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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누구에게나 불만족스럽기 마련이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당연하고
가진 것 많은 자 역시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갖춘 것을 토대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끝없은 욕망과 거기로 부터 오는 불만족감은
오히려 가진 자에게 더 많은 삶의 회의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대개의 사람들은 종교 혹은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모든 종교와 철학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로 인해 막연한 신의 섭리, 숙명, 우연 등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
자신의 미래는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감에도 불구하고(자업자득自業自得)
자신의 삶이 알수 없는 신의 섭리, 숙명, 우연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기존 자료들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다.
- 무엇이 바른 법의 전승을 그토록 어렵게 하는가 (http://cafe.naver.com/susinsy/2700)
- 수행의 주요쟁점들 (http://cafe.naver.com/susinsy/2581)
문제는 현대의 대표적 불교로 자리잡고 있는 초기(남방)불교와 대승(북방)불교이다
=== ( 1 ) ===
<남방불교>는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라 하고 ,
<북방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유부)'를 비롯한 '대승불교(마하야나)'를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
이는 부처님 열반 후 100 여년쯤이 지나자 교단에는 계와 율 , 그리고 다르마(법,法)와
고오타마 붓다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면서 ,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
이 근본분열의 시작은 ,
바이샬리의 밧지족 출신 비구들이 전통 계율을 완화한 10사(事)를 정법(正法)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
장로(長老)비구들은 비법(非法)이라고 선언한데서 서로 분열이 일어났다 .
비법(非法)이라고 선언한 쪽이 '상좌부'이고 , 정법이라고 주장한 쪽이 '대중부'이다 .
그러나 상좌부내에서도 또 다른 부파가 생기고 , 대중부는 대중부대로 또 다른 파벌이 일어나 ,
B.C 2세기를 전후하여 근본 2부를 포함한 20여개나 되는 부파들이 생겨났다 .
어떤 부파들은 크고 수명이 오래 지속되었는가 하면 , 어느 부파들은 세력이 약했고 단명했다 .
하여튼 그 형성된 부파들은 자기네들의 경전들을 각기 보유하게 되었다 .(부파불교 시대)
그러나 그들의 경전들은 형식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
그 형식은 " 티피타카(Tipitaka)" 즉 '세 개의 바구니'였다 .
첫번째 바구니 '비나야-티피타카'는 상가(僧伽 , 승僧)의 규칙에 대한 것이고 ,
두번째 바구니 '숫다-티피타카'는 붓다의 담마(법,法)에 대한 것이고 ,
세번째 바구니 '아비담마-티피타카'는 브라흐마나(수행자)들의 담마(법)에 대한 철학적 논문들이다 .
각 부파마다 자기네들의 '티피타카'를 가지고 있었지만 견해를 달리하다 보니
그 내용도 조금씩 다르게 되었다 .
그도 그럴것이 철학적 견해가 조금씩 다르고 , '아비담마'는 붓다 열반 후 학문적 박사들이 썼기 때문이다 .
어떻든 이런 여러 부파들은 붓다 열반 후 500년 쯤 지나자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
상좌부와 상좌부 내에 설일체유부의 2파 만이 남게 되어 ,
'상좌부'는 남방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태국 쪽으로 ,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북방의 캐시미르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가게 된다 .
그래서 스리랑카로 들어간 불교의 상좌부스님들은 붓다 열반 후 400여 년간
붓다의 담마를 노랫말의 암송으로 전승을 거듭해오다 스리랑카 밧다가마니 왕의 집권 후기에
비로소 패엽에 문자로 기록하게 된 것이 남방불교의 <빠알리어 경전>이다 .
(빠알리어 : 사투리성격의 평민들의 언어이며 , 붓다께서도 이 언어(마가디)를 사용하신 것으로 되어있고 ,
마가다 지방의 언어인 '마가디'가 빠알리어와 같다고 본다 )
그리고 북방 설일체유부 역시 쿠산왕조의 카니시카왕 시절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티피타카를
산스크리트어 문자로 기록하여 전해진 북방불교의 <아가마(아함경)> 이다 .
==== ( 2 ) ====
그래서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남방불교'는 빠알리어로 된 <니까야 경전>을 ,
'북방불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가마(아함경) 경전>을 문자로 해서 ,
경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빠알리 경전은 , 5개의 '니까야' <디가니까야 , 맛지마니까야 , 쌍윳다니까야 , 앙굿따라니까야 , 굿따가니까야> 가 있고 ,
아가마(아함경)는 , 4개의 경전 <장아함 , 중아함 , 잡아함 , 증일아함 >인데
여기에 굿따가니까야(소부)는 아가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이렇게 해서 기원 전 1세기 경 스리랑카에서 상좌부그님들에 의해 처음 문자화된 빠알리 경전은
오랜 세월의 풍랑 속에 완전히 사어(死語)로 묻혀 있다가 ,
과거 200여 년에 걸친 서구 언어 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
스리랑카에 온전히 온전히 보존되어 있던 이 사어(死語) 빠알리어는 해독에 성공했고 ,
19세기 초반부터는 유럽 언어들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
특히 괄목할만한 업적은 영국 런던에 있는 빠알리문헌협회(Pali Taxt Society)의 지속적인 번역이었다 .
이제 한국에도 '굿따가니까야(소부경전 15부 가운데 , 법구경 , 숫타니타파 , 우다나는 완역)를 제외한
4부경전 모두가 , '초기불전연구원'과 '빠알리성전협회'의 불굴의 노력에 힘입어 국역 번역이 완성된 상태이다 .
이는 한국 불교 1600년 사의 쾌거이며 , 참으로 영원히 빛날 금자탑이다 .
왜냐하면 원전에 의한 우리말 번역사업으로 말미암아 바른 불교(정법) 이해의 한국불교 역사가
새롭게 정리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서기 7세기까지 연명한 것으로 추정되는 설일체유부의 북방불교의 아가마 경전도 문자는 달라도 ,
남방불교 빠알리 경전과 거의 형태를 같이 하고 있었으나 ,
현존하는 아가마의 원전은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
열반경을 비롯한 몇몇 아가마가 있을 뿐이다 ...
이것이 대략 살펴본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갈래이며 역사이다.
- 불교는 깨달음의 과학, 황경환 저 중
그런데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본 모임에서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의 사유법(연기법), 바른 수행의 과정(수행법), 그 결실(해탈∙열반)에 대해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바른 수행을 시작하려면 이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중 무엇이 참된 부처님 가르침인지 경전을 근거로 가려내야 할 것이다.
1. 초기불교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은 삼세양중인과설(윤회설)을 바탕으로 한다.
즉 이 몸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자기존재성을 유지하는 식(재생연결식)이 있었으며
그 식의 소멸이 곧 해탈∙열반이다.
따라서 그 식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이들이 주장하는 수행법이 되며
그 수행법을 이들은 알아차림(사띠)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식을 인위적인 의도에 의해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식의 특성 자체가 본래 생멸하는 것이므로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식의 생멸을 보게 되면 즉시 해탈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이 말하는 수관법은
호흡이 생겨날 때 단지 호흡이 생겨남이라고 알고
호흡이 사라질 때 단지 호흡이 사라짐이라고 안다
앞으로 나아갈 때 오른 발바닥이 바닥에 닿으면 오른발이 닿음이라고 알고
왼 발바닥이 바닥이 닿으면 왼 발바닥이 닿음이라고 안다.
이러한 수행과정들을 통해서
식의 생겨나고 사라짐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되면
식의 무상함을 보게 되어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이들의 수행법은 몸과 식의 조건성(식연명색, 명색연식)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모곡 사야도 저 중
2. 대승불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은 의존적 발생원리(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이다.
만물은 대상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으므로 자체의 정해진 성품은 없다(공空)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식이 자신 혹은 경계에 대해
고정적 성품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며
그 착각에서 벗어나게 되면 바른 법에 대해 알지 못해도 지금 여기에서 즉시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파악해나가는 과정이 대승불교의 수행법이다.
남방불교가 인식의 찰나생멸을 살피는데 집중하고 있다면
대승불교는 인식의 국집성(고정관념)을 깨트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 수행법은 간화선과 묵조선이 대표적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래선에 대비하여 조사선이라고 자칭한다.
당나라 때의 선가오종은 12세기 송나라 때에 와서는 법안종, 운문종, 위앙종이 모두 임제종에 흡수되어, 선가오종 중 최초로 성립한 소림사의 조동종과 최대종파인 임제종 둘만이 남았다.
그 양대파벌은 명상법에 대해 상대방을 크게 비판하였다.
소림사의 조동종은 석가모니가 만든 전통의 수식관(數息觀)을 중심으로 한 묵조선을 주장했으나,
최대종파인 임제종에서는 석가모니와는 다른 새로운 명상법인 간화선을 개발했다.
묵조선의 호칭은, 대혜종고(大慧: 1089~1163[3])가 굉지(宏智: 1091~1157[2])의 선풍을
지나치게 묵념부동(默念不動)에만 그쳐 활발한 선기(禪機)를 잃고 있다고 평파(評破)한 데서 온 말이다. 굉지는 이에 대해서, 묵조(默照) 두글자를 가지고 정전(正傳)의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묵조명(默照銘)》 1편을 만들었으며, 묵좌(默坐)하는 것만이
혜(慧)의 작용을 활발히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정도(正道)라 하였다.
그리고 대혜종고의 선(禪)을 공안에 구애(拘碍)받아 맹봉난갈(盲棒亂喝)을 휘둘러
득의만만(得意滿滿)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고 맹렬히 반격하여,
이로부터 묵조선·간화선의 병칭(倂稱)이 생기게 되었다
- 위키 백과 중
(관련 링크 : http://ko.wikipedia.org/wiki/%EB%AC%B5%EC%A1%B0%EC%84%A0 )
대승불교의 문제점은 사물에 대해 분별하는 인식이 사라져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먼저 법에 대한 바른 개념이 있고 그 다음에 지혜가 있다(전식득지, 아래 뽓타빠다경 중)라고 설하셨다.
2.2.1. 무자성
2.2.1.1. 자성의 부정
• 모든 사물의 자성自性은 그 사물을 연기적으로 형성시킨 조건緣들 속에는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그 외 다른 성품他性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인연에 의해서 자성이 생기한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만약 자성이 인연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이라면 만들어진 것所作이 된다.
• 어떻게 자성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고無作, 다른 것에 의존 하지 않는 것不待異法成이다.
2.2.1.2. 무자성이므로 적멸(寂滅)하다
•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기하는 것은 자성이 적멸 寂滅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생기하고 있는 것生時이나 생기 자체生는 모두 적멸한 것이다.
• 정(淨)과 부정(不淨)의 전도(顚倒)에 의존해서 생기하는 번뇌는 그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煩惱)는 진실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實
• 만약 모든 존재를 자성을 가진 실체로 본다면 그대는 그 존재가 인연없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 어떤 존재도 인연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2.2.1.3. 무자성이므로 생멸변화가 있다
• 사물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有者이라면 즉 자성적 존재라면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존재하지 않는 것無者이 소멸한다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머리를 두 번 자르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이 없고 不生不滅, 변화와 다양성도 없을 것이다.
- 중론, 나가르주나 중
대승불교에서는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인식이 사라질 때 생겨나는 본래의 무자성(공空)한 성품을 참성품이라고 말한다. 참성품은 일체 대상을 포괄하며 만물의 근본성품이 된다. 따라서 참성품을 벗어난 경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설하신 육내외입처설(현실에서 사실로 경험되는 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논리이다.
1. 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삼계가 혼돈하여 일어났으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나니
앞서 깨달은 분과 그 후에 깨달은 분들이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사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느니라."
어떤이가 물었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
끝없는 옛부터 온갖 동작을 하는 모든 시각과 모든 장소가
그대의 근본 마음이며 모두가 그대의 근본 부처이다.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 함은 바로 이와 같으니라.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을 떠나서 불도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기 성품(自性)은 진실해서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 그대로가 마음이니,
스스로 마음이 부처이며 자기의 마음이 곧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는 열반이다.
만일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 혈맥론, 달마대사 중
(관련 링크 : http://zen24.kr/xe/index.php?mid=Zdata&page=2&document_srl=2554 )
덕산스님은 20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경과 율을 공부하였습니다.
처음 서촉에 있으면서 교리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주금강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속성은 주씨였습니다. 당시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 소초」
를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
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덕산스님이 그 노파에게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
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여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다. 노파가 물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 소초가 들어 있소”
“금강경에는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점심을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려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했습니다.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우고
모로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 마디
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에 숭신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도 없고
못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습
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먼.” 그러자 또 주금강은 할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숭신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려고
방문을 나서니 밖이 너무 어두워서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밖이 캄캄했다.숭신이 등불을 켜 주었다.불빛에 의지해 캄캄한 어둠
에 마주하여 밝은 빛을 만났다.숭신이 후윽 등불을 꺼버리는 순간
눈 앞에 닥처온 암흑 속에서 진리를 발견했다.숭신은 덕산의 아만심과
편견을 불어서 꺼버린 것이고 덕산은 숭신이 등불을 끄자 지혜의
빛을밝히신 것이다.. 이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숭신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 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말했습니다. “모든 玄辯(현변)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樞機(추기)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
같다.”(뜻: 모든 변론과 변설이 하도 뛰어나서 온 천하의 사람이 당할 수
없다 하여도 깨달은 경지에서 볼 때는 큰 허공 가운데 조그만 터럭과
같다.자기가 실제로 깨친 것은 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것으로 이 대도
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수단을 다하는 재주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큰 바다
에 작은 물방울 하나 던지는 것과 같다)
그 후 후배들을 제접할 때는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가서 뭉둥이로
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비 오듯
이 몽둥이로 때린다’고 평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대중방을 뒤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 중국의 두 가지 대표적 선풍은 덕산 방 임제 할이라고 부른다.
덕산의 제자로 설봉스님 암두스님 등 훌륭한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 벽암록 중
(관련 링크 : http://www.jungto.org/community/community2.html?sm=v&b_no=63900)
[※ 아래에 뽓타빠다 경과 위의 벽암록 일화에서 드러난 '지금 여기'에 대한 개념을 비교해 보면
대승불교와 부처님 가르침의 차이가 드러난다.]
3. 본 모임
이상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특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본 모임에서 주장하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① 연기법
연기법은 사성제법을 말한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현실 삶의 괴로움에 대해
그 원인을 파악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이 연기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상(육내외입처)에 대해 묶인 인식(갈애)이며
그러한 인식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고 말한다.
② 수행법
따라서 연기법에 바탕한 수행법은
이 몸이 대상 경계에 대해 감각접촉하면 감각접촉했다고 알아차리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모든 감각접촉에 대해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법이 아니다.
감각접촉에서 비롯된 느낌들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느낌들 중 나에게 끄달림을 가져다주는 감각접촉이 주요한 살핌의 대상이다.
이 때 나에게 끄달림을 가져다주는 감각접촉이
어떤 대상들(육내외입처)로 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대상들에 대한 묶임은
오온(명색) 중 무엇을 '나∙내것∙나의자아'라고 취착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살핀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취착없는 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묶여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③ 해탈∙열반
이 때 오온에 대해 더이상 '나∙내것∙나의자아'라고 취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해탈∙열반'이다.
즉 오온을 '나∙내것∙나의자아'라고 취착한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오취온고)이며
오온에 대해 '나∙내것∙나의자아'라고 취착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것에 취착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는 것이 무상함을 바르게 통찰하지 못함이며
오온의 무상함을 깨달아 더이상 괴로움을 받지 않는 것이 곧 무아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해탈∙열반'을 '무상∙고∙무아'(삼법인)의 증득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몸을 괴롭히지도 않고,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을 소멸시키지도 않으면서
단지 바른 법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지금 여기에서 해결하는 법이다.
12.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만큼의 번잡함이 있으니,
바로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번잡함이다.’라고.
그는 ‘이 인식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것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공에 대한 짧은 경(M121),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중
“뿟타빠다여,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중략)
“뿟타빠다여, 인식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인식이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참으로 이것에 조건 지어져 나의 지혜는 생긴다.’라고.
뿟타빠다여, [조건 지어져서 생긴다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인식이 먼저 생기고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인식이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라고 알아야 한다.”
(중략)
50. “찟따여,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었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한다 하자. 이렇게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제게 물으시기를
‘그대는 과거에 존재했었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한다면
저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존재했었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찟따여 만일 다시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가 과거에 자아를 획득 했을 때 그대에게도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미래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이 아닌가?
그대가 미래에 자아를 획득할 때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이 아닌가? 그대가 현재의 자아를 획득할 때
그대에게도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미래도 헛된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 하자. 이렇게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제게 물으시기를, ‘그대가 과거에 자아를 획득 했을 때 그대에게도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미래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이 아닌가? 그대가
미래에 자아를 획득할 때 그대에게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이 아닌가? 그대가 현재의 자아를 획득할 때
그대에게도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미래도 헛된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저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자아를 획득했을 때 제게는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었고 미래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입니다. 제가 미래에 자아를 획득할 때 제게는 그 자아의 획득이 사살일 것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현재도 헛된 것입니다. 제가 현재의 자아를 획득할 때
제게는 그 자아의 획득만이 사실이고 과거도 헛된 것이고 미래도 헛된 것입니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51. “찟따여, 그와 마찬가지로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결코 얻을 수가 없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결코 얻을 수가 없으며
그때에는 오직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만을 얻게 된다.
찟따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결코 얻을 수가 없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결코 얻을 수가 없으며
그때에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만 얻게 된다.
찟따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는
그에게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결코 얻을 수가 없고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결코 얻을 수가 없으며
그때에는 오직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만을 얻게 된다.”
- 뽓타빠다경(D9), 초기불전연구원 중
부처님 가르침은 마음챙김이 현전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 혹은 미래에 의지하여서는 바르게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 혹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도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생겨난 생각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는 일이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생겨난 생각은 그 생각이 생겨나게 된 원인과 조건을 살펴서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 생겨난 생각을 바른 법에 대한 견해(정견)를 바탕으로 살펴서 단속하는 것이
곧 부처님이 설하신 '마음챙김이 현전하는 법'이다.
이처럼 '마음챙김이 현전하는 자'는
오온에 대해 '나∙내것∙나의자아'라는 생각이 없음으로 인해
대상경계에 대해 취착하지 않고 단지 지금 여기에 욕심없이 머무르게 된다.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나서 형색을 경험하고 형색에 대한 탐욕도 경험한다. 그러면 그는 ‘내 안에는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음을 꿰뚫어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을 두고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귀로 … , 코로 … , 혀로 … , 몸으로 … , 마노로 … ”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나서 형색을 경험하지만 형색에 대한 탐욕은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내 안에는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지 않음을 꿰뚫어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을 두고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귀로 … , 코로 … , 혀로 … , 몸으로 … , 마노로 … ”
- 우빠와나 경(S35:70),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중
첫댓글 이 수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