 물에 완전히 잠기도록 넣었다가 꺼내는 것이 적합합니다. 즉 죽었다는 뜻을 상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물을 뿌림으로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표합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원래 동일시, 동질화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를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와 같은 죄인의 반열에 섰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으사 우리와 똑같이 죄값을 받는 자리에 오사 우리 모두를 대신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가 되려면 우리와 같은 동족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신데도 죄인들이 마땅히 고백해야 되는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자리에 오셔서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와 동질화하셨습니다. 우리와 동일시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세례받으라는 얘기를 그의 공생애 속에서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28장에 오면 드디어 세례 줄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땅 끝까지 이르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왜?여기서 세례줄 것을 말씀할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말해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질화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인과 동일시 되는 일을 세례로 하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동질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값으로 이미 죽은 존재이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묶어 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무덤 속에 가두었으나 사망이 주님을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고 심판과 저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할 우리 인생들이 이제는리스도와 동일시됨으로, 주 안에 들어가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첫번째로 있어야 되는 전제 조건이 죄 값으로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세례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케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죽음의 이쪽편이 아닌 새생명의 저 쪽에서 새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약속으로 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문제와 안타까움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동시에 저 약속의 나라에서의 부활은 없고, 단지 세례를 받았다는 의식만이 남아있는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 나는 이 세상의존재가 아니라, 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속한 자다'는 거듭나고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는 의식을 가진 신앙인이 어쩌면 그렇게 많지를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병입니다.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은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가나에게 과연 실현되고 체험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세례 신자다는 표를 지니고있는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까? 자신에게 세례로 주어지는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체험되어지지 않는데도 다들 답답해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고전10:1-2절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갖는이 아름다운 상징을 보시면 훨씬 이해가 빨라집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볼 때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들이고 종입니다. 그 노예와 종들이 노예 신분에서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죽는 방법입니다. 죽어버리면 노예라는 신분은 끝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통과하면서 과거의 노예 신분이 죽고, 새로운 자유인들로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건널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살아서 건너올 수가 없습니다. 다 빠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로 말미암아 건넜습니까? 모세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 관원을 때려 죽이고 쫓겨서 도망을 갔었던 자입니다. 물론 육로로 도망을 갔습니다만 상징적으로 보자면 애굽을 벗어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중에 유일하게 애굽을 벗어나 광야에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라는 말씀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지 않고 광야로 갈 수 있었듯이 모세에게 속한 이스아엘이 같이 죽음의 홍해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파리가 하루에 열심히 날면 몇 리쯤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디 앉느냐?에 따라달라집니다. 소달구지에 앉으면 40리 가기 바쁘고, 천리마 꼬리에 앉으면 천리를가는 가는 것이고, 보잉 747에 앉으면 미국까지도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구 안에 속하였느냐?가 세례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세례는 나 자신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우리를 위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홍해를 통과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확인하고는 이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 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싸움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제 우리는 보이는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세계는 이 육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까지 다 통과하므로 육신과 물질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자신을다스리고 신령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계와 물질계를 똑같이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악해져서 물질계를 더럽히고,영계는 사단과 그 휘하들이 더럽히며 우리 마음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에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영원토록 있다는 것을압니다. 우리가 다만 이생과 물질만을 위하여 70년 80년을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계 속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다 위를 걸으신 분이시요,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신 분이시요, 죽은 시체까지 살려 일으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안에 우리가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그런데 걱정이 그치지 않습니다.오늘의 우리의 싸움이 바로 이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롬6:4-9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음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억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이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함께 하셔서 그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아름답고 생명과 진리되시는 영광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이 축복들을 바라보며 감사와 감격과 보람과 궁극적인 승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풍성한 삶을사는 자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자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껏해서 우리의 자랑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도와 주셨던 것 하나입니다. '이번에 진급하는데 기도했더니 진급하게 하셨다' '이번에 몹시 아팠었는데 기도하였더니 덜 아팠다'는 식의자랑 이외에 과연 어떤 자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간섭은 우리가 세상을 목적하여 사는 데에는 끝까지 간섭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돌이켜 신령하고 풍성한 축복의 자리로 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삶의 목표와 원리를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바꾸십시다. 내가이것 때문에 예수믿고 세례 받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학습받은 지가 한참 지나서 세례를 받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닌지 30-40년이 되어서 세례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세례받는 것을 주저하고 연기하는가?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꼴보기싫은 모습 때문에 나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동일시되는 것이 싫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동일시 되는 것이야 뭐가 싫겠습니까마는 예수님과 동일시 되었다고 까부는사람이 보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똑같은 입장이 되고, 똑같은 장소에서 쉬는 것이라면 천국도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판단일 뿐 세례는 결코 동료 신자들과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또 두번째, 세례를 기피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별 신통한 것이 없습니다. 옆에서 보아서 욕심이 나고 부러울 정도로 갈증이 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라기 보다, 신앙이라는 내용 그자체에 풍성함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인격에서 솟아나는 신앙의 풍성함이 없고 싸울때 세상 사람들이 상스러운 욕으로 싸우면 이쪽에서는 '하나님 저 사람 벌 주세요!'하는 식으로 용어만 다르지 결국은 상대방을 절단내고 이기려는 것은 똑같더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신앙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않고 기대와 흥분이 없는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먼저 믿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결론>
예수 믿는다는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그 깊고 오묘한 은혜를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살아보지 않고 체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말로서는 설명이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가진 것으로 죄우되지 않고, 건강으로도 좌우되지 않고, 지위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고그 사랑하시는 자녀들 모두에게 풍성하도록 나눠주시고 약속하시고 꼭 이루시는 그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왜?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것입니까?
주를 위하여 여러분이 희생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이익과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이 말씀을 다시 깊이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