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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기 일제의 문화통치 후기로 들어섰고, 1929년 경제공황을 맞이하면서 일제는 1930년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강압적 통치로 돌아섰다.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항쟁은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 6.10만세 사건, 신간회, 근우회의 투쟁이 있었으나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전환기에 큰 분열을 일으켰고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었다. 교회 및 교파 사이,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사이,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 사이, 서북교권과 이남교회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고, 교권은 경직되었다.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신앙운동들은 교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 교회의 내적 갈등과 분규
⑴ 교파신학의 형성
1) 한국개신교는 초창기에 한국인에 의해 주체적인 복음수용이 일어났다. 주체적 신학형성의 시기는 1890~1910년 이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신학작품은 다음과 같다.
노병선, 《파혹진선론(1897)》 길선주, 《해타론(1904)》
최병헌, “죄도리”(1901) : 한국인 최초의 신학논문, 《천주양교변론(1908)》, “성산유람기”(1907)―《성산명경(1911)》: 최초의 비교종교학 서적, 《만종일련(1922)》-기독교와 전통종교를 ‘연결과 보완’의 관계로
탁사 최병헌 목사
2) 장·감의 신학 이해의 차이
장로교의 평양 신학교의 교수들은 주로 舊프린스톤 신학교와 매코믹 신학교의 출신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선교확장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였다.
반면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의 교수들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이해 못지않게 폭넓은 지식을 통해 치우치지 않는 인격”을 지닌 목회자를 양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신학교육의 차이는 교과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평양신학교
협성신학교
신학교 교과의 강조점 차이
평양신학교: 성경 〉이론〉 실천〉 역사〉 교양 (5.2%)
협성신학교: 교양(46.6%) 〉성경〉역사
3) 선교사들의 주입 신학
1920년대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하면서 근본주의와 전천년설이 강한 신학을 지닌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들은 방어적 보수주의 신학을 강조했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사들은 사회복음을 수용하는 진보적 신학사상의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한편 해외유학파 한국인들은 새로운 서구신학을 접하고 한국에 새로운 신학사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방어적인 보수신학과 감리교 신학과 새로운 진보신학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⑵ 신학적 갈등
적극신앙단(1932)에 동조한 함태영, 전필순, 최거덕, 권영식, 이석진 등 장로교 목사들은 보수적인 경성노회로부터 경중노회(京中老會)를 분립하였다. 1934년 장로교 희년대회에서 서북교권은 남부총대들을 향해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고, 남부노회들은 서북교권이 독주하는 총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응수 했다. 장로교총회 50년을 맞는 희년대회는 불행하게도 교권과 신학적 갈등으로 분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서북교권은 서울의 언더우드와 에비슨 선교사에 대해서도 근대주의자로 의심했고, 해외 유학파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나타냈다.
제23회 총회 1934
장로교희년대회 1934.9
1)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이었던 송창근 목사는 함북출신으로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콜로라도의 덴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학파였다. 그는 1936년 조만식 장로와 갈등을 빚고 산정현교회를 사임했다. 그는 산정현을 사임한 후 호주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성빈학사에서 잠시 일했다. 송창근 목사는 1940년 조선신학교 창립이 주역이되었고 1950년 납북되어 사망했다.
만해 송창근과 김재준(젊은시절) 부산 성빈학사 시절(노블매캔지 선교사) 만해의 말년
2) 박형룡 박사와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갈등
김재준 목사(1901-1987)는 함북출신으로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의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웨스턴 신학교에서 3년동안 구약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숭인 상업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지남〉에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를 발표하면서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근본주의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평양 장신의 교수이며 미국에서 근본주의자 메이첸의 제자로 공부했던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 목사를 고등비평을 쓰는 신신학자로 비판하였다.
박형룡 박사 장공 김재준 목사
장공의 젊은 시절, 일본 아요야마 신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3) 여권문제 1934
장로교회는 여성 안수를 금지하고 있었다. 캐나다 선교부가 선교하고 있었던 함남노회의 22개 교회의 여성들이 여성장로직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당시 성진중앙교회의 김춘배 목사는 <기독공보>(34.8.22)에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바울의 말은 2천년 전 한 지방의 교훈과 풍습이라고 하며 여성안수를 옹호하였다. 1934년 제23회 장로교총회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듬해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씨가 바울이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고 한 것은 ‘2천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풍습’ 이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의 성경해석을 술한 것은 큰 오류라고 인정하나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속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웨다. 이렇게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 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보는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나이다. 그런 인물들은 우리교회 신조 제일조를 위반하는 자임으로 우리교회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나이다.
김춘배 목사는 보수적인 교권에 밀려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 되었다.
4) 모세오경 사건(김영주) - 1934
일본 유학을 마치고 남대문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영주 목사는 조선조일학교연합회가 발간한 “만국주일공과”에서 “(창세기가) 히브리 오랜 신화를 근본 삼았다.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고 적어 문제가 발생했다. 전북노회장은 모세오경을 거부하는 목사가 어떻게 시무할 수 있는가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경성노회는 김영주 목사를 특정 인물로 지목하지 않아 심증적 증거 밖에 없어서 문제가 확산되지 않았다. 김영주 목사는 남대문교회, 새문안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김영주 목사
5) 아빙돈 주석사건 - 1934
감리교의 유형기 목사는 아빙돈 단권 주석을 번역하여 신생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책은 당시 서구사회에서 알려진 주석책으로 성서비평학을 사용한 책이었다. 평양노회 길선주 목사는 이 책을 이단서적으로 규정하였고, 장로교 총회는 이 책의 번역자로 참여한 장로교 신학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번역자 53명 중―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광식, 김재준, 조희렴, 윤인구, 이대위, 임두화 등은 장로교 목사들이었다.
아빙돈 단권주석
한경직 목사 채필근 목사 윤인구 목사
기존의 신학갈등은 장로교 내부 문제였으나 아빙돈 주석사건은 장감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한국개신교 선교50년을 맞는 희년대회는 이렇게 분열이 구체화되었다.
송창근, 김재준, 김춘배, 김영주 목사는 다 함경도 출신의 목회자들이었다. 송찬근과 김재준은 일본의 아오야마 신학교과 신프린스톤 출신이었고 김춘배와 김영주는 일본의 간사이(關西) 대학 신학부 출신이었다. 이들의 출신지역과 신학적 배경은 서북교권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⑶ 서북과 비서북 세력 간의 지역갈등
당시 한국교계는 지역적으로 편차가 컸다.
장로교회의 경우 서북지역에 55% + 중부이남에 45%가 속해 있었다.
감리교회의 경우 서북지역에 33% + 중부이남에 64%가 속해 있었다.
서북지역은 유교 지배질서로부터 소외된 지역으로 기독교를 적극 수용하였다. 이 지역은 청과 무역을 통해 중산층을 형성하였고 경제적 부(富)를 바탕으로 자녀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교회도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성공하여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서울 경기지역은 봉건사회의 핵심층으로 농촌중심의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중산층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이 지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상인, 천민, 부녀자였고, 기독교 학교와 독립 협회운동 등을 통해 신지식 층과 양반 층으로 기독교가 확대되었다. 감리교회는 교육사업ㆍ부녀사업ㆍ의료선교를 통해 교회가 성장했다.
남부교회들은 장ㆍ감이 연합하여 서북교권의 독주를 방어하였고, 서북교권은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⑷ 교파간 갈등의 징후
1) 신편찬송가 vs 신정 찬송가
1931년 조선예수교서회는 《신정찬송가》를 발행했다. 이것은 1908년부터 장감이 함께 사용했던 합동찬송가를 개편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로교에서는 서북교권의 정인과 목사를 중심으로 이 찬송가 사용을 반대했다.
정인과 목사는 1934년 장로교만의 《신편찬송가》를 발행했다. 김인서 목사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교회연합운동을 깨칠 위험성을 지적했고, 구왕삼은 정인과 목사의 독선적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 총회는 이 찬송가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연합에 큰 균열이 일어났다.
신정찬송가
신편찬송가
2) 기독신보사건
교계연합신문인 〈기독신보〉는 선교사가 경영하였으나 그 경영권이 한국인에게 넘어왔다. 1933년 서울경기 지역의 배경을 지닌 전필순 목사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문의 편집권은 선교부공의회에 있었고, 발행권은 예수교 서회에 있었다.
진보적 인사들과 감리교회는 혁신조치(1935)를 취하면서 선교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이것은 선교사들이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조선예수교서회와 충돌하게 되었다. 〈기독신보〉는 1935년에 적극신앙단을 옹오하는 기사를 실었다.
예수교서회는 유억겸 사장을 새롭게 임명했으나 전필순목사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고 신문을 사유화해 버렸다. 이로써 장로교 감리교의 연합신문을 발행하던 시대도 끝이 나버렸다.
감리교는 1933년부터 〈감리회보〉를 발행했고, 장로교의 서북계는 1933년부터 〈종교시보〉(정인과 발행)를 발행하였다.
기독신보 감리회보 종교시보
정인과 목사 전필순 목사
평가: 이상의 갈등들은
㉠ 선교사 중심의 보수(근본) 신학과 신진학자들의 진보(자유) 신학사이의 갈등
㉡ 교파별 신학적 입장의 차이
㉢ 서북교권과 비서북(함경, 중부) 갈등이 드러난 것이었다.
⑸ 선교사 배척운동
1) 선교사―총독부의 협력관계 악화
일제의 만주침략이후 미일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1931년 이후 선교사와 총독부의 협력관계도 악화되어 총독부는 선교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2) 선교사―한국교회: 주도권 문제 야기, 1920년대 이후
① 헤이스머 사건(1926):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는 자기 소유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친 아이의 얼굴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쓰는 악행을 저질렀고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자들과 총독부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을 배척하였다.
② 구세군 분규사건(1926)―선교사들이 구세군 신학교의 학생들의 인종을 차별하며 강제노역을 시킨것에 대해 학생들이 분규를 일으키며 처우개선을 요구했으나 선교사들은 주도학생을 출교시켰다.
③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생 휴학사건(1926)―성결교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킬보른 원장 및 교수에 대해 학생들이 탄핵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④ 기독교 학교의 선교사 배척 운동(1924-27)
3) 원인
① 인종차별주의
② 문화적우월주의→문화적 식민주의
③ 보수주의적 신학 이식, 교회지배의식
4) 1925. 12. 28~29 기독교봉역자회 한국인·선교사 토론회
한석진 목사의 질타 “선교사는 떠나라!”
그동안 선교사 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수고한 것에 대해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 교회도 이만큼 자랐으니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에게 맡기고 선교사 분들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다른 나라로 가서 봉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갈 곳이 없다면 하늘나라로 가는 것도 좋습니다.”
마펫(S.A. Moffett)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석진 목사는 그를 향해 일갈했다. “마 목사! 당신도 당장 한국을 떠나시오. 여기 더 있으면 백해무익한 존재가 될 뿐이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오.”
5) 의미
긍정적으로는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립·자치 운동을 추구하려했다는 의미가 있으나, 다른 한편, 그 배후에는 일제가 추진하던 반미 “동양적 기독교”에 편승할 위험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기독교의 조선인 자치운동은 대부분 친일로 경사되고 말았다
2. 교회의 자립·자치 운동과 부흥운동
⑴ 감리교 합동운동
1903-1907 한국교회 안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의 연합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두 교단이 교파교회로 정립되면서 교회연합운동은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가 1920년대 초반 미국의 초교파연합운동에 자극을 받은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연합운동이 추진되었으나 실패했다. 1925년 미국 내에서 두 교단의 통합논의가 진행되었으나 남감리교회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남ㆍ북감리교회가 1924년 “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구성하고 합동을 위한 초안을 작성하고, 미국의 양교단에 승인을 요청했다. 1927년 한국의 두 감리교회는 한국감리교회의 합동청원서를 제출했고, 미감리교회(1928)와 남감리교회(1930)의 허락을 받았다.
기독교조선 감리회 연합연회 (1930. 9. 29, 정동교회)
기독교조선감리회 1회 연회 1930. 6.4
최초의 여목사 14명 안수
기독교조선감리회 통합 (1930. 12. 2, 협성신학교)
초대총리사 양주삼 목사
1930. 11. 29 조선감리교회는 창립을 선언했고 12월 2일 협성신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지위를 고려하여 감독을 선출하지 않고 감독과 감리사의 중간 형태로 총리사를 선출했다. 중앙협의회는 선교사들과 한국인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에서 두 개로 갈라진 감리교회가 한국에 각각 이식되었지만 이들은 1930년에 연합하면서 자치적인 교회를 수립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한국감리교회는 경제적으로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립이 아닌 “자치” 교회를 수립했다.
⑵ 신앙부흥운동
1) 3.1운동 이후의 신비적 부흥운동
① 교파갈등, 선교사와 한국인들 사이 갈등, 사회주의 및 진보진영의 교회 비판, 지방색이 가미된 교권분쟁, 3․1운동이후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 등은 신비적 부흥운동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② 1907 부흥운동과 백만인구령운동은 ‘집단적’ 신앙체험을 가져왔다. 그러나 1920~30년대 부흥운동은 특출한 개인의 영적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신유ㆍ신비ㆍ내세 지향적이었고, 민족적 시련상황에서 현실을 극복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2) 길선주 부흥회(말세와 재림의 종말론)
조선교회 부흥회→제1기는 길선주 목사(1869-1935) 제2기는 김익두(1874-1950)가 이끌었다.
길선주는 대부흥 운동의 구형자로서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회 창안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2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말세학〉 강의집을 만들었고 후에 전국을 돌며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1만 1백회 독파하여 암기했으며, 신약성서 100독, 구약성서 30독 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이 가르친 전천년설은 역사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며 천국을 지향하도록 했다. 그러나 길선주 목사의 종말론은 새 하늘과 새땅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위에 이루어지며, 하나님-인간-자연의 화해를 다루었다. 김인서 목사는 길선주의 신학을 “조선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예수 밟으시던 지구는 새 땅이 되여 영원히 잇슬 거시오. 에덴의 위치이던 지구는 소각될 거시 아니라 불꼿 검으로 수호하던 에덴은 다시 나타나서 이 지구는 무궁 안식세계가 될 거시다.
그러나 길선주의 종말론은 레널즈의 전천년설, 박형룡의 전천년설의 영향력으로 인해 한국교회 안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그는 1935년 11월 25일 평서노회 사경회 인도 중 사망했다.
길선주 목사의 말세도
길선주 목사의 발인 (1935. 11. 26)
3) 김익두 목사의 이적집회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난봉꾼이었으나 스왈론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1900년 27세에 개종하였다. 그는 1901년 성령임재를 경험한 후, 1902년 신약성서를 100독하였고, 평양장신을 3회로 졸업했다.
그는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 교회 사경회에서 턱이 떨어진 병자를 치유한 후, 전국적으로 이적 집회를 열었다.
김익두 목사의 이적에 대해 진실공방이 일어나자 임택권 목사는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19-1922)을 발간했다. 1923년 총회는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다.”는 총회헌법의 일부를 수정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적집회를 “고등무당”이라고 비판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부(富)를 경원시 했고, 내세를 지향하고 현 질서의 종말을 강조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대중들이 그를 추종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적 좌절과 세속 문명의 도전 앞에서 그는 대중들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김익두 목사는 776회의 부흥회를 했고, 2만 8천회 설교를 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했으나 후에 학살 당했다.
*논점: 김익두 목사는 교육 배경이 없었고 그의 메시지는 사회개혁 정신과는 멀었으나 민중들은 그를 따랐다. 그의 부흥회와 이적 집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김익두 목사의 군산집회 1930. 132명 결신
4)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운동
1930년대 경제적 시련과 정치적 억압의 시기에 한국교인들의 신앙은 내면화 되었고 고난 속에서 신비주의적 신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1901-1933)는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그의 설교와 삶의 주제로 삼았다. 이용도는 3.1운동에 참여하여 2년의 옥고를 치르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재학시절부터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세기며 전국적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이 아파서 울었고, 교회의 형식화와 교권 싸움에 빠진 교회를 질타했다. 25세에 폐병 3기에 들어선 그는 눈물의 설교를 하였다.그의 영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이었고, 그의 신앙은 “주님과의 합일”을 이루려는 신비적 몸부림이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 잠시라도 딴 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나의 시선에 잡힌 바 주님은 나의 속에 안주하시리라”
이용도의 신앙에서 세 가지 좌우명은 무언, 겸비, 기도였다.
예수교회 잡지 창간호
그는 교리나 교직의 형식화에 반대하며 언어 자체를 불신했고, 어떤 비난에도 말로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의 진수는 믿음보다 사랑이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약점은 주님과 자신의 융합을 강조하면서 주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1931년 8월 황해노회는 이용도의 집회에 대해 금족령을 내렸다. 이용도에 대해서 기존교회는 여신도와 서신을 교환했다. 불을 끄고 기도했다. 무교회주의자라는 억울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1933년 9월 이단적 접신주의자 유명화와 친분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장로교회에 의해 이단 정죄를 받았다. 이용도는 신학적으로 실수 한 점은 있으나 이단적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사랑으로 버리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이 있었다. 1933년 10월 그는 폐평으로 사망했다.
이용도 목사의 일가
이용도 목사 자택(현저동)
이용도 삼방 약수터 요양중
이용도의 시
이용도의 집회 모습
야외 설교 모습 마지막 모습 1933. 10.22
⑶ 자치·자유교회 분립
1) 제도권 교회에 대한 저항운동―
일제하 한국교회 안에는 순수 복음적 신앙운동으로서의 저항운동과 반선교사 자치운동으로서 저항운동이 나타났다. 자유운동이란 오늘날의 독립교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일제 하에서 독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어려워서 자유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① 최중진 자유교회(1910, 부안, 정읍, 임실, 제군)와 차학연의 자유교회(1911, 평북 의주)는 선교사들의 독주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자치운동이었다.
② 김장호 조선기독교회(1918)는 자유주의 신학적 영향과 反선교사 운동이 결합된 것으로 황해도 재령에서 나타났다. 그는 장로회주의를 버리고 회중주의를 택했고, 홍해사건을 간조사건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도시락을 준비해 온 것으로 해석했다.
③ 이만집 자치교회(1923)는 대구남성교회에서 선교사와의 대립으로 등장했다. 그는 선교자의 독주와 제도권 교회를 비판했다.
④ 박승명 예수교회(1928) : 反선교사 + 제도권 교회 비판
⑤ 이용도 예수교회(1933) : 신비주의 신앙 + 제도권 교회 비판
⑥ 변성욱 조선기독교회(만주, 1935) : 反선교사 + 제도권교회 비판
⑦ 하느님의 교회(1936) : 反선교사 + 제도권 교회 비판
최중진, 최광진, 최대진 3형제
이만집 목사 박승명의 종교변론
이러한 자치, 자유 교회 운동은 선교사들에 대한 반발과 미국인에 대한 불신, 자존의 기풍에 의한 것이지만 일제는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이러한 운동을 지원했다. 반선교사 반교권 운동의 기치가 조선의 주체성을 외쳤지만 친일로 경사된 것은 우리 교회사와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2) 자치, 자유교회의 특징
① 인적 카리스마(신앙체험) 중심의 교회와 제도교회의 대립이었다.
② 제도권 교회로부터 단절되었고, 선교사 배경의 교회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 이 운동은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지지 못했다.
⑷ ‘조선적 기독교’ 수립운동
1) 특징
① 제도권 교회 밖에서 신앙개혁을 추구하고 신앙공동체를 수립했다.
② 일본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③ 민족주의적 색체가 강했다.
④ 반선교사 분위기가 강했다.
⑤ 성서(복음)를 교리 및 신조 보다 우선시 했다.
2) 김교신 - 무교회주의
① 과정
1901김교신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20. 6 유학중 동경에서 결신, 성결교회에서 수세, 성실한 목회자가 기성 교회에서 쫒겨나는 것을 보고 비애를 느낌
1920. 11.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 아래 성경공부, 조선 사랑과 성경사랑의 사명감을 갖게 됨
1927 귀국하여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양인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
“오직 우리는 朝鮮에 聖書를 주어 그 骨筋을 세우며 그 血液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基督敎로서도 或者는 祈禱 生活의 法悅의 境을 主唱하며 或者는 靈的 體驗의 神秘世界를 力說하며 或者는 神學智識의 組織的 體系를 愛之重之 하나, 우리는 오직 聖書를 朝鮮에 주고자 한다.” “영원한 새로운 朝鮮을 聖書 위에 세우라”(성서조선 제2권)
1942 〈성서조선〉의 권두언에 “조와(弔蛙)”를 기록하여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그는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와”에서 겨울을 보낸 우물 아래서 개구리 몇 마리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고 적었고 일제는 그것을 독립정신이라고 해석하였다.
1945. 4사망
김교신은 양정학교에서 손기정 선수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성서조선의 동인들 1927. 2
양인성, 함석헌(뒷줄)
유동석,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성서조선과 김교신의 원고
우찌무라 간조 손기정 선수
② 무교회주의자들의 신학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성도들이 예배하는 곳
성직제도와 직분의 조직을 무시 - 무교회주의로 오해
교권의 성서해석권을 넘어 만인제사장을 강조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
선교사들이 전한 교파적 기독교를 거부하고 조선의 기독교를 형성하려는 민족신앙운동
3) 최태용 - 복음교회
① 활동
최태용도 함경남도 출생으로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았다. 1924 〈천래지성〉발간하고 기성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예수의 성육신이 신성을 포기하는 순수한 육신으로 변했다는 주장을 하여 박형룡 박사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최태용 감독(1897-1950)
1935 그는 무교회주의 사상을 포기하고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창립했다.
② 복음교회의 창립 3대표어
신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다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 자신의 교회이어라.
복음교단의 창립
천래지성 영과진리
평가: 최태용은 서구의 진보주의 신학을 수용하였고, 반선교사, 조선 자치, 자립교회를 수립하려고 한 자주성이 있었으나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보여준 민족성은 약했다. 그 결과 친일에 경사되었다.
(1) 6·10만세 사건과 신간회·근우회 운동
3.1운동 이후 일제의 이간책은 민족운동을 분열시켰고, ‘개량주의’ 혹은 ‘타협주의’가 출현했다.
1) 6.10 만세사건 (1926)
기독교인들의 조직적 참여는 나타나지 않았고, 경성성서학원 천세봉이 단독으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피어선 성경학원 학생들의 개인적 참여가 있었다.
6.10 만세운동
2) 신간회 →남성중심
신간회는 개량주의를 제외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1927년 2월에 결성하였고, 반식민지·반봉건을 주창했다. 신간회에는 이상재, 조병옥, 이갑성, 박동완, 이동욱, 김영섭, 김활란 등 YMCA계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상재의 사망 이후 허헌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노동쟁의, 소작쟁의와 같은 대중집회를 일으켰다.
신간회 창립 조선 (1927.2.15) 회장 이상재, 총무 안재홍
1928년 공산당 사건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다수 피검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했고, 1931년 5월 신간회는 해산되었다.
3) 근우회 →여성중심
근우회는 기독교 계 민족주의 여성들과 사회주의 조선여자동우회의 여성들이 연합하여 1927년 5월에 결성하였다. 기독교계 인사들은 유각경, 김활란, 김선, 김미리사, 양매륜, 방신영, 손정규, 차사백, 최활란, 홍에스더, 이효덕, 김영순, 신알벳트였고, 여성동우회 인사들은 정종명, 허정숙, 정칠성, 박원희, 이현경, 황신덕 등이 었다. 이들은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주창했다.
① 여성 차별 반대, ②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③ 조혼금지 및 결혼의 자유, ④ 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⑤ 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옹호, ⑥부인노동의 임금차별 철폐, 야업폐지, ⑦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산전산후 임금지불
근우회는 야학 개설, 노동쟁의 및 동맹휴업을 지원하였으나, 중심 인물들이 각종 시위에 연루되어 피검되었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 1930년대 해산하였다.
근우회 창립 (1927. YMCA)
주세죽 차미리사 최은희 허정숙
신간회와 근우회는 한국사회 안에서 기독교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운동을 위해 연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나 투쟁방향과 방법론에서 이견의 노출되었고, 제3의 이념을 도출하는 것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2) 기독교의 사회의식→계몽주의적 사회참여
1920~30년대 기독교인의 신앙양태는 초월주의적 신비주의 신앙과 계몽주의적 사회참여 신앙 두 가지가 대조적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보수적인 형태의 신앙으로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통한 세계 재창조를 기대했다. 후자는 역사와 사회현실 개조에 인간의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적 사회참여 신앙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①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응전, ② 사회 경제적 황폐화, ③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IMC)가 보여준 통전적 선교신학의 등장이었다.
1) 사회개조론
기독교인들이 추구한 사회개조론은 사회 계몽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극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상은 만주에서 일어나던 “무력투쟁론” 보다는 “실력양성론”를 추구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로부터는 ‘개량주의’ 또 ‘타협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2)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 (1928)
1921년 존 모트를 중심으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결성되었고 한국은 1924년경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이름으로 IMC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IMC에 감리교 대표로 김활란(YWCA), 신흥우(YMCA), 양주삼, 노블 선교사, 그리고 장로교 대표로는 정인과 목사(장로교 종교교육부 총무)와 마펫선교사가 참석했다.
예루살렘 IMC, 1928
예루살렘 IMC는 산업사회에서의 기독교 선교문제를 논의했고, 아시아·아프리카의 선교 상황 분석했다. 이 모임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브룬너 교수는 “한국농촌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대회는 신앙생활의 사회화와 실제화를 재확인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1928년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총회는 각각 농촌부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착수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신학이 보수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기였다.
3) 기독신우회(1929)
기독신우회는 조병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사회운동의 연합체 였다. 조병옥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연희전문학교와 YMCA는 기독교인의 현실참여를 강하게 주장했다.
기독신우회는 기독주의의 민중화와 실제화를 강조했다.
기독신우회는 교파주의, 의식주의, 속죄구령의 개인복음에 빠져있는 기독청년을 의식화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 유물론의 영향으로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에게 기독교사회운동의 대의를 촉구했다.
조병옥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중
4) 적극신앙단 (1932)
중앙YMCA 총무 신흥우가 중심이 되었던 기독교연구회가 발전되어 1932년 6월, 비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진보적인 한인 목사와 평신도들로 구성된 장로교의 8명과 감리교의 10명의 인사들은 적극신앙단을 구성했다.
유학시절의 이승만(왼쪽)과 신흥우(오른쪽) 1904
신흥우가 전도사로 있었던 LA 한인감리교회 1904
그 구성 인사들은 주로 미국의 이승만이 세웠던 동지회의 중진들이었고, 이들은 국제YMCA와 긴밀하게 협력을 하고 있었다.
적극신앙단이 제시한 조선교회의 나아갈 길:
기독교의 민중화(사회참여), 생활의 간소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교회설립(탈선교사)
그들은 동등대우, 동등보수, 공동활동, 단체발전과 같은 평등한 이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급진성과 당파성으로 인하여 장로교와 감리교 양쪽에서 독선적이고 비밀결사적이라 비난을 받았다.
적극신앙단의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다.
① (우주관) 자연, 역사, 예수, 경험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을 믿는다.
② (인생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악과 싸워 선으로 이기는 것이 인생의 제일원칙이다.
③ (개인해방) 인간의 권리, 의무, 행위에 있어서 남녀동등권 보장,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
④ (개인 대 사회) 개인의 취득욕 보다 인류 공헌욕으로 새사회를 건설한다.
⑤ (사회 대 개인) 사회는 경제, 문화, 정신생활에 昇登的 균형과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적극신앙단은 편중된 서북교권, 연합기관에서 선교사들의 독주, 보수주의 신학의 폐쇄성에 대해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한국교회의 교리 및 신조에 나타난 사회사상
1919년 남감리교 교리적 선언
1930년 감리교 교리적 선언
제7조 천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교회 교리와 장정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12개조 사회신조
우리는 하나님을 父로 인류를 형제로 信하며 기독을 통하야 계시된 하니님의 愛와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 사하는 동시에 일절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강압에 박대하고, 통하야 기독교 전도와 교육 급 사회사업을 확장하야 기독속죄의 은총을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체 중에 기독정신이 활략케 하고 모든 재산은 신께로 받은 수탁물로 알아 신과 인을 위하여 공헌할 것으로 신하는 자이다.
한국교회는 국내 사조의 도전과 해외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으로 사회참여에 대한 입장이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제정한 사회신조는 일본교회 사회신조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기독교 사회운동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고 억압했고, 다른 한 편 한국교회의 보수권에서는 기독교 사회운동에 반발하면서 1937년 총회농촌부와 청년면려회가 폐지되었고 연합공의회도 해체되었다.
(3) 기독교농촌운동 1) 농촌의 현실 1920년대 농민인구는 전인구의 80%에 달했고, 한국교회의 75%는 농촌교회였다. 한국의 농촌사회는 일제의 농지수탈(헐값에 구입, 철도부설 명목으로 농토수탈), 고율의 소작료로 인해 농민경제가 파탄났고, 대규모의 이민이 발생했다. 또한 공산주의 활동으로 농민 소작쟁의가 일어나며 농민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 안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구분 연도 자작 자작겸소작 소작 가구 비율 가구 비율 가구 비율 1917 517,996 19.6% 1,061,438 40.2% 989,362 37.4% 1922 534,907 19.7% 917,877 35.8% 1,106,598 40.8% 1926 524,066 19.4% 892,624 33.0% 1,185,674 43.8% 1930 504,009 17.0% 890,291 30.0% 1,334,139 45.0% 지주농가 2.8~3.8% 고정 1930년대 소작농의 비율은 80%
국외 이민행렬 1930년대 이주 물결 암태도 소작쟁의 (1932) 원산총파업 (1929) 2) YMCA의 농촌운동 1920 신흥우는 서울근교 농촌을 조사했다. 1924 신흥우 미국을 방문하여 국제 YMCA위원 존 모트 박사와 회담을 하였고, 농촌 전문가를 파송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1925 에비슨(GW Avison)과 쉽(F.T. Shipp)은 농촌문제와 쌀 문제의 전문가였다. 1926 YMCA 농촌사업지도자 세미나는 문맹 퇴치, 농사개량, 협동정신을 가르쳤다. 1926 미국인 사회학자 브룬너(EB Brunner)가 내한하여 1년간 농촌현실을 조사하여 예루살렘 IMC(1928)에서 보고하였다. 1928 번즈(HC Bunce)는 내한하여 축산과목을 가르쳤다., 1929 클라크(FO Cleark)는 농촌문제를 반하르트(BP Barnhart)는 농촌사업을 다루었다. 한국인 간사들로는 홍병선, 계병호, 최영균, 이순기 등이 있었다.
YMCA농촌사업지도자협의회 (1928) 사업내용: 농촌계몽(문맹퇴치, 야학, 강연회)/ 농촌지도자 양성(농민학교 등)/ 농촌문화계발(농촌문고 발행, 농민운동회, 농민위안회)/ 농촌협동조합조직/ 농사개량과 부업장려/ 농업상담/ 농업지원
농촌계몽운동 1933년 향촌사업으로 농촌자립운동, 영적훈련기관, 교육기관, 보건기관을 지원했고, 농촌운동은 서서히 쇠퇴했다. 1935년 신흥우는 적극신앙단 사건 이후 YMCA 중앙 총무를 사임했다. 3) YWCA의 농촌운동
김필례, 김활란, 유각경(1922) 김활란과 홍병선은 덴마크의 농촌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덴마크식 농촌사업을 전개했다. 1930년 8개 마을에서 YWCA 회원들이 독자적 농촌운동 시작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최용신이었다. 1934년YWCA는 농촌부녀 지도자 수양소를 개설했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상록수의 저자 심훈 협성신학교에 입학한 최용신(1928) 최용신과 농촌강습소 아이들
4) 장로교의 농촌운동 1928년 장로교 총회는 정인과 목사의 지도력 아래서 농촌부를 설치했다. 총회는 농촌사업 전문가를 초빙했고, 농민잡지인〈농민생활〉을 발행했고, 모범 농촌을 설치했다. 1930년 총회는 농촌주일을 제정했고, 농학교를 설립하여 농촌전도, 농촌위생, 농촌교풍, 농촌조합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숭실전문학교 농과부와 연합으로 “고등농사학원”을 설립하였다. 1935년 정인과 목사가 물러난 이후, 배민수 목사는 농민협동조합 운동을 추진했다. 1938년 농우회 사건 이후, 유재기 박한전 등이 체포되었고 장로교 농촌운동은 축소되었다.
숭실전문농장
유재기 목사
배민수 목사 부부 (4) 절제운동과 사회사업 일제는 한국경제를 침탈했고, 술, 담배, 아편, 공창 등으로 정신적 문화적 황폐화 정책을 추진했다. 기독교 절제운동은 이에 저항하는 신앙운동, 애국운동, 여성해방 운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1926) 1874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WT)는 미국에서 설립되었다. 1923. 5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WT)의 틴링(Miss CL Tingling)이 내한하여 전국에 강연 1923 여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여자 절제회 운동을 하였다. 1924. 8.28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 창설되었다. 회장 유각경(YWCA회장), 총무 손정규(이화) 1927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의 임원 손정규, 유각경, 최활란, 김선이 근우회에 참여했다. 1928 이 조직은 52개 지회와 3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했다. 이효덕 총무 시절 잡지 〈절제〉를 발간했고, 금주·단연 외에 색의 입기운동을 전개했다. 1932 9.9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합동하여 ‘금주선전일’에 2000여명의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금주 금연 구습타파 가두행진 - 상동교회
절제 가두 캠패인(1920)
대구 금주대회 (1922) 금주 포스터 2) 공창폐지운동 일제는 고의적은 공창제도와 일본의 매춘부들을 한국에 도입했다. 최초의 공창은 개항이 되었던 부산에 1902년에 시작되었고, 1904년 거류민단의 주도로 지금의 묵정동 앰버서더호텔 자리에 70평의 신정(新町)유곽이 개설되었다. 신정유곽은 동쪽은 한국인 매춘여성들이, 서쪽에는 일본인 여성들이 영업하였다. 1916년 이후 공창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다른 한편, 한국의 농가들은 춘궁기가 되면 생존과 부채탕감을 위해 딸을 팔아 넘기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것은 공창의 확대를 부채질했다. 교회는 1920년 사이토 총독의 유화정책을 사회개혁의 기회로 이용했다. 일본에는 1900년 10월 2일 “창기취체규칙”(娼妓取締規則)에 “자유폐업(自由廢業) 조항”을 신설했다. 즉 공창의 여성들이 경찰에 가서 자신이 폐업하겠다고 신고하면 부채에 상관없이 풀려날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법안을 한국에도 적용하도록 하였다. 공창폐지운동은 경남의 호주장로회 여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평양과 감리교회로 확대되었다. 1923. 11 공창철폐위원회 조직 1924 〈기독신보〉 “절제부” 구성 1926 장로교 총회는 후원을 결의
공창-신정유각
인천 부도루 유각
평양기생학교 1930년대 3) 조선기독교절제회(1932) 1932. 5.5 한국교회는 산발적인 남성들의 절제운동을 조직화하여 이 절제회를 만들었다.(총무 송상석 목사) 1932. 12.16 미성년자 음주끽연금지법 실시 촉성회를 구성했다. 1938. 4. 총독부는 “청소년보호법”을 제정했다.
조선기독교절제회 전람회 (송상석 목사) 4) 구세군의 구제사업 구세군은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한 전투적 선교단체로 출발했다. 그들은 1908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금주단연 운동을 전개했다. 1916. 10 여자육아원개설→‘혜천원’으로 발전 1918 남아육아원설립-1920 ‘후생학원’으로 발전했다. 1921. 3 〈구세공보 금주호〉를 발간 1924 걸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건립했다. 1926 직업여성들을 직업훈련소를 만듬 1928 자선남비 활동 시작 1936 부산에 ‘여객의 벗’이란 공간을 만들고, 여행 중인 여성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금주호 발간 최초의 자선남비(1928) 5) 감리교의 사회사업 1919 명월관을 구입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개조, 개성의 ‘고려여자관’ 원산의 ‘보혜여자관’ ‘춘천여자관’ 등을 설립하였다. 1924 미감리회여선교회는 공주 영아원을 설립지원하였다. 1932 해주 구세요양소의 홀이 도입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에 나섰다. 또한 한국교회는 대구, 부산, 순천에서 나환자 구제사업을 벌였다. 평양맹인학교를 통한 맹인구제 및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완성했고, 성경을 점자로 작성했다. 4. 희년잔치와 기독교계 (1) 감리교회 희년기념사업 1935. 4 21 부활주일 전국 개교회에서 기념예배 4. 28 50주년기념식 1936. 4. 12 정동교회 뜰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 설립
감리교선교50주년 기념 연극 고종황제의 선교윤허 장면 감리교선교 50주년 기념비 (2) 장로교회 희년기념사업 1934. 6.30-7.3희년기념강연회는 주로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잔치’ 1934. 6.27-7.1피어선 성서학원 및 새문안교회 ‘희년기념목사대회’는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서북계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1934. 9.7-14 평양서문밖교회 제23차 총회는 희년기념총회 9.9~10 숭실대학교 희년축하식
장로교선교 50주년 (1934) 평양서문밖교회 1934-35 여권문제, 창세기모세저작설 문제, 신편찬송가문제, 기독신보문제, 아빙돈 성서주석 등으로 장로교회는 보수-진보 갈등, 서북-비서북의 갈등, 장감 갈등이 극대화 되고 있었다. 따라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희년대회를 함께 치르지 못했다. 신학적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선천 3개노회연합 희년기념대회에서 마펫의 강연 내용이다.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복음 그대로 전파합시다. … 다른 복음 전하면 전주를 받을 것이오 말할 기회
첫댓글 그림이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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